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통한의 1.4후퇴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6.10 08:53


 

  미련을 두지 않고 너무도 빨리 북한 땅을 내주었지만 1950년 12월 중순, 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일대의 방어진지를 점령하였을 때까지만 해도 내심 중공군도 38선에서 공세를 멈춰주기를 기대하였습니다. 마치 지난 9월말 아군이 38선을 돌파하지 않기를 오매불망 바라던 북한정권과 같은 입장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어쩌면 유엔군의 이러한 희망은 맞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12월 중순, 38선 일대까지 유엔군을 추격하여 내려온 중공군은 일단 그곳에서 숨을 고르려 예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8선 일대에서 중공군이 진격을 멈추어 전선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였습니다]


  일단 진격을 멈춘 중국지원군 사령관 펑떠화이는 연합사령부 설치에 착수하여 북한군의 지휘권도 자연스럽게 확보하였습니다.
이제 맥아더에 맞상대 하여 6·25전쟁을 지휘하게 된 펑은 1951년 2~3월경에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지난 두 차례의 공세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는데 성공하였지만 반대급부로 소모된 것이 너무 많아 이를 보충하여 전력을 회복하는 것이 선결과제라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장진호 전투에서 붕괴된 제9병단의 피해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본토에서 이동 중인 제19병단도 한반도로 이동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그 또한 2~3개월 정도 부대재편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동의는 하였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 생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38선 일대에서 중공군이 정지할 경우, 전선이 고착화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지체 없이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한 이후에 부대를 재정비하라며 명령을 내렸습니다. 38선 일대에서 전선이 소강상태로 빠지기를 원했던 유엔군의 희망과 달리 마오의 지침에 따라 대강의 준비를 마친 중공군은 12월 31일을 기해 전 전선에서 공세를 감행하면서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1.4후퇴를 야기한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서울을 탈출하는 피난민]


  이때 공산군은 총 9개 군단으로 구성되었는데, 5개 군단(중국 2, 북한 1)으로 편성된 주공은 서울을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고, 중공군 2개 군단이 전선 중앙의 가평으로, 북한군 2개 군단이 동부전선의 홍천-원주 방향으로 38선을 넘어왔습니다. 중동부 전선의 조공부대는 전선을 돌파하여 아군의 배후를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사실 이러한 부대배치와 공세방향은 지난 1950년 6월 당시에 북한군이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북한군은 20여만 이었지만 이번 공세에 펑의 지휘 하에 동원된 중국, 북한군은 물경 50여 만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어둠이 내리던 17시경, 임진강, 한탄강 일대의 서부전선에 집중 배치된 중공군은 짧은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면서 강을 넘어왔고 얼마가지 전선의 계곡과 능선은 중공군으로 가득 찼습니다. 문산 우측의 제1사단과 동두천의 제6사단은 준비된 진지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더불어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3군단도 집중적인 공격에 하염없이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전투현장을 시찰한 신임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적에게 허용한 돌파구가 예상외로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전 부대를 한강-양평-홍천선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한강이 결빙되어 적의 공세를 저지할 장애물로써 가치가 반감되었기 때문에 1월 3일 오후에 서부전선의 아군에게 평택-안성선으로 후속 철수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이것은 38선 이남에서 동서간에 가장 짧은 거리인 북위 37도선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시도였고 한편으로 서울을 적에게 내준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서울을 재점령한 중공군의 모습]


  1월 4일 아침부터 한강이북의 모든 부대들이 임시교량을 이용하여 질서 있게 철수를 개시하였습니다. 더불어 철수하는 아군부대 옆에는 엄청난 피난민들이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여름에 벌어진 공산학정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군 당국의 소개명령이 하달되자 엄동설한임에도 한강을 건너 서울을 탈출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13시경 마지막 엄호부대가 철수를 완료한 후 14시경, 임시교량이 폭파되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중공군이 텅 비워버린 서울에 무혈 입성하였습니다.


  아군은 서울을 수복한 지 3개월 만에 다시 한 번 적에게 내어주는 치욕을 겪었습니다. 결국 평택-안성을 연하는 37도선까지 철수한 유엔군은 겨우 중공군과 접촉을 단절하고 전열을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부전선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홍천-원주를 향해 남하한 북한군이 원주를 점령한 후에도 공세를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충주-대전방향까지 진출하여 37도선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유엔군 후방을 차단한다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던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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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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