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 2사단, 인디언 태형을 당하다 (군우리 철수작전)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11 10:47

미 제 2사단, 인디언 태형을 당하다 (군우리 철수작전)

 

이 전투는 중공군 제2차 공세 시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방어선인 숙천-순천-성천-양덕선으로 철수할 때 엄호부대였던 미 제2사단이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철수하면서 중공군 제38군 제113사단과 치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미 제2사단은 중공군에게 퇴로가 차단된 가운데 11 29일부터 3일간 철수하면서 약 80%의 병력을 잃는 대참사를 당하였다.

 

 

 

인디언 헤드(Indian Head) 부대와 인디언 태형

미 제2사단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창설되어 제1·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투에 참가한 전통 있는 부대이다. 6·25전쟁에는 8월 초 미 본토에서 증원되어 낙동강전선에 투입되었다.

미 제2사단은 부대마크의 심벌로 미국의 원주민인 인디언의 얼굴을 형상화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대의 별명이 인디언 헤드(Indian Head)였다.

인디언 태형(笞刑, Gauntlet)은 인디언이 적군이나 범법자를 처벌할 때, 두 줄로 늘어선 인디언 전사 사이로 이들을 들여보내고, 행렬을 빠져나갈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패는 형벌의 일종이다.

미 제2사단의 군우리 철수작전을 두고 역사가들은 “인디언 헤드 사단이 중공군에게 인디언 태형을 당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중공군이 장악한 후방의 철수로를 통과하면서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을 빗대어 하는 얘기이다.

 

 


미 제2사단 부대마크

 

중공군 2차 공세로 크리스마스 공세는 저지되고…

유엔군의 11 24일 크리스마스 공세는 11 25일 중공군의 2차 공세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미 제8군의 우익인 국군 제2군단은 묘향산맥에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고, 26일 덕천이 피탈되었다. 미 제8군 전체가 퇴로를 차단당할 위험에 직면하였다.

 

미 제8군은 28일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를 지시하였다가 적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29일 평양방어선인 숙천 - 순천 - 양덕 선으로 철수를 지시하였다.

 

군우리에서 희천 방향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은 국군 제3연대와 터키여단을 배속받아 군우리 일대에서 적을 저지하고 있었다.

 

국군 제7사단 제3연대는 묘향산을 공격하던 중 중공군의 역습을 받고 철수할 때 퇴로가 차단되자 인접한 미 제2사단 지역으로 우회하여 철수하던 중 11 26일 국군 제2군단의 명령에 의거하여 미 제2사단에 배속되었다.

 

미 제2사단장은 28일 청천강 계곡으로 진출한 중공군과 혈전을 벌여 많은 피해를 입은 제9연대를 군우리 남쪽으로 철수시켜 재편성을 하도록 하고, 미 제23연대를 구장동-군우리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북원에, 국군 제3연대와 미 제38연대를 사단 작전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비호산 남쪽에 배치하였다. 이때 사단의 좌측(청천강 서쪽)에는 미 제25사단이, 오른쪽(와원)에는 터키여단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미 제2사단의 군우리 철수작전 상황도

 

 

터키여단이 와원·신립리에 이어 봉명리에서 중공군 제38군과 결전을 펼친 29, 중공군 제40군은 국군 제3연대와 미 제23연대를, 중공군 제38군은 미 제38연대를 공격함으로써 군우리 전투가 시작되었다.

 

터키여단을 공격하여 사기가 오른 중공군 제38군은 미 제38연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미 제38연대는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터키여단이 배치된 봉명리로 철수하였고, 이때 미처 철수하지 못한 터키여단의 잔여부대와 미 제38연대 제2·3대대가 혼재되어 유일한 철수로인 군우리-개천 도로는 대혼잡을 이루었다. 이때 중공군 제38군은 이들의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개천강 남쪽으로 우회 침투시켜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132고지를 점령하였다. 사단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자 미 제5공군은 야음과 악천후 등 최악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B-26 폭격기를 출격시켜 중공군을 공격하였고, 철수제대는 이 틈을 이용하여 개천을 빠져 나왔다.

 

 


미 제2사단장 카이저 소장

 

한편 미 제2사단의 오른쪽 전방이 위기상황에 몰리자 미 제9군단장은 미 제2사단장에게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철수하여 성천 일대를 방어 중인 미 제1기병사단과 연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미 제23연대는 개천에서 군우리로 철수하는 부대들을 엄호하기 위해 제3대대와 전차 1개 소대를 군우리 북쪽 3㎞ 지점에 배치하고, 주력은 군우리를 감제할 수 있는 개천강과 조통강(梧補江) 사이의 마장리로 철수시켰다. 그리고 국군 제3연대와 미 제38연대 1대대는 철수 중인 터키여단과 미 제38연대 제2·3대대를 엄호하기 위해 군우리 동쪽에 재배치되었다.

 

이날 군우리 북쪽에서 적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던 미 제23연대 제3대대와 전차소대는 군우리 동쪽에서 철수 중인 미 제38연대와 터키여단이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강력한 역습을 시도하였다. 철수제대의 마지막 부대인 국군 제3연대 주력이 군우리를 경유하여 안주 도로로 접어들자 북쪽에서 엄호하던 부대도 철수하였다.

 

이로써 미 제2사단은 청천강 하류 삼각주 지대의 전술적 요지인 군우리를 적의 수중에 넘겨주고, 이번 철수작전에서 최대의 격전이 예상되는 적의 차단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철수준비를 서둘렀다.

 

사단 철수로를 차단한 중공군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 제38군의 제113사단은 28일 아침 군우리에서 순천에 이르는 삼소리와 용원리를 차단하였다. 야간에만 행군하던 중공군은 이 철수로를 차단하기 위해 국군으로 위장한 후 주간에 강행군을 하여 삼소리를 먼저 점령하였고, 337연대는 삼소리 서북쪽의 용원리를 점령하였다.

 

이런 사실은 미 제2사단의 철수에 앞서 28일 미 제1기병사단 주력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이동한 미 제5기병연대와 전차소대에 의해 확인되었다.

 

5기병연대는 삼소리 부근의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중공군과 밤늦게까지 치열한 격전을 펼친 후 순천으로 철수하였고, 또 미 제72전차대대 1개 소대는 영연방 제27여단을 지원하기 위해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이동하던 중 2개 중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았으나 장갑차의 보호를 받아 무사히 순천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들

 

또 미 제2사단이 29 05:00시에 청룡리의 초등학교 건물에 전방지휘소를 개설한 직후 순천에서 군우리로 보급품을 수송하던 터키여단의 수송대가“이 도로로 이동 중 적의 기습을 받아 겨우 탈출하였다”는 보고를 해 옴으로써 중공군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미 제2사단장은 사단 수색중대에 용원역 남쪽 6㎞에 위치한 고개 부근을 점령 중인 적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수색중대는 제503야포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아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강력한 적의 저항에 밀려 정오 무렵 공격의 기세가 꺾였다. 이에 사단장은 제38연대의 1개 중대와 전차 1개 소대로 수색중대를 증원하였다. 이들 공격부대는 고개를 돌파하기 위해 저녁 무렵까지 격전을 벌였으나 차단진지 돌파에 실패하고 복귀하였다. 이 공격이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적이 도로상에 장애물을 설치하지 않고 단지 화력으로만 도로를 차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미 제9군단장은 미 제2사단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을 공격하는 동안 미 제2사단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영연방 제27여단의 미들색스 대대를 격전이 펼쳐지고 있는 갈고개 남쪽 11㎞ 지점으로 이동시켰다. 미들색스 대대는 전차 1개 소대와 105㎜ 곡사포 대대를 지원받아 갈고개를 공격하였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이 저지되어 남쪽의 용원리로 철수하였다.

 

어둠이 깊어 가면서 사단사령부 지역에도 적의 박격포, 자동화기, 소총사격이 가해지자 사단장은 사단예비로 집결 대기 중인 미 제9연대에 30 08:00시 적의 차단선을 돌파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사단은 미 제9연대를 선두로 사단본부 - 포병 및 지원부대 - 터키여단 - 미 제38연대 - 국군 제3연대순으로 철수하고, 미 제23연대를 후위로 하는 철수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 제38군도 삼소리·용원리 일대를 차단하고 있는 제113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30일 새벽, 주력부대인 제112사단과 제114사단을 제113사단이 점령한 차단선 북쪽의 용흥리·쌍룡리 일대에 투입하였다. 이처럼 중공군의 차단선이 더욱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이를 간파하지 못하였다.

 

죽음의 계곡에서 태형을 당하다

공격의 선봉에 나선 미 제9연대 2개 대대는 1개 전차소대를 앞세우고 30 03:30분 집결지를 출발하여 06:30분에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청룡참에서 약 1.5㎞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 적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연대장은 즉시 차량제대를 적의 포병 사정거리 밖으로 철수시키고, 2대대는 도로 서쪽의 고지를, 3대대는 우측의 개활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격제대는 얼마 되지 않아 자동화기와 박격포로 무장한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수세에 몰렸고, 전차소대만이 적의 화망을 뚫고 남쪽의 용원리 부근에 저지진지를 구축한 영국군과 합류하였다사단은 09:00시경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국군 제3연대를 급파하였다.

 

정진(鄭震) 중령이 지휘한 국군 제3연대는 전방으로 이동하여 공격이 돈좌된 미 제9연대 제2대대 진지를 인수하였다. 연대는 10:30분에 공군의 근접항공지원과 미 제72전차대대 C중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운용리(청룡참 서쪽 마을) 남쪽의 중공군 진지를 향해 돌진하였다. 그 결과 20여 명의 중공군이 저항하는 첫 능선을 단숨에 돌파하고, 두 번째 능선으로 치달아 고지 정상의 점령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때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다.

 

도로를 따라 남진(南進)하고 있던 72전차대대 소속의 전차가 공격 중인 국군을 중공군으로 오인, 전차포와 중기관총을 난사해 2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연대는 일단 후사면으로 철수해 재편성한 후 즉시 재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사격이 더욱 강화된 데다 대응사격을 개시한 미 전차가 또 오인사격을 하는 바람에 연대의 공격이 다시 돈좌되었다. 결국 연대의 공격은 불명예스럽게도 2차에 걸친 미 전차의 오인 사격으로 실패하였다.

 

국군 제3연대의 공격이 실패할 무렵 사단의 후방지역을 엄호하던 미 제23연대장은 사단장에게 “항공폭격으로 적의 접근을 차단하고는 있으나, 군우리 부근의 적이 계속 증강되고 또 일부는 사단의 동쪽 방향으로 이동 중”이라고 보고하였다. 이로써 군우리-순천 도로에 집결된 미 제2사단은 진퇴양난에 빠졌고, 시간이 경과할수록 포위망은 점점 압축되어 왔다.

 

사단의 좌측 미 제1군단 지역에 군우리-안주-숙천-순천으로 연결되는 군단의 주보급로가 있었으나, 사단이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개천강으로 진출한 적의 감제하에 신안주로 역행군을 해야 하였고, 게다가 이 도로는 미 제1군단을 추격하여 안주 일대로 진출한 적이 점령하고 있어 사용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단장으로서는 적이 점령하고 있는 차단선을 강력하게 돌파하면서 순천으로 철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사단장은 미 제9연대와 국군 제3연대가 이미 공격을 퍼부어서 적의 방어력이 다소 줄었고, 중화기도 배치되어 있지 않으며, 남쪽에서 영연방 제27여단의 미들색스 대대가 공격하고 있어 사단이 무난히 순천으로 철수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미 제2사단은 다시 미 제38연대를 선두로, 사단사령부 - 각종 포병부대 - 공병부대 - 미 제9연대 - 국군 제3연대 - 터키여단 순으로 철수제대를 편성하였다.

 

이때 사단장은 보병부대도 가용한 차량을 이용해 최대한 탑승하도록 하여 전 부대가 정지하지 말고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라고 강조하였다.

 

사단은 정오가 조금 지나자 후위를 담당한 제23연대의 엄호하에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은 사단의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인천참과 그 남쪽 갈고개 일대에 아군으로부터 노획한 M-39 수송차, M-4 전차, 2½톤 트럭 등으로 그 전날까지 없던 도로장애물을 새로 구축하고 저항하였다. 이로 인해 사단의 이동이 잠시 주춤하기도 하였으나 선두로 나선 9대의 전차제대는 이들을 도로 밖으로 밀어내고 14:00시경 남쪽의 영연방 제27여단 전초가 배치된 지역을 통과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영연방 제27여단은 미 제9군단에 군우리-순천 도로가 개통되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선두 전차를 후속하던 부대들의 상황은 아주 달랐다. 전차가 차단선을 통과하자 중공군 2개 연대는 미리 인천참 일대의 차단선에 배치한 3040정의 기관총과 10여 문의 박격포를 이용해 후속부대에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였다. 이 포격으로 철수제대는‘일단 정지-공중폭격 간 대기-출발’을 반복하였다. 이처럼 미 제38연대는 총격전과 이동을 반복하면서 15:00시께 중공군의 저지선을 통과하였다.

 

이어서 제9연대가 갈고개 저지선을 통과할 무렵 양쪽 단애에서 중공군의 치열한 사격이 개시되었고, 도로에는 20여 대의 고장난 차량이 흩어져 있어 엄폐물이 되기는 하였으나 연대가 신속히 돌파하는 데는 장애물이 되었다. 이때 사단이 지원 요청한 항공기들이 적진을 강타하였고 도로상의 차량들이 불타기 시작하였다. 공중폭격으로 적의 사격이 주춤한 틈을 이용해 미 제9연대도 이동을 완료하였다.

 

 


죽음의 계곡으로 불리는 갈고개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격에 파괴된 미 제2사단의 화포와 차량들

 

뒤따르던 포병부대 중 미군이 보유한 유일한 8인치 곡사포인 제17야전포병대대는 포 1문을 포함해 약간의 손실을 입고 차단선을 돌파하였으나, 다른 포병들은 양 측방이 고지로 둘러싸인 갈고개 부근에서 증강된 중공군에 의해 다시 포위되었다. 적중에 고립된 포병부대들은 장비를 유기하고 병력만 철수하였다. 그러나 포병부대가 철수한 이후부터 적의 저항이 현저하게 감소되어 그 뒤를 후속한 국군 제3연대와 터키여단은 적의 경미한 저항을 격퇴하고 순천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후방을 엄호하던 제23연대장은 어둡기 전까지 후속부대의 철수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좌측 미 제1군단의 신안주-숙천 도로를 이용하여 철수할 것을 건의해 승인받았다. 연대장은 도로가 협소해 야포의 철수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철수 20분 전까지 보유한 전 탄약을 사격한 후 야포를 파괴하고 일몰 직전에 미 제1군단 엄호부대인 미 제5연대 진지를 경유하여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피로 얼룩진 미 제2사단의 군우리 철수작전은 일단락되었다.

 

군우리 철수작전은 적정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애로(隘路)지역의 돌파를 강행하려다가 진퇴양난에 몰려 무려 3,000여 명의 사상자와 포로 및 실종자를 발생하게 하였고, 각종 화포와 기동장비를 유기하는 참극을 빚었다. 이후 미군들은 청룡참에서 갈고개까지 10㎞ 계곡을‘태형(笞刑)의 계곡’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12 1일 집계에 의하면 11월 후반 미 제2사단의 전투로 인한 사상자는 4,940명이며, 이중 90% 4,500명은 25일 이후 군우리전투에서 발생하였다. 이러한 손실은 사단 병력의 1/3에 해당되는 숫자이며, 이로 인해 사단은 편제상 인원에서 8,662명이 부족하게 되었다. 또한 장비의 손실도 인원 손실에 못지않게 컸다. 수백 대의 차량과 야포 114, 2전투공병대대의 공병장비 대부분, 예하부대가 휴대하고 있던 통신장비의 2040%가 손실되었다.

 




북으로 끌려가는 미군 포로들. 

 



중공군에 포위되어 유기한 미제2사단의 무기와 장비들.

 

재정비 없이는 전투에 투입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은 미 제2사단은 이후 부대를 정비하기 위해 전선을 떠나 영등포에서 재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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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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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ivigno hotels 2013.12.14 06: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시엔추(韓先楚), 참모장에 셰방(解方)이 임명되었다. 중공군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2. Rugged Cams 2013.12.14 0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에 출동명령을 하달했다. 또 미 육군 25사단 27연대를 주축으로 한 1개 연대전투단을 출동 준비시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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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Great Home 2013.12.15 0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鄧華)·홍쉬에쯔(洪學智)·한시엔추(韓先楚), 참모장에 셰방(解方)이 임명되었다. 중공군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9. Venapro review 2013.12.15 19: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용하지 않고 공간사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중공군’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국군의 방어계획과 대비태세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10 15:42

국군의 방어계획과 대비태세

 

국군은 1949년 말 북한군이 남침을 위한 전력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어느 정도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방어계획을 준비하였다. 육군본부는 주한미군이 철수한 후인 1949 8월부터 북한의 남침준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이에 따라 각 사단에 자체적으로 방어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1949 11월에는 각 사단장과 작전참모, 그리고 미 수석고문관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 평가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토의된 계획과 1949년도 육군 정보국이 작성한 연말 정보보고서를 기초로 육군본부와 참모학교에서 방어계획의 시안(試案)을 수립하게 되었다.


국군 방어계획은“1950년 봄에 적이 38도선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해 올 것이다”라고 평가한 육군본부 정보국의 종합정보보고서에 따라 이에 대비하기 위한 차원에서 계획수립을 서둘러 1950 3 25일 국군 방어계획인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를 확정하고 예하 부대에 이 계획을 하달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국군 방어계획은 신태영 육군 총참모장의 지시로 육군본부 작전국장(강문봉 대령)이 주도하여 작성한 기본방어계획으로, 부록까지 구비한 비교적 완벽한 작전계획이었다. 이 계획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해군과 공군도 각각 기본방어계획에 따라 자체적으로 작전계획을 수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군의 예하 각 사단은 1950 3월 말경 육군본부로부터 기본방어계획을 수령하였으며, 이를 기초로 1950 5월 초 사단 자체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국군 방어계획은 적의 주공이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에 지향될 것으로 판단하여 의정부 지구에 중점을 두고 방어지대를 편성하였다. 방어목표는 이 지역으로 공격해 오는 적의 주공을 진지 전방에서 격파하여 38도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38도선 확보를 위한 국군 방어계획의 기본개념은 첫째, 옹진지구의 육군부대는 적의 공격 시 인천으로 철수하고 둘째, 개성지구의 육군부대는 적의 공격을 받으면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계획된 임진강 남쪽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며 셋째, 후방지역 예비사단은 적의 공격 시 역습부대로 운용한다는 것이었다.

38도선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할 경우에는 남한 지역의 큰 강을 이용하여 지연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최초 한강 이남으로 전략적인 철수작전을 수행하면서 한강선·대전선·낙동강선에서 축차적인 지연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국군의 방어계획

 

이와 같이 국군의 방어계획은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북진을 위한 공격계획이 아니라 북한군이 공격했을 때 이를 현 전선에서 물리치고자 하는 수세적인 개념의 전형적인‘방어계획’이었다.


북한군이 남침하리라는 풍문은 1949년 말부터 남한사회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전쟁발발 가능성에 관한 소문은 그 후로도 끊이지 않아 1950년 초에 들어오면서‘2월 위기설’‘3월 위기설’‘4월 위기설’등 갖가지 위기설이 떠돌았다. 정부도“북한의 전쟁준비는 완료되었고 남침은 시간문제”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도“5, 6월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맥아더 장군 역시 3 10일“최근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북한이 6월에 남한을 침략할 것”이라는 비밀정보 보고서를 워싱턴으로 타전한 바 있다.


육군본부 정보국도 자체 수집한 정보와 월남 귀순자 혹은 북한 탈출 귀순 조종사 등의 각종 증언을 토대로 북한군 병력과 장비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 정보는 훗날 밝혀진 내용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적의 무기와 장비 및 동향에 근접하였다.


5, 6월 위기설’이 파다한 가운데 1950 4 10일 육군 총참모장으로 재기용된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의 동향과 국내 정세를 고려해 4월부터 6월 동안 세 번에 걸친 경계강화 조치를 취하였다. 북한군과 남한지역에 남아 있는 공비들이 5 1일 노동절을 전후하여 남침과 폭동을 기도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군지휘부는 육군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피아 병력 및 장비상황에 근거해 취약한 38도선 남측 방어시설을 강화·보완할 대책을 담은 긴급 건의서를 국회에 제출한 상태였다. 당시 38도선상의 방어진지는 적의 곡사화기에 아군병력 및 장비를 보호할 수 있는 시설과 적 전차공격에 대비한 주요 접근로상의 장애물은 물론 대전차지뢰도 매설하지 못해 대전차 방어수단이 전무한 상태였다. 육군은 그동안 장애물공사를 방해한 북한‘38경비대’와의 무장충돌, 그리고 38도선 방어부대가 교체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나름대로 38도선 방어시설을 강화하고 보완해 1950 6월까지 방어진지를 구축했다고 하지만,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을 막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국회에 제출된 건의서는 선거기간이라 국회가 휴회 중이어서 처리되지 못하였다.


사실상 이 시점은 북한군이 공격준비를 갖추는 마지막 단계로6 11일부터 6 23일 사이 남침공격 대기지점으로 이동을 완료한 후 상부의 최후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중으로 사전 계획된 공격일자를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전쟁 직전 국군 부대 배치 현황

 

그러나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은 비상경계령이 실시되는 동안 적의 특별한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쟁 이틀 전인 6 23일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해 버렸다. 북한군 전투부대가 38도선 북쪽에서 최후의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고, 실제로도 적이 38도선상에서 병력증강을 하던 때라 국군은 전군에 비상대기령을 내렸어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는 것은 국군지휘부의 중대한 판단착오였다.


전방 상황을 주시해 온 육군본부 상황실에서는 6 22 23일 이틀 동안 입수된 첩보를 분석한 결과 이상하리만치 활발한 적의 움직임을 우려하고 있었다. 비상경계령 해제 후인 6 24일 전방 제7사단으로부터 “북한군 군관들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아측을 향하여 지형정찰을 하는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하여 즉각 관련 첩보를 분석한 결과 북한의 전면공격이 임박한 것으로 보이며, 오늘내일 중으로 전쟁이 발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다.


정보 실무자들의 이러한 판단에 따라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과 관련 참모들은 이날 15:00시 긴급회의를 열고 상황을 분석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몇몇 위관급 장교는 비상경계령 해제를 즉각 중지하고 휴가와 외출을 중지하든가, 아니면 최소한 병력의 2/3는 영내에 대기하도록 건의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총참모장은 단지 정보국의 첩보대를 서울 접근로상의 중요 지역인 포천·동두천· 개성 등지로 파견하여 적정을 살핀 후 그 결과를 다음날 08:00시까지 보고할 것을 지시했을 뿐이다.


 

그런데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다음날인 6 24일은 토요일이라서 전군이 외출·외박을 실시했기 때문에 전방 일선부대들도 외출·외박과 휴가를 실시한 상황이었다. 그간 45일이나 지속돼 오던 비상경계 태세가 해제되자 오랜 비상근무가 끝난 데다 농번기까지 겹쳐 많은 장병들이 부대를 빠져나갔다. 특히 38도선 경계부대는 3분의 1에 해당되는 병력이 제자리를 비우게 돼 영내 대기 장병 수는 군 복무규정과 육군본부가 요구한 범위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병사들은 오랫동안의 긴장상태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말과 휴가를 즐기려 하였다. 부대에 남아 있던 장병들도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


일선부대의 긴장이완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1949년과 1950년의 대북 정보판단을 통해 북한군의 전력이 절대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점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처럼 긴박한 시기였음에도 육군 총참모장이 육군 고위급 장교의 인사이동을 두 번이나 실시한 것도 국가적 차원의 종합적 대책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사이동 시 육군의 작전을 주관하는 핵심 보직인 작전국장과 전방 38도선에 배치된 4개 사단 중 제6·7·8사단의 3개 사단장이 교체되면서 6 10일자로 임명된 신임 사단장들이 임명날짜보다 늦게 임지에 부임한 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일선 사단장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제1사단장도 당시는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느라 현지에는 부재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새로 부임한 사단장급 이상 일선 지휘관들도 며칠 지나지 않아 대부분이 전쟁발발 바로 전날 밤에 열린 육군 장교구락부 개관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근무지를 떠나 서울로 가 버렸다. 북한군이 공격대기선에 집결을 끝마치고 기습공격을 위한 지형정찰과 마지막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육군 총참모장을 비롯한 고위 장교들과 전방 주요 지휘관들이 연회에 참석해 38도선을 비워 두다시피 함으로써 전방의 지휘계통은 공백상태의 먹통이 되었다.


국군은 바로 그런 상태에서 1950 6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이 감행한 전면기습 공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3 1개월 2일간이나 지속되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참화를 초래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개시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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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elaleuca 2013.12.13 05: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있을 때 육군 총참모장을 비롯한 고 있을 때 육군 총참모장을 비롯한 고 있을 때 육군 총참모장을 비롯한 고

휴전협상 속의 고지쟁탈전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06 14:36

 휴전협상 속의 고지쟁탈전

 

휴전협상은 1951 7 10일부터 1953 7 27일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유엔군과 공산군은 협상 중에도 치열한 전투를 계속 벌였다. 유엔군은 협상 과정에서 주요 쟁점사항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이를 타개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공산군에게 휴전조건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반면 공산군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전력증강을 도모하고, 일부 빼앗긴 진지를 탈환하는 등 군사력 과시를 통한 휴전회담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투를 실시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일면 협상, 일면 전투’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높게 쌓인 협상 기록 옆에서 있는 유엔군 장교.

방대한 기록물은 오랫동안 치열하게 진행된 협상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엔군은 현재 전력으로는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더 이상의 유혈을 방지하고자 회담에 응하였다. 그러나 공산군은 휴전회담을 이용, 진지보강과 전력 증강을 꾀하면서 전쟁에서 달성하지 못한 군사목표를 이루겠다는 흑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회담은 결렬되고 중단되는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휴전협상 중 유엔군은 협상이 결렬될 경우나 유엔군이 요구한 협상조건을 공산군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전투를 재개하였다. 유엔군은 협상 중에도 제한된 목표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적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고지쟁탈전을 택하였다.

 

공산군 역시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엔군 진지 가운데 돌출되어 있거나 취약한 진지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등 고지쟁탈전을 펼쳤다. 결국 쌍방 모두 휴전 협상 후 생길 군사분계선을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고지쟁탈전을 전개한 것이었다.


 

 

휴전회담장을 지키는 북한군.

비무장 지역이어야 하는 회담장을 중무장한 북한군이 둘러싸고 있다.

 

공산군은 서부전선에서는 유엔군의 화력이 강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중동부의 산악지역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중동부 전선은 고지쟁탈전의 격전지가 되었고 351고지(동부), 펀치볼 지역,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수도고지(중부), 저격능선, 백마고지 등에서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벌어졌다.


 

 

치열한 고지쟁탈전

유리한 상황에서 휴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높은 곳에서 제압할 수 있는 감제고지를 먼저 차지하는게 중요하였다.

 

미 제8군은 1951 8월 중순부터 펀치볼 및 피의 능선 지역에서 하계공세를 개시하였는데, 이때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고전하였다. 특히 피의 능선에서는 4×5㎞ 정도의 조그마한 고지를 탈취하는 데 3주나 소비되었고, 인원손실은 3,000명이나 되었으며, 포탄도 4만여 발을 소모하였다. 고지쟁탈전의 피해를 실감한 밴 플리트 장군은 고지쟁탈전을 지양하고 중동부전선에서 대규모의 공세작전을 실시하여 상황을 반전시키려 하였다. 이에 따라 8월 말에 공세계획을 수립해서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게 건의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공산군에게 치명타를 입힐 경우 휴전회담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휴전회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의 지상작전은 승인하였다. 이와 같은 통제로 인해 미 제8군은 기존과 같은 고지쟁탈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고지쟁탈전의 현장들

 

그 결과 한편으로 휴전회담장에서 말로 싸우는 설전(舌戰)을 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 전선에서 휴전 후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라는 혈전(血戰)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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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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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ffordable essay writing 2013.12.23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오거든요.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자국내에서

  2. affordable essay writing 2013.12.23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오거든요.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자국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