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참전했던 덴마크 병원선 '유트란디아'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4.16 08:18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세계 16개 국이 유엔의

기치아래 전투 부대를 파병하여 북한 침략군과 싸웠다.

전투 병력을 파견해서 한국을 도운 나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투원 파견이 아닌 인도적 지원을 했던 나라들도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 덴마크가 파견한 병원선 유트란디아는 부상병

치료와 한국인 구호에 큰 업적을 남겨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참전국 미국을 제외하고 병원선을 한국에 파견한 국가로서는

덴마크가 유일했다.


덴마크 병원선 유트란디아는 본래 병원선으로 건조 된

선박이 아니었다.

8,500톤 크기의 유트란디아는 1934년 덴마크의
나크스코프 조선소에서
화객선[화물 여객 겸용]으로 탄생했다.



유트란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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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터지자 덴마크 정부는 병원선 파견으로

유엔의 요청에 협조하기로 하고 당시 화물선으로

대서양 노선을 오가던 유트란디아를 병원선으로 개조했다.


개조 작업은 유트란디아를 건조했던 나크스코프 조선소에서

맡아서 단 3개월 만에 깔끔하게 완료했다.


병원선으로 탈바꿈한 유트란디아는 356침대를 갖춘 네 개의

큰 병실들에 수술실, 엑스선 촬영 실과 치과 시설을 갖춘

아주 현대적인 해상 종합병원이 되었다.


선체는 하얀 색이 칠해지고 선명한 적십자가 양현에 그려졌다.


병원선 유트란디아의 파견 대장은 해군 대령으로
덴마크 적십자사
총재였던 카이 함메리히 씨가 임명되었다.




파견대장 카이 함메리히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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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트란디아는 덴마크의 국가 정책으로 파견했지만 소속은
덴마크 적십자사로서 이곳에서 
맡아서 사업을 추진하도록했다.


개조 전 운항 시절 선장이었던 크리스텐 콘드럽이 계속

배의 운항을 맡았고 병원의 운영은 부(副)대장인

모겐스 빙게 박사가 담당했다.


병원 인원의 선발은 덴마크 전국 각지에서 엄청나게

많이 몰려든 지원자들 덕분에 최고의 인원들만

엄선할 수가 있었다.


단 42명의 간호사 모집에 무려 4,000명 가까운 덴마크

전국의 간호사들이 지원했었다.


유트란티아의 의료 분야 인원은 91명,

운항 및 정비 분야 인원은 97명으로 첫 출항을 하게 된다,


병원선의 인원 평균 연령 40 세가 말해주듯 경험 많고

원숙한 전문인들로 구성되었다고 하겠다.


요원들은 적십자 소속이었으나 극히 기초적인 군대 훈련을
교육 받았고 군대 체제의 운영에 근무중 군복을 입었다.


1951년 1월 23일.

좌우 현(舷)에 적십자 표시를 한 하얀 병원선

유트란티아가 추위에도 불구하고 몰려든 일 만 명의

덴마크 국민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코펜하겐 항구를 떠나

전쟁이 한창인 미지의 나라 한국을 향하여 닻을 올렸다.


유트란디아는 한달 넘게 항해 끝에 극동으로 들어서자

일본에 먼저 들렀다.

도쿄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의 맥아더에게 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을 떠나 유트란디아는 현해탄을 건너 일로 한국

부산항으로 향했다.

유트란디아는 드디어 고국을 떠난지 38일 만에 부산항에

기항하여 닻을 내렸다.


부산항에 정박 활동중인 유트란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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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트란디아는 준비를 끝내고 1951년 3월10일부터

진료 업무를 개시했다.


병원선 유트란디아에게 주어진 임무는 전선에서

중상을 입고 일본이나 본토의 큰 병원으로 후송되어 가는

중환자들이 후송 순서에 따라 대기하는 동안 치료를 받는

후송 병원의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전선의 전투 빈도와 강도에 따라 유트란디아로 보내지는

입원 환자의 숫자가 변화했지만 대개 100명 수준에서

200명 수준이었다.



유트란디아는 이미 이차 세계 대전중 전쟁의
맛을 보았었다,
자바 섬에서 일본 폭격기에 폭격 당하고 있는 유트란디아.
[두 척중 바다쪽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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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트란디아의 의료진의 기술이나 의료시설 수준은 세계

최고 일류 병원과 견주어 보아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것이었다.

한국에는 미군의 육상 병원들도 있었고 병원선도 있었지만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중상자나 중환자는 유트란디아로 보내졌다.


부상 미군들 사이에서도 유트란디아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침대를 빽빽이 들여놓아 좁은 미군 병원선보다도 같은 면적에

절반의 침대만 들여 놓은 유트란디아는 지내기에 아주 쾌적했다.


그리고 미군의 젊고 미숙한 군의관들보다 경험도 많고

뛰어난 기술을 가진 덴마크의 민간 의사들이 치료를 담당했다.

게다가 매력적인 푸른 눈과 금발에 보륨 넘치는 몸매의

바이킹 후손 간호사들의 친절한 써비스도 있었다.



유트란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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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선의 미군들 중에 전투에 돌입하기 전 군번줄에

부착하거나 포케트 속에 “부상시 유트란디아 후송 요망’이라는

글귀가 적힌 쪽지를 챙기는 병사들이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유트란디아는 의료진과 병상에 여유가 있었기에 전화(戰禍)로

모든 것을 잃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한국인

환자들에게도 인술의 손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유트란디아의 여성 간호사들은 상륙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의사들과 남자 간호사들은 상륙해서 응급 진료소를 열고

한국인 병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때로는 상태가 안 좋은 한국인 환자들은 병원선으로 데려와

입원 치료도 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거리를 방황하는 고아들을 돌봐주고

고아 수용 전용 선실을 마련해서 고아원으로 보내 질 때까지

머무르게 하기도 했다.


미군 군의관 맥키언 대위가 부산 교외에 부대의 도움을 
받아 
해피 마운틴이라는 어린이 전용 병원을 세웠는데

유트란디아는 의술과 의약품의 제공으로 이 병원을 열심히

지원했다.


그러나 유트란디아에 한국인 민간 환자를 입원시켜서

치료하는 의료 행위는 공식적으로 허가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민간인 진료는 유트란디아가 유엔군 소속이었으므로

유엔의 허가가 필요했다.


전쟁 기념관에 전시된 유트란티아 병원선
요원의 유니폼 - 군복에 덴마크 적십자사 마크를
부착했다. 이런 기념품을 장기간 보관했다가 기증한
덴마크 사람들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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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간 환자들에게 인술을 베풀게 해달라는 의사들의

요청에 파견 대장 함메리치 씨는 유엔군 사령부에 이를

허용해주도록 거듭 건의했다.


한국인의 입원과 치료를 해도 좋다는 허락은 유트란디아가

부산항에서 진료를 개시한지 4개월이 지난 1951년

7월에야 떨어졌다.


단 부상 환자가 밀려오는 긴급 상황에서는 입원실을

비워 주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였다.


1951년의 무더운 여름이 왔다.

에어 컨디션 장치가 전혀 안되어 있던 유트란디아의

찜통 같은 선실에 환자가 입원 할 수도 없었고 의사들이

의료 임무를 계속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유트란디아는 참전 국가[주로 유럽]의 부상병들을 싣고 그들의

고국으로 후송하는 해상 앰브란스 임무를 수행하며 더운

한 여름을 지나고 가을에 돌아오기로 하였다.


1951년 8월 초 유트란디아는 후송 환자를 싣고 부산항을

출항하여 네델란드의 로테르담으로 출발했다.


바다로 나간 유트란디아는 긴 항해 끝에 네델란드의

로테르담 항에 기항해서 환자들을 후송을 완료하고 재정비와

재보급을 받고 다시 극동으로 향하는 뱃길을 되 집어

1951년 11월 13일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유트란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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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째의 한국 파견 임무를 시작하면서 병원선
운영체제에도
변화가 있었다.


유엔 사령부에서 허가를 득했던 대로 병원선의 침대 100석이

국군 환자들에게 배당되고 100석은 한국인 민간들에게 할당되었다.


유엔군들 중에 병원선이 한국인들로 붐비는 것에 불만을 터뜨리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한국인 환자 중 어린이들이 많아 그들이

병원선을 여기저기 뛰어 다니며 병원 분위기를 밝게 해서

배타적인 유엔군들을 마음을 바꾸게 했다.


사실 한국인 군인과 민간 환자를 다량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유트란디아의 의료진에게 큰 업무 부담을 주는 것이었다.


비록 유트란디아 침대가 350석이 되었지만 의료진의

규모로 보아 적당한 환자의 숫자는 200-250석이었다.


그러나 유트란트의 의료진들은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환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인 의사들도 유트란디아로

교육 파견을 나와서 체계적으로 최신 의료 기술을 전수 받았다,


덴마크 의사들은 선상에서만 한국인들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을 위한 육상 출장 진료도 하였다.

병원선의 어린이 전용 선실에서는 정규 학교 교육도 시행되었다.


인술의 베품은 한국의 종교인들이나 선생들을 지식인 사회에  

한국인 사회에 덴마크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게 했다.


한국인 종교인들과 선생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들과 병원선의

덴마크 의료진 사이에 협조 관계가 잘 이루어져 피난지

부산 지역의 인근 지역에서 여러 인술 진료가 진행되었다.


적십자 사의 헌신적인 인도주의 정신에 충실했던 유트란트의

의료진들은 너무 열심히 일을 하는 바람에 순번제로 일본으로

휴가 가는 것조차 반납하는 사람도 생겨났었다.


급한 한국인 중환자 긴급 후송으로 자기 근무

시간이 아닌데도 수술복을 챙겨 입고 급히 달려 나오는

비번 의사들도 있었다.


1952년 3월 29일.

유트란디아는 정비와 개조를 위해서 본국으로 회항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귀국하는 환자 장병들의 후송 임무가 주어졌다.


유트란디아는 백 여 명의 유엔군 환자의 일본 후송 임무를
띄고 부산항을 떠났다.


일부 미군 환자들을 일본에 내려놓자 유트란티아는 194명의

유럽국가 환자들을 싣고 고국 덴마크로  향했다.


귀국한 유트란티아는 8월과 9월에 다시 건조사인 나크소코프

조선소의 드라이 독크에 들어가서 더 많은 의료 써비스를

위한 대대적인 개조를 했다.


긴급 환자 후송을 위한 헬리콥터 착륙장이 설치되었고

안과 환자를 위한 치료 설비가 추가되었다.

에어 컨디션도 각 선실에 설치되었다.

여러 척의 영국제 환자 수송용 엠브란스 보트도 탑재되었다.


1952년 9월 20일 모든 개수와 개장을 끝낸 유트란티아는

다시 코펜하겐 항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일본을 거쳐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52년 11월 20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기항한 곳은 부산이 아니라 인천 항이었다 .

유엔사의 명령이었다.


전선이 가까워서 긴급환자의 헬리콥터 직접 후송도 가능하고

후송 시간도 훨씬 단축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헬리콥터 착륙장을 설치한 유트란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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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 너무 가까워 서부전선에서 울리는 포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헬리콥터 덕분에 전상 장병을  전투 현장에서 유트란티아로

부상 20분 내에 긴급 후송되는 신기록이 나오기도 했다,


53년 3월은 특별히 분주한 달이었다,

단 사흘 반 만에 169명이 후송되어 왔는데 이중 81명은

위급 환자였다.


3월 한 달 동안 무려 301명의 중상자가 후송되어왔다,

이중 104명은 전선에서 헬리콥터로 직송된 긴급 환자들이었다


너무 업무가 과중해 본국에 의료진 증파를 요청하자는

말이 나왔지만 다시 전선이 조용해져 없던 일이 되었다,


전선이 가까운 인천항에 정박한 관계로 급증한

전상 장병들에게 인원과 자원을 집중해야겠지만 유트란티아

의료진은 한국인들에 대한 인도적인 봉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의료진은 육지에 진료소를 설치하고 시간을 내서 육상 출장 진료를

교대로 했고 가져온 의약품을 아껴서 가난하고 병든 한국인들을
돌봤다,



1950년대말 스칸디나비아 3국이 세운 서울에 세운 메디칼 센터의
진료 사진.- 유트란디아의 덴마크 의료팀 모습도
이와 비슷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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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회담도 진행되어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되었다.

중상자의 긴급 후송도 뜸해졌다.

회담 초기 유엔사는 유트란디아를 원산 만에 정박하고

여기서 회담을 진행 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북한 측이 거절했다,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발효 되고 전쟁이

끝이 났다

전투가 발생해야 발생하는 전상자들이 없는데 더 이상

유트란디아의 기능은 필요 없어졌다,


유엔사는 유트란디아에게 다시 각국의 환자들을 

승선시켜서 본국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1953년 8월 16일 유트란티아는 일본에 들려 마지막 미군 환자를

내려놓고 요코하마 항의 독크에서 장거리 항해를 위한 점검과

보수를 완료했다.


8월 27일 한국에서 승선한 229명의 환자들과 제3국행을 희망한

반공 포로들을 싣고 계속 귀환 길에 올랐다,.


후송 업무를 모두 마친 유트란디아는 10월 16일 성대한

환영 속에 모국의 코펜하겐 항에 임항하여 긴 해외 파견 임무를

마치는 마지막 의식의 닻을 내렸다.




유트란티아의 귀향- 미군 환자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던
간호사들이 외무상 
 Ole Bjørn Kraft 씨의
환영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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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트란디아는 유엔사에 999일간 배속되어

의료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24개국에서 온 4,981명의 환자를 치료했으며

6,000명의 한국 민간인들을 돌보고 치료했다.


[그러나 치료한 한국인들의 정확한 숫자는 기록에 없다.

관계자에 따라 이보다 세배는 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돌봤다,]


긴급 후송된 환자를 포함해서 이렇게 많은 환자들을

돌봤지만 의료진의 우수한 기술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병원선에서 사망한 환자는 단지 29명밖에 되지 않았다,


유트란티아가 치료한 유명 인사 중에는 치과 치료를

받았던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있었다,


비참한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던 한국인에게 베푼

덴마크 국민의 인정은 유트란디아가 귀국한 뒤에도

육지에서 그 맥을 이어갔다,


덴마크는 언커크[유엔 산하 기구]의 한국 부흥 사업에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인 스웨덴과 노르웨이와 협력하여

1958년 서울에 메디칼 센터라는 첨단 의료 시설을

갖춘 종합 병원을 건립했다.


1968년 병원을 한국 정부에게 기증하고 떠나기 전까지

메디칼 센터에서는 덴마크 의료진들이 오가면서 한국인

환자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유트란디아의 봉사 정신이 탄생의 기초가 된 국립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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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종합 병원으로 발전한 을지로 5가의 국립 의료원이

유트란디아의 인술이 계승 된 메디칼 센터의 후신이다,
아래는 10년간 메디칼 센터에서 의술을 베풀던 스칸디나비아
3국 의사들의 진료 모습이다.

*이 구하기 힘든 사진 자료는 국립 의료원 홍보팀
 권순조님이 제공한 것이다.*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도 보인다.메디칼 센터는 진료와 함께
선진 의술의 한국 전파에도 크게 기여했다
.


메디칼 센터의 또 다른 진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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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면서 한국 의료진의 수준도 많이 향상하고
한국의 경제 사정도 호전되자 메디칼 센터는 한국정부에
기증되었다.

유트란디아 - 한국 파견 임무후 화객선으로 다시 개장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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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트란티아는 3년간의 해외 임무를 마치자 조선소로

돌아가 다시 화물선으로 개장한 후 덴마크와 태국

방콕 항로에 투입되었다.

1964년 유트란디아는 그 부지런한 일생의 임무를
다하고 퇴역하였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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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1 개런드 2010.04.24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 기증은 외국에서는 당연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그냥 고물 취급 받다 사라지는게 안타깝죠

  2. KW 2010.05.15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걸 보면 참 우리도 힘든나라에 대한 의료지원, 교육지원, 식량지원을 꾸준히/성실히 해야 할것 같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3. keenan 2010.06.25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덴마크에 대해 몰랐던 사실이네요.. 우린 모두 알게 모르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면서 살아가고 있었군요.

  4. Pennsylvania 2010.06.27 14: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여기는 미국인데요. 제가 오늘 뉴욕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알게된 사실인데 유트란디아에서
    치료를 받은 한국인들은(민간인, 군인 포함) 비 공식적으로 30,000명 이상이라고 그러더군요.

  5. graphing calculator 2012.06.05 15: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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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portable dog fence 2012.12.03 2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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