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현장에서 믿음을 심어준 카푼 신부님의 이야기(3-3)

생생! 6·25/6·25전쟁 지원국 2013.04.16 14:43

중공군의 약속과는 달리 포로수용소의 상황은 열악했다. 숙식 및 의료지원은 물론이고 배식마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하루 500그램에 불과한 음식만으로 연명해야 했다.

 

Kapaun 대위를 포함한 장교들은 미군포로들의 생사가 중공군 간수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량의 식량을 훔칠수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Kapaun 대위는 군종 신부로서 열악한 포로수용소의 환경에서 살아가야 하는 미군들에게는 10계명이 예외가 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고, 매일 밤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Kapaun 신부는 병사들이 수용된 오두막도 찾아가기 시작했다. Sombakol에 있던 포로들은 운산전투에서 생포된 8 기병연대 병사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Kapaun 신부의 농담과 따뜻한 위로에 더욱 힘입어 어려운 환경에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8주 후, 미군포로들은 섬박골을 떠나 벽동으로 향했다. 섬박골에서 숨을 거둔 이가 몇몇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전상으로 인한 것이었고, 그해 겨울 타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미군 포로의 수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Emil Kapaun 신부는 따뜻한 위로와 희생을 통해 섬박골의 미군들에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준 것이다.

 

19511월 중반 벽동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포로들은 섬박골보다도 열악한 환경에 경악했다. 구조에 대한 희망도 사라져 버린 가운데 압록강 변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쳤고, 포로의 수는 늘어만 갔다.

 

Kapaun 신부는 벽동에서도 목회를 계속했다. 주간에는 미군 의료진을 도와 병자들을 돌봤다. 거동이 불가능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던 포로들은 자신의 오물도 치우지 못한 채 미약한 숨만을 내쉬고 있었다. Kapaun 신부는 환자들의 더럽혀진 옷을 치우고 따뜻한 물에 씻긴 후 깨끗한 옷을 입혀주었다. 야간에는 간수들 몰래 병사들이 있는 오두막으로가 소식을 전하고 격려의 말을 나눈 후 짧게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등 희망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추가하여 중공군으로부터 식량, 담배 및 장작나무를 훔쳐 다른 포로들과 나누는 활동도 지속했다.

 

부활절 일요일에는 모든 종교를 부인하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폐허가 된 교회에서 공개 미사를 이끌었다. 미사제의를 입은 Kapaun 신부는 임시로 만든 십자가를 손에 쥔 채 14처 기도문을 낭송했다. 장교 수용소의 포로 대부분이 미사에 참여했는데, 천주교, 개신교, 유대교,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공군 간수들이 안절부절 하며 지켜보던 미사는 신부가 "아름다운 미국 America the Beautiful"이라는 노래를 선창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 부르며 막을 내렸다. 장교들은, 미사에 참여하지 못한 벽동의 다른 포로들이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부활절 미사를 기점으로 Kapaun 신부는 눈에 띄게 기력을 일어갔다. 포로생활 5개월 간 얻은 각종 질병들이 신부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추운 겨울 날씨에 동상에 걸렸고, 나무를 자르던 중 튄 조각에 눈을 다쳤으며, 영양을 섭취하지 못해 심각한 저체중인 것도 모자라 각기병마저 걸린 상태였다. 제때 자르지 못한 머리는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었고, 수염도 길게 자라있었다. 신부의 상태를 알지 못했던 장병들이 신부가 예수를 닮아 간다며 놀릴 때면, 말없이 얼굴을 붉히기만 했다.

 

부활절 미사 1주일 후, Kapaun 신부가 설교도중 정신을 잃었다. 미군 군의관 들은 신부의 다리에 血栓이 있는 걸 발견하고 휴식을 권고했다. 동료들은 신부에게 자신들의 의약품과 식량을 나누어주고, 변소에 가는 걸 도우며, 붓기를 빼기 위해 벽돌을 데우는 등 최선을 다해 신부를 간호했다. 그 덕분인지 Kapaun 신부는 수주 만에 지팡이에 기대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등 활기를 되찾는 듯 했다.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특별한 관심을 부담스러워 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한편, 끊임없는 선전공세에 대한 신부의 명예로운 저항은 중공군의 회유정책을 위협하고 있었다. Kapaun 신부는 벽동 포로수용소 유일의 군종장교였고, 중공군 간수들은 이러한 신부의 신앙 및 미군포로들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을 두려워했다. 19514월 말, 간수들은 수용소의 기강을 해하고 중공군을 비방한다는 혐의로 Kapaun 신부를 소환했다. 하지만 이러한 위협과 비방들은 어떠한 효과도 거두지 못했고, 결국 신부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신체적 고문까지 행할 경우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5월 초, Kapaun 신부는 목발을 사용해 장교수용소 내를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회복되는 것 같아 보였으나, 얼마 못가 심한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약이 부족한 상태에서, 미군 군의관들은 중공군 간수들에게 추가로 약을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미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신부의 치료를 지원할 리 만무했다. 결국 동료 장교들이 기지를 발휘해 단체로 설사에 걸렸다며 간수들로부터 약을 받아야만 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얻은 약을 6일간 섭취하자 설사가 멈추게 되었다. 하지만 며칠 되지 않아 신부는 다시 한 번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그러자 중공군 간수가 신부를 포로수용소 내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비위생적이며 낙후된 시설뿐만 아니라 관리인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병자들이 구더기와 함께 생활해야만 했던 곳으로 Kapaun 신부를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입원한 환자가 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어 오히려 장례식장이라는 명칭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신부의 동료들은 간수들에게 거세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며 Kapaun 신부는 말했다: 언제나 가고 싶었던 곳에 가는 것뿐입니다. 천국에서 여러분 모두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신부는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2일 후 숨을 거두었다.

 

Emil Kapaun 신부의 유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다른 수백 구의 미군 유해와 함께 압록강 변 어딘가,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혀있다. 신부가 사망한지 수주 후, 중공군은 신부가 매장된 지역에 공원을 조성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흔적을 지우려는 중공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부의 고결한 희생정신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명예, 용기 신념을 가지고 고된 포로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Kapaun 신부의 유산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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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et more info about Dead Piff 2014.02.15 14: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투현장에서 믿음을 심어준 카푼 신부님의

  2. carpet cleaningwhat does bubblegum casting do balham 2014.03.23 1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효과도 거두지 못했고, 결국 신부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신체적 고문까지 행할 경우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3. what does bubblegum casting do 2014.03.23 16: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효과도 거두지 못했고, 결국 신부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신체적 고문까지 행할 경우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4. Cheap Divorce Lawyers 2014.04.21 15: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약을 6일간 섭취하자 설사가 멈추게 되었다. 하지만 며칠 되지 않아 신부는 다시 한 번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전투현장에서 믿음을 심어준 카푼 신부님의 이야기(3-2)

생생! 6·25/6·25전쟁 지원국 2013.04.15 14:26

<장병들과 함께 기도하는 카푼 신부님>

 

1026, 평안북도 운산에 포진해있던 국군 1사단이 중공군을 생포했다. 백선엽 당시 1사단장은 포로 취조 끝에 중공군 3개 사단이 아군 근처에 포진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상부에 보고했지만,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지휘부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다.

 

하지만 국군이 중공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육군 1군단장이 지원 병력을 파견했다. 수일 내로 1기병사단 8연대가 운산에 전개되어 마을 북부와 서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기온은 예년보다 높았지만, 중공군이 아군 정찰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피운 검은 연기가 계곡을 뒤덮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전기에서 중국어 대화가 들리는 등 대규모 중공군 병력이 인근에 위치해 있다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식별되었지만, 다시금 지휘부에 의해 무시되었다. 국군은 이미 남쪽으로 철수한 상태였고, 가장 가까운 미군부대는 16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당시 1기병사단장에 따르면 8연대는 매우 위태로운 입장에 처해있었다.

 

111일은 천주교에서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만성절로서, 1950111Kapaun 대위는 제8 기병연대 유일의 천주교 군종 신부로서 아침 일찍 일어나 종일 미사를 진행하고 고해를 듣느라 매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날 역시 인근을 정찰하던 수색대가 대규모 적 부대의 징후를 보고해왔지만, 지휘부의 누구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가 지자 중공군은 운산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8연대 1대대에 대한 대규모 로켓 공격과 함께 공격을 개시했다. 연이어 마을 서북방에 있던 2대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고, 연대가 와해될 것이라 판단한 지휘부는 8연대에게 남쪽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3대대와 함께 최전선에서 수백여 미터 떨어져 있던 Kapaun 신부는 마을 북방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때문에 이른 저녁 잠자리에 들었지만, 2300시 즈음에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서둘러 후퇴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 Kapaun신부는 보조로서 자신을 돕던 Patrick Schuler 일병과 함께 퇴각하는 8연대 차량행렬에 합류했지만,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속출했다. Kapaun 대위와 Schuler 일병은 가능한 많은 수의 미군 장병들을 구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였다.

 

112일 새벽 0300시경 3대대 본부에 중공군이 들이닥쳤고, 후퇴를 하기 위해 준비하던 지원차량들 근처에서 육탄전이 벌어졌다. 부상당한 장병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기며 전장을 누비던 Kapaun 신부는 한순간 중공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군종 신부가 생포된 걸 발견한 장병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전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Kapaun 신부는 군의관 Clarence Anderson을 도와 부상병들을 돌봤고, 살아남은 장병들은 3대의 아군 탱크를 거점으로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했다. 탱크의 막강한 화력 덕택에 중공군의 공격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종일 8연대 장병들은 Kapaun 신부가 몇 번이고 적 총탄과 박격포 공격을 뚫고 부상병들을 찾아 비교적 안전한 참호로 끌어 옮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날 하루에만 15명을 구한 Kapaun 대위는 그 영웅적 용기를 인정받아 훗날 육군 수훈십자훈장을 수상한다.

 

그날 밤, Kapaun 신부는 결국 중공군에게 생포되었다. 수일간의 행군 끝에, 운산 전투에서 생포된 다른 수백 명의 포로들과 재회하는데, 부상병들을 돌보기 위해 끝까지 자리를 지킨 군의관 Anderson도 일행에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군의 잔학성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데다 그 증거를 직접 봤기 때문에(낙동강 방어선, 대다수의 포로들은 자신들이 즉결처형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신, 중공군은 오히려 미군포로를 예우하며 따뜻한 숙소, 넉넉한 음식 및 의료지원을 약속했다. 포로들은 11월의 대부분을 행군에 할애하며 압록강 변에 위치했던 평안북도 벽동 포로수용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군의 폭격에 의해 포로수용소의 반이 파괴되어버려 남쪽의 섬박골에서 2개월을 보내야했다.

 

포로 중에는 들것을 사용해야만 이동시킬 수 있었던 부상병들이 여럿 있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을 도울 지원자를 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만큼 포로생활이 고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Kapaun 신부는 언제나 자신의 차례가 오면 주저 않고 들것에 누워있는 동료들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전우들을 격려하며 모두가 단합해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Sombakol로 이동하던 중 동료 군종 장교 Kenneth Hyslop가 운산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Kapaun 신부는 그의 곁으로 달려가 임종의 순간까지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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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현장에서 믿음을 심어준 카푼 신부님의 이야기(3-1)

생생! 6·25/6·25전쟁 지원국 2013.04.10 15:19

 

 

 

전투는 전투병과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군에는 보병을 비롯한 여러가지 병과(군종, 정훈, 병참, 헌병, 부관, 경리 등)가 있습니다. 6ㆍ25전쟁 당시에도 낯선 땅 한국을 위해 바다를 건너온 미군 전투병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끊임없이 심어주기 위한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오늘은 미 한국전 60주년 사업위원회에서 이달의 인물로 선정한 에밀 카푼 신부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래 글의 원 출처는 http://www.koreanwar60.com/이며, 원문을 번역한 내용을 3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

*본 자료의 저작권은 미 한국전 60주년 사업위원회에 있습니다.

 

 

 

Emil Kapaun 대위는 1916420일 미국 캔사스Pilsen에서 태어났다. 농부의 아들로서 Kapaun은 튼튼한 신체를 가진 청년으로 성장했고, 덕분에 후일 포로수용소의 척박한 환경에도 잘 견딜 수 있었다. 또한, 독실한 천주교 가정환경 덕택에 어떠한 육체적 고통 또는 심리적 압박에도 굴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Kapaun1932년 천주교 기숙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몬타나Saint Louis에 위치한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1940, 마침내 성직에 임명되어 고향 Pilsen의 부목사로 부임한다.

 

1941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과 동시에 Kapaun 목사는 인근 군 기지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섬기며 군종 신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1944육군에 입대한 Kapaun은 말라리아가 창궐하던 인도 전선에서 2년간 복무했다. 1946년 전역 이후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등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군 생활을 잊지 못해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1948년 군종 신부로 재입대했다.

 

일본에서 기병 1사단 8연대 소속 군종 신부로 근무하던 Kapaun 대위는 6.25 전쟁이 발발 직후 소속부대와 함께 포항에 상륙했다. 8연대 예하 2개 대대는 서북방으로 이동, 용동 인근에 물밀 듯 남하하는 북한군에 맞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723일 최초로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8 기병연대의 장병들이 이국땅에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전개해가는 가운데, Kapaun 신부는 언제나 최전선에서 전상자들을 도왔고, 장병들과 음식을 나누며 사기를 북돋았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한 공로로 동성훈장을 수여받는 등 전우를 위한 마음씨가 남달랐다.

 

Kapaun는 신부는 편지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지인들에게 전했다: 적 포격으로 인해 양 다리를 잃은 장병들을 봤습니다. 한명은 머리의 윗부분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더군요. 아마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을 겁니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이렇게 고백했다: “8일간 전선에서 적과 맞서 싸우는 장병들과 함께했습니다. 적의 끊임없는 기관총 및 박격포 공격에 시달리고, 전차의 포격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3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기기도 했지요. 제가 살아남은 건 하나님의 은총이었던 듯합니다. 얼마나 더 이 끔찍한 나날들을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같은 개인적인 심정에도 불구하고, Kapaun 신부는 전우들 앞에서 만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한번은, 북한군 탱크가 발사한 포탄이 수미터가 되지 않는 지점에 떨어져 철모가 날아가기도 하고, 야외 미사를 진행하던 장소에서 140미터 떨어진 곳이 적의 집중포격을 받는 일이 있기도 했다. 사용하던 차량마저 적에게 피격되자 버려진 자전거를 수리해 타고 다니며 전선의 부대들을 방문하는 등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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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lick Wagening en CNS Link 2014.02.13 00: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꼭 알아야할 한국의 아픈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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