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철군이냐 확전이냐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6.16 13:55


 

  중공군의 참전은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장 큰 논의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반도에서 철군하는 방안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유엔군의 철군은 대한민국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한국정부 또한 다급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각종 결의대회와 국민방위군을 설치하여 서방측에 계속하여 항전을 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어필하려 부단히 애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 국민방위군 고급간부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려 물품을 빼돌려 집단 아사, 동사자가 생기게 만드는 부끄럽고도 한심한 모습이 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한심함의 극치였습니다.]


  미국은 국방비를 증액하고 징집연령을 낮춤과 동시에 18개 사단 재창설 계획을 조기에 앞당기기로 했을 만큼 중공군의 출현은 위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또한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는 서유럽을 방위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군을 창설하였습니다. 이 같은 미국의 정책은 전 세계 분쟁지역에서 미국의 역할을 확대한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등장으로 전황이 순식간 바뀌자 미국을 비롯한 참전 유엔군 측은 “한반도에서 철군할 것인가, 확전할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12월 22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중국의 의도가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 진다면, 유엔군은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철수 한다”는 암울한 내부 의견을 정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중공군이 금강을 연하는 선에 진출하게 되면, 한국국민 일부를 제주도로 소개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하도록 조치하고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간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한국정부에는 정식통보하지 않고, 단순히 의사를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때문에 우리 정부는 아직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확전을 주장하여 투르먼과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1950년 12월 전선을 순시하는 맥아더와 리지웨이)


  반면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를 중심으로 확전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그는 합참의 지시가 “전쟁에서 싸워 이기려는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다음날 회신에서 중국에 대한 강력한 보복조치를 요구했습니다. 맥아더는 중국해안 봉쇄, 중국본토에 대한 폭격, 타이완 군의 참전 및 중국본토 상륙공격 허용 등의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습니다. 맥아더의 주장은 ‘중국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행동으로 인하여 일본이나 서유럽이 대규모의 전쟁에 말려든다면 결코 미국의 국익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대통령 투르먼과 대립을 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주요 참전국 중 하나인 영국의 주도로 정치적으로 철군과 확전의 중간인 명예로운 휴전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1월 17일, 당시 3차례의 공세에서 모두 승리하여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던 중국은 이를 휴전을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은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휴전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날려 버림 셈이었습니다. 만일 이때 휴전 교섭에 돌입하였다면 공산권 측의 의도대로 전쟁이 멈출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쉽게 최종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여 전쟁을 고수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너무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었고 미국의 잠재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하였던 것이었습니다.


[1951년 1월 4일 서울 시내로 진입하면서 최고 극성기를 연출한 중공군]


  이처럼 연이은 공세를 성공시켰지만 힘이 극도로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1951년 1월 10일을 전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나아가 건국 이래 대한민국의 최대 위기상황이었습니다. 평택-삼척에 형성된 전선으로부터 불과 50킬로미터 후방에 있는 금강까지 더 밀려난다면 유엔군은 즉시 철군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나라의 운명은 실로 풍전등화였습니다.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하면서 더 이상 내려올 수 없을 만큼 힘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지만 만일 그때 마지막 힘을 다하여 좀 더 밀어붙였다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었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아군은 중공군을 과대평가하여 회피만 하고 있었지만, 막상 중공군도 유엔군의 위기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생생! 6·25 > 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56. 다시 한강으로  (4) 2010.07.01
55. 생각지도 못한 전환점  (7) 2010.06.21
54. 철군이냐 확전이냐  (4) 2010.06.16
53. 알려지지 않은 적  (3) 2010.06.15
52. 예상을 벗어난 위기  (3) 2010.06.14
51. 통한의 1.4후퇴  (2) 2010.06.10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장기빅맨 2010.06.22 1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폭염인데도 글을 읽고 있으니 온몸이 으스스 합니다.

  2. allstate insurance telephone number 2012.05.21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행복과 함께 다양한 매력으로 우리를 가르친다. 그 가능성은 그리 놀라운 및 유형이 이렇게 빠른 거래입니다. 그것은 합법 좋은 기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욕망의 큰 거래로 날 수 있습니다.

  3. carinsurancecompany travel 2012.05.21 16: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정 Pileateds과에 당신에게 모든주의 깊고, 프레임간 연구 감사합니다. 그래픽 저가 두 팀은 당신의 Luneau의 딱따구리 하오 Pileated있다 / 될 수있는 그런것에 대해 훨씬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4. condition farmville farm vehicle insurance business 2012.05.21 16: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은 즐거운 사이트를 논의있어. 사실에게도주의 사람들이 주위에서 잘 쓰기까지 표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은 엘리트 블로그 게시물 것입니다. 이 웹 사이트에서 현재 유용한 볼거리를 공유에 관한 많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블로그 사이트 내에 결과적으로 지속 흥미로운 정보를 b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