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에 해당되는 글 53건

  1. 2013.12.16 휴전협상의 배경 (7)
  2. 2013.12.13 새로운 적, 그들은 누구인가? (1)
  3. 2013.12.12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 (장진호전투) (2)

휴전협상의 배경

 

6·25전쟁에서 휴전협상은 전쟁발발 후 1년이 지난 1951 6월을 전후하여 제기되었으며, 그 후 7 10일 쌍방 협상대표들은 개성에서 만나 최초 회담을 개최하였다.’

 

 



1951 7 10, 휴전회담을 위해 개성으로 출발하기 전 헬리콥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유엔 측 대표들,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지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수석대표(해군 중장)와 대표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호디스 육군 소장.

 

쌍방의 휴전협상 제의 과정

6·25전쟁은 북한의 김일성 공산정권이 소련과 중공의 지원하에 전 한반도를 공산화한다는 목표로 1950 6 25일 남침을 자행함으로써 발발하였다.

 

이에 한국을 지원하여 자유진영의 유엔군이 참전하고, 뒤따라 공산진영의 중공과 소련(공군)이 북한을 지원하여 직접 개입하였다. 따라서 이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전쟁으로부터 국제적 성격의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한편 양측은 군사적으로 격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전쟁이 세계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북한의 남침 직후에는 주로 유엔의 주도 아래 평화의 회복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유엔은 한반도 문제를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선에서 전쟁을 중단시키려 여러 차례 시도하였지만 공산군의 반대로 유엔의 제안은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먼저, 1950 6 25북한이 남침을 자행하자 유엔은 결의를 통해 북한이 침략을 중지하고 즉각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한 1950 12월에는 유엔총회가‘정전 3인위원회’를 설치하여 중공에 대해 38도선 이남으로 침공하지 않도록 요구하는 등 한반도에서 평화를 회복하려 노력하였다.

 

 

 


정전위원회는 평회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반면 공산군은 195010월 초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에 의해 패주할 때 38도선에서 휴전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제의는 ‘외국군 즉각 철수’등의 불합리한 조건을 달고 있어 유엔군 측이 수용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산군의 제의는 유엔군의 38도선 돌파를 지연시키며 이미 출병을 결정한 중공군의 참전 준비에 시간을 벌고자 하는 위장 평화제의였기 때문에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의 파병결정에 따라 참전준비를 마친 중공군.

 

해가 바뀌어 1951년 초에 접어들어서도 유엔의 평화회복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3월 하순 유엔군이 38도선을 회복할 무렵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직접 공산군사령관 펑더화이에게 휴전회담을 제의하였으나 이 제의 역시 묵살되었다. 이는 상대방이 그때마다 힘으로 전쟁목표를 달성하려는 정책을 계속 추구 한데 기인하였다.

 

전선 교착과 휴전협상

쌍방은 1951 45, 이른바 중공군의 춘계공세에서 개전 이후 최대의 결전을 치렀다. 여기에서 피아 모두 최악의 인명손실을 입은 후에야 무력으로 승리를 쟁취하려는 정책을 포기하고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 양측 모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되었다.

 

이 무렵 미국이 주도한 미·소의 막후 접촉에서 소련이“전쟁 전 현상에서 휴전으로 평화를 회복한다”는 데 호응해 옴으로써 마침내 휴전협상의 장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휴전을 제의하고 있는 유엔 주재 소련대표 말리크의 1951 6 23일 유엔 라디오 장면.

 

그러나 협상이 성사되기까지 힘에 의한 타결 시도가 몇 차례 더 반복되었고, 그 중에는 ‘국지적 제한 전쟁이냐 또는 확전이냐’라는 기로에까지 이른 경우도 있었다. 이 시기에 남북한은 총력전을 펼쳤고, 동서 양 진영도 동원할 수 있는 최대 역량을 투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산군 측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유엔군 측은 침략자를 응징하고 자유를 수호하며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피를 흘렸다.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끝난 1951 6, 전선은 또다시 38도선 부근으로 회귀하였고 그 후 교착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무렵 중공군은 춘계공세에서의 실패와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재기불능의 손실을 입어 더 이상의 공세가 거의 불가한 상황이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치열한 공방전은 계속되었다.

 

1년간의 전쟁을 통해 공산군 측은 그들의 힘으로 전 한반도를 통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엔군 측으로서도 힘에 의한 응징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전쟁을 사실상 주도한 소련과 미국은 각각 한반도에서의 전략적 이익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대의 의도를 확인하였고, 이로써 이 지역에서 냉전구조의 균형을 파괴할 수 없다는 현실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공동의 인식하에 쌍방은 기존 정책과는 달리 전쟁을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교착된 전선에서 휴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 측에서는 유엔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미국이 전쟁 이전 상황에서의 휴전정책을 확정한 데 이어 공산국 측에서도 소련이 중심이 되어 1951 6 13일 모스크바 조·중·소 회담에서38도선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조건에서 휴전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양측의 협상목표와 전력증강

양측의 협상 목적과 목표는 각기 달랐다. 유엔군 측은 군사협상을 통해 일단 휴전한 다음 유엔기구를 통해 정치적 수단에 의한 통일 민주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1951 7 8일 휴전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을 벌인 개성의 광문동 민가.

 

 

 

예비접촉 당시의 모습.

 

 

 

휴전 예비 회담시 북한군과 중공군.

 


 

반면 공산군도 전선이 교착된 6월부터 방어태세를 취하면서 지상군의 정비와 공군력의 전개를 통해 전력을 회복한 다음 8월 이후에 공세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고, 이 기간 중에 휴전회담을 추진한 것은 그러한 여건을 마련하기에 상당히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1951 7 10일 지프에 백기를 달고 회담장에 들어서는 유엔군 측 대표단. 백기를 다는 것이 합의사항이었지만 공산군 측의 유엔군 측을 항복사절로 선전했다.

 

 

 

1951 7 8일 첫 접촉에 나선 유엔군 측 대표단.

왼쪽은 이수영 중령, 오른쪽은 키니 대령.

 

 

 


휴전회담 첫 날의 모습.

  



이때 병력 면에서는 공산군이 2:1로 우세하였지만 화력이나 해·공군 전력 면에서는 유엔군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이처럼 1년 동안의 격전 끝에 대치한 양측은 휴전에 대비해 방어선을 강화하고 부대의 재편성·재배치를 통해 전력을 재정비하면서 휴전회담의 진전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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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omment hacker un compte facebook 2013.12.22 0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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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myhellotoyou 2013.12.23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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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적, 그들은 누구인가?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13 15:04

새로운 적, 그들은 누구인가?

 

인민지원군의(人民志願軍)의 실체

중국이‘인민지원군’으로 불렀던 군대는 사실상 중국의 정규군, 즉‘인민해방군’의 일부였다(이 책에서는 중국이 사용한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공간사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중공군’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한국에 투입된 중공군은 동북변방군이 주축이었으며 참전경험이 많은 정규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휘부도 마오쩌둥의 명령에 의해 총사령관에 펑더화이, 부사령관에 덩화(鄧華)·홍쉬에쯔(洪學智)·한시엔추(韓先楚), 참모장에 셰방(解方)이 임명되었다. 중공군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중공군, 북한군 지휘부

 

 

중공군의 신문과 잡지: 그들은 의도적으로 지원군이라는 제호를 강조하였다.

 

 

 

중공군의 편제는 사--병단-야전군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유엔군의 편제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중공군의 편제 비교

유엔군

사단

군단

야전군

집단군

중공군

병단

야전군

 

중국은 그들이 파병한 군대를‘지원군(支援軍)’이라 하지 않고 인민이 자원해서 이루어진‘지원군(志願軍)’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중국 인민이 조선 인민을 돕는 민간 차원의 군대라고 위장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명칭은 한동안 유엔군 측을 혼란스럽게 하였고,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중공군의 전략·전술

중공군은 과거 국부군[장제스(蔣介石)의 정부군]과 국·공내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전력은 온전하게 보전하면서 국부군의 전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기 위해 ‘거보적(巨步的) 전진·후퇴’를 반복하는‘운동전(運動戰: 기동전)’전략을 적용하였다. 그러나 중공군 지휘부는 기동공간이 좁은 한반도에서는 그러한 전쟁수행방법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분리와 소멸’이라는 개념하에 진지전(지역방어)과 운동전(기동전)을 배합한 작전을 수행한다는 방침을 세운 중공군은 상황에 따라 역습·기습·매복으로‘적’의 유생역량(병력)을 소멸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피리와 나팔을 불며 공격하는 중공군

 

 

산악지역에 편성한 중공군의 포병부대

 


 

중공군의 인해전술

 

 

중공군은 그 같은 개념에 입각해 먼저 국군의 방어지역을 돌파·소멸한 후 미군의 측방을 노출시켜 그 퇴로를 차단·포위함으로써 소멸시키는‘분리와 소멸’이라는 개념을 기본으로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같은 전술에 의해 중공군은 방어에 유리하고 유엔군이 공격하기 어려운 산악지역에 진지를 구축한 뒤 은밀하게 숨어 적이 통과하기를 기다렸다가 유엔군의 측방과 후방을 포위·공격하였다.

 

또한 그들은 피리·나팔, 꽹과리 같은 도구를 이용하며, 협소한 정면에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해 밀집대형으로 전진하는 이른바‘인해전술(人海戰術)’과 유엔군의 집중 화력과 공중공격을 피해 야간에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최대의 전과를 거두려 하였다. 그 같은 중공군의 전략·전술은 초기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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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bout us 2013.12.17 16: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어지역을 돌파·소멸한 후 미군의 측방어지역을 돌파·소멸한 후 미군의 측방어지역을 돌파·소멸한 후 미군의 측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 (장진호전투)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12 15:28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 (장진호전투)


 

이 전투는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의 7개 사단에 포위되어 11 27일부터 12 11일까지 약 240㎞의 장진호 계곡을 철수한 작전이다.

미 제1해병사단은 혹심한 추위 속에서 겹겹이 에워싼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엄청난 시련을 겪었으나, 근접 항공지원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함흥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는 철수라기보다‘후방으로의 공격’작전으로 중공군에게 수만명의 전사자 손실을 입힘으로써 이어진 흥남철수작전을 가능케 하였다.

 

 

 

중공군 포위망 속으로 공격

장진호 일대는 1,000m 이상의 고지대인 개마고원 일대 산악지역이었다. 또 깊은 계곡에 도로는 단 하나만 나 있어 교량이 파괴되면 차량통행이 불가능하였다. 이 무렵 날씨는 북풍이 몰아치는 엄동설한이었다. 주간에도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내려갔으며, 야간에는 영하 2845도까지 급강하하였다. 적설량은 많지 않았으나 곳에 따라 60㎝ 이상 눈이 쌓여 있었고, 눈보라가 칠 때는 15m 앞도 보이지 않았다.

 

 


장진호 전투 상황도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북쪽의 한·만 국경선으로 진출하기 위해 사단 주력이 하갈우리에 집결하고 있었다. 사단은 제7해병연대가 유담리를 확보하면 제5해병연대가 제7해병연대를 초월하여 무평리로 공격해 서부전선부대와 연결한다는 계획하에 11 27 08:00, 유담리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미리 매복 중이던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중공군 제9병단은 제27군 예하 4개 사단이 장진호 북방에 전개하여 미 제1해병사단의 주력이 집결된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를 포위 공격하고, 20군의 4개 사단이 장진호 서쪽에서 미 제1해병사단의 유일한 철수로인 유담리 - 하갈우리 - 함흥 간의 산악도로를 차단하고 있었으며, 26군의 4개 사단을 예비로 확보하고 있었다.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

중공군 제79·89사단은 유담리에 집결한 미 제1해병사단을 북쪽과 서쪽에서 공격하고 제59사단이 신흥리 일대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미 해병대는 진격을 중단하고 2개 연대로 유담리를 고수하면서 차단된 보급로 개통에 전투력을 집중하였다.

 

한편 미 제10군단장은 서부 미 제8군의 철수와 장진호 일대의 급박한 상황을 고려하여 11 30일 하갈우리의 사단지휘소를 방문해 함흥-흥남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다.

 

유담리의 미 제5·7해병연대는 협조된 작전으로 후방돌파를 시도하였다. 최초부터 덕동고개에 배치되어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제7연대 제2대대 F중대와 본대가 연결함으로써 일단 덕동통로는 개통되었다. 12 3일 덕동고개에서 하갈우리까지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을 때 하갈우리에 있던 영연방 제41해병특공대가 북상하여 철수부대를 엄호함으로써 철수부대는 하갈우리에 진입하였고, 22㎞에 걸친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12 4일 일단락되었다. 이들 부대가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철수하는 데 걸린 시간은 77시간으로, 1㎞를 진출하는 데 3시간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미 제1해병사단은 이 전투에서 1,140명의 인명손실과 동상에 의한 1,194명의 비전투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이들 부대는 철수 때 발생한 600여 명의 들것 환자와 함께 부대건제를 유지한 상태로 질서 있게 철수함으로써 해병대의 용맹성을 다시 한 번 과시하였다.

 

한편 장진호 동쪽의 신흥리 일대는 미 제7사단 제31연대장 지휘하에 제31연대 제3대대와 제32연대 제1대대, 57야전포병대대가 중공군 제27군의 제80·81사단의 5개연대로부터 포위공격을 받았다. 후방으로부터의 구출이 지연되자 이 부대는 소집단으로 포위망을 돌파해 하갈우리로 철수하였다. 수색부대의 구출작전으로 2,500명 중 1,050명이 구출되었고 300명은 전사, 나머지 1,150명은 실종되었다.


 

하갈우리 포위망 돌파작전

사단지휘소가 있는 하갈우리는 11 27일 중공군 제58사단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는데, 미 제1해병연대 제3대대와 공병대대가 적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다.

 

 

하갈우리 일대의 미 해병대

 

사단은 철수작업의 일환으로 12 2일부터 5일까지 4,312명의 부상자와 대량의 군수물자를 공중으로 후송하였다. 후송이 불가능한 시설과 물자는 파기한 후 병력은 12 6일 새벽에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철수 중인 미 해병대.



 

 

철수 중에 휴식하고 있는 미 해병대

 

이때 극동공군 수송사령관 윌리엄 터너(William H. Tunner) 소장이 해병 사단장 스미스 소장을 방문하여 ‘모든 전투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이라도 공중 철수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사단장은 “해병대 역사상 그 같은 불명예는 없었다”고 그 제의를 일축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결심을 굳힌 사단장은 각 제대가 철수준비를 하는 동안 장병들에게 “사단은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는 새로운 방향에 대한 공격이다”고 강조하면서 장병들의 전의를 북돋웠다.

 

중공군은 철수하는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제20군으로 철수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예비인 제26군을 투입해 철수하는 병력을 추격하였다. 사단은 제5해병연대가 하갈우리를 방어하면서 철수부대를 엄호하는 한편 제7해병연대는 후방으로 공격하면서 통로를 개척하였다. 전차를 선두로 강력한 근접항공지원하에 통로를 개척하고 철수로상의 주요 애로지점은 도로 좌우측 부대가 공격해 사전 확보함으로써 중공군의 포위와 기습을 방지하였다.

 

1만여 명의 병력과 1,500여 명의 피란민, 그리고 1,000여 대의 차량이 이동한 하갈우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선두부대가 12 7일 새벽에 고토리에 도착하고 14:30분께 엄호부대가 철수함으로써 끝났다. 이 작전에서 미군은 103명이 전사하고 7명이 실종되었으며, 506명이 부상당하였다.

 

고토리 포위망 돌파작전

중공군은 제58·60사단의 일부 병력이 고토리-진흥리 간 애로지역과 황초령 일대를 차단하고, 89사단이 진흥리 남쪽을 차단하고 있었다.


미 제1해병사단은 12 8 08:00, 진흥리에 있는 제1해병연대 제1대대로 하여금 북쪽으로 공격해 황초령의 요충지인 1081고지를 확보토록 하였다. 이후 제1해병연대의 엄호하에 제7해병연대가 선두에서 철수하고 제5해병연대가 후속하도록 하였다.

 

12 8일 야간에는 기온이 40도 이하로 급강하하였다. 이 때문에 고토리 이남의 애로지역을 지키고 있던 중공군은 꽁꽁 얼어붙은 시체가 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고토리 남쪽 6㎞ 지점의 수문교(고토리-황초령 중간)를 파괴하여 유엔군의 철수를 차단하였다. 이 수문교는 약 450m의 계곡을 연결하는 교량으로, 이 교량이 복구되지 않을 경우 미 제1해병사단은 차량·전차·야포 등 각종 전투 장비를 유기하고 후퇴하여야 할 처지였다. 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M-2 임시교량 경간목(무게 2, 5×2×15피트) 4개가 필요하였다. 극동 공군은 12 7 C-119 수송기 8대에 낙하산 2개를 부착한 경간목을 800피트 상공에서 공중 투하하였다. 그중 한 개는 중공군 지역에 떨어졌고, 1개는 파손되었으나 나머지 6개는 안전하게 투하되었다. 공병대대는 12 9 15:00시께 파괴된 수문교에 항공기로 공수된 경간목을 이용, 임시교량을 가설하였다. 가설이 완료된 후 병력과 차량은 밤새도록 유도병의 안내를 받으며 교량을 건너 12 10 08:30분 진흥리에 도착하였다.

 

진흥리를 통과한 다음부터는 미 제3사단의 엄호를 받으면서 함흥으로 전진하여 12 11 21:00시에 모두 함흥에 도착하였다. 이 작전에서 미군은 75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실종되었으며 256명이 부상하였다.

 

 

중공군에 의해 파괴된 교량 (수문교)

 

 

파괴된 교량을 복구 후 행군을 계속하는 해병대.

 

 

철수 중 눈 속에서 휴식을 하는 해병대원들

 

 

하갈우리로 향하는 미 해병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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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reast growth cream 2013.12.17 0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이 수석대표(해군 중장)와 대표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호디스 육군 소장

  2. Great Home 2013.12.17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지난 1951년 6월을 전후하여 제기되었으며, 그 후 7월 10일 쌍방 협상대표들은 개성에서 만나 최초 회담을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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