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반 시체 반 (파로호전투)


중공군 1개 사단을 전멸시키다

중곤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한 후 반격작전으로 전환한 미 제9군단은 5 23일 가평을 점령하고 캔자스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개시선인 미시시피선을 점령하였다.

 

중공군 제3병단은 60군을 엄호부대로 운용하는 가운데 주력은 금성-평강선으로 후퇴시키고 있었다. 미제8군의 공증정찰 결과 중공군이 춘천-화천 축선으로 후퇴하는 것이 확인되자 이를 섬멸하기 위해 미 제9군단장은 대규모 포위작전을 구상하였다.

 

미 제9군단은 지암리를 목표로 미 제24사단이 가평-지암리 축선(현재 391번 도로)으로 왼쪽에서 포위하고, 미 제7사단이 춘천-지암리 축선(현재 5번 도로)으로 공격해 오른쪽에서 포위하며, 국군 제6사단이 중앙에서 산악지역인 계관산-북배산-가덕산 방향에 정면으로 압박을 가하는 포위작전을 펼쳤다.

 

5 25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가 선두에서 공격하여 중공군의 소규모 저항을 물리치고 야간에 지암리 입구까지 도달하였다. 미 제7시단은 제17연대를 선두로 공격해 중공군의 저항을 공중공격과 포병사격으로 물리치고 지암리까지 진출 하였다. 중앙의 제6사단은 제19연대를 선두로 25일 북한강 도화하여 중공군의 소규모 저항을 물리치면서 14:00시에 북배산 남쪽 계관산을 점령하였다.

 

미 제24 . 7시단은 켄터키선으로 계속 공격하여 26 20:00시에 연결함으로써 포위망 구축을 완료하였다. 가평에서 지암까지의 391번 도로는 미 제24단의 제5연대가, 춘천에서 지암리까지의 5번 도로는 미 제7사단 제32연대가 포위망을 구축하였고, 6사단은 북배산을 점령하여 정면에서 강하게 중공군을 압박하였다.

 

지암리-북배산 일대에는 중공군 제60군 예하 제80사단 이외에도 타 사단으 낙오병들이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고 판단한 제180사단장은 26 18:00시경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누어 지암리 북서쪽 매봉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한편 중공군 제60군은 제 181사단으로 역습을 가해 제180사단을 구출하려 했으나 통신 두절과 우천으로 공격이 지연된 데다 유엔군이 주요 지역을 선점하고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공군 제180사단은 유엔군의 공격과 포격으로 조직적인 철수를 하지 못하고 각개 약진으로 포위망을탈출하였다. 27 09:00시경 매봉으로 탈출한 병력은 7,000여 명 가운데 1,0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들은 중기기관총 이상의 모든 장비와 통신장비를 잃었고, 휴대용 무전기 1대만 남아 있었다. 지암리 포위작전에서 제6사단 제19연대는 1,786명의 포로와 184필으 군마, 각ㅈ오 포15, 기관총 21, 소화기 751, 차량 2대 등을 획득하였다. 연대가 창설된 이래 최대의 전과였다.

 



물 반 시체 반의 파로호

미 제9군단은 중공군 포위작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26 12:00, 국군 제6사단 1개 연대만 포위작전에 참가하도록 하고 사단(-)은 미 제7사단 우측의 산악지역으로 이동해 화천저수지 방향으로 공격토록 하였다. 이 지역은 중앙에 오음리.유촌리 등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외곽은 매봉-용화산-수리봉-부용산-병풍산 등 600~800m 고지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분지였다. 6사단은 제19연대를 지암리 포위전에 잔류시키고 제2연대와 제7연대를 이 지역으로 전환해 2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토록 하였다. 이 지역에는 중공군 제20군이 있었다. 중공군 제20군은 현리에서 북서쪽으로 철수하던 중 유엔군이 반격해 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제 58사단이 화천 일대를 점령 방어하고 있었다.




 


미 제9군단은 좌측의 국군 제2사단과 미 제24사단, 중앙의 미 제7사단이 병행 공격하여 27일 지암리 전방의 켄터키선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우측의 국군 제6사단은 작전지역이 전환되는 바람에 켄터키선까지 진출하지 못하여 켄터키선 6km 전방에 버지니아선을 설정하고 계속 공격토록 하였다.

 

28일 미제7사단은 공격목표였던 화천을 장악하였다. 국군 제6사단은 켄터키선을 목표로 공격을 계속하였으며, 28일 저녁에 화천발전소(일명 구만리발전소)를 확보하기 위해 제2연대 제3대대 제10중대를 적 지역에 침투시켰다. 화천발전소에는 중공군의 군지휘소와 보급소가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야간에 침투한 제10중대는 29, 국군 제6사단의 목표였던 화천발전소를 탈환하였다. 동이 틀 무렵 예기치 못한 국군의 기습에 중공군은 방어다운 방어 한 번 하지 못하고 산발적인 사격으로 대응하였으며, 1개 중대 규모 이상의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이 전공으로 제10중대 중대원 전원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5 29, 미 제9군단은 켄터키선 전방에 설치한 버지니아선을 확보하고 국군 제6사단도 화천저수지 이남 지역을 확보하였다. 화천발전소와 구만리 고개를 아군이 차단하자 오음리와 유촌리 일대의 적들은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이 지역의 구만리 고개로부터 양구 일대에는 중공군 제12. 15. 20. 27군 등 4개 군 소속의 패잔병 2~3만 명이 갇혀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퇴로를 차단당한 적은 화천저수지를 헤엄쳐 도주하려다가 익사하는가 하면 유엔군의 네이팜탄 공중폭격과 무제한으로 허용된 포병 사격에 대부분 전멸하고 일부 살아남은 적들은 아군에 투항해 왔다





증언에 의하면 수많은 중공군 시체가 물 위로 떠올랐고, 부패된 이 시체들로 인해 한동안 물을 마실 수가 없어 부근의 우물과 구급차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오읍리로부터 유촌리에 이르는 461번 도로에는 중공군의 시체가 좁은 길을 메우고 있었고, 능선과 계곡마다 시체와 군마 등이 널려 있어 공병대의 불도저를 동원해 도로의 시체를 길 옆으로 밀어낸 후에야 차량이 다닐 수 있었다.

 

5 24일부터 30일까지 미 제9군단은 2 4,140명을 사살하였고, 7,905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국군 제6사단은 1 3,383명을 사살하고 2,395명을 포로로 획득하였다. 중공군은 5월 공세시 8 5,000여 명의 전투손실을 입었다고 전사에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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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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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in more instagram followers 2013.09.04 1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언에 의하면 수많은 중공군 시체가 물 위로 떠올랐고, 부패된 이 시체들로 인해 한동안 물을 마실 수가 없어 부근의 우물과 구급차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오읍리로부터 유촌리에 이르는 461번 도로에는 중공군의 시체가 좁은 길을 메우고 있었고, 능선과 계곡마다

  2. 고태진 2013.09.19 1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켄터키선 이라 ^^ 새로운 사실도 배우네요. 저 어렸을땐 잊지말자 6.25 상기하자 6.25 라는 표어도 있었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