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말고개의 북 전차 섬멸전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11.08 09:17

 1950년 춘천 방면에서 국군 6사단 7연대의 선전[善戰]에 졸렬한 전투를 했던 북한군 2사단을 제치고 춘천을 맹공하여 점령한 부대는 북한군 7사단이다. 당시 북한군 7사단의 정보장교로 참전했던 중국 동포 김동욱 씨는 아득한 젊은 시절, 그의 부대가 남하하던 때를 아래와 같이 회상했다.

 북한군 7사단은 모두 중국 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강한 사단이었다. 중국 내전이 끝난 후 모택동에 의해서 김일성에게 선사된 조선족으로 구성된 정예 사단이었다. 7사단은 안동 점령후 사단 호칭을 12사단으로 바꾼다. 북한군 7사단의 그의 연대는 춘천 점령 부대가 아니라 양구를 점령하고 남으로 침공해 내려온 부대였다. 중국 동포 어르신 분의 심한 사투리의 녹취한 말을 그대로 옮겨 문장이 어색하지만 잘 보시기 바란다.

 이 일화를 채집한 정현수 씨가 남한 침공시 어느 전투가 제일 치열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김동욱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T-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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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과 춘천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에서다. 그 사람들을(국군을 말함) 포로로 붙잡아서 심문하니까 다 철거(장비를 다 버렸다는 뜻)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부대가 해체 되었다는 말) 자신(국군 포로)들만이 꼴이 되었다고. 그래도 백골 부대인지 정말 대단했다. (부대원들이 자신들에게 포로가 되었지만 백골 부대가 매우 용감했다는 말을 하는 것, 여기서 말하는 백골 부대는 춘천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준 6사단을 잘못 오해한 것이며, 이 때는 유명한 3사단 18연대-백골 부대가 탄생하기 전이다.)

 홍천을 지나서 원주 제천 쪽에 대마우 고지라고 있었는데, 우리가 그 고지를 못 올라가서 전차 부대와 소련제 오토바이 부대, 자동포 11대(자주포, SU-76) 까지 동원해서 대마 고개까지 올라가다가 백골 부대에게 격파 당했다. 당해 낼 재간이 없어서 다 파괴당하고 마지막에 젊은 사람은 다 도망쳤다.(북한에서 모집한 신병들을 말하는 듯. 중국 내전에서 실전을 풍부하게 겪은 조선족 병사들은 북한 출신 병사들을 조선병이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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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북한군 소속 한국전 참전 노병이 되게 당했다는 전투는 어디서 어떻게 싸운 전투일까? 

 한반도의 중부 전선인 가평-춘천-양구 전선에서 싸운 국군 6사단은 춘천 지역에서만 잘 싸운 부대가 아니었다. 6사단의 춘천 지역 방어전투는 임부택 중령의 7사단이 했지만 양구 지역 방어전투는 함병선 중령의 2연대가 담당했었다.

[SU-76]



 6사단의 3개 연대 중에 예비 연대로서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19연대는 원주에 주둔하고 있다가 급한 전황의 춘천으로 배치되었지만, 춘천 철수 결정으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었다.

 양구 전선에서부터 적에게 타격을 주며 철수해 오던 6사단 2연대는 지역 방어형 지연 전술보다는 후방의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여 적에게 섬멸적 반격을 하기로 하고 홍천 북방 말고개로 철수해서 방어선을 폈다. 때는 이웃 연대인 7연대가 춘천에서 잘 싸우고 철수한 1950년 6월 28일이었다.

 6사단 2연대가 말고개에 방어선을 폈을 때 6사단 19연대가(연대장 : 민병권 대령) 증원되어 고개 건너편 사면에 배치되었다. 긴 말고개 양 쪽에 두 개 연대의 전차 공격조가 적 전차를 대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말고개에서 내려오는 북한군 7사단 전차 부대를 협격한 6사단 2연대(분홍색) 와 6사단 19 연대(청색)의 부대 배치도]



 두 연대 모두 전차 특공조를 편성해서 전차 공격에 대한 연구와 훈련을 했었다. 유감스러웠던 것은 두 연대 사이에 긴밀한 연결과 협조 방법이 강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나중에 포상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양구로 내려온 북한 7사단 연대는 아직도 홍천을 점령하지 못한 것 때문에 힐책을 받았던지 6월 28일에는 전차와 자주포(SU-76), 야포 등 가용한 전투력을 총동원하여 결전을 시도하였다.

 말고개의 잠복하고 있었던 국군은 지시를 오해한 2연대의 57mm 포가 미리 철수하는 등 혼란이 있으나 적 전차의 고개 진입 전 무사히 원위치하고 적을 대기하였다. 마침내 적 전차 부대가 고갯길을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때 고개 입구 일대를 담당한 제 8중대장 서봉호 중위는 도로를 파서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한 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을 보고 진두에 뛰쳐나가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차 포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고갯길로 올라온 전차는 사실은 SU-76이다. 그러나 증언을 존중하여 그냥 전차라고 쓴다.)

 제 8중대 전투 지대를 통과한 적 전차는 쏟아지는 포화와 수류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첫 번째 굴곡 지점을 돌아섰다.

[57mm 대전차포]



 그 찰나 대기하고 있던 57mm 대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적 전차에 명중한 철갑탄이 튕겨 나갔다. 적 전차는 꿈쩍도 하지 않고 전진해 왔다. 사수는 다급해졌다. 제 2탄, 제 3탄을 연거푸 발사했다. 그러나 3탄을 발사한 직후 적 전차가 반격한 첫 탄에 57mm 포는 배수구에 처박히고 사수는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다가 그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잠복한 국군 병사들은 공포감이 들었다. 첫 포를 제거한 북한 전차는 거침없이 고개를 계속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만일 적 전차가 아군의 마지막 대전차 방어선인 고개의 두 번째 구비진 곳을 통과한다면 그 이남에는 이들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도 없거니와 방어 배치 또한 없기 때문에 적은 홍천까지 단숨에 진출 할 수가 있게 된다. 제 2연대 대전차중대 제 2소대 1분대장 김학두 일등 중사는 57mm철갑탄을 장전했다. 그 50m 전방 구비진 도로변 배수로 속에는 제 19연대 전차특공대원 조달진 일병이 수류탄을 움켜쥐고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적 전차는 점점 다가왔다. 

 먼저 공격한 사람은 대전차포의 김학두 사수였다. 그는 방앗끈을 잡아 당겼다. 그는 결과를 확인하기 전에 연달아 2탄, 3탄의 고폭탄을 발사하였다. 선두 전차는 첫 탄에 측면이 관통되어 급정차하였으며 두 번째 전차가 그 뒷면에 충돌하였다.

 이때 길 옆에 잠복하고 있던 조달진 일병이 쏜살같이 1번 전차로 뛰어 올라가 수류탄을 던져 넣고 도로 좌측 벼랑 밑으로 굴러 떨어졌으나, 중간에서 나뭇가지에 걸려 목숨을 건졌다. 대전차 포탄에 의한 것인지 내부에서 조달진 일병이 던진 수류탄 덕분이었는지, 적 전차는 굉장한 폭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김학두 일등 중사는 계속 2번 전차 측면에도 명중탄을 퍼부었다.

 적 전차 대열은 선두차가 파괴되자 모두 정차하였다. 이 때 길 옆에 잠복한 병사 한 명이 3번 차에 뛰어 올라 수류탄을 던져 넣어 승무원을 몰살시켰다. 후속하던 4번 차는 이것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화양강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하여 수류탄 한 방에 전차 두 대를 잡았다는 소문이 제 2연대 장병들 사이에 자자하게 되었다.

 전차 행군 대열이 정지하자 후미차부터 뒤로 빠져 나가기 위해서 전차장이 전차 햇치를 열고 뒷면을 살피고 있었다. 이때 그 10여 미터 떨어져 있던 좌측 능선(19연대) 위에 배치된 아군이 발사한 2.36인치 로케트 포탄 한 발이 햇치 안에 정통으로 들어가 터지면서 불길을 내뿜었다. 이리 하여 적 전차 10여량은 좁고 굴곡이 심한 언덕길 중턱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게 되고 말았다.

 고개 양쪽에 매복한 국군 장병들은 힘찬 함성을 지르며 적 기갑부대 행렬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가 돌격하는 장병들을 덮어버려 이들을 대담하게 만들었다. 제 2연대와 제 19연대 병사들이 뒤범벅이 되어 수류탄을 던지고 앞을 다투어 전차에 올라탔다. 

 북한군 전차병들은 너무 놀라 도로 옆 벼랑으로 뛰어 내려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2연대 장병들은 적 전차는 소련군이 직접 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 2번 전차에서 죽은 전차장(대위-중대장)의 시체를 검사한 결과 북한군임이 밝혀졌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분열중인 SU-76]



 이 전차 몰살전을 50m 이내의 거리에서 지켜본 지역의 정춘옥 방위 소위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이 때 민병대 수준의 호국군이라는 조직이 지역마다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방위 소위는 이 조직의 소위를 말한다.)

 "57mm 포 첫 탄이 명중하자 선두 전차가 정지했다. 승무원이 햇치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한 병사가 자주포 뒷면으로부터 뛰어 올라가 수류탄을 던져 넣고 사라졌다. 전투가 끝난 직후 나는 현장으로 달려가 보았다. 1번차는 우측면에 포탄이 관통한 구멍이 나 있었고 승무원은 새까맣게 타 죽어 있었다.

 그리고 1, 2, 3번 차는 후방 출입문이 있는 전차(SU-76)였고, 화양강에 굴러 떨어진 것은 좀 크고 형태도 다르며 포신 또한 길어보였다(T-34전차). 그러나 5번 차 이후의 것은 확인하지 못했다. SU-76 내부에는 그들이 남침한 뒤 마을에서 약탈한 혼수감으로 보이는 비단 옷감이 가득 실려 있었다"

[57mm 대전차 포 - 영국 6파운드 포를 개량한 것이다.]



 춘천에서 북한군의 남침 첫 날 옥산포에서 적 대군을 포병으로 분쇄시킨 6사단 18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은 노획한 전차를 활용해 보려고 전차 안에 들어가 포와 내부 조종 장치를 살펴보았으나 그 조작 방법을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아까운 일이었지만 적 전차를 포기하고 파괴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 2연대에 배속된 사단 공병대대 제 2중대[중대장 백 수욱 대위]는 불에 타지 않고 도로 위에 서있는 전차마다 폭약을 장치하여 이를 폭파시켰다.

 그러나 두꺼운 장갑 때문에 완전이 파괴된 것은 그 중의 약 반수에 지나지 않았다.

[말고개 입구에서 전차 특공조에게 섬멸된 북한 T-34전차와 사살당한 북한 전차병들]



 말고개의 전차 섬멸전이야 말로 개전 이래 국군이 한 장소에서 올린 최대의 적 기갑부대 섬멸 전과였다. 이로 말미암아 적의 홍천 점령이 이틀이나 지연됨으로서 춘천 방어 전투 이래 두 번째로 적 2군단 작전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하였던 것이다.

 이 말고개 전차 섬멸전에서 공훈을 세운 장병들에게 훈장과 특진이 후한 포상이 주어졌다. 첫 공훈을 세운 조달진 일병에게는 미 정부에서 동성 훈장이 주어졌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말고개 전투는 우리 전사에서 상당히 저평가 되는 느낌이 있다.

 글의 서두에 소개했던 북한측 참전 노병은 치열한 춘천 전투의 전투 참가자다. 그런 분이 북측이 최대로 참담한 피해를 본 전투로서 춘천 전투보다도 이 말고개 전투를 회상한 것이 그 저평가를 오류를 지적해준다. 

 한반도 중부 방어를 책임진 6사단 7연대(연대장 임부택)가 춘천 방어에서 대단한 전투력을 발휘했었다. 춘천 전역에서 철수한 직후 충주 동락리에서 거둔 대승리가 7연대의 명성을 한층 드높이게 했다. 그 우측 양구 쪽을 담당한 2연대(연대장 함병선)나 예비였었던 19연대(연대장 민병권)는 그 전공이 별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 말고개에서 불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적이 남침에서 도깨비 방망이로 휘둘러 우리 국군의 방어선을 유린하던 기갑부대를 좁은 산 고개에서 변변한 대전차무기도 없이 10량을 파괴한 것은 대단한 전공인 것이다. 더해서 말고개 전투는 3년간의 6ㆍ25전쟁이 현재 한국 육군 기갑교리 발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한 교훈, 즉 “좁은 산길에 기갑부대 투입하지 말라.”는 원칙을 강조해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다.

 좁은 산길에 미군의 기갑 부대가 들어갔다가 큰 피해를 본 경우는 1950년 10월 평북 군우리나 운산, 그리고 장진호 전투가 있다. 북한도 서울 침공의 주범 105전차 여단의 전차 38량과 자주포[SU-75] 7량, 트럭 117량이 1950 년 7월 11일 평택 남쪽의 야산 좁은 길에서 미 공군의 공격으로 선두와 후미의 전차를 공격당해 전진 후퇴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섬멸당한 전례가 있고,

 1950년 8월 11일 해병대의 공격에 쫓겨 경남 고성에서 사천 쪽으로 도주하던 적 105전차여단 83기계화연대 소속 45량의 트럭과 55대의 모터 싸이클이 역시 해병대의 F-4U 콜세어 전투기에게 선두와 후미를 파괴되고 도로에 즐비하게 늘어서서 섬멸당한 전례도 있다.

 서울 북방에서만 대전차 수단 없는 한국군에게 힘을 발휘하였던 북한군 105전차여단의 사령관 류경수는 김일성 부인 김정숙의 여동생 남편으로 김일성과 동서지간이었다. 그는 내내 위와 같이 두들겨 맡는 기록을 세웠었다. UN 군의 인천상륙작전 뒤 류경수는 전차를 타고 북상 탈출을 시도하다가 조치원에서 퇴로가 막히자 전차를 버리고 산으로 해서 북으로 도망쳤다.

 그의 초라한 전적은 견책의 대상이지만 중공군 개입후 군단장으로 승진하여 한국 전선에 다시 나타났다. 17세부터 김일성의 충실한 졸개 노릇을 열심히 했었고 혈연적으로 믿을만한 동서였던 덕택이었다.

 개인적으로 6ㆍ25전사의 피아 기갑 부대 운용의 전례는 한국 기갑이 좀 더 한국적인 기갑 전술, 즉 기갑 공병의 중시, 보전 합동의 전술 숙지, 자주 박격포와의 합동 작전 등을 포함한 전술 개발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끝//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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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했던 기억 그러나 과하였던 순간, 평양탈환(1/2)

생생! 6·25/6·25전쟁 10대전투 2011.06.30 14:48

 불과 보름 전까지 한반도의 최남단인 낙동강을 방패삼아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급급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는 어느덧 사라져 버렸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면서 38선 인근까지 다가간 아군은 이곳을 넘어 북으로 내달리기 위해 조바심을 낼 정도로 상황은 반전되었고, 마침내 10월 1일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38선을 넘은 것을 신호탄으로 역사적인 북진이 개시되었습니다.

<감격스러운 38선 돌파를 기념하는 국군 3사단>

 인천상륙작전으로 우리를 위협하던 북한군 주력의 대부분은 배후가 차단당한 체 붕괴되어 아군을 막을 적대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행군속도가 바로 북진속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빠르게 북으로 진격하였습니다. 그 당시 아군이 한만국경인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나고 북진의 최종 목표인 통일은 달성될 것으로 모두가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8선에서 한만국경까지 가는 중간에 북한의 수도인 평양이 놓여 있습니다.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로 진격하고 있는 미 8군에게 이곳을 탈환하라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적국의 수도 점령은 단지 하나의 도시를 점령하는 행위일 뿐이며 승전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지만 정치적인 상징성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북한도 개전 초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면서 이러한 선전효과를 톡톡히 누렸습니다.

<평양 비행장으로 맥아더를 영접 나온 워커>


 따라서 미 8군을 이끌던 워커(Walton Walker)는 물론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도 패주중인 북한의 전쟁 의지를 꺾고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최대한 빨리 평양을 탈환하도록 예하부대를 재촉하였습니다. 당시 미 8군은 미 1군단, 미 9군단, 국군 2군단으로 구성 되었는데 미 1군단과 국군 2군단이 각각 전선 좌우를 담당하며 북진하였고 미 9군단은 아직 38선 이남에 머물며 후방작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아군의 진격여건상 평양 탈환은 미 1군단 관할이었는데 당시 군단은 미 1기병사단, 미 24사단, 국군 1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선봉은 기동력이 가장 좋은 미 1기병사단이 담당하여 10월 4일, 38선을 돌파한 후 경의가도 본선이라 할 수 있는 개성-금천-사리원을 거쳐 평양에 다가갈 예정이었습니다. 이때 미 1기병사단을 후속하여 우측에서 조공의 역할을 담당하며 북진에 참가한 부대가 국군 1사단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평탄한 경의가도를 이용하여 평양으로 진격하던 미 1기병사단>


 국군 1사단은 공격 우선순위에 밀려 10월 11일에서야 38선을 넘었고 대부분 행군에 의존했을 만큼 기동력도 부족한 상태로, 험악한 신계-수안-율리를 거쳐 평양으로 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적의 심장부를 우리가 먼저 점령하겠다는 굳은 의지와 신념이 있어 그 속도는 가공할 수준이었습니다. 미군이 금천에서 고전하는 틈을 타 국군 1사단은 앞으로 내달렸고 이후 평양 선점을 향한 한미양국군의 경쟁은 치열하였습니다.

 10월 19일 거의 동시에 미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은 대동강에 다다랐는데, 국군 1사단 예하 12연대가 미군보다 조금 빨리 선교리를 점령함으로써 제일 먼저 東평양을 점령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도주를 완료한 북한은 대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하였고, 평양(本평양 또는 西평양)에 입성하려면 강을 도하하여야 했습니다. 장비가 좋았던 미군은 지체 없이 부교를 가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양 진입을 준비 중인 국군 1사단>

 자칫 눈앞에 두고도 평양 선점을 미군에게 빼앗길 수 있는 순간이었는데, 바로 그때 국군 1사단은 그대로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양 인근 출신인 사단장 백선엽에게 대동강은 어릴 때부터 물놀이를 하던 곳이어서 얕은 곳을 잘 알고 있었고, 그곳을 도섭지점으로 삼아 급속도하를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하 15연대가 미군보다 하루 빨리 평양 도심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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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사단은 서쪽에서 청송-기계 축선으로 남진하던 제12사단과 보조를 맞춰 영덕-포항 방향으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9. field marketing 2013.06.04 0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 좌우를 담당하며 북진하였고 미 9군단은 아직 38선 이남에 머물며 후방작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10. business plan experts 2013.06.10 07: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38선을 넘은 것을 신호탄으로 역사적인 북진이 개시되었습니다.

  11. Supplements for healthy skin 2013.06.14 02: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넘은 것을 신호탄으로 역사적인 북진넘은 것을 신호탄으로 역사적인 북진

  12. password recovery 2013.06.14 2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グ」そして「トラックバック」の意味や活用方法について、なるべく分かりやすく解説して

  13. condolence letter sample 2013.06.16 0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름 전까지 한반도의 최남단인 낙동강을 방패삼아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급

  14. photo booth nj 2013.06.22 2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낙동강을 방패삼아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급급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는 어느덧 사라져 버렸습니다.

  15. painters in new jersey 2013.07.08 1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낙동강을 방패삼아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급급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는 어느덧 사라져 버렸습니

  16. lån betalningsanmärkning 2013.09.11 04: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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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Tips for charity fundraising 2013.09.15 2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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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sky vue 2013.09.16 2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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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Tips for charity fundraising 2013.10.24 2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당시 아군이 한만국경인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나고 북진의 최종 목표인 통일은 달성될 것으로 모두가 믿고 있었습니다.

  20. The Hillford 2013.10.28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출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나고 북진의 최종 목표인 통일은 달성될 것으로 모두가 믿고 있었습니다.

  21. leasing or buying 2013.11.18 2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패삼아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급급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는 어느덧 사라져 버렸습니다.

77. 최대의 패배를 감수한 중공군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9.06 08:36

  미 제3사단이 운두령 일대를 차단하자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돌출 고립된 중공군을 소탕하라고 밴 플리트 제8군사령관에게 지시하였고 이 명령은 예하 군단장에게 즉시 하달되었습니다. 당시 명령을 받은 제10군단장 알몬드는 미 해병 제1사단을 홍천 북방의 한계(철정)로부터 양구 방향으로, 미 제2사단은 한계-인제 방향으로 공격하여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고, 운두령을 점령했던 미 제3사단으로 하여금 포위망에 갇힌 중공군을 격멸하도록 조치했습니다. 하지만 국군 제3군단의 몰락으로 동부전선을 모두 책임지게 된 미 제10군단의 작전 반경이 너무 컸고 더불어 험악한 지형으로 말미암아 진출이 상대적으로 지지부진하였습니다.


[험악한 지형으로 미 제10군단의 반격은 지지부진하였습니다.]


  반면 5월 25일경 서부전선에서는 임진강까지, 중부전선에서는 춘천까지 전선을 걷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제10군단의 이런 부진에 대해 밴 플리트는 군단장을 독촉하였고 고심하던 알몬드는 미 제2사단이 한계-인제를 신속히 돌파하여야 전선을 밀어붙일 수 있을 것으로 결론내리고 공격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명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 제2사단은 선두에 나설 선봉부대로 사단에 임시 증원된 제187공수연대 2대대에 2개 전차 중대를 배속하여 게르하트(Gerhardt)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하지만 불가피한 사전으로 부대편성이 지연되자 전차 1개 소대(4대)와 수색분대(인원11명, 지프 3대), 공병 1개 소대(트럭 2대)로 부대를 축소 편성한 후 이를 제72전차대대의 부대대장인 뉴먼(Charles A. Newman)소령으로 하여금 지휘하도록 조치한 후 급히 출발시켰습니다.


  그런데 뉴먼의 부대는 중공군이 철수하며 설치하였을지도 모를 대전차 장애물을 공병이 탐지한 후 전진하였고 있었기 때문에 진격이 상당히 지체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런 진격 모습을 헬기에서 알몬드가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목도한 알몬드는 현장에 즉시 착륙하여“지금은 지뢰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귀관은 지뢰에 부딪칠 때까지 최고속도로 진격하라”고 단호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군단장의 명령을 받은 뉴먼은 모든 것을 운에 맞기고 적이 혼비백산할 정도의 신속한 속도로 부대를 쾌속 진격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몬드의 판단대로 불과 3시간 만에 적진을 무려 30킬로미터나 돌파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뉴먼의 부대는 쾌속 진격하였고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뉴먼의 부대가 적진을 뚫고 신속한 속도로 진출하자, 철수 중에 있던 중공군은 지뢰를 매설할 틈도 없을 만큼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기 바빴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항복한 포로들을 너무 많아 불과 4명의 공병대원이 80명의 포로를 감시하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뉴먼부대에 후속하여 진출한 미 제10군단에 의해 속사리까지 진출하였던 중공군의 주력 2개 군의 후방은 완전히 차단되면서 일거에 궤멸되었으며, 단 1개 군만이 뉴먼 부대가 소양강 도하지점을 차단하기 전에 겨우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전사에 유엔군의 제3차 반격작전으로 기록된 이번 작전으로 유엔군이 지난 3월경에 휴전선으로 구상하던 캔사스선(Kansas Line 임진강-연천-화천호-양양)을 다시 확보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이를 10~20킬로미터 넘어선 북방인 와이오밍선(Wyoming Line)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것은 휴전을 희망하던 유엔군이 내심 북으로 최대한 올라갈 수 있는 정책적 목표선이었고 더 이상 올라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목표를 이룬 유엔군은 여유를 가지고 중공군의 반응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중공군의 최대의 패배를 기록하였습니다.]


  반면 펑떠화이가 아군의 허점을 노려 야심만만하게 개시하였던 중공군 제6차 공세는 이렇게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초기에는 그의 의도대로 순조롭게 목표가 달성되는 듯 했으나 속사리까지 진출하였던 부대들이 공격 기세를 상실한 상태에서 유엔군에게 후방이 차단되자 오히려 함정에 빠진 격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펑은 아군의 방어선에서 국군이 취약하다는 나름대로의 정확한 분석을 하였지만 스스로의 약점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공군의 능력을 벗어난 과도한 전략을 구사하였던 것이고 그 결과 중공군은 이번 공세에서 6·25전쟁 참전이후 가장 처참한 패배를 경험하였습니다. 펑은 지피(知彼)는 하였지만 지기(知己)를 몰랐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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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만슈타인 2012.08.15 15: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이오밍선과 캔사스선 돌파 사이에 그런 작전 사연이 있었군요. 항상 돌파전이나 포위전 국면에서 소수의 부대가 결정적 돌파나 포위를 하는 게 역사에 종종 있었는데 여기서도 그랬군요.

  5. 신창균 2012.08.15 16: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충성!
    1107공병단 130환경대대 상병 신창균입니다.

    77편 최대의 패배를 감수한 중공군 편을 잘봤습니다.

    동부전선을 모두 책임지게된 미 제 10군단의 너무나 큰 작전반경, 험악한 진형이라는 핸디캡을 이겨내고 전선을 밀어붙인 제 10군단이 활약이 눈부셨습니다. 특히 알몬드가 “지금은 지뢰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귀관은 지뢰에 부딪칠 때까지 최고속도로 진격하라"라고 단호한 명령을 내렸던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의 결정은 옳았고, 그에 따라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므로 많은 목숨을 구했고, 적군을 와해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지도자의 올바른 판단력과 단호한 결정력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펑더화이의 야심만만하게 개시하였던 중공군 제 6차공세가 참담한 실패로 무너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피는 알앗지만 지기를 몰랐던 펑더화이의 전쟁전술에서 지기의 중요성을 여실히 깨달았습니다. 지기를 몰랐던 대가는 6.25 참전이후 가장 처참한 패배였던 것입니다.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충성!

    tlsckdrbs123@hanmail.net

  6. Chatrandom.com 2013.04.03 1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제 방향으로 공격하여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고, 운두령을 점령했던 미 제3사단으로 하여금 포위망에 갇힌 중공군을

  7. chatrandom 2013.04.27 05: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 제3사단이 운두령 일대를 차단하자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돌출 고립된 중공군을 소탕하라고 밴 플리트 제8군사령관에게 지시하였고 이 명령은 예하 군단장에게 즉시 하달되었습니다.

  8. Social Bookmark 2013.05.13 0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지만 국군 제3군단의 몰락으로 동부전선을 모두 책임지게 된 미 제10군단의 작전 반경이 너무 컸고 더불어 험악한 지형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