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에 해당되는 글 306건

  1. 2010.08.12 71. 예견된 대전투 (2)
  2. 2010.08.12 워커 중장의 비극과 불운 (24)
  3. 2010.08.11 길목에 남겨진 역사 (2)

71. 예견된 대전투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8.12 09:09

 

  중공군의 제5차 공세가 끝나고 아군의 반격이 얼추 끝나가던 5월 초, 교통의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대일대에서 전선으로 향하는 공산군 측 군수물자의 수송량이 눈에 띠게 증가되고 있음이 포착되었습니다. 더불어 포로를 심문한 결과, 지난 공세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군은 곧바로 공세를 재개할 것이라는 첩보도 입수되었습니다. 이런 각종 정보를 분석한 결과 전선에는 중공군 54만, 북한군 20만이 배치되었고 더불어 만주에는 후속투입 될 75만의 예비 병력이 주둔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이 전선에 집결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정황은 또 다른 대규모 공세가 코앞에 다가왔다는 의미였습니다. 공산군은 지난 제5차 공세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지만 신속한 보급과 증원으로 전력을 조속히 재편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중공군의 전술과 보급 능력을 고려한다면 6월초나 공세가 가능하리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시기가 앞당겨 질 가능성이 농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규모도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느 규모의 공세보다 클 것으로 예측되었습니다.


  반면 당시 유엔군 27만, 국군 23만으로 구성된 아군은 수적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고, 다만 화력으로 병력의 부족을 만회해 나가던 중이었습니다. 사실 중공군의 참전이후 정립된 이러한 패턴은 휴전 때까지 계속하여 이어지게 될 6·25전쟁의 패러다임이기도 하였습니다. 제5차 공세를 물리쳐 상당한 자신감을 얻은 밴 플리트는 적의 재 공세가 있다면 현 전선에서 후퇴 없이 적을 저지하여 고착화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만일 이 상태에서 적에게 밀려 다시 남으로 철수한다면 간신히 꺾어놓은 적의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게 되고, 이것은 차후 예상되는 휴전협상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시소처럼 이제까지의 한차례 씩 공세와 방어가 오고가던 반복상황을 그는 끝내려 하였습니다. 이제 아군의 전략은 중공군이 공세를 하면 지연하면서 후퇴하다가 적이 약해지면 반격한다는 소극적 개념에서 현 전선에서 후퇴 없이 적을 막아낸다는 적극적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지난 중공군의 제4차, 제5차 공세를 통하여 일주일 정도만 방어선을 지켜내면 적을 반드시 물리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생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220여 킬로미터의 전 전선에 참호가 깊게 파여지기 시작하였고 배후에는 강력한 포병전력이 구축되었습니다.  더불어 진지를 고수하며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양의 탄약과 보급물자가 비축되었습니다.


[유엔군도 전력을 정비하여 공산군의 공세에 대비하였습니다.]


  공산군의 대공세는 조만간 예상되어 있었고 아군도 이에 대한 준비를 끝냈습니다. 이처럼 초조와 긴장으로 고요해진 전선은 어느덧 폭발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여기까지는 유엔군 측이나 공산군 측 모두가 준비를 충분히 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산군이 어느 방향으로 공세를 취하려 하는가하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칼자루를 쥐고 있던 중공군의 의지에 딸려있는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대공세라 하더라도 전 전선을 일거에 밀어붙이기는 힘들었습니다. 대개 전선의 일각을 돌파하여 적의 배후를 차단함으로써 전선 전체에 부담을 안겨 주면서 후퇴를 유도시키는 것이 지금까지 중공군이든 아군이든 즐겨 사용하던 전술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번에 예정된 공세에서 중공군이 어디로 주력을 집중하여 공세를 개시하려 하는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엔군은 이를  예측하는데 철저히 실패하였습니다.


  5월 중순에 공세가 감행될 것이라는 시점에 대해서는 미 제8군사령부는 정확히 예측하였지만 주공방향은 지난 제5차 공세와 마찬가지로 서울을 목표로 하고 있을 것이라고 오판하였던 것이었습니다. 5월 초 항공정찰 결과와 포로 진술에 의하면 공산군의 새로운 공세는 중-동부의 산악지역에서 감행될 것이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적의 페인트 모션으로 보아 묵과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제8군사령부는 미 제3사단을 포함한 대부분의 예비전력을 서부전선으로 대거 이동시켰습니다.


[유엔군은 예비전력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방어선을 강화하였습니다. ]


  이처럼 제8군이 오판하여 서부전선 강화에 주력하자 국군 6개 사단이 담당하고 있던 중-동부지역은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약해졌습니다. 하지만 밴 플리트는 중-동부 지역에 배치된 북한군의 전력도 약한데다 국군이 산악지대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선다면, 설령 예상과 달리 적의 공세가 그쪽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엔군의 예상과 달리 중공군이 이곳으로 주력을 지향하려는 데는 지난 수차례의 공세에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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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 중장의 비극과 불운

생생! 6·25/퍼싱의 군사 이야기 2010.08.12 09:02

  6·25 전쟁은 역대의 그 어떤 전쟁 못잖게 많은 영웅들을 탄생시켰습니다.
  대개 전쟁영웅들의 희비는 참으로 극과 극 그 자체인데 이 중에서도 뛰어난 전공에도 불구하고 가장 불운하고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미 제8군사령관 월톤 워커 중장입니다.
  그는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작전을 지도했음에도 중공군 개입 후 38선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한국군의 트럭과 충돌하여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그런 탓인지 워커 중장은 군사령관으로서 숱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매튜 리지웨이·밴플리트 장군만큼 영예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워커 중장은 영광보다 오히려 불운·비극으로 점철되다시피한 장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월톤 워커 중장은 여러분도 잘 아는 조지 스미스 패튼 대장의 휘하에 있었습니다.
  패튼 대장은 제3군 사령관 시절 특유의 쾌속 기동전을 통해 북프랑스와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을 공포에 몰아넣은 맹장이었고 특히 과감무쌍한 기동작전을 선호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특유의 과감한 고속 기동전을 통해 독일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제3군 사령관 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 중장. 그의 과감한 지휘 기질은 부하였던 워커 중장이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이러한 상관의 지휘를 받은 워커 중장은 곧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로 이동합니다.
  물론 전쟁 초반은 그에게 있어 비극과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워커 중장이 한반도 전선의 지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받고 전황 파악을 위해 한국에 온 첫날인 1950년 7월 8일 미 제24 보병사단 예하 34 보병연대장 로버트 마틴 대령이 천안전투에서 북한군 T-34/85의 일격을 받아 전사함과 동시에 부대가 와해돼 천안이 함락되었고 7월 13일, 대구시에 미 제8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전선을 지도했지만 아직까지 전황은 북한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7월 20일에는 전략적 요충지인 대전이 함락됨은 물론 사단장 딘 소장까지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미 제24 보병사단장 딘 소장과 워커 중장. 딘 소장은 최선을 다해 대전을 사수하고자 고군분투했지만 승승장구하고 있던 북한군의 노련한 작전으로 결국 패전지장이 됨은 물론 주민의 밀고로 포로가 되는 수모까지 겪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함은 물론 새로운 세계의 맹주로서 무소불위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미군은 그 어떠한 전쟁에서도 당해보지 못했던 수모를 겪으며 패퇴를 거듭, 결국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에서 배수진을 쳤습니다.
  이 때의 망신으로 인해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맥아더 원수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미 제8군 사령부를 전격 방문, 워커 중장에게 “됭케르크·바탄 같은 후퇴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오”라며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해야 함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도대체 본토의 증원군은 언제 오는 겁니까?" 좌측부터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 콜린스 대장, 존 처치 준장. 워커 중장은 개전 초반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충분치 못했던 취약점까지 극복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워커 중장에게는 예비 전력이 충분치 못해 보다 융통성있는 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죠.
  특히 그를 더욱 난감하게 한 것은 전선에 투입된 미군이 대부분 축소 편제된 일본 주둔 부대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사단은 3개 보병연대로 편성되어 본토 주둔군과 편제상 차이는 없었지만 각 연대는 겨우 2개 대대만 완편되어 있어 사단 전투력은 사실상 2개 연대 수준이었고, 포병과 전차부대도 사정이 이와 비슷했습니다.

  오늘날의 주한 미군 제2 보병사단은 규모가 많이 감축되었어도 여전히 한국군 1개 사단을 능가하는 전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군의 예상을 깬 북한군의 빠른 남진 속도는 워커 중장을 크게 당혹시켰습니다.
  결국 워커 중장은 독소전 당시 과감한 기동작전을 선보인 소련군에게 훈련받은 북한군의 위력에 경악하며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병력들을 부산항에 상륙하는 즉시 바로 전선에 배치시키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죠.
  상황이 이러하니 효과적인 방어 진영 배치나 예비부대의 확보 따위는 한낯 꿈속의 꿈에 불과했습니다.
  그러함에도 워커 중장은 최악의 전장 환경에서 ‘가난하면서 자식 많은 흥부’가 한 끼 식사를 때워 나가듯 전선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한반도에 상륙한 미 제1 기병사단. 하지만 이들은 상륙과 동시에 곧바로 전선으로 이동해 전투를 치러야 했습니다.
  7월 말부터 시작된 미 본토증원 병력으로 전선에는 약간의 여유가 생긴 듯했지만 아직 전세를 역전시키기는 부족했습니다.

  바로 북한군의 대대적인 정면 공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그러자 워커 중장은 즉각 미군 1개 보병연대를 차출해 전략 예비대로 북한군에게 돌파된 지역마다 마치 응급환자에게 긴급 수혈하듯 다부동과 영산돌출부와 같은 ‘전략적 공백지대’를 메워 나갔습니다. 
  여기에 한국군은 아직
 군단조차 편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 뿐만 아니라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도를 수행하는 등 워커 중장은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적인 기질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제8군 사령관으로 모자라 한국군의 사단들까지 지휘해야 하니 자연스레 지휘부담도 커지게 되었고 1944년 유럽전선에서 패튼 중장의 휘하로 용맹을 떨쳤던 워커 중장은 모든 것이 부족하고 촉박한 한반도에서 졸지에 '우리에 갇힌 맹수'꼴이 되며 지쳐갔습니다.
  캠프 케이시에서 담소 중인 미 제2 보병사단장 마이클.S.터커 소장과 한국군 제5 기갑여단장 나상웅 준장. 오늘날 한국군은 야전군과 군단, 독립 기갑여단 등을 갖춘 체계화된 군대로 거듭났지만 6·25 초반에는 그야말로 독자적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군단급 작전은 미군의 지휘를 받아가며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미군의 고초가 컸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버티며 지탱했던 낙동강 전선에서 마침내 총반격작전이 감행되자 워커 중장은 오랜 고생에 대한 보답을 받을 것이며 앞으로 닥칠 영광에 잠시나마 희망을 가졌지만 작전의 하이라이트인 서울 점령의 영광은 제10 군단장 알몬드 소장에게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고초를 겪어가며 전선을 유지하고 총반격작전까지 성공시킨 대가는 너무나도 초라한 것이었죠.
  하지만 그의 시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니 전선이 점차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광범위해진 전선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알몬드 소장과 지휘권을 나누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이는 명분은 좋았지만 아무런 영광도 누리지 못한 워커 중장에게 ‘치욕'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나마 북진작전에서 한국군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의 평양 점령으로 겨우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곧이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전면적인 개입은 악운이자 비극의 서곡으로 작용했습니다.
  태형의 골짜기에서 미 제2 보병사단은 경무장한 보병이 주력이었던 중국 인민지원군의 작전에 말려들어 문자 그대로 판돈을 완전히 날려버렸고 이는 오늘날까지 '인디언 헤드'의 치욕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유명한 태형의 골짜기에서 미 제2 보병사단 "인디언 헤드"가 궤멸적 타격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군 제2 군단이 완전히 박살나 미8군 상황판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개전 이래 당해왔던 패배 중 이렇게 참담한 경우가 또 없었습니다. 
  특히 최대의 전리품이자 마지막 자존심이던 평양을 포기하고 38선 이남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하달하며 워커 중장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군 생활을 시작한 이래 이렇게까지 치욕적인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워커 중장의 불운과 비극으로 점철된 뫼비우스의 띠는 1950년 12월 23일, 한국군 트럭과의 충돌 사고로 종결됐습니다. 
  평소 자동차 스피드광( 狂, Mania )이었던 워커 중장은 의정부 북쪽 덕정에서 한국군 트럭과 충돌해 사망한 것이죠.  미국 정부는 워커의 중장 전공을 기려 대장으로 특진시켰지만 이미 고인이 된 사람에게 이런 조치는 이미 한 발 늦은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워커 대장의 묘지
  하지만 워커 대장의 생전 활약으로 오늘날 한반도의 안보는 더욱 굳건하게 다져진 만큼 우리는 그의 노고를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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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Logo Design Contest 2011.09.13 2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상웅 여단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3사 16기로 임관해 항상 멋진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이렇게 여단장까지 진급하신 모습을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3. Write My Essay 2011.09.13 2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사가 그런 것이죠. 전쟁영웅은 대단히 허망한 법입니다

  4. chat 2011.10.30 06: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どのような有用な記事は本当に再びこの時間と時間に戻って来るということだ。おかげで..

  5. Memphis Jobs 2011.11.01 0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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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psychics 2013.04.02 05: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 지식은 분명하다. 난이 기사를 읽고 좋아, 난 당신이 업데이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와 함께 공유 할 감사

  17. Chatrandom 2013.05.02 0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 전쟁은 역대의 그 어떤 전쟁 못잖게 많은 영웅들을 탄생시켰습니다.

  18. Social Bookmarking 2013.05.14 05: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사 16기로 임관해 항상 멋진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이렇게 여단장까지 진급하신 모습을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19. Rapid Writers 2013.06.26 2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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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 기동전을 통해 북프랑스와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을 공포에 몰아넣은 맹장이었고 특히 과감무쌍한 기동작전을 선호했습니다.

길목에 남겨진 역사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8.11 08:30

 

  현재도 우리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6·25전쟁의 유산 중 하나가 한미동맹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굳건한 동맹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미동맹의 법리적, 외교적 근거는 1953년 10월 1일 체결되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입니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현재는 많이 축소되었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주한미군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반도 곳곳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서류상의 조약보다 6·25전쟁 발발 일주일도 되지 않아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미국이 전쟁에 전격 개입하여 우리와 함께 피를 흘림으로써 동맹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전쟁 당시에 미국 외에도 수많은 나라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고 귀중한 전투병을 파견하여 피를 흘려주었지만 당시 유엔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것은 단연코 미국이었습니다.


[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중 미군의 역할이 제일 컸습니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쟁 기간 중 총 178만 명의 미군이 참전하여 우리를 도왔고 그중 사망자 3만6940명, 부상자 9만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 등 총 13만7250명 희생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더불어 수많은 물자지원이 함께 있었는데, 이러한 고귀한 희생과 지원은 대한민국이 초유의 국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엄청난 힘이 되었고 한미동맹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미군들이 희생을 당하였고 그것은 동맹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쟁 당시는 물론 상호방위조약 체결 후 6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미군들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한반도를 거쳐 갔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이들이 한반도에 들어오고 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관문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주한미군의 병력도 많이 축소되었고 장거리 항공 교통이 발달한 관계로 오산에 있는 미 공군기지가 중요한 통로역할을 담당하지만 오래 동안 주한미군 병력이 한반도로 들고나가는 길목은 인천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인천을 통해 떠나는 미군들의 모습 ]


  전쟁 초기에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대부분은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지만 전쟁 중반기 이후에는 내륙교통망의 파손도 심하고 전선이 가까운 관계로 인천항은 주요 출입구가 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인천항이나 인천이 전쟁사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인천상륙작전이지만 사실 이처럼 전쟁 내내 묵묵히 아군의 생명선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전쟁 중 현재 인천항 제1부두에 설치된 제21운송대 입구 ]


  물론 한반도 최대의 항구인 부산의 역할은 계속하여 컸지만 주로 군수물자에 한정되었고 병력이나 시급한 화물은 인천항을 통해 전선과 계속하여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천이 미군의 통로가 된 것은 전쟁 훨씬 이전부터였습니다. 1945년 9월 8일 미 제24군단 예하의 제7사단이 38선 이남의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군정을 실시하기 인천으로 상륙하였던 것이었습니다.


[1945년 9월 상륙하기 위해 인천항 내항으로 진입하는 미 제7사단]


  행정상륙이었지만 인천은 미군이 상륙주정을 이용하여 한반도로 들어오는 길목이 되었고 부대 또한 5년 뒤 미 해병 제1사단과 함께 인천으로 상륙한 제7사단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인천을 발판으로 한반도에 손쉽게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1949년 철군한 미군은 이듬해 다시 인천에서 거대한 상륙을 성공시켜 서울로 진입하는 통로가 되었고 1951년 이후에 오래 동안 주한미군의 관문 노릇을 하였습니다.


[인천항에서 유류를 하역하는 모습 (1952년)]


  특히 인천항과 내륙을 연결하는 초입인 부평일대에 설치된 애스캄(ASCOM)이라 불린 거대한 미군병참기지는 1970년대 초반까지 한반도로 들어오는 미군과 미군 물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1945년부터 1970년 사이에 한반도에서 근무한 미군들이 남긴 사진들을 보면 주로 복무한 자대뿐만 아니라 들어오고 나간 인천항이나 일대의 모습이 예외 없이 잡혀있을 정도입니다.


[전쟁 중 초등학교를 징발하여 설치된 제8057보충대]
좌에서 우로 6·25전쟁에 참전한 제3, 2, 1기병, 45, 40, 7, 24, 25사단의 마크가 표시 되어있습니다 (사진-Dewey Mclean)


  1953년경 철도수송대에 근무하면서 찍은 Dewey Mclean씨의 희귀한 컬러사진에도 이 부분이 잘 나옵니다. 부평의 애스캄으로 완전히 옮겨가기 전에 인천 서림초등학교를 징발하여 운영된 제8057보충대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 깊습니다. 긴박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전쟁 중에서도 미 제8군의 보충대답게 예하부대들을 일일이 표시하여 놓은 모습은 한편의 여유를 느끼게도 만듭니다.


[인천 외곽에서 제8057보충대로 가는 길(현재의 제물포역 부근)의 이정표인데, 미국에 있는 집으로 가는 출입구라는 푯말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이제 한국의 그 어느 곳에서도 6·25전쟁 당시의 참담했던 모습을 떠 올리기는 힘들고 그것은 미군이 전쟁 이전부터 그리고 전쟁이후에도 거대한 관문 노릇을 하였던 인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곳을 통해 한반도로 처음 들어왔고 전선이나 자대에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아니면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고국으로 돌아갔던 수많은 미군들에게 인천항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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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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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ealth insurance businesses big apple 2012.05.22 1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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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ideal medical insurance plans for anyone 2012.05.22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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