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6·25'에 해당되는 글 485건

  1. 2013.12.03 운산의 비극 (운산지역전투)
  2. 2013.12.02 노블레스 오블리주 (2)
  3. 2013.11.28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다 (국경선으로의 진격)

운산의 비극 (운산지역전투)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03 14:26

운산의 비극 (운산지역전투)

 

 

이 전투는 10 24일부터 11 5일까지 청천강 북방 운산 일대에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중공군 포로를 최초로 생포하여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이 확인되었으나, 중공군의 참전을 믿지 않고 총공세를 감행하다가 미 제1기병사단의 1개 대대가 중공군에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최초로 중공군 포로를 생포하다

1024일 청천강을 도하한 미 제8군의 좌익 군단인 미 제1군단의 미 제24사단(영연방 제27여단 배속)을 좌측사단으로 구성-신의주 방면으로, 국군 제1사단을 우측사단으로 안주-운산-수풍을 향하여 각각 진격하고 미 제1기병사단을 예비로 평양에 잔류시켜 놓고 있었다.



 




국군 제1사단은 10 25일 아침 일찍 용산동을 출발, 운산을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선두의 제 15연대가 여기저기 분산되어 해주하는 북한군 패잔병을 소탕하며 운산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날 미 제8군은 새로운 적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승리를 목전에 두었던 전선의 상황은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날 국군 제1사단 장병들은 이제 적유령산맥을 지나 강남 산맥을 돌파하면 최종목표인 압록강에 도달하게 된다는 승리의 기쁨과 흥분 속에 들떠 있었다.




국구네 사로잡힌 중공군 포로

 

15연대는 사단의 우측에서 상탄천 계곡을 따라 북서진하고 제12연대가 사단의 좌측에서 남면천 계곡에 연하여 서진하며, 11연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제15연대는 미 제6전차대대 D중대의 전차를 앞세운 선두가 막 상탄천(운산 북쪽`km)을 건너 조양동으로 들어서는 순간 북쪽 고지로부터 치열한 집중 사격을 받았다. 급히 도로 양쪽으로 산개하여 대응사격을 하던 연대는 40여 분이 지났을 때, 낯선 군복차림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 1명의 적을 생포하였다. 중공군이었다. 그가 625전쟁에서 잡힌 중공군 포로 제1호였다. 이때가 정확히 10 25 11:44이었다.

 

이 포로는 운산과 희천 북방에 2만여 명의 중공군이 대기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진술하였다. 그 내용은 당시 미 제8군의 정보판단과는 너무나 차이가 많았다. 중공군의 참전 사실은 지휘관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사태의 중대성을 감안한 사단장은 즉시 이를 밀번 미 제1군단장에게 보고하였다.

 



백선엽 국군 제1사단장과 밀번 미 제1군단장.

백선엽 준장은 제2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가 전황이 급박해지자 다시 사단장으로 복귀하여 작전을 지휘하였다.


이날 오후 벌어진 격전에서 제15연대는 또 다른 중공군 포로 3명을 생포하여 평양으로 이송하였다. 중공군 제39군 예하 제 115, 116, 117사단이 운산 주변 야산에 불을 질러 그들의 기동을 은폐하면서 국군 제1사단 정면을 공격하였으며, 이에 따라 제12연대는 운산 서쪽에서 진격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미 제1군단은 좌측 미 제24사단의 진격이 순조로운 데다 우측의 국군 제1사단 정면에 출현하였다는 중공군도 북한군을 증원하기 위해 투입된 소규모일 것으로 가볍게 판단하고 이날 16:00시를 기해 압록강을 목표로 총공격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좌측의 미 제24사단이 안주를 거쳐 박천을 향해 진격을 계속하고 있을 때, 국군 제1사단은 진격은 고사하고 현 전선의 유지도 힘겨울 정도였다. 전투는 밤새도록 계속되었으며, 좌측의 제12연대는 그런대로 진지를 확보하였으나 우측의 제15연대는 가중되는 적의 압력을 못 견디고 뒤로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사단이 가장 우려한 상황이 벌어졌다.

 

사단 예비인 제 11연대로 전방을 증원하기 위해 이동시키고 있을 때, 사단의 좌측으로 우회한 중공군이 운산-용산동 일대의 도로를 차단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1연대를 다시 뒤로 돌려 이를 격퇴하려 하였으나 연대가 오히려 운산 쪽으로 밀리기 시작하였다.

 

10 27일 날이 밝자 상황은 약간 호전되었다. 10대의 C-119 수송기로 탄약을 공중보급 받은 사단은 운산 북쪽과 서쪽에서 제 15, 12연대가 각각 2~3km씩 진출하였고, 사단예비인 제11연대도 운산-용산동 도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10 28일 운산 정면에서는 또 다른 2명의 중공군을 생포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미 제8군은 중공군은 전면개입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판단을 토대로 미 제8군은 미 제1군단에게 군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수풍댐으로 진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중공군에게 포위된 미군 1개 대대연대

10 29일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가 운산으로 진출하고, 그 뒤를 이어 10 30일 제 5기병연대가 용산동에 도착하자, 8기병연대는 이날 국군 제1사단 15연대의 전선을 인수하기 위해 전방으로 진출하였다.

 

10 31일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가 운산으로 진출하고, 그 뒤를 이어 10 30일 제5기병연대가 용산동에 도착하자, 8기 병연대는 이날 국군 제1사단 15연대의 전선을 인수하기 위해 전방으로 진출하였다.

 

10 31일 미 제8기병연대 제2,3 대대는 운산 서쪽 3km인 남면천을 감제할 수 있는 300m 내외의 고지군에 배치된 국군 제12연대의 진지를 무난히 인수하였으나, 운산 북쪽에서 격전 중인 국군 제 15연대 제2대대의 진지를 인수하게 된 미 제8기병연대 제1대대는 상황이 여의치 못해 그 후방에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였고, 16:00시에 국군 제15연대 2대대가 미 제8기병연대 제1대대가 점령한 진지를 통과해 철수함으로써 진지교대가 완료되었다.

 




미 제1기병사단장

호발트 케이 소장




미 제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




이로써 운산의 서측에는 미 제8기병연대으 3개 대대가, 그 동측에는 국군 제15연대의 제1,3대대가 각각 배치되었다. 미군에게 진지를 인계한 국군 제12연대는 입석으로 철수한 후 재편성에 착수하였으며, 사단 예비인 국군 제11연대는 동쪽으로 전진하여 우측 국군 제8사단과의 연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간격은 다음날 11 1일 미 제5기병연대의 1개 대대가 구장동에 이르는 도로의 중간지점까지 진출해서 연결하였다.

 

한편 미 제24사단은 신의주를 불과 30km밖에 남겨 놓지 않은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청천강 계곡을 따라 원리로 진출한 중공군 제38, 40군이 원리를 돌파, 안주로 진출해 미 제8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였다.

 

11 1일 오후에는 운산에서 후방으로 연결되는 2개의 도로 중 운산-용산 간의 도로가 중공구넹 의해 차단되고 운산-입석-영변에 이르는 도로만 남게 되었다.

 




우회하고 있는 중공군들



미 제1군단장은 11 1 20:00시에 안주에서 사단장회의를 소집하여 운산의 국군 제15연대와 미 제8기병연대는 즉시 용산동 영변 도로로 철수해 청천강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고 미 제24사단은 청천강 북쪽에서 우군으 ㅣ철수를 엄호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날 23:00시에 철수명령을 받은 제8기병연대는 자정이 넘어서야 철수를 개시하였다. 운산 남쪽 2km 지점에서 용산동과 입석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철수통제지점으로 선정한 미 제8기병연대는 제2,1,3대대 순으로 철수하려 하였으나 최남단의 제3대대를 제외한 제2,1대대는 철수명령이 하달되기 2시간 전부터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느라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이리하여 제1대대는 운산에서 분산되어 20~30명씩 집단을 이루어 입석으로 철수하였으며, 2대대와 이를 지원하던 지원표병 1개 포대 및 전차 1개 소대는 운산 남단에서 중공군의 매복공격을 받았으나 입석까지 무사히 철수하였다. 하지만 제 3대대는 끝내 중공군의 포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고립되고 말았다. 운산 남쪽 3km 지점에 위치한 제3대대 본부 옆 도로상에는 11 2 03:00시 현재 대대의 모든 차량이 남쪽을 향하여 줄을 지어 늘어선채 전방 고지로부터 철수 중인 소총중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무렵 운산 남서쪽 4km 지점인 구룡강 강변 상초동에서 교량을 경비 중이던 M중대 2개 분대외 미 제70전차대대 소속 1개 전차소대는 국군으로 보이는 1개 중대 규모의 부대가 그들 옆을 통과해 북상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국군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대본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은 채 이들을 통과시킨 것이 종래는 커다란 불행을 자초하고 말아다. 철수준비를 완료하고 전방 소총중대들의 철수를 기다리던 제3대대는 얼 마 후 이들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국군이 아니라 중공군이었다. 날이 채 밝기전인 데다 동양인들을 잘 분간하지 못한 데서 생긴 잘못이 그토록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비규환 같은 처절한 공방전이 전선으로부터 마지막 소총중대가 철수할 때까지 약 1시간 반동안 계속되었다.

 

날이 밝았을 때는 부상병 170명을 포함한 병력 370명과 전차 3대가 남았을 뿐이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미 제7기병연대의 1개 대대를 미 제5기병연대(-)에 배속하여 미 제8기병연대 제3대대를 구출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끝내 적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였다. 이날 오후 늦게 미 제1군단장은 미 제1기병사단장에게 구출을 포기하고 즉시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미 제8기병연대 제3대대 병력들은 중공군의 포위 속에서 2일을 더 버티었으나 80명의 사망자만 더 냈을 뿐 포위망을 돌파하는데는 실패하였다. 11 4일 오후 늦게 그곳에 남아 부상병들의 간호사를 자청하고 나선 군의관과 250명의 부상병들을 남겨 놓은 채 나머지 대대 장병 200여 명은 야간을 이용,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구룡강을 건넜다.

 

운산전투에서 미 제8기병연대 제3대대는 600명 이상이 전사하고 장교 10명을 포함한 약210명의 장병만 생존하였다.

 

11 2~3일 기간 중 청천강으로 철수한 유엔군은 이곳에서 새로운 방어진지를 점령하였으며, 계속 유엔군의 뒤를 추격하던 중공군 제38, 39 및 제40군도 군우리 박천지구에서 각각 남하가 저지됨으로써 11 5일을 기하여 점차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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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02 15:44

노블레스 오블리주

 

626전쟁 때 국군은 130만여 명이 참전해 62만여 명의 손실을 입었다. 또 학도의 용군을 비롯해 많은 무명용사가 조국을 위해 장렬히 산화했는가 하면 고급 장교들도 조국 수호와 통일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채병덕 장군김백일 장군




이용문 장군, 밤범집 장군,




 

채병덕 육군 소장, 김백일 육군 소장, 이용문 육군 준장, 박범집 공군 준장은 장군 신분으로 전사해 1계급씩 추서됐다.

 

함준호(연대장), 김현수(육군 보도과자), 이상근(수도사단 참모장), 권태순(연대장), 박노규(연대장), 안병범(청년방위대 수도방위 고문단장), 김용배(연대장), 전성호(장사동상륙작전 시 전략 고문), 권동찬(연대장), 이근석(비행단장), 김영환(비행단장) 등은 계급으로 전사해 장군으로 추서됐다.

 

625전쟁 때 군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울 수 있던 힘은 광복 5, 건국 2년도 안 돼 나라를 다시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공에 기초한 애국심에서 우러나왔다.

 

이의 중심에서 장교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부자, 장인과 사위, 형제, 처남과 매부, 동서로 맺어진 장교들의 역할이 돋보였다.

 

부자지간으로 김기원(육군 준장 예편) 장군과 김정렬(공군 준장 예편 공군 총참모장 역임) 장군 및 김영환(공군 준장 추서) 장군, 이응준(육군 중장 예편 육군 총참모장 역임) 장군과 이창선(육군대령), 신태영(육군 중장 예편 육군 총참모장 국방부장관 역임) 장군과 신응균(육군 중장 예편) 장군, 유승열(육군 소장 예편) 장군과 유재흥(융군 중장 예편 국방부장관 역임) 장군, 김석원(육군소장 예편) 장군과 김영국(육군 소령 예편), 원용덕(육군 중장 예편 헌병 총사령관 역임) 장군과 원창희(육군 중장 예편) 장군, 안병범(육군 대령 자결 육군 준장 추서) 장군과 안광호(육군 중장 예편) 장군이 있다.

 




김정렬 장군과 김영환 장군




신태영 장군과 신응균 장군




유승열 장군과 유제홍 장군 그리고 원용덕 장군






장인과 사위로는 이응준 장군과 이형근(육군 대장 예편 육군 총참모장 역임) 장군, 백홍석(육군 소장 예편) 장군과 채병덕 장군이 있다.

 

형제로는 백선역(육군 대장 예편 육군 총참모장 역임) 장군과 백인엽(육군 중장 예편 군단장 역임) 장군, 이형근 장군과 이상근(육군 준장 추서) 장군, 김계원(육군 대장 예편 육군 참모총장 역임) 장군과 김계일(육군 소장 예편) 장군, 강문봉(육군 중장 예편 2군사령관 역임) 장군과 강태봉(육군 대령 예편), 박영석(육군 준장 예편) 장군과 박경석(육군 준장 예편) 장군이 있다.





이형근 장군


 

처남과 매부롯는 김응수(육군 소장 예편 - 6군단장 역임) 장군과 강영훈(육군 중장 예편 육사교장 역임) 장군, 김용배(육군 대장 예편 육군 참모총장 역임) 장군과 김종면(육군 준장 예편) 장군이 있다. 이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명문가들이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였다.

 

한편 6,25전쟁은 미국의 전쟁이라고 할 만큼 178 9,000여명이 참전해 많은 피를 흘렸다. 미군은 전사 3 6,940, 부상 9 2,134명 등 13 7,250명의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는 미국 최고 명문대학인 하버드대학교 학생 20여 명도 포함돼 있다.

 

이는 미국이 참전한 4개 전쟁의 전-사상자 비율과 비교할 때 가장 높다. 미군은 한국전에서 9명 중 1, 2차 세계대전 때에는 13명 중 1, 월남전에선 17명 중 1, 걸프전에선 5,000명 중 1명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625전쟁 때 미군 장군의 아들이 많이 참전하였고, 고급 지휘관이 희생되었다. 아이젠하워 원수를 비롯하여 장군의 아들 142명이 참전, 그 가운데 35명이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는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장군, 미 제8군사령관 웤커 장군과 밴 플리트 장군, 미 해병항공사단 해리스 장군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공군 중위로 전략폭격기 조종사였던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작전임무 수행 중 실종됐고,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아들은 보병중대장으로 중상을 입고 입송됐으며, 미 해병항공사단장인 아들 해리스 소령은 해병대대장으로 장진호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밴 플리트 장군과 그의 아들


 

고급 지휘관 중 마틴 미 제34연대장은 천안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워커 미 제 8군사령관(교통사고)과 무어 미 제9군단장(헬기 사고)은 사고로 순직하였다.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대전전투 당시 실종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625전쟁 때 한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강한 애국심과 반공에 기초한 국가 수호 정신, 미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시민사회의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도덕적 의무로 나타났다





무어 장군 추모비 (경기도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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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enapro review 2013.12.09 18: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에서 달성하지 못한 군사목표를 이루겠다는 흑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회담은 결렬되고 중단되는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2. 이강수 2013.12.16 0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용상 오류에 대한 지적으로 단 댓글 지우지 마시고, 내용을 수정하세요...
    626 전쟁이 아니라 625전쟁이고, 백선역 장군이 아니라 백선엽장군이고 띄워쓰기 에도 신경을 써주세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다 (국경선으로의 진격)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1.28 14:13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다 (국경선으로의 진격)

 

1950 10월 하순 북한의 수도 평양을 탈환한 유엔군 지휘관들은 마치 전쟁이 끝난 것처럼 기쁨에 들떠 있었다. 미 육군부와 도쿄의 유엔사령부는 한반도 전쟁에 참가한 미 제2사단을 유럽으로 전환할 계획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심지어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한국에 반입될 모든 탄약을 앞으로는 일본 보급창으로 전환시켜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

10 24일 미군의 총공격 명령은 늦어도 추수감사절 (1950 11 23)까지는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미로 추수감사절 공세라고 불렀다. 이에 북진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각급 부대는 일제히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한 진격에 더욱 매진하게 되었다.

 


평양탈환 환영대회에서 환호하는 시민.



그 무렵 뉴욕 타임스의 사설은 - 만 국경에서 불의의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이 전쟁의 승리는 약속되어 있다.” 고 언급하였다.

 

 

통일의 부푼 꿈을 안고

평양을 우회하여 순천에 진출한 국군 제2군단은 10 21일 오전 6시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를 선두로 개천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파죽지세로 공격하는 국군 앞에 북한군은 부상자와 낙오병을 버리고 도주할 뿐만 아니라 주요 장비를 파괴하지 않은 채 대로상에 유기하였으며, 심지어 식사를 준비해 놓고도 정신 없이 달아났다. 거리 이곳 저곳에 붙은 강계로 집결하라는 다급한 벽보가 그 실상을 말해 주었고, 북한정권 간부들의 가족인 것 같은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노변 수수밭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러나 연대가 당일 중으로 개천에 진출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하였다.

 


압록강과 두만강오르의 진격상황도

 


이때 제3대대장(중령 인성관)은 패주하고 있는 북한군의 중앙을 돌진하여 개천으로 직행하고, 만일 적이 사격하지 않으면 사격하지 말고 무조건 전진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제3대대는 북한군을 향해 전쟁은 끝났다. 총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라고 외치며, 북한군 사이로 과감하게 돌진하였다. 이러한 위세에 눌린 북한군은 대부분 총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이로 인해 제3대대는 한 차례의 총격전도 없이 개천을 무혈점령할 수 있었다.

 


북진 중 찾아낸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환호하는 유엔군 병사.

 

오후 9 30분경, 국군의 개천점령 사실을 모른 채 보급품을 가득 싣고, 전차까지 적재한 북한군의 열차가 북상하고 있었다. 이들을 향해 국군이 사격을 가하자 기관사와 호송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버렸다. 당시 국군 병사들은 하계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노획한 북한군의 복장을 착용하였고, 이 때문에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곤란할 정도였다. 그러나 땀에 찌들고 다 해진 여름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으라고 강요할 수 없어 누구도 이를 통제하지 않았다. 그 후 개천에 도착한 국군 제6사단 후속부대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벌어져 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으로부터 보급을 받는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청천강을 도하하는 국군과 유엔군,



최근의 청천강의 모습

 


3대대가 개천을 점령하자 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제1대대로 하여금 제3대대를 초월하여 희천을 탈환하라고 명령하였다. 얼마 후 대대는 청천강 도하지점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교량이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수심이 얕은 하류를 택해 도섭하는데, 이곳을 통과하던 북한 고급관리 및 인민군 차량이 미 공군의 폭격으로 강물 속에서 파괴되어 통로가 막혀 있었다. 거기에는 고급승용차 22대를 비롯하여 일산 트럭과 미군 트럭 등 100여 대의 차량이 즐비하게 버려져 있었다. 이 노획 차량 가운데 승용차는 일반 시중에서는 보기 드문 고급 세단이었다.

 

청천강 도하지점에서 북한군이 버리고 간 차량을 노획하여 전 부대가 차량화가 된 국군 제 7연대 제1대대는 북한군 제18사단의 일부 패잔병과 교전 끝에 10 23일 희천을 점령하였다.

 



당시 노획한 승용차(항공우주박물관 소장)



국군을 환영하는 청천강변 화천의 주민들


 

이 무렵 연대본부에는 태천 부근에 중공구니 출현하였다는 소문이 들어왔고, 이 지방 주민들의 동요가 있는 듯 보였으나 연대장은 이를 공산분자 들의 역선전으로 일축하고 오직 국경선으로의 진격을 위한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7연대는 10 26일 오전 7시에 압록강을 향해 진격을 개시하였다. 첫눈이 내려 산하가 하얗게 뒤덮인 가운데 차량에 탑승한 제7연대 제1대대가 초산을 향해 질주하였다. 초산 남쪽 6km 지점에서 돌입하였다. 그러나 시가지는 텅 비어 있었고 압록강은 보이지 않았다. 초산읍에서 압록강까지는 6km를 더 가야 하였다. 대대는 국경선을 향해 신속히 이동하였다. 신도장 일명 양토동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압록강의 푸른 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압록강이다!” 너나없이 환성이 터져 나왔다. 10 26일 오후 2 15분 국군 제6사단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압록강에 다다라 강변에 태극기를 꽂고 수통에 압록강의 푸른 물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패주하는 북한군의 모습 뒤로 아직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중공군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새로운 적과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그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채 그들이 파 놓은 함정에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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