68. 굴욕 그리고 그것을 막은 자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8.05 08:09

  나름대로 서부전선에서 선방하며 중공군의 제5차 공세를 저지하고 있던 그 시점에 커다란 위기가 중부전선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공세 이전인 4월 22일까지 춘천북방의 사창리-화악산 일대에서 육단리-와수리 방향으로 공격하던 부대는 미 제9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6사단이었는데, 군단으로부터 사단 전방에 대규모의 적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으로 보아 중공군의 대공세가 충분히 예견되는 시점이어서 사단장 장도영(張都暎)은 16시경 공격을 중지하고 부대를 방어태세로 전환시켰습니다. 더불어 사단 좌측의 미 제24사단과 우측의 미 제1해병사단도 공격을 방어로 전환하며 진지구축에 들어갔습니다.


[중공군의 공세가 예견되자 방어태세로 바꾸었습니다.]


  이들 앞에 등장한 적군은 중공군 제9병단이었는데, 이들은 화천-가평 축선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중동부의 미 제9군단과 서부의 미 제1군단의 연결을 끓어 서울을 공격하는 주공부대(제19, 3병단)의 동 측방을 엄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들은 중공군의 새로운 공세가 서울 재 함락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므로 조공에 해당되던 부대였습니다. 그런데 서부전선에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의 분전에 막혀 중공군 주력이 남하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동안 오히려 조공이었던 중공군 제9병단이 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내어 전선전체에 커다란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미군의 화력을 겁내 사창리에 집결한 국군 제6사단 지역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는데, 만일 이곳을 뚫어버리면 양측에 있던 미 제24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의 후퇴도 자연적으로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4월 22일 17시경, 중공군은 정면공격과 병행하여 부대 간격으로 침투해 국군 제6사단의 후방지역을 차단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좌전방 제19연대는 순식간 적중에 고립되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우전방 제2연대와 예비인 제7연대는 겁에 질려 차량 및 장비를 포기한 채 분산 철수하였는데, 갑작스런 제6사단의 후퇴로 말미암아 후방에서 사단을 지원하던 미군 포병들도 순식간 중공군에게 포위당하여 다수의 화포를 유기한 상태로 철수했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제6사단은 항공기와 포병의 지원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둔화시키면서 화악산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그날 밤 중공군의 공격에 의해 또다시 돌파되었습니다. 결국 4월 25일에 제6사단이 긴급 배치된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 하에 가평일대로 철수를 완료하였을 때 집결한 병력은 후퇴 이전 정원의 60퍼센트 수준에 불과한 6,313명이었습니다. 이들의 무질서한 후퇴는 주변 미군들의 분노를 촉발시켰고 국군에 대한 신뢰하지 않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국군방어선이 돌파당하여 후방 미군지원부대까지 위협을 받았습니다.]


  사창리에서 제6사단이 조기에 붕괴되었던 것은 하급제대의 지휘관 및 참모들의 지휘통솔 및 전투능력 부족과, 하사관들의 사기 저하 등에 기인 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명을 내려도 통하지 않던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비단 제6사단의 문제가 아니라 1951년 중반까지 한국군 전체의 가장 큰 취약점이기도 하였습니다. 6·25전쟁 초기의 병력은 낙동강까지 밀려가면서 소진이 되었고 그 이후 징집된 병력은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체 북진에 나섰지만,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본 적도 없이 단지 걸어 다니기만 하였던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국군 제6사단을 격파한 중공군은 23일과 24일,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면서 서부전선과의 연결고리인 서울-춘천간의 도로를 차단하려 했습니다. 서부전선에서 막힌 중공군의 제5차 대공세가 엉뚱한 곳에서 성공하려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긴급 투입되어 가평에 진지를 구축하고 강력히 저항에 나선 영연방 제27여단에 가로 막혔습니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병사들로 구성 된 영연방 제27여단은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치고 가평을 사수하는 기적을 만들었고 중공군의 제5차 공세는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지난 2월 지평리에서 미 제2사단 23연대가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좌절시킨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가평의 전설을 만든 영연방 제27연대 소속의 뉴질랜드 포병대 ]


  그런데 이것은 이후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힌트가 되었습니다. 추후 공세는 미군이나 유엔군이 담당하는 전선이 아닌 국군이 담당하고 있는 곳으로 하여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번 공세에서 국군 제1사단이 나름대로 분전하였지만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공세에서 중공군이 위세를 떨쳤던 것은 아쉽게도 주로 국군이 담당하던 전선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유엔군이 구멍을 틀어막아 위기를 해소하였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렇다면 다음 중공군의 공세는 국군들이 담당하고 있는 곳으로 예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굴욕적인 역사지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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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그네 2010.08.05 1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만보면 6사단은 참...대실패와 대승리를 오가는군요. 사단이 와해될정도의 피해를 입었다가도 3개사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지를 않나..파란만장하고도 드라마틱한 사단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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