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 (장진호전투)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12 15:28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 (장진호전투)


 

이 전투는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의 7개 사단에 포위되어 11 27일부터 12 11일까지 약 240㎞의 장진호 계곡을 철수한 작전이다.

미 제1해병사단은 혹심한 추위 속에서 겹겹이 에워싼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엄청난 시련을 겪었으나, 근접 항공지원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함흥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는 철수라기보다‘후방으로의 공격’작전으로 중공군에게 수만명의 전사자 손실을 입힘으로써 이어진 흥남철수작전을 가능케 하였다.

 

 

 

중공군 포위망 속으로 공격

장진호 일대는 1,000m 이상의 고지대인 개마고원 일대 산악지역이었다. 또 깊은 계곡에 도로는 단 하나만 나 있어 교량이 파괴되면 차량통행이 불가능하였다. 이 무렵 날씨는 북풍이 몰아치는 엄동설한이었다. 주간에도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내려갔으며, 야간에는 영하 2845도까지 급강하하였다. 적설량은 많지 않았으나 곳에 따라 60㎝ 이상 눈이 쌓여 있었고, 눈보라가 칠 때는 15m 앞도 보이지 않았다.

 

 


장진호 전투 상황도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북쪽의 한·만 국경선으로 진출하기 위해 사단 주력이 하갈우리에 집결하고 있었다. 사단은 제7해병연대가 유담리를 확보하면 제5해병연대가 제7해병연대를 초월하여 무평리로 공격해 서부전선부대와 연결한다는 계획하에 11 27 08:00, 유담리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미리 매복 중이던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중공군 제9병단은 제27군 예하 4개 사단이 장진호 북방에 전개하여 미 제1해병사단의 주력이 집결된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를 포위 공격하고, 20군의 4개 사단이 장진호 서쪽에서 미 제1해병사단의 유일한 철수로인 유담리 - 하갈우리 - 함흥 간의 산악도로를 차단하고 있었으며, 26군의 4개 사단을 예비로 확보하고 있었다.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

중공군 제79·89사단은 유담리에 집결한 미 제1해병사단을 북쪽과 서쪽에서 공격하고 제59사단이 신흥리 일대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미 해병대는 진격을 중단하고 2개 연대로 유담리를 고수하면서 차단된 보급로 개통에 전투력을 집중하였다.

 

한편 미 제10군단장은 서부 미 제8군의 철수와 장진호 일대의 급박한 상황을 고려하여 11 30일 하갈우리의 사단지휘소를 방문해 함흥-흥남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다.

 

유담리의 미 제5·7해병연대는 협조된 작전으로 후방돌파를 시도하였다. 최초부터 덕동고개에 배치되어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제7연대 제2대대 F중대와 본대가 연결함으로써 일단 덕동통로는 개통되었다. 12 3일 덕동고개에서 하갈우리까지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을 때 하갈우리에 있던 영연방 제41해병특공대가 북상하여 철수부대를 엄호함으로써 철수부대는 하갈우리에 진입하였고, 22㎞에 걸친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12 4일 일단락되었다. 이들 부대가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철수하는 데 걸린 시간은 77시간으로, 1㎞를 진출하는 데 3시간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미 제1해병사단은 이 전투에서 1,140명의 인명손실과 동상에 의한 1,194명의 비전투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이들 부대는 철수 때 발생한 600여 명의 들것 환자와 함께 부대건제를 유지한 상태로 질서 있게 철수함으로써 해병대의 용맹성을 다시 한 번 과시하였다.

 

한편 장진호 동쪽의 신흥리 일대는 미 제7사단 제31연대장 지휘하에 제31연대 제3대대와 제32연대 제1대대, 57야전포병대대가 중공군 제27군의 제80·81사단의 5개연대로부터 포위공격을 받았다. 후방으로부터의 구출이 지연되자 이 부대는 소집단으로 포위망을 돌파해 하갈우리로 철수하였다. 수색부대의 구출작전으로 2,500명 중 1,050명이 구출되었고 300명은 전사, 나머지 1,150명은 실종되었다.


 

하갈우리 포위망 돌파작전

사단지휘소가 있는 하갈우리는 11 27일 중공군 제58사단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는데, 미 제1해병연대 제3대대와 공병대대가 적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다.

 

 

하갈우리 일대의 미 해병대

 

사단은 철수작업의 일환으로 12 2일부터 5일까지 4,312명의 부상자와 대량의 군수물자를 공중으로 후송하였다. 후송이 불가능한 시설과 물자는 파기한 후 병력은 12 6일 새벽에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철수 중인 미 해병대.



 

 

철수 중에 휴식하고 있는 미 해병대

 

이때 극동공군 수송사령관 윌리엄 터너(William H. Tunner) 소장이 해병 사단장 스미스 소장을 방문하여 ‘모든 전투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이라도 공중 철수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사단장은 “해병대 역사상 그 같은 불명예는 없었다”고 그 제의를 일축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결심을 굳힌 사단장은 각 제대가 철수준비를 하는 동안 장병들에게 “사단은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는 새로운 방향에 대한 공격이다”고 강조하면서 장병들의 전의를 북돋웠다.

 

중공군은 철수하는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제20군으로 철수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예비인 제26군을 투입해 철수하는 병력을 추격하였다. 사단은 제5해병연대가 하갈우리를 방어하면서 철수부대를 엄호하는 한편 제7해병연대는 후방으로 공격하면서 통로를 개척하였다. 전차를 선두로 강력한 근접항공지원하에 통로를 개척하고 철수로상의 주요 애로지점은 도로 좌우측 부대가 공격해 사전 확보함으로써 중공군의 포위와 기습을 방지하였다.

 

1만여 명의 병력과 1,500여 명의 피란민, 그리고 1,000여 대의 차량이 이동한 하갈우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선두부대가 12 7일 새벽에 고토리에 도착하고 14:30분께 엄호부대가 철수함으로써 끝났다. 이 작전에서 미군은 103명이 전사하고 7명이 실종되었으며, 506명이 부상당하였다.

 

고토리 포위망 돌파작전

중공군은 제58·60사단의 일부 병력이 고토리-진흥리 간 애로지역과 황초령 일대를 차단하고, 89사단이 진흥리 남쪽을 차단하고 있었다.


미 제1해병사단은 12 8 08:00, 진흥리에 있는 제1해병연대 제1대대로 하여금 북쪽으로 공격해 황초령의 요충지인 1081고지를 확보토록 하였다. 이후 제1해병연대의 엄호하에 제7해병연대가 선두에서 철수하고 제5해병연대가 후속하도록 하였다.

 

12 8일 야간에는 기온이 40도 이하로 급강하하였다. 이 때문에 고토리 이남의 애로지역을 지키고 있던 중공군은 꽁꽁 얼어붙은 시체가 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고토리 남쪽 6㎞ 지점의 수문교(고토리-황초령 중간)를 파괴하여 유엔군의 철수를 차단하였다. 이 수문교는 약 450m의 계곡을 연결하는 교량으로, 이 교량이 복구되지 않을 경우 미 제1해병사단은 차량·전차·야포 등 각종 전투 장비를 유기하고 후퇴하여야 할 처지였다. 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M-2 임시교량 경간목(무게 2, 5×2×15피트) 4개가 필요하였다. 극동 공군은 12 7 C-119 수송기 8대에 낙하산 2개를 부착한 경간목을 800피트 상공에서 공중 투하하였다. 그중 한 개는 중공군 지역에 떨어졌고, 1개는 파손되었으나 나머지 6개는 안전하게 투하되었다. 공병대대는 12 9 15:00시께 파괴된 수문교에 항공기로 공수된 경간목을 이용, 임시교량을 가설하였다. 가설이 완료된 후 병력과 차량은 밤새도록 유도병의 안내를 받으며 교량을 건너 12 10 08:30분 진흥리에 도착하였다.

 

진흥리를 통과한 다음부터는 미 제3사단의 엄호를 받으면서 함흥으로 전진하여 12 11 21:00시에 모두 함흥에 도착하였다. 이 작전에서 미군은 75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실종되었으며 256명이 부상하였다.

 

 

중공군에 의해 파괴된 교량 (수문교)

 

 

파괴된 교량을 복구 후 행군을 계속하는 해병대.

 

 

철수 중 눈 속에서 휴식을 하는 해병대원들

 

 

하갈우리로 향하는 미 해병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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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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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reast growth cream 2013.12.17 0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이 수석대표(해군 중장)와 대표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호디스 육군 소장

  2. Great Home 2013.12.17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지난 1951년 6월을 전후하여 제기되었으며, 그 후 7월 10일 쌍방 협상대표들은 개성에서 만나 최초 회담을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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