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생각지도 못한 전환점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6.21 09:00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서울에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으나 중동부전선의 원주 돌파구가 계속 확대되고 있어 상황은 극히 비관적이었습니다. 더불어 중공군의 제4차 공세가 1월 20일을 전후하여 감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또다시 후퇴하여야 한다는 패배의식이 전선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미 합동참모본부는 여기서 불과 50킬로미터 만 더 후퇴한다면 한반도를 미련 없이 포기하고 전쟁에서 손을 들어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37도선에서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으나 패배의식이 팽배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선에서는 막상 후퇴한 유엔군을 추격할 것 같았던 중공군의 움직임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나타나면 이제 어떻게 싸워야할지 난감해 하던 유엔군은 생각과 달리 적이 나타나지 않고 숨 막히는 적막만 전선에 흐르자 오히려 초조해졌습니다. 비록 원주에서 미 제2사단이 선전을 펼쳐 중부전선의 위기를 막아내기도 하였지만 중공군 참전이후 계속된 연이은 패배와 그로인한 후퇴로 사기는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전투보다 군의 사기 회복이 선결문제로 부각되었고 신임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교육을 통하여 전투의지를 회복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하지만 정신교육보다 사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승리였습니다.


  결국 국지적인 승리라도 필요하다고 판단한 리지웨이는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지금까지 나타나기만 기다리던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항공정찰 등을 하였음에도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답답해진 리지웨이는 증강된 1개 연대 규모의 정찰대를 구성하여 위력수색(威力搜索)을 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미 제1군단에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이 배속되어 증강된 제25사단 27연대가 작전에 나섰고 이를 울프하운드(Wolfhound)작전으로 명명하였습니다. 비록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서 실시한 작전이었지만 이것은 6·25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위력수색에 나선 제27연대원 들의 모습]


  1월 15일 아침, 제27연대전투단은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수색을 개시하였습니다. 더불어 밀번 미 제1군단장은 제27연대전투단의 동측방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 제3사단의 1개 연대와 국군 제1사단의 1개 대대를 안성-용인방향으로 진출시켜 수원-용인 간 국도를 차단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이들 작전 참여부대들은 첫날, 적을 발견할 수 없었으나 다음날 아침 수원에 진입하면서부터는 대규모의 중공군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목표가 전투가 아닌 수색이었으므로 군단장은 철수를 명령하였고, 항공기의 공중엄호로 중공군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안전하게 철수를 완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진까지 뚫고 들어가 교전을 벌이며 직접 확인한 위력수색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수원-이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는데 의외로 화력지원과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대규모의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울프하운드 작전이 불과 1개 연대전투단이 겨우 이틀간에 걸쳐 펼친 소규모의 작전이었지만,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겼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제8군 전체가 한번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J.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전선의 상황을 직접 파악한 콜린스 는 처음 한국에 도착하였을 때와 달리 희망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야전지휘관들에게 주지시키려 한국을 찾았지만 울프하운드 작전 결과는 자신들이 너무 중공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고난의 시기를 극복한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정일권과 작전을 검토하는 리지웨이)


  콜린스 대장은“중공군을 군사적으로 응징한다”는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의 확고한 신념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철군이냐 확전이냐의 갈림길에 섰던 유엔군은 비록 확전은 아니더라도 철군을 하겠다는 패배적인 생각을 접게 되었습니다. 콜린스 대장이 이후 그의 자서전인 『평화시의 전쟁(War in Peacetime)』에서 “철군문제의 변화를 가져다준 장본인은 바로 리지웨이 장군이었다”라고 하였을 만큼 리지웨이의 신념과 그가 주도한 울프하운드 작전은 비록 작았지만 전쟁의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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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윤곤 2010.06.21 1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정일권과 작전을 검토하는 ← 오타네요 ^^

  2. 박애경 2010.06.21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정말 이사진과 글을 읽고 정말많은것을 알게되었다 전말 감동이다

  3. 이상용 2010.06.22 04: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아는 6.25 전쟁 생생한 전설 같은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들!!



    내 나이 60세 우리들이 이야기 하는 나이로는! 나는 1951년1월24일(음력) 에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여 났다.

    정확히 말해서 약력으로 1951년 3월 1일에 경기도 양평군 지역의 어느 탕광 혹은 금광 터널에 안에서 태여 났다 .



    이때가 우리 한국 전쟁이 중공군에 개입으로 UN군이나 국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하여 UN군이나 국군이 엄창난 희생을 초래 하였던 시기였을 것이다. 왜냐 하면 압록강 까지 진군한 국군이나 미군이나 속절없이 밀렸기 때문이다.

    내가 태여 나기전 약 1개월전에 1951년2월경 어머님는 날 배속에 만삭이 였던 그때였다. 얼마전에 6개월전에 피난을 같다가 다시 북한 공산군 후퇴하기 시작하고 국군이 회복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집으로 돌아 온 때였다.



    우리 집은 6번국도 양평에서 강원도 홍천 방향 24km 지점 양평군 청운면 비룡리 국도변. 6번국도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홍천 과 횡성의 갈림길 )에서 서울쪽으로 3Km 지점.

    그래서 아버님 이제는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먹을것도 없고 하여 집 돌아가 땅속에 감추어 놓있던 식량을 찾아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 온것이다.



    아버님은 집으로 돌아 와 보니 집은 완전히 망거지지는 않았던것을 확인 하고는 뒷 마당 외진곳에 감추어 놓앗던 곡식을 찾아 모처럼 밥을 가족과 해드시고 너무 곤역스럽워던 피난 생활에 지처던 가족과 초 저녁밤을 보내려는 순간에 마지막 남아 있던 북한괴뢰군 패잔병 7명이 후퇴 하다가 우리 집으로 들어 와 총으로 위협하며 음식를 요구하며 쉬여 갈 방을 요구하여 남아 있던 보리쌀로 저녁을 하여주고 방 하나 를 제공하여 우리 가족 5은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새벽 2`3경에 우리 방문을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아주 낢은 국군복장의 국군2명이 들어 오면서 작은형님의 귀에다 대고 "우리는 국군 특수부대 요원이며 함흥부터 여기까지 2명이 간신이 살아왔다면서 혹시 여기 북한군이 어디있는지 안느냐'물어보는 것이 였다.

    형님은 너무 당황 스럽고 무섭고하여 아무리 소리 않고 손가락으로 저쪽 방에 북한군 괴뢰군 있다는 손짓으로 알려 주니 그들은 고양이 처럼 움직여 옆방으로 가던이 요란스러운 총소리가 들리던이 잠잠한 후에 그들이 다시 와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지금 남쪽으로 갑니다" 어디 쯤 국군이 있는것 같으냐?" 아버님이 그들에게 "여기서 30리 정도 가면 지평리 인데 거기쯤 국군이 있을거라고 알려 주었던것이다".



    그때 그들은 눈에 살기가 돌았으며 두 눈에서 불빛이 나듯 두눈이 빨간 눈동자 같았다고 회고 한다. 형님은 회고 하기를 이들 국군은 몇몇일을 굶은것 같아서 음식을 해주겠다고 어머님이 이야기 하니 그 국군들은 이 집에서 총소리가 났으니 당신 가족도 위험 하니 피하기 바란다면서 미안하다면서 그들 국군2명은 즉시 움직여 어둠속으로 살았젔다.



    그 다음 날까지 우리 가족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아버님은 동력이 트기전에 북한괴뢰군 7명의 시체를 뒷산 구덩이에 파뭇었다.



    형님은 지금도 그 국군 2명이 살았 갔는지 굉장히 걱정하시던 것을 지금도 그 6.25 전쟁의 잔상이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군 선배님들이 6.25 전쟁시 얼마나 어려운 전투를 하였는지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용 5기생

  4. 이상용 2010.06.26 0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아는 6.25 전쟁 생생한 전설 같은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들!!


    내 나이 60세 우리들이 이야기 하는 나이로는! 나는 1951년1월24일(음력) 에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여 났다.

    정확히 말해서 약력으로 1951년 3월 1일에 경기도 양평군 지역의 어느 탕광 혹은 금광 터널에 안에서 태여 났다 .

    이때가 우리 한국 전쟁이 중공군에 개입으로 UN군이나 국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하여 UN군이나 국군이 엄창난 희생을 초래 하였던 시기였을 것이다. 왜냐 하면 압록강 까지 진군한 국군이나 미군이나 속절없이 밀렸기 때문이다.

    내가 태여 나기전 약 1개월전에 1951년2월경 어머님는 날 배속에 만삭이 였던 그때였다. 얼마전에 6개월전에 피난을 같다가 다시 북한 공산군 후퇴하기 시작하고 국군이 회복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집으로 돌아 온 때였다.

    우리 집은 6번국도 양평에서 강원도 홍천 방향 24km 지점 양평군 청운면 비룡리 국도변. 6번국도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홍천 과 횡성의 갈림길 )에서 서울쪽으로 3Km 지점.

    그래서 아버님 이제는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먹을것도 없고 하여 집 돌아가 땅속에 감추어 놓있던 식량을 찾아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 온것이다.


    아버님은 집으로 돌아 와 보니 집은 완전히 망거지지는 않았던것을 확인 하고는 뒷 마당 외진곳에 감추어 놓앗던 곡식을 찾아 모처럼 밥을 가족과 해드시고 너무 곤역스럽워던 피난 생활에 지처던 가족과 초 저녁밤을 보내려는 순간에 마지막 남아 있던 북한괴뢰군 패잔병 7명이 후퇴 하다가 우리 집으로 들어 와 총으로 위협하며 음식를 요구하며 쉬여 갈 방을 요구하여 남아 있던 보리쌀로 저녁을 하여주고 방 하나 를 제공하여 우리 가족 5은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새벽 2`3경에 우리 방문을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아주 낢은 국군복장의 국군2명이 들어 오면서 작은형님의 귀에다 대고 "우리는 국군 특수부대 요원이며 함흥부터 여기까지 2명이 간신이 살아왔다면서 혹시 여기 북한군이 어디있는지 안느냐'물어보는 것이 였다.

    형님은 너무 당황 스럽고 무섭고하여 아무리 소리 않고 손가락으로 저쪽 방에 북한군 괴뢰군 있다는 손짓으로 알려 주니 그들은 고양이 처럼 움직여 옆방으로 가던이 요란스러운 총소리가 들리던이 잠잠한 후에 그들이 다시 와서 "고맙습니다."우리는 지금 남쪽으로 갑니다" 어디 쯤 국군이 있는것 같으냐?" 아버님이 그들에게 "여기서 남쫒으로 30리 정도 가면 지평리 (6.25 전사 "지평리 전투") 인데 거기쯤 국군이 있을거라고 알려 주었던것이다".

    그때 그들은 눈에 살기가 돌았으며 두 눈에서 불빛이 나듯 두눈이 빨간 눈동자 같았다고 회고 한다. 형님은 회고 하기를 이들 국군은 몇몇일을 굶은것 같아서 음식을 해주겠다고 어머님이 이야기 하니 그 국군들은 이 집에서 총소리가 났으니 당신 가족도 위험 하니 피하기 바란다면서 미안하다면서 그들 국군2명은 즉시 움직여 어둠속으로 살았젔다.

    그 다음 날까지 우리 가족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아버님은 동력이 트기전에 북한괴뢰군 7명의 시체를 뒷산 구덩이에 파뭇었다.
    형님은 지금도 그 국군 2명이 살았 갔는지 굉장히 걱정하시던 것을 지금도 그 6.25 전쟁의 잔상이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군 선배님들이 6.25 전쟁시 얼마나 어려운 전투를 하였는지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용 3사학교5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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