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제3군단 해체되다 (현리 철수작전)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09.26 15:24

국군 제3군단 해체되다 (현리 철수작전)

이 전투는 중공군 5월 공세 시 국군 제3군단이 중공군 2개 군과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한 후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한 철수작전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제3군단의 서측 미 제10군단지역을 집중 돌파하여 후방의 오마치 고개를 점령함으로써 국군 제3군단은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상하 인접부대 간의 협조가 단절되어 조직적인 철수를 하지 못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 제3군단은 많은 인원 및 장비 손실뿐만 아니라 군단이 해체되는 수모를 당하였다.



현리 철수작전 상황도



중공군에게 선점당한 오마치고개

중공군은 5 16 17:30분에 국군 제3군단 서쪽에서 방어 중인 미 제10군단의 국군 제7사단 지역을 향해 집중적으로 공격해왔다. 이에 따라 20:00시경 국군 제7사단의 전방연대들이 붕괴되면서 통신마저 두절되어 상급부대에서는 국군 제7사단의 상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한편 오마치 고개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중공군 제20군 예하 제60사단 제178연대 제2대대는 국군이 배치된 진지를 우회해 빠른 속도로 국군 제7사단의 바어종심을 향해 기동하였다. 그 결과 중공군 첨병중대가 17 04:00시에, 대대가 07:00시에 오마치 고개 일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들은 16 18:00시부터 17 07:00시까지 13시간 동안에 동부전선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뚫고 무려 25km나 기동하였던 것이다.

 

국군 제3군단의 좌측 사단인 제9사단은 20:00시경 국군 제7사단 제5연대가 전투지경선을 넘어 사단지역으로 철수하면서 전장상황을 알게 되었다. 9사단장은 03:00시경에 철수를 건의하였으나, 군단장은 미 제10군단으로부터 아무 이상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9사단장은 퇴로가 차단당하기 전에 기동장비를 먼저 철수토록 하였으나 유일한 철수로인 오마치 고개를 중공군이 이미 점령하고 있어 철수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사단장은 04:00시경 예하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예하부대들이 17 10:00시경 철수를 위해 용포 일대에 집결하였으나 이곳을 미리 선점한 중공군의 공격으로 북쪽으로 퇴각하여 13:40분경 현리에 도착하였다.

 

군단 우측 부대인 국군 제3사단은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하던 중 제9사단으로부터 제7사단이 철수하였다는 사실과 오마치 고개를 중공군이 이미 점령하고 있다는 상황을 전달받고 17 08:00시 철수명령을 하달하여 13:00시경 현리에 집결하였다.

 

이에 따라 현리에는 국군 3사단과 제9사단, 군단직할부대, 7사단 제5연대,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 등 많은 병력이 혼재된 상황이 되었고, 중공군이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였다는 상황이 전파되자 장병들의 불안과 동요가 확산되었다.





오마치 고개를 돌파하라

5 17 14:00시경 헬기로 현리에 도착한 군단장 사단장들과의 작전회의에서 3사단장에게 부대를 통합 지휘해 오마치 고개를 돌파하여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15:30분 하진부리의 군단지휘소로 복귀하였다.

 

3사단장과 제9사단장은 17:00시경 포위망 돌파계획을 예햐 연대에 하달하였다. 먼저 제9사단 제30연대가 공격하여 중간목표인 736고지와 785고지를 확보하고, 이후 제3사단 제18연대가 초월 공격하여 오마치 고개를 탈환한 후 810고지와 681고지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30연대장은 17:30븐경에 제3대대가 736고지를 확보하고 제1대대가 제3대대를 후속하여 785고지를 확보토록 하였다. 그러나 예하 대대가 아직 용포를 향해 이동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도착하는 즉시 공격토록 하였다. 그러던 중 일몰 이후부터 각 부대 간의 통신이 두절되어 상황파악이 어려워졌다. 군단 대부분의 병력이 협소한 현리 용포 일대의 공간에 일시에 집결되면서 무전기의 혼선으로 상하부대간 통신이 두절되고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먼저 공격한 제3대대는 22:00시경 736고지를 무혈점령했지만 785고지를 점령하기로 한 제 1대대가 내린천을 따라 남하하다가 방태산으로 퇴각해 버리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사단전체가 방태산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 처럼 현리 일대에 집결해 있던 일부 병력들의 적의 기습을 받아 방태산으로 흩어지고, 9사단이 대오를 잃고 방태산으로 퇴각하는 등 상황이 급박해지자 현리 일대에서 공격대기 중이던 제3사단장은 5 18 03:30경 예하 부대에 모든 장비를 파괴하고 방태산을 지나 창촌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리지구전투 비문.       /         현리지구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된 국군.



국군 제3군단사령부의 해체

중공군은 17일 오전에 오마치 고개와 침교 일대를 각각 1개 연대 규모가 선점하였고, 오후에는 사단 주력이 증원되었다. 따라서 3권단이 공격작전을 개시하였을 당시에는 이미 2개 사단 규모가 퇴로를 차단한 상태였고, 현리 일대도 중공군 제20군 제58사단 제173연대와 북한군 제5군단 제6사단 제1연다가 내부 포위를 완료한 상태였다.

 

국군 제3군단의 철수는 조직적인 철수가 아닌 무질서한 패주였다. 장교-병사 할 것 없이 뒤섞여 철수하였다. 중공군의 집요한 추격으로 대오를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광원리에서 창촌으로 이동한 후 집결하려 하였지만 그마저도 중공군이 먼저 차단하고 있어 대부분의 철수 병력이 계방산을 넘어 하진부리로 이동하였다.

 

5 20일 하진부리에 집결한 병력은 제9사단이 40%, 3사단이 34,2%에 불과하였다.

 

중공군은 5 20일 야음을 이용해 운둔령을 넘어 속사리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제 3군단은 04:30분경 하진부리에서 퇴각해 횡계리로 이동하였다. 미 제8군 사령관은 제3군단장에게 하진부리에서 더 이상 철수하지 말고 그곳에서 적을 저지하라고 직접 명령한 상태였다. 그러나 제3군단은 5 21일 다시 퇴각하여 제3사단은 송계리로, 9사단은 대화로 각각 퇴각하고, 군단사령부는 횡계리에서 영월로 퇴각하였다.

 

5 25일 강릉 비행장의 육군본부 전방지휘소에 미 제8군사령관이 방문하였다. 정일권 육군 총참모장도 있는 자리에서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군 3군단을 해체하고 육군 본부의 작전권도 폐지한다. 육군본부의 임무는 작전을 제외한 인사와 행정, 군수와 훈련에만 국한한다. 국군 1군단은 내 지휘를 직접 받아야 하고, 육군본부 전방지휘소도 폐지한다.” 고 말하였다. 국군부대의 지휘권이 완전히 유엔군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밴 플리트 장군의 통보를 듣기만 하였다.

 

3군단 소속이던 국군 제9사단은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었고, 국군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었다. 국군 제3군단은 1951 1 10일 중공군 3차공세 후 해체된 제2군단에 이어 5 26일 두 번째로 해체되는 수모를 겪었다. 3군단 해체의 결정적 이유는 하진부리 일대에서 더 이상 철수하지 말고 적을 저지하라는 미 제8군 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횡계리 ㅡ 영월로 후퇴를 거듭한 때문이었다.




오마치(오미재)고개에 있는 현리지구전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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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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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태진 2013.09.27 14: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날 작전 상황도 보니까, 정말 치열함을 느낄 수가 있네요. 새로운 지식 알게되었답니다.

  2. 기재현 2013.09.30 22: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내용은 강원도 인제군의 현리 전투를 이야기하는데... 작전 상황도는 경기도 가평군의 지도가 나오네요... 수정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