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서울 함락의 서곡

생생! 6·25/김병륜 기자의 6·25전쟁 2012.07.06 08:44

6·25전쟁 개전 초기 육군의 주력 곡사포였던 미국의 M3 105mm 곡사포. 김풍익 소령과 장세풍 대위가 의정부에서 목숨을 걸고 북한군 전차와 맞섰을 때 사용한 곡사포도 바로 M3였다.                      <사진출처 wikipedia>

 

의정부가 함락되기 직전인 6월26일 오전 10시 서울 국방부 청사로 역전의 노장들이 모여들었다. 청산리 전투의 주인공이자 광복군 참모장과 초대 국방부장관을 지낸 이범석 장군, 광복군 총사령관이자 대한민국 무임소장관을 역임한 이청천 장군, 광복군 참모장을 지내고 현역 육군 소장이었던 김홍일 장군은 하나같이 무거운 표정으로 국방부로 들어섰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이 개최한 군사경력자 자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참석자들의 면면은 현역 군 지휘부를 압도하는 경력을 가진 역전의 노장들이었으나 채 총참모장은 ‘듣기’보다 ‘말하기’에 주력했다.

군사경력자 회의
 
회의 첫머리에서 김홍일(외교부장관 역임ㆍ중장 전역) 장군은 “결전을 기도한다면 어느 선에서 결전을 수행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지연전을 실시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어디까지 철수할 것인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중한 의견 제시였으나 그 발언의 속내는 한강선에서 지연전을 실시하자는 이야기였다.

 이범석 전 국방부장관도 한강선에서 지연전을 벌이라고 권고했으나 오히려 채 총참모장은 조만간 반격에 성공할 것이라며 장담했다. 당시 채 총참모장은 공식적인 참모 라인이나 원로들의 조언과 건의보다는 개인적으로 친구 사이였던 이종찬(육참총장 역임ㆍ중장 전역) 수도경비사령관의 주장에 더 귀를 기울였다. 이 장군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기동력이 부족한 국군이 한강선까지 후퇴해 방어전을 수행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서울이 가진 상징성을 생각했을 때 서울 포기는 군과 국민에게 패배감을 안겨 더욱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고 보았다. 채 총참모장은 친구인 이 장군이 자신과 생각이 같은 것에 안심했는지 자신의 작전 지도에 조금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군사자문회의가 끝나고 11시에 열린 국회에서도 신성모 장관은 북진을 장담하며 국회의원들을 안심시키는 데 주력했다. 채 총참모장은 “얼마 후 남쪽의 3개 사단(2ㆍ3ㆍ5사단을 의미)이 도착하므로 반격으로 전환해 (북한군을) 반드시 격퇴한다”며 “안심하기 바란다”고까지 말했다.

 포병의 분투 

 채 총참모장이 군 원로와 국회의원들에게 안심하라고 장담하던 그 시간, 국군 장병들이 안간힘을 다해 지탱 중이던 의정부 전선의 상황은 시시각각 위태롭게 변해갔다.

 26일 아침 충주 등지에서 북상한 2사단 16연대가 의정부에 도착했다. 16연대 병력은 포병학교 교도대대 2포대와 함께 의정부 금오리와 축석령 사이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축석령을 넘어 북한 T-34 전차가 전진해 오자 교도대대 2포대 장병들은 M3 105㎜ 곡사포로 맹렬한 사격을 가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결국 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2포대장 장세풍 대위와 함께 2포대의 6번포를 끌고 나와 근거리 직접사격으로 T-34를 상대하려 했다. 별다른 방호력이 없는 포병이 근거리 직접 사격으로 적 전차를 상대한 것은 결국 자기 목숨을 초월할 결심을 했다는 뜻이다.

 북한 전차가 산모퉁이를 돌아 측면이 노출됐을 때 김 소령과 장 대위, 2포대 6번 포대원들은 1탄을 발사했다. 소총 영점사거리도 안 되는 근거리에서 포탄을 맞은 적 전차는 궤도가 파괴되면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 하지만 후속하는 북한 전차의 사격으로 김 소령과 장 대위은 그자리에서 모두 전사했다. 26일 9시 무렵의 일이었다.

 기동 불능이 된 적 전차는 1대에 불과했으나 북한 T-34 전차들은 전진에 부담을 느꼈는지 후방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북한 전차가 다시 의정부 금오리에 출현한 것은 26일 정오 무렵이었다. 결국 김풍익 소령과 장세풍 대위, 그리고 6번포 포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것은 단 3시간이었다.

 전체 전선의 상황으로 보자면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단순히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것에만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국군 장병들이 이처럼 곳곳에서 분투하며 목숨을 담보로 지켜낸 그 소중한 시간들이 모이고 모여, 뒷날 지연전을 성공시켜 대한민국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2사단과 7사단의 철수 

 26일 정오 무렵 의정부 금오리의 국군7사단 9연대 막사에 자리 잡고 있던 2사단 지휘부에도 적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적 앞에 노출된 2사단 지휘부는 결국 후퇴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형근 2사단장의 지프에도 적탄이 명중되어 사단장부터 병사까지 도보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도로에 적탄이 집중되어 논두렁을 오르내리며 후퇴하는 장병들의 어깨는 더없이 무거웠다.

 이 무렵 의정부 시내에 자리 잡고 있던 7사단 사령부에도 적 포탄이 떨어졌다. 7사단 사령부는 의정부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2㎞ 떨어진 7사단 1연대 막사로 이동해 포탄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동 중에 의정부 여기저기에서 적 전차와 마주쳤다. 후방에서도 북한군이 추적해 왔다. 결국 7사단도 의정부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비슷한 시간 국회 보고를 마치고 용산의 육군본부로 돌아온 채병덕 총참모장은 역습 작전의 성패부터 질문했다. 7사단의 동두천 역습과 2사단의 포천 역습 작전의 성공을 기대하고 있던 채 총참모장에게 돌아온 대답은 ‘의정부 함락’이었다.    

백석천 방어전  

 26일 오후 2시 채병덕 총참모장은 전선 상황을 시찰하려 했다. 하지만 이동 병력과 피란민으로 어마어마한 교통 체증이 발생한 상태였다. 채 총참모장은 철도 궤도 위를 다닐 수 있는 특수 개조 차량을 타고서야 의정부에 접근할 수 있었다.

 채 총참모장은 의정부 입구에서 후퇴하던 이형근 2사단장과 마주쳤다. 명령 없이 후퇴한다고 생각한 채 총참모장은 그 자리에서 2사단장을 해임하고 유재흥 7사단장으로 하여금 통합지휘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막 전방에 도착한 2사단 25연대 병력을 26일 오후 3시 의정부 남쪽의 백석천에 배치했다. 이어 16연대 일부 병력도 재편성을 거쳐 의정부 남쪽 일대에 포진했다.

 북한 T-34 전차가 백석천에 처음 나타난 것은 26일 오후 5시였다. 하지만 아군이 쏜 2.36인치 로켓으로 백석교 교량 위에서 T-34 전차 1대가 주저앉자 북한군 전차들은 다시 의정부 시내로 되돌아갔다. 북한군이 공세를 재개해 백석천과 호원동을 돌파한 것은 27일 새벽 4시였다. 이어 북한군 4사단과 105전차여단은 서울 창동(당시는 경기도 양주)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27일 새벽 4시30분, 개전 후 약 48시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 백석천 16시간의 미스터리-`부대통제 미비 등 북한군 대혼란' 추정  

  26일 오후 5시 백석천 교량에 진입한 적 T-34 전차를 파괴한 것은 국군 2사단 25연대 2대대 5중대 화기소대 소속의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분대장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상황에서 이 무명의 분대장은 갑자기 부하로부터 2.36인치 로켓을 뺏어 들고 교량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사격을 가해 로켓을 적 전차에 명중시켰다.

 교량과 전차가 동시에 부서지면서 그 자체로 장애물이 되어 버렸다. 다른 전차의 사격으로 이 무명의 분대장은 그 자리에서 전사했으나 백석교가 차단되면서 북한군 T-34 전차는 남하를 포기하고 의정부 시내로 되돌아갔다. 이후 백석천이 돌파된 것은 16시간이 경과한 후인 27일 새벽 4시였다.

 과연 북한이 작은 하천에 불과한 백석천을 돌파하는데 16시간이나 허비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교량 파괴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여러가지 추정이 나오고 있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최용호 박사는 “당시 북한군이 교통 체증과 부대 통제 미비로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며 북한군 내부에 모종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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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사포 심각한 비즈니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WOW는 것은 마주보고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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