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작전, 중공군이 공세와 유엔군의 철수 – 반격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0.30 14:15

북진작전, 중공군이 공세와 유엔군의 철수 반격

 

38도선 돌파가 결정됨에 따라 북진작전을 개시한 국군과 유엔군은 원산과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청천강선(희천)까지 진출하였다.

 

여기에 이르자 맥아더 장군은 총 추격명령을 하달하여 한-만국경선을 향해 진격토록 하였으나 중공군의 기습공세로 국경선 진출이 좌절되었다.

중공군의 공세는 총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중공군은 제1,2차 두 번의 공세로 유엔군을 38도선일대까지 철수하게 만들었다. 이 공세로 인해 군우리에서 미 제2사단이 괴멸되었고, 장진호에서는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에 포위되었으나 가까스로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험난한 포위망을 뚫고 나와 흥남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38도선을 돌파하기 위해 세 번째 공세를 감행하였고 이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의 1951 1 4일 또다시 서울을 적의 수중에 넘겨주고 평택-삼척선까지 후퇴하였다.

 

한편 계속된 공세로 중공군의 능력이 한계점에 이른 것을 간파한 국군과 유엔군은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여 한강 남쪽 횡성까지 진출하였다.

 

중공군은 예상하지 못하던 유엔군의 반격을 저지하기 위해 제 4차 공세를 실시하였으나 국군과 유엔군은 이를 격파하고 제2차 반격작전을 실시하여 3 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 말에는 38도선을 다시 회복하였다.




대동강을 건너는 국군 제1사단

1950 10 19일 제일 먼저 대동강을 건너 동평양을 향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다

-만 국경선 초산까지 진출하는 데 최선봉의 영예를 얻은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병사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고 있다.




중공군의 참전

스탈린과 김일성의 파병요청을 받은 마오쩌둥은 출병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50 10 19일 야간에 중공군 선두부대 12개 사단이, 이어서 10 26일에는 2차 부대 6개 사단 등 총 18개 사단 26만여 명이 한반도 전선에 투입되었다.





중공군의 공세

한반도에서 외국군을 철수시킬 목적으로 참전한 중공군은 총 5차례에 걸친 대규모의 공세를 실시하였다. 유엔군은 산악과 야음을 이용해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하는 중공군의 전술에 고전하기도 하였다.





유엔군의 반격

중공군의 제3차 공세 이후부터 반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은 이후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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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ichaelA 2013.11.01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koreanwar60.tistory.com 매일 방문 하는 사랑

    http://jujudoka.free.fr/galerie.php

전쟁의 불씨 : 38도선과 남북 분단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0.28 15:05

전쟁의 불씨 : 38도선과 남북 분단

 

1945년 초 독일이 항복한 후 연합국은 일본의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다. 일본이 연합국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으므로 미국은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8 6일과 9일에 일본 본토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폭을 투하했으며, 소련도 8 9일 선전포고와 함께 일본과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연합국의 총공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일본은 1945 8 10일 무조건 항복 의사를 표시하였다. 일본의 항복은 그동안 원폭을 투하하고 일본 본토 진격까지 준비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소련의 군대가 급속히 한반도에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한반도 문제에 대해 신속할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한반도에서 군사작전을 실시하겠다는 종래의 계획을 바꾸어 일본군 무장해제와 군사적 점령이라는 전략을 추구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미군과 소련군으 ㅣ작전경계선을 신속히 설정하기로 하였으며, 1945 8 11일국무부 육군부 해군부의 3부조정위원회가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 나가사키 원폭투하 장면

 

실무를 담당한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steel) 대령과 딘러스크(National Geographic) 대령은 이날 새벽 [내셔널 지오그래픽 (National Geographic)] 지의 1942년판 지도를 보고 한반도에서의 미-소 작전담당 구역의 분할선을 북위 38도선으로 정하기로하였다. 이 시기에 소련군은 이미 북한의 동북부를 폭격하고 있는데 반해, 미군은 1,000km 떨어진 일본의 오키나와에 있었다. 그들은 만일 소련이 자신들의 안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미국은 이 선까지도 확보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이 선은 미국이 현실적으로 진주할 수 있는 가장 북쪽에 있는 선으로서 한반도를 대략 반으로 나누고, 무엇보다 그 지역 내에 서울-부산-인천 등 주요 도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 항복 접수도 : 이 선은 미국이 현실적으로 진주할 수 있는 가장 북쪽에 있는 선으로서 한반도를 대략 반으로 나누고

무엇보다 그 지역 내에 서을, 부산, 인천 등 주요 도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이 선은 일본의 항복을 받는 선을 최대한 북상시키려는 희망과 소련이 미국의 안을 수용할 것인가의 현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이었다.

 

한반도에서의 작전지역 분할은 이 시기 이전에도 검토된 적이 있었다. 우선 미- 3개국의 포츠담회담(1645 7)에서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을 수행한 관리들이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가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육상분계선을 고려한적 있다. 1945년 여름에 작성한 것으로 추측되는 미국의 합동전쟁계획서의 비밀보고서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를 통해 판단할 때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소련이 참여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으며, 일본이 갑자기 항복할 경우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려고 시도할 것으로 판단하여 우선 그 절반만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38도선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한편 작전한계선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던 당시에 해군 측 대표는 요동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포함할 수 있는 북위 39도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선을 확보하기에는 미군이 한반도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곤란하다는 육군 측의 의견과 대련보다 한반도가 더 중요하다는 국무부 측의 의 견을 참작해서 3부조정위원회는 38도선을 극동에서의 작전한계선으로 결정하여 일반 명령을 작성하였다. 작성된 명령초안은 서울을 확보할 수 있고, 신탁통치시에 영국과 중국에 할애할 지역적 공간이 있다 는 논평을 곁들인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받은 후 국무-육군-해군 장관의 동의를 얻어 트루먼 대통령의 결재를 받았다. 이 명령은 8 15일 태평양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Douglas A. MacArthur) 장군에게 하달되었다. 동시에 더글라스 연합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영국과 중국 정부,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에게 즉시 보내졌다. 다음날인 8 16일 스탈린은 명령초안에 대한 답신에서 극동의 작전한계선으로 제시된 북위 38도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하여 그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그 이남에서는 미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다는 방침이 양국 간에 확정되었다.

 

이어서 일본군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항복할 것인가를 주 내용으로 하는 [일반명령] 1호가 작성되었으며, 9 2일 도쿄만의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이 있는 후 발표되었다. 요컨대 일반명령 제1호는 미국이 초안을 만들고 연합국의 동의를 받아 일본에 제시한 것이며, 대본영이 일본 국내를 비롯해 일본 지배하에 있는 모든 군대에 내린 명령이었다. 아울러 이 명령에 언급된 38도선은 단지 일본의 항복 접수와 무장해제를 위한 책임구역의 할당을 목적으로 선정된 것일 뿐이었다.


 

38도선과 관련된 일반명령 제1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국 대본영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대한 항복의 결과로서 일본국 국내 및 국외에 있는 모든 지휘관에 대하여 적대행위를 즉시 정지하고 무장을 해제하며 현 위치에서 다음에 있는 모든 지휘관에 대하여 적대행위를 즉시 정지하고 무장을 해제하며 현 위치에서 다음에 지시하는 각 지휘관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할 것을 명령한다.

 

1)    생략

2)    만주,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국, 사할린, 쿠릴열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지휘관과 모든 육군-해군-공군 및 보조부대는 소련 극동군사령관에게 항복하라.

3)    일본국과 일본국 본토에 인접한 모든 소도,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 유구열도 및 필리핀 제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지휘관과 모든 육군-해군-공군 및 보조부대는 미국 태평양 육군 최고 사령관에게 항복하라.

 

 

사실 미국 입장에서 38도선은 소련의 일본 군정 참여를 저지하기 위해 되도록 일본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멈추게 한다는 정치적 군사적 목적에서 설정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 시력의 남하를 일단 저지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38도선은 결국 한반도를 지리적으로 둘로 나누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고, 미국이 남한을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함으로써 한반도를 이념적으로도 둘로 나누어 놓고 말았다. 그리고 북한이 무력으로 남한을 점령하기 위해 전쟁계획을 수립함으로써 38도선에 의한 남북분단은 결과적으로 전쟁의 불씨가 되어 타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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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북한 군정과 공산정권 수립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0.25 11:04

소련의 북한 군정과 공산정권 수립

 

북한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소련은 남한을 점령한 미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정책과 전략을 폈다.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일본의 붕괴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소련은 즉각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동시에 병력을 한반도에 진주시켰다. 38도선 이북에서 소련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1940년 여름에 창설된 소련 88정찰여단의 1대대장으로 근무한 김일성 대위 등 조선인 50명을 여단 해체와 동시에 1945 9월 북한에 입북시켜 지역별 인민위원회를 구성하는 핵심세력으로 삼았다.

 

소련은 이들로 하여금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이를 농민들에게 분배해 주면서 공산사회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일반 대중에게 심어주도록 하였다. 이와 병행해서 소련군은 북한의 공산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을 포섭하는 노력을 기울여 소련군에 협조하는 동조자는 끌어들이고, 비협조자들은 남한 탈출을 방조하거나 구금하는 방법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서둘렀다.

 

소련군 당국은 북조선에 소비에트 질서를 수립할 생각이 아니고 조선을 일본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하는 것, 그리고 민족자결의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것에 그 진주 목적이 있다고 수차례 강조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과는 전혀 달리 북한을 계획대로 소련화해 갔다.

 

소련군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실시하는 한편 38도선 요소요소에 진지를 구축하고 기관총을 설치한 후 남-북으로 오가는 통행인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하였으며, -북을 잇는 경의선-경원선 등 주요 철도와 도로를 끊는 등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였다. 이렇게 장벽을 친 소련군은 군정을 효과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일본으로부터 모든 국가 기관을 접수하여 행정권을 인수하였다.

 

소련은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한국인을 기용하되 소련군 장교를 고문역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입북할 때 데려온 소련계 한인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이 조직은 겉으로는 북한이 자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 군정 당국에 의해 지배되었다. 결국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인민위원회 조직은 민족진영 세력이 점차 배제되고 주로 소련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해 갔다.

 

이러한 소련의 공작은 평양군중대회에서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을 북한 주민 앞에 내세움으로써 절정에 달하였다. 김일성은 이때부터 소련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김일성을 북조선 공산당 책임비서에 앉힘으로써 북한 공산당의 제1인자로 만들어 주었다.

 



^ 평양시민 환영 군중대회에서 최초로 나타낸 김일성

 

1948 2 8일 소련은 조선인민군을 창설한 데 이어 그해 9 9일 북한 전역에서 소련식 흑백선거’’ 를 실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함과 동시에 김일성을 초대 내각수상으로 앉혔다.

 

그리고 소련은 북한정권에 대한 군사적 원조를 본격적으로 강화하면서 북한군 훈련에 주력하였다.

 

이렇듯 북한에 공산 기반을 닦아 놓고 군사력도 남한에 비해 충분히 육성한 소련은 이후 “1948 12월 말까지 소련군을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주한미군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철수하면서 북한군에 장비를 넘겨주고, 1948 9월 이후 북한군을 4개 사단으로 늘리고 전차대대와 항공연대를 증편하였다.

  

이처럼 소련 점령군의 장비를 인수하고 중공과 소련의 군사지원을 받은 북한은 금속히 군사력을 확장해 나갔다.

 

소련은 철수와 함께 과거 중대급까지 파견하던 군사고문단을 대대급까지만 유지함으로써 그 수를 대폭 축소하긴 했으나, 그 대신 장성 5명을 포함한 특별군사사절단을 남겨서 북한군의 전력증강을 지도하였다.

 



^ 평양음악학교 학생들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북한 인민위원회 선거 경축대행진을 하고 있다

(북한도 그때까지는 태극기를 국기로 쓰고 있었다. 1946 11 3)

 

 

남북한에서 미-소 양군의 동시 철군에 대한 보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이 철수를 감행한 이유는 북한에 이미 친소정권이 수립되고, 강력한 군대가 있으므로 소련이 철수하더라도 북한에 대한 소련의 통제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평양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장의 모습 (광복 후 1945 10 14)

 

 

이리하여 한민족에게는 광복과 함께 단일국가를 건설할 기회가 주어지는 듯했으나 한반도에 위성국가를 건설하려는 소련의 팽창정책으로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민족과 국토의 분단이 고정화 되었고, 전쟁의 불씨는 점점 더 크게 번져가고 있었다.



 

^ 소련군의 입성을 환호하는 북한 주민들. (1945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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