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방어계획과 대비태세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10 15:42

국군의 방어계획과 대비태세

 

국군은 1949년 말 북한군이 남침을 위한 전력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어느 정도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방어계획을 준비하였다. 육군본부는 주한미군이 철수한 후인 1949 8월부터 북한의 남침준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이에 따라 각 사단에 자체적으로 방어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1949 11월에는 각 사단장과 작전참모, 그리고 미 수석고문관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 평가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토의된 계획과 1949년도 육군 정보국이 작성한 연말 정보보고서를 기초로 육군본부와 참모학교에서 방어계획의 시안(試案)을 수립하게 되었다.


국군 방어계획은“1950년 봄에 적이 38도선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해 올 것이다”라고 평가한 육군본부 정보국의 종합정보보고서에 따라 이에 대비하기 위한 차원에서 계획수립을 서둘러 1950 3 25일 국군 방어계획인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를 확정하고 예하 부대에 이 계획을 하달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국군 방어계획은 신태영 육군 총참모장의 지시로 육군본부 작전국장(강문봉 대령)이 주도하여 작성한 기본방어계획으로, 부록까지 구비한 비교적 완벽한 작전계획이었다. 이 계획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해군과 공군도 각각 기본방어계획에 따라 자체적으로 작전계획을 수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군의 예하 각 사단은 1950 3월 말경 육군본부로부터 기본방어계획을 수령하였으며, 이를 기초로 1950 5월 초 사단 자체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국군 방어계획은 적의 주공이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에 지향될 것으로 판단하여 의정부 지구에 중점을 두고 방어지대를 편성하였다. 방어목표는 이 지역으로 공격해 오는 적의 주공을 진지 전방에서 격파하여 38도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38도선 확보를 위한 국군 방어계획의 기본개념은 첫째, 옹진지구의 육군부대는 적의 공격 시 인천으로 철수하고 둘째, 개성지구의 육군부대는 적의 공격을 받으면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계획된 임진강 남쪽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며 셋째, 후방지역 예비사단은 적의 공격 시 역습부대로 운용한다는 것이었다.

38도선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할 경우에는 남한 지역의 큰 강을 이용하여 지연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최초 한강 이남으로 전략적인 철수작전을 수행하면서 한강선·대전선·낙동강선에서 축차적인 지연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국군의 방어계획

 

이와 같이 국군의 방어계획은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북진을 위한 공격계획이 아니라 북한군이 공격했을 때 이를 현 전선에서 물리치고자 하는 수세적인 개념의 전형적인‘방어계획’이었다.


북한군이 남침하리라는 풍문은 1949년 말부터 남한사회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전쟁발발 가능성에 관한 소문은 그 후로도 끊이지 않아 1950년 초에 들어오면서‘2월 위기설’‘3월 위기설’‘4월 위기설’등 갖가지 위기설이 떠돌았다. 정부도“북한의 전쟁준비는 완료되었고 남침은 시간문제”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도“5, 6월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맥아더 장군 역시 3 10일“최근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북한이 6월에 남한을 침략할 것”이라는 비밀정보 보고서를 워싱턴으로 타전한 바 있다.


육군본부 정보국도 자체 수집한 정보와 월남 귀순자 혹은 북한 탈출 귀순 조종사 등의 각종 증언을 토대로 북한군 병력과 장비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 정보는 훗날 밝혀진 내용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적의 무기와 장비 및 동향에 근접하였다.


5, 6월 위기설’이 파다한 가운데 1950 4 10일 육군 총참모장으로 재기용된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의 동향과 국내 정세를 고려해 4월부터 6월 동안 세 번에 걸친 경계강화 조치를 취하였다. 북한군과 남한지역에 남아 있는 공비들이 5 1일 노동절을 전후하여 남침과 폭동을 기도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군지휘부는 육군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피아 병력 및 장비상황에 근거해 취약한 38도선 남측 방어시설을 강화·보완할 대책을 담은 긴급 건의서를 국회에 제출한 상태였다. 당시 38도선상의 방어진지는 적의 곡사화기에 아군병력 및 장비를 보호할 수 있는 시설과 적 전차공격에 대비한 주요 접근로상의 장애물은 물론 대전차지뢰도 매설하지 못해 대전차 방어수단이 전무한 상태였다. 육군은 그동안 장애물공사를 방해한 북한‘38경비대’와의 무장충돌, 그리고 38도선 방어부대가 교체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나름대로 38도선 방어시설을 강화하고 보완해 1950 6월까지 방어진지를 구축했다고 하지만,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을 막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국회에 제출된 건의서는 선거기간이라 국회가 휴회 중이어서 처리되지 못하였다.


사실상 이 시점은 북한군이 공격준비를 갖추는 마지막 단계로6 11일부터 6 23일 사이 남침공격 대기지점으로 이동을 완료한 후 상부의 최후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중으로 사전 계획된 공격일자를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전쟁 직전 국군 부대 배치 현황

 

그러나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은 비상경계령이 실시되는 동안 적의 특별한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쟁 이틀 전인 6 23일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해 버렸다. 북한군 전투부대가 38도선 북쪽에서 최후의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고, 실제로도 적이 38도선상에서 병력증강을 하던 때라 국군은 전군에 비상대기령을 내렸어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는 것은 국군지휘부의 중대한 판단착오였다.


전방 상황을 주시해 온 육군본부 상황실에서는 6 22 23일 이틀 동안 입수된 첩보를 분석한 결과 이상하리만치 활발한 적의 움직임을 우려하고 있었다. 비상경계령 해제 후인 6 24일 전방 제7사단으로부터 “북한군 군관들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아측을 향하여 지형정찰을 하는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하여 즉각 관련 첩보를 분석한 결과 북한의 전면공격이 임박한 것으로 보이며, 오늘내일 중으로 전쟁이 발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다.


정보 실무자들의 이러한 판단에 따라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과 관련 참모들은 이날 15:00시 긴급회의를 열고 상황을 분석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몇몇 위관급 장교는 비상경계령 해제를 즉각 중지하고 휴가와 외출을 중지하든가, 아니면 최소한 병력의 2/3는 영내에 대기하도록 건의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총참모장은 단지 정보국의 첩보대를 서울 접근로상의 중요 지역인 포천·동두천· 개성 등지로 파견하여 적정을 살핀 후 그 결과를 다음날 08:00시까지 보고할 것을 지시했을 뿐이다.


 

그런데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다음날인 6 24일은 토요일이라서 전군이 외출·외박을 실시했기 때문에 전방 일선부대들도 외출·외박과 휴가를 실시한 상황이었다. 그간 45일이나 지속돼 오던 비상경계 태세가 해제되자 오랜 비상근무가 끝난 데다 농번기까지 겹쳐 많은 장병들이 부대를 빠져나갔다. 특히 38도선 경계부대는 3분의 1에 해당되는 병력이 제자리를 비우게 돼 영내 대기 장병 수는 군 복무규정과 육군본부가 요구한 범위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병사들은 오랫동안의 긴장상태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말과 휴가를 즐기려 하였다. 부대에 남아 있던 장병들도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


일선부대의 긴장이완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1949년과 1950년의 대북 정보판단을 통해 북한군의 전력이 절대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점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처럼 긴박한 시기였음에도 육군 총참모장이 육군 고위급 장교의 인사이동을 두 번이나 실시한 것도 국가적 차원의 종합적 대책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사이동 시 육군의 작전을 주관하는 핵심 보직인 작전국장과 전방 38도선에 배치된 4개 사단 중 제6·7·8사단의 3개 사단장이 교체되면서 6 10일자로 임명된 신임 사단장들이 임명날짜보다 늦게 임지에 부임한 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일선 사단장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제1사단장도 당시는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느라 현지에는 부재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새로 부임한 사단장급 이상 일선 지휘관들도 며칠 지나지 않아 대부분이 전쟁발발 바로 전날 밤에 열린 육군 장교구락부 개관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근무지를 떠나 서울로 가 버렸다. 북한군이 공격대기선에 집결을 끝마치고 기습공격을 위한 지형정찰과 마지막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육군 총참모장을 비롯한 고위 장교들과 전방 주요 지휘관들이 연회에 참석해 38도선을 비워 두다시피 함으로써 전방의 지휘계통은 공백상태의 먹통이 되었다.


국군은 바로 그런 상태에서 1950 6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이 감행한 전면기습 공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3 1개월 2일간이나 지속되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참화를 초래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개시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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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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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elaleuca 2013.12.13 05: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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