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욕전(용문산전투)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0.04 15:12

설욕전(용문산전투)

 

국군 제6사단은 중공군 5월 공세 시 5 18일부터 20일까지 용문산 일대의 주저항선을 방어하던 중 경계부대로 전방에 배치한 제2연대가 축차진지로 전환하면서 효과적인 전면방어를 실시하여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이전투로 중공군은 5월 공세를 중지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유엔군은 곧장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사창리전투 전적비



사창리전투의 치욕을 씻자


국군 제6사단은 사창리 북방의 와이오밍선으로 진격을 계속하던 중 중궁군의 4월 공세로 기습을 당하였다. 사단은 급편방어로 전환하였으나 중공군 제20군 예하사단과 제 40군 예하 제120사단 등 4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6사단 예하 부대들은 중공군의 우회 공격으로 후방이 차단되자 무질서하게 철수하였고, 병력-야포와 차량 등이 협소한 사창리 지역에 몰려들어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결국은 가평까지 철수하면서 대규모 돌파구 형성되었다.

 

가평이 돌파되면 전선이 동서로 크게 분할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영국군 제27여단이 3일 동안 가평을 고수하면서 중공군의 전선 분할 기도를 좌절시켰고, 유엔군은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사창리 전투의 패배는 국군 장교와 부사관의 지휘통솔 능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으로 평가되었다




사창리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철모에 새겼단 결사 표식.




국군 제6사단은 개전 초부터 춘천 동락리 - 낙동강방어선 전투 등에서 연승을 이어 갔고, 압록강 초산까지 제일 먼저 진출한 막강한 부대였다. 그러나 운산전투 이후 중공군의 우회 및 퇴로차단에 중공군에 포위되면 끝장이다라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

 

국군 제6사단은 가평에서 양평으로 철수하여 재편성하였다. 이때 육군본부는 병력과 장비를 보충하였다. 병력도 30~35%에서 88% 수준으로 향상되었고, 사창리 전투에서 단 1문도 끌고 오지 못한 105mm곡사포도 18문을 확보하였다.

 

이윽고 4 30일 사단은 군단으로부터 노 네임(No Name)선상의 용문산 지역을 점령-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창리 전투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부대가 제2연대였다. 사단장은 제2연대에 경계부대의 임무를 부여하고 5 1일 전투태세를 점검하는 군장검사를 실시하였다. 이때 사단장은 훈시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 청성부대는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는데 너희가 사창리전투에서 망쳐 놓았다. 이 오명을 씻기 위해서 너희는 앞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이제 후퇴는 없다.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은 하지 말고 전초진지를 사수하라. 진지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한 사단장은 모든 것을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전투의지를 자극하였다

 

이에 고무된 연대 장병들은 사창리전투를 설욕하고 말겠다는 결의로 뭉쳤으며, 2대대는 전방진전방 떠날 때 決死(결사)’ 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강한 결의를 보였다.

 



제6사단장 장도영 준장



전면방어로 진지를 사수하라


중공군은 5월 공세 시 중서부지역의 유엔군을 고착 견제하여 중동부 전선으로의 증원을 차단할 목적으로 5 17일 중서부전선에서도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 제19병단 예하 제63군의 3개 사단이 국군 제6사단 정면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6사단은 제19연대와 제7연대를 주저항선인 용문산 일대의 고지에 배치하고 북한강과 홍천강 남쪽에 경계부대인 제2연대를 배치하였다.

 

2연대는 제1대대를 홍천강을 감제할 수 있는 미사리 부근에, 2대대를 북한강을 감제할 수 있는 울업산에, 3대대를 예비로 울업산 후방의 353고지에 배치하였다. 전대대는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사주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또한 경계부대로서 적의 공격을 방해 및 저지 후 주저항선 남쪽으로 철수하는 일반적인 작전과는 달리 나산과 427고지 등에 축차적인 방어진지를 준비하는 등 현 진지에서 결전을 치르겠다는 태세를 갖추었다.





용문산 전투상황도



사단과 연대에서는 수색정찰부대를 북한강과 홍천강 건너 가평까지 보내 중공군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감시하였다.

 

5 18, 중공군은 미사리 일대의 홍천강을 도섭하여 제1대대를 공격해 왔다. 이에 제1대대는 적 1개 연대의 공격을 저지하긴 했지만 인접해 있던 미 제7사단의 경계부대가 철수한 관계로 중공군이 측방으로 우회하자 차후진지인 나산으로 철수하여 진지를 점령하였다.

 

울업산에 배치된 제2대대 지역에서 인접 사단 지역인 청평댐 일대로 북한강을 건너온 적들이 야간에 제5중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 5중대는 백병전과 역습으로 이들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19일 오전에 제1대대 지역으로 남하한 중공군이 다시 공격해왔고, 2대대는 최종 진지인 427고지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용문산 (멀리 보이는 고지)



19일 야간, 중공군은 353고지와 나산 일대를 주저항선인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군 예비인 제189사단을 투입해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중공군 3개 사단이 인해전술로 새벽까지 353고지와 나산, 427고지에 공격을 가해 왔다. 각 대대는 전명방어진지에서 백병전을 벌이며 결사적으로 싸웠고, 사단에서는 강력한 화력을 지원하여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이날 야간에 사단 포병 1개 대대와 증원포병 1개 대대, 군단 포병 2개 대대, 인접사단 포병 2개 대대가 지원하여 약 3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사단은 5 20 05:00, 주저항선의 제7연대와 제19연대로 역습을 실시하여 425고지의 제2대대와 연결 작전에 성공하였으며, 이에 중공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5 21일 퇴각하였다.

 

용문산전투에서 제2연대대는 4,944명의 적을 사살하고 15명의 포로를 잡았다. 반면에 제2연대는 26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74명이 실종되었다. 용문산전투에서 중공군 제63군은 약 1 5,900여 명의 병력손실을 입은 것으로 판단되어 있다.

 

국군 제6사단은 경계진지에서 중공군 1개 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공세이전의 선봉에 섰다. 용문산전투는 사창리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사단 전 장병이 죽을 각오로 싸워서 거둔 승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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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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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태진 2013.10.07 1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용문산이 어디인가요? 그리고 결사를 항전했다는 말에 가슴이 짱하네요.

  2. 고근애 2013.10.09 2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철모에 결사라고 쓴 것에 괜시리 짠하고 가슴이 아프네요. 또한 존경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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