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죽음의 계곡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5.21 09:42

 

  제8군은 언론에서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이름을 붙인 대대적인 진격작전을 개시하였지만 오히려 실제로 전선은 후퇴를 거듭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하였습니다. 11월 27일, 덕천과 영원 일대의 국군 제2군단이 붕괴되자 제8군은 전 부대를 청천강 선으로 철수하였고 이것으로도 위기를 감당할 수 없자 곧이어 평양-원산을 연하는 선으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서부전선에 투입된 중공군은 이중으로 아군 주력을 포위하여 제8군을 일거에 격멸하려는 야심만만한 시도를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제38군이 덕천을 돌파하여 군우리(軍隅里) 후방으로 진출하여 내곽을 포위하고, 제42군은 영원, 북창을 거쳐 순천 및 성천 방향으로 진출하여 외곽을 봉쇄하려 하였습니다.



[중공군은 제8군을 일거에 격멸하려는 대공세를 개시하였습니다.]


  당시 청천강 상류의 교통 요충지인 군우리 일대를 방어하던 부대는 미 제2사단이었는데,
11월 29일 군우리 전방에 출몰한 중공군 제40군의 압박으로 위기가 고조되자 숙천 후방으로 부대를 철수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군우리 후방으로 파고들던 중공군 제38군 113사(사단)가 군우리와 순천중간인 갈고개를 점령함으로써 위기가 증폭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중공군 제42군을 순천북방 신창리에서 미 제1기병사단이 저지하는데 성공하여 철수할 수 있는 통로를 겨우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안전은 장담하기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미 제2사단이 숙천으로 철수하는데 이용될 수 있는 도로가
2개였는데, 하나는 사단 후방에 있는 군우리~순천~성천에 이르는 도로였고 또 하나는 미 제1군단 관할지역인 신안주~숙천~성천에 이르는 도로였습니다. 따라서 순전히 지휘관의 의지에 따라 철수로를 선택할 수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미 제1군단장 밀번은 미 제2사단장 카이저(Laurence B. Keiser)에게 도로 상태가 양호한 신안주~숙천간 도로를 사용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카이저는 미 제1군단과 철수로가 겹치면 혼잡할 것으로 예상하여 군우리~순천 간 도로를 따라 철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극의 결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철수로를 정찰하려 먼저 급파된 전차
소대는 저항 없이 갈고개를 넘었고 이상이 없음을 사단에 보고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찰대는 험준한 협로 양측 위에서 매복하여 있던 중공군 제113사가 미 제2사단 본진을 살상지대로 유인하기 위하여 그대로 통과시켰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낙관적으로 보이자 사단은 11월 30일 새벽, 제9연대, 사단 본부, 포병 및 지원부대, 제38연대, 국군 제3연대, 제23연대의 순서대로 철수를 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험준한 협곡 안으로 진입하자 좌우측에 매복한 중공군으로부터 집중적인 사격이 개시되었습니다. 노출된 병사들은 중공군의 조준사격에 차례차례 쓰러져 갔지만 이 상태에서 뒤로 돌아 빠져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군우리 협곡에서 저항하는 제2사단 공병대대]


  이런 미 제2사단에게 위기기 닥치다 공군의 지원과 외곽에서 미 제9군단이 배속된 영국군 대대가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모두 무위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후 죽음의 계곡으로 명명된 군우리에서 용원리까지 10킬로미터를 통과하는 동안 미 제2사단은 모든 장비와 대응을 포기한 상태로 몰매를 맞아가며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철수를 개시한 미 제23연대는 연대장 단독으로 신안주로 우회하여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으나 제23연대의 작전지역 이탈로 사단 본부가 더욱 많은 피해를 보게 되어 후일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군우리 전투에서 미 제2사단은 3,000여명의 사상자와 사단의 전 장비를 상실하여 부대가 완전히 와해되는 참극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대해체까지 고려하였지만 전통 있는 부대를 이대로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후 미 제2사단은 재건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미군들은 군우리
전투가 좌우측으로 늘어서 있는 형(刑) 집행인 사이를 죄인이 통과하도록 하여 몰매를 가하는 ‘인디언의 태형’ 방법과 비슷하다고 하여 ‘인디언의 태형(笞刑 : Gauntlet)’이라고 부르며 뼈아픈 교훈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군우리 전투 당시에 가도에 몸을 숨긴 미 제2사단 장병들 ]


  미 제2사단이 전멸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그나마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후방을 차단한 중공군이 강력한 화력으로 궤멸적인 공격을 가한 것이 아니라 매복한 상태로 소화기에만 의존하는 공격을 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당시에 중공군 제113사의 뒤에는 미 제9군단이 있었는데, 이들이 지원에 나서 강력하게 압박을 가했다면 오히려 중공군이 전멸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은 나중에 전황을 분석하며 알게 된 것이었지만 이때 까지만 양측 모두는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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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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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꽁보리밥 2010.05.21 1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믹시때문에 오랜만에 방문합니다.
    여전히 6.25 관련글을 꾸준히 올리고 계셨군요.
    아예 제 블로그와 다음 구독신청을 해 놓겠습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2. Colin Stroinski 2012.05.12 14: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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