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염원을 안고 (국군과 유엔군의 38도선 돌파)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0.24 13:50

국군의 38도선 돌파

 

1950 9 29, 서울 환도식을 마친 뒤 이승만 대통령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곧 대구로 내려가 군 수뇌부회의를 소집, 북진 명령을 하달하였다.

 

명령을 받은 정일권 총참모장은 즉각 가장 북쪽에 진출해 있던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에 연락하여 “38도선 인근의 북쪽에 국군이 진격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지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1군단에서 3사단 정면 하조대(양양 남쪽)에 그런 곳이 있다고 응답하였다.

 

정일권 총참모장은 바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에게 3사단이 38도선 북방 요지 (하조대)에서 사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고 있다. 38도선 지상에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를 공격하게 해 달라 고 요청 하였다. 워커 장군은 이 요구를 바로 승인하였다.

 



38도선을 돌파하는 국군



워커 장군의 승인을 받은 정일권 총참모장은 9 30일 강릉의 제1군단사령부를 거쳐 국군제3사단 제23연대 진지를 시찰하고 현장에서 구두로 북진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10 1일 오전 5시에 국군 제3사단은 제23연대를 선두로 38도선을 돌파, 오후 2시에 양양에 돌입하였다. 이때 제3사단의 서측에서 수도사단 제18연대가 양야에 동시에 입성하였다. 이어 10 3일에는 제3사단 제26연대가 제23연대와 교대하여 간성을 점렴하고 10 9일 원산 외곽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10 10일에 수도사단과 함께 공격을 개시하여 원산 시가지에 진입하였으며, 마침내 11일에는 원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북진의 선봉으로 38도선을 최초로 돌파한 국군 제3사단의 38도선 돌파기념 푯말.





38도선 돌파 후 행군하고 있는 국군 제3사단 장병들.





국군의 북진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기기 위하여 공보처가 발행한 전단



사실 9 29일 유엔군사령부로부터 하달된 ‘38도선에서 진경 중지지시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수뇌부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이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독자 노선은 미국과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에 대한 열망은 트루먼 행정부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유엔군의 38도선 돌파

 

1950 9 27일 미 합참으로부터 북한지역 작전을 승인 받은 맥아더 장군은 북진작전계획을 수립하여 10 2일 예하부대에 하달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맥아더 장군의 북진작전계획



1.   미 제8군은 38도선을 돌파하여 개성-사리원-평양 축선으로 진격한다.

2.    미 제10군단은 원산에 상륙하여 제8군과의 연결 및 동부지역 작전을 담당한다.

3.    정주-영원-함흥선 이북지역의 작전은 국군에게 일임한다.

 


이 작전의 전체 골격은 미 제8군을 주공으로 하고 미 제10군단을 조공으로 삼아 원산에 상륙한 다음 북진하여 일명 맥아더 라인까지 진출한 후 그 이북지역의 작전은 국군이 전담한다는 것이다.

 


미 제1기병사단의 금천지역 전투 (1950 10 9 ~12)



 

유엔군사령부의 북진작전계획에 따라 10 4일부터 북진작전에 돌입한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10 8일 임진강을 건너 공격 당일 개성까지 진출하였다.



 


북진하는 도중에 어린이들을 대하는 호주군 병사.

 


북진작전의 주력인 미 제1군단은 미 제1기병사단을 주공으로 군단에서 지원 가능한 전투력의 대부분을 집중 지원하여 작전지역 중앙의 가장 양호한 통로인 금천-사리원-평양 축선을 따라 공격토록 하였다.

미 제1군단에 배속되어 있던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의 우측에서 조공으로 시변리(토산)-신계-수안을 거쳐 평양 동쪽으로, 미 제24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의 좌측에서 조공으로 연안-해주로 우회하여 재령-진남포 방향으로 공격토록 하였다.




 

금천을 점령한 미 제1기병사단.

 


 

한편 미 제1군단의 북진은 10 9일 오전 9시에 미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2개 사단이 배치된 금천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금천은 평양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써 북한군이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대량의 지뢰를 매설해 놓아 작전에 제한이 많았다. 이 때문에 미 제1기병사단의 공격은 10 11일까지도 지지부진하였다. 이에 미 제1기병사단은 북한군 주력에 대한 정면공격과 병행하여 2개 연대를 북한군 좌우측으로 우회시키는 양익포위 전술을 시도하였다. 마침내 10 12일 저녁 무렵 우회부대가 후방지역인 한포리에 진출함으로써 북한군 2개 사단을 포위 격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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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욕전(용문산전투)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0.04 15:12

설욕전(용문산전투)

 

국군 제6사단은 중공군 5월 공세 시 5 18일부터 20일까지 용문산 일대의 주저항선을 방어하던 중 경계부대로 전방에 배치한 제2연대가 축차진지로 전환하면서 효과적인 전면방어를 실시하여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이전투로 중공군은 5월 공세를 중지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유엔군은 곧장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사창리전투 전적비



사창리전투의 치욕을 씻자


국군 제6사단은 사창리 북방의 와이오밍선으로 진격을 계속하던 중 중궁군의 4월 공세로 기습을 당하였다. 사단은 급편방어로 전환하였으나 중공군 제20군 예하사단과 제 40군 예하 제120사단 등 4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6사단 예하 부대들은 중공군의 우회 공격으로 후방이 차단되자 무질서하게 철수하였고, 병력-야포와 차량 등이 협소한 사창리 지역에 몰려들어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결국은 가평까지 철수하면서 대규모 돌파구 형성되었다.

 

가평이 돌파되면 전선이 동서로 크게 분할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영국군 제27여단이 3일 동안 가평을 고수하면서 중공군의 전선 분할 기도를 좌절시켰고, 유엔군은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사창리 전투의 패배는 국군 장교와 부사관의 지휘통솔 능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으로 평가되었다




사창리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철모에 새겼단 결사 표식.




국군 제6사단은 개전 초부터 춘천 동락리 - 낙동강방어선 전투 등에서 연승을 이어 갔고, 압록강 초산까지 제일 먼저 진출한 막강한 부대였다. 그러나 운산전투 이후 중공군의 우회 및 퇴로차단에 중공군에 포위되면 끝장이다라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

 

국군 제6사단은 가평에서 양평으로 철수하여 재편성하였다. 이때 육군본부는 병력과 장비를 보충하였다. 병력도 30~35%에서 88% 수준으로 향상되었고, 사창리 전투에서 단 1문도 끌고 오지 못한 105mm곡사포도 18문을 확보하였다.

 

이윽고 4 30일 사단은 군단으로부터 노 네임(No Name)선상의 용문산 지역을 점령-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창리 전투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부대가 제2연대였다. 사단장은 제2연대에 경계부대의 임무를 부여하고 5 1일 전투태세를 점검하는 군장검사를 실시하였다. 이때 사단장은 훈시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 청성부대는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는데 너희가 사창리전투에서 망쳐 놓았다. 이 오명을 씻기 위해서 너희는 앞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이제 후퇴는 없다.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은 하지 말고 전초진지를 사수하라. 진지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한 사단장은 모든 것을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전투의지를 자극하였다

 

이에 고무된 연대 장병들은 사창리전투를 설욕하고 말겠다는 결의로 뭉쳤으며, 2대대는 전방진전방 떠날 때 決死(결사)’ 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강한 결의를 보였다.

 



제6사단장 장도영 준장



전면방어로 진지를 사수하라


중공군은 5월 공세 시 중서부지역의 유엔군을 고착 견제하여 중동부 전선으로의 증원을 차단할 목적으로 5 17일 중서부전선에서도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 제19병단 예하 제63군의 3개 사단이 국군 제6사단 정면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6사단은 제19연대와 제7연대를 주저항선인 용문산 일대의 고지에 배치하고 북한강과 홍천강 남쪽에 경계부대인 제2연대를 배치하였다.

 

2연대는 제1대대를 홍천강을 감제할 수 있는 미사리 부근에, 2대대를 북한강을 감제할 수 있는 울업산에, 3대대를 예비로 울업산 후방의 353고지에 배치하였다. 전대대는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사주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또한 경계부대로서 적의 공격을 방해 및 저지 후 주저항선 남쪽으로 철수하는 일반적인 작전과는 달리 나산과 427고지 등에 축차적인 방어진지를 준비하는 등 현 진지에서 결전을 치르겠다는 태세를 갖추었다.





용문산 전투상황도



사단과 연대에서는 수색정찰부대를 북한강과 홍천강 건너 가평까지 보내 중공군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감시하였다.

 

5 18, 중공군은 미사리 일대의 홍천강을 도섭하여 제1대대를 공격해 왔다. 이에 제1대대는 적 1개 연대의 공격을 저지하긴 했지만 인접해 있던 미 제7사단의 경계부대가 철수한 관계로 중공군이 측방으로 우회하자 차후진지인 나산으로 철수하여 진지를 점령하였다.

 

울업산에 배치된 제2대대 지역에서 인접 사단 지역인 청평댐 일대로 북한강을 건너온 적들이 야간에 제5중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 5중대는 백병전과 역습으로 이들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19일 오전에 제1대대 지역으로 남하한 중공군이 다시 공격해왔고, 2대대는 최종 진지인 427고지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용문산 (멀리 보이는 고지)



19일 야간, 중공군은 353고지와 나산 일대를 주저항선인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군 예비인 제189사단을 투입해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중공군 3개 사단이 인해전술로 새벽까지 353고지와 나산, 427고지에 공격을 가해 왔다. 각 대대는 전명방어진지에서 백병전을 벌이며 결사적으로 싸웠고, 사단에서는 강력한 화력을 지원하여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이날 야간에 사단 포병 1개 대대와 증원포병 1개 대대, 군단 포병 2개 대대, 인접사단 포병 2개 대대가 지원하여 약 3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사단은 5 20 05:00, 주저항선의 제7연대와 제19연대로 역습을 실시하여 425고지의 제2대대와 연결 작전에 성공하였으며, 이에 중공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5 21일 퇴각하였다.

 

용문산전투에서 제2연대대는 4,944명의 적을 사살하고 15명의 포로를 잡았다. 반면에 제2연대는 26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74명이 실종되었다. 용문산전투에서 중공군 제63군은 약 1 5,900여 명의 병력손실을 입은 것으로 판단되어 있다.

 

국군 제6사단은 경계진지에서 중공군 1개 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공세이전의 선봉에 섰다. 용문산전투는 사창리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사단 전 장병이 죽을 각오로 싸워서 거둔 승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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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태진 2013.10.07 1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용문산이 어디인가요? 그리고 결사를 항전했다는 말에 가슴이 짱하네요.

  2. 고근애 2013.10.09 2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철모에 결사라고 쓴 것에 괜시리 짠하고 가슴이 아프네요. 또한 존경을 표합니다.

국군 제3군단 해체되다 (현리 철수작전)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09.26 15:24

국군 제3군단 해체되다 (현리 철수작전)

이 전투는 중공군 5월 공세 시 국군 제3군단이 중공군 2개 군과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한 후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한 철수작전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제3군단의 서측 미 제10군단지역을 집중 돌파하여 후방의 오마치 고개를 점령함으로써 국군 제3군단은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상하 인접부대 간의 협조가 단절되어 조직적인 철수를 하지 못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 제3군단은 많은 인원 및 장비 손실뿐만 아니라 군단이 해체되는 수모를 당하였다.



현리 철수작전 상황도



중공군에게 선점당한 오마치고개

중공군은 5 16 17:30분에 국군 제3군단 서쪽에서 방어 중인 미 제10군단의 국군 제7사단 지역을 향해 집중적으로 공격해왔다. 이에 따라 20:00시경 국군 제7사단의 전방연대들이 붕괴되면서 통신마저 두절되어 상급부대에서는 국군 제7사단의 상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한편 오마치 고개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중공군 제20군 예하 제60사단 제178연대 제2대대는 국군이 배치된 진지를 우회해 빠른 속도로 국군 제7사단의 바어종심을 향해 기동하였다. 그 결과 중공군 첨병중대가 17 04:00시에, 대대가 07:00시에 오마치 고개 일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들은 16 18:00시부터 17 07:00시까지 13시간 동안에 동부전선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뚫고 무려 25km나 기동하였던 것이다.

 

국군 제3군단의 좌측 사단인 제9사단은 20:00시경 국군 제7사단 제5연대가 전투지경선을 넘어 사단지역으로 철수하면서 전장상황을 알게 되었다. 9사단장은 03:00시경에 철수를 건의하였으나, 군단장은 미 제10군단으로부터 아무 이상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9사단장은 퇴로가 차단당하기 전에 기동장비를 먼저 철수토록 하였으나 유일한 철수로인 오마치 고개를 중공군이 이미 점령하고 있어 철수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사단장은 04:00시경 예하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예하부대들이 17 10:00시경 철수를 위해 용포 일대에 집결하였으나 이곳을 미리 선점한 중공군의 공격으로 북쪽으로 퇴각하여 13:40분경 현리에 도착하였다.

 

군단 우측 부대인 국군 제3사단은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하던 중 제9사단으로부터 제7사단이 철수하였다는 사실과 오마치 고개를 중공군이 이미 점령하고 있다는 상황을 전달받고 17 08:00시 철수명령을 하달하여 13:00시경 현리에 집결하였다.

 

이에 따라 현리에는 국군 3사단과 제9사단, 군단직할부대, 7사단 제5연대,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 등 많은 병력이 혼재된 상황이 되었고, 중공군이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였다는 상황이 전파되자 장병들의 불안과 동요가 확산되었다.





오마치 고개를 돌파하라

5 17 14:00시경 헬기로 현리에 도착한 군단장 사단장들과의 작전회의에서 3사단장에게 부대를 통합 지휘해 오마치 고개를 돌파하여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15:30분 하진부리의 군단지휘소로 복귀하였다.

 

3사단장과 제9사단장은 17:00시경 포위망 돌파계획을 예햐 연대에 하달하였다. 먼저 제9사단 제30연대가 공격하여 중간목표인 736고지와 785고지를 확보하고, 이후 제3사단 제18연대가 초월 공격하여 오마치 고개를 탈환한 후 810고지와 681고지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30연대장은 17:30븐경에 제3대대가 736고지를 확보하고 제1대대가 제3대대를 후속하여 785고지를 확보토록 하였다. 그러나 예하 대대가 아직 용포를 향해 이동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도착하는 즉시 공격토록 하였다. 그러던 중 일몰 이후부터 각 부대 간의 통신이 두절되어 상황파악이 어려워졌다. 군단 대부분의 병력이 협소한 현리 용포 일대의 공간에 일시에 집결되면서 무전기의 혼선으로 상하부대간 통신이 두절되고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먼저 공격한 제3대대는 22:00시경 736고지를 무혈점령했지만 785고지를 점령하기로 한 제 1대대가 내린천을 따라 남하하다가 방태산으로 퇴각해 버리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사단전체가 방태산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 처럼 현리 일대에 집결해 있던 일부 병력들의 적의 기습을 받아 방태산으로 흩어지고, 9사단이 대오를 잃고 방태산으로 퇴각하는 등 상황이 급박해지자 현리 일대에서 공격대기 중이던 제3사단장은 5 18 03:30경 예하 부대에 모든 장비를 파괴하고 방태산을 지나 창촌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리지구전투 비문.       /         현리지구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된 국군.



국군 제3군단사령부의 해체

중공군은 17일 오전에 오마치 고개와 침교 일대를 각각 1개 연대 규모가 선점하였고, 오후에는 사단 주력이 증원되었다. 따라서 3권단이 공격작전을 개시하였을 당시에는 이미 2개 사단 규모가 퇴로를 차단한 상태였고, 현리 일대도 중공군 제20군 제58사단 제173연대와 북한군 제5군단 제6사단 제1연다가 내부 포위를 완료한 상태였다.

 

국군 제3군단의 철수는 조직적인 철수가 아닌 무질서한 패주였다. 장교-병사 할 것 없이 뒤섞여 철수하였다. 중공군의 집요한 추격으로 대오를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광원리에서 창촌으로 이동한 후 집결하려 하였지만 그마저도 중공군이 먼저 차단하고 있어 대부분의 철수 병력이 계방산을 넘어 하진부리로 이동하였다.

 

5 20일 하진부리에 집결한 병력은 제9사단이 40%, 3사단이 34,2%에 불과하였다.

 

중공군은 5 20일 야음을 이용해 운둔령을 넘어 속사리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제 3군단은 04:30분경 하진부리에서 퇴각해 횡계리로 이동하였다. 미 제8군 사령관은 제3군단장에게 하진부리에서 더 이상 철수하지 말고 그곳에서 적을 저지하라고 직접 명령한 상태였다. 그러나 제3군단은 5 21일 다시 퇴각하여 제3사단은 송계리로, 9사단은 대화로 각각 퇴각하고, 군단사령부는 횡계리에서 영월로 퇴각하였다.

 

5 25일 강릉 비행장의 육군본부 전방지휘소에 미 제8군사령관이 방문하였다. 정일권 육군 총참모장도 있는 자리에서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군 3군단을 해체하고 육군 본부의 작전권도 폐지한다. 육군본부의 임무는 작전을 제외한 인사와 행정, 군수와 훈련에만 국한한다. 국군 1군단은 내 지휘를 직접 받아야 하고, 육군본부 전방지휘소도 폐지한다.” 고 말하였다. 국군부대의 지휘권이 완전히 유엔군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밴 플리트 장군의 통보를 듣기만 하였다.

 

3군단 소속이던 국군 제9사단은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었고, 국군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었다. 국군 제3군단은 1951 1 10일 중공군 3차공세 후 해체된 제2군단에 이어 5 26일 두 번째로 해체되는 수모를 겪었다. 3군단 해체의 결정적 이유는 하진부리 일대에서 더 이상 철수하지 말고 적을 저지하라는 미 제8군 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횡계리 ㅡ 영월로 후퇴를 거듭한 때문이었다.




오마치(오미재)고개에 있는 현리지구전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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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태진 2013.09.27 14: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날 작전 상황도 보니까, 정말 치열함을 느낄 수가 있네요. 새로운 지식 알게되었답니다.

  2. 기재현 2013.09.30 22: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내용은 강원도 인제군의 현리 전투를 이야기하는데... 작전 상황도는 경기도 가평군의 지도가 나오네요... 수정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