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6·25 포토 에세이 해군사관학교

생생! 6·25/퍼싱의 군사 이야기 2010.06.29 08:24

   국제 관함식에서 항진하는 KDX-Ⅲ "세종대왕함". 6·25 전쟁 당시 백두산함 등 중고 함정을 구입해와야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출발했지만 그 와중에도 강력한 대양해군을 꿈꿔온 이순신 장군의 후예들은 이제 아시아에서 그 누구도 쉽사리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해상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의 요람으로 굳건히 진해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해군사관학교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 4년간 지·덕·체 수련과정을 거쳐 조국 해양수호의 간성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입니다.
  4년간의 교육과정을 거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생도들은 소위로 임관, 약 5년 간의 의무복무를 거친 후 본인의 희망에 따라 전역 및 진급을 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급 구축함인 DDH-972 "을지문덕함". 창군 초기 선박 한 척 없는 열악한 여건에서 시작한 해군사관학교 졸업생들의 헌신적인 노고로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은 KDX-Ⅲ를 비롯한 우수한 성능의 구축함들을 다수 장비한 강군으로 거듭났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징인 귀선 앞에서 담소 중인 생도들. 1999년 여성 생도가 입학한 이래 오늘날 해군사관학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국 수호와 해군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군사관학교는 어떻게 개교하고 발전해왔을까요?
  격동의 19~!20세기, 영국 해군의 영향을 받아 강력한 해상 강국을 구축했던 일본의 압제를 받아왔던 전훈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손원일씨는 후배인 정긍모씨와 더불어 해군의 창설에 대한 강한 열망을 꿈꿔왔습니다.
  그리고 해방 6일 후인 8월 21일, 마침내 서울 안동교회에서 해사대를 결성한 것을 시초로 조직을 더욱 보강해 "조선해사협회"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정보통신의 중요성에 따라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은 노트북과 PMP, MP3 등의 장비 활용에도 능숙합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1945년 11월 11일, 마침내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이 창설되고 미 군정법령 제42호에 의거, 군사단체로 보장받음에 따라 대한민국 해군의 기초가 다져졌습니다.
  해방병단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이들을 교육시키고 지휘할 장교의 양성은 필수가 되었고 이에 따라 1946년 1월 17일을 기해 현 진해 군수사령부 자리에 "해군병학교"가 설립되고 초대 교장으로 손원일 중령이 취임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해군을 이끌어갈 호국 간성을 양성하는 해군병학교의 교육과정과 군기는 매우 혹독했고 이는 동년 2월 28일에 입학한 제1기생 113명 중 54%인 62명만 졸업한 점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1946년 6월 15일, 해방병단이 해안경비대로 개칭되자 해군병학교 역시 조선 해안경비대 사관학교로 개칭되었고 1947년 2월 11일에는 보다 효과적인 훈련 및 교육에 유리한 현 해군 교육사령부 기술병과학교 자리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후 조선 해안경비대 사관학교는 "해안경비 대학", "해사대학"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며 마침내 1947년에는 노산 이은상 선생이 작사하고 손원일 교장의 부인 홍은혜 여사가 작곡한 교가가 생도들에 의해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해군사관학교 설립에 기여한 초대 교장 손원일 중령과 교가를 작곡한 부인 홍은혜 여사

  1948년 10월 25일,  해사대학은 망해봉 기슭에 위치해 광활한 해역을 관제할 수 있는 현재의 옥포만으로 증축, 이전했고 11월 26일 해군대학으로 교명을 개칭합니다.

  그리고 1949년 1월 15일, 마침내 "해군사관학교"로 개칭됨과 동시에 대통령령 제87호에 의거해 해군사관학교 설치령이 제정됨에 따라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을 거듭해온 학교가 마침내 일반대학과 동등한 수준의 교육기관으로 인정되는 법률적 보장을 받음과 동시에 명실공히 조국해양수호의 대임을 맡을 해군장교 양성의 요람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해군사관학교는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정규 교육과정을 일시 중단하고 해군사관학교 전투사령부를 발족했습니다.
  1950년 7월 13일, 아직 교육을 받고 있던 해군사관학교 4, 5, 6, 7기 생도들은 창원 지구 전투와 해상 작전에 투입되어 북한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적잖은 생도들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대신 전쟁 기간 중 서울지역의 권위있는 학자들이 대거 진해 인근으로 이주함에 따라 우수한 교관을 확보할 수 있게 됨은 물론 미 해군 고문단의 도움으로 교육의 질적 발전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참혹했던 3년 간의 전쟁이 휴전되자 다시금 교육기관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해군사관학교는 1953년 8월, 4년제 교육과정을 위한 교과과정을 마련하는 한편 1955년 10월 1일을 기해 사관학교 설치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1956년부터 사관생도들은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고 이학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위풍당당한 행진

  이러한 교육과정의 발전에 발 맞춰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본격적인 시설 확충에 착수한 해군사관학교는 1955년 통해관, 1958년 도서관 완공 등 기본적인 교육시설을 확보했습니다.
  여기에 장래 해군장교로서 일선에서 병사와 하사관들을 지휘할 사관생도 생활이 보다 발전적이고 체계적으로 제도화되었는데 우선 적성평가제도, 명예제도, 군기장 제도, 무감독 시험제도, 옥포회 활동 등 해군사관학교만의 독특한 전통이 바로 이 시기에 정립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주목할 부분은 바로 1956년 3월 1일에 처음 시행된 천자봉 구보!
  해군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할 코스인 천자봉 구보는 생도가 단독군장으로 산악구보를 하며 천자봉을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사관생도 교육 및 생활/복지를 위한 각종 시설들이 건립되었는데 우선 생활관인 세병관과 면회 및 복지를 위한 옥포회관, 그리고 도서관과 합포관, 교회, 체력단련장, 고 이인호 동상 등이 완공되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과학관, 제2 통해관, 호국사, 생도사, 생도식당, 웅포관, 실내 체육관이 건립되었고 옥포회관이 증축되었습니다.
  이어 1980년대에는 거북선 복원 및 통해로, 충무공 이순신 제독 동상 건립, 전산실, 대형 컴퓨터실, 중앙도서관이 건립되는 한편 해양체육을 위한 주정고와 수영장이 기공되었습니다.



 
원양 함정실습 중인 4학년 생도들. 졸업을 앞둔 생도들은 이제 전문적인 해군 장교로서 첫걸음을 내딜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1990년대에 들어 해군사관학교는 박물관, 교훈탑, 사관생도들의 복지시설인 벽파회관, 그리고 OCS 생활관 등을 건립했고 2000년대에 들어 충무관과 인호관, 그리고 생도사를 신축하는 한편 해군사관학교의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시켜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교육 중인 해군사관학교 생도들.
  초창기 칠판과 분필로 시작했던 교육은 오늘날 첨단화된 디지털/시청각 교육장비와 강의실의 도입으로 더욱 효과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사관생도들의 교육은 어떻게 이뤄질까요?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군 과학화 지시에 따라 과학화 교육 계획을 수립한 해군사관학교 교육과정은 기존의 이학사에 이어 공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습니다.
  2학년으로 진학한 생도들은 해군과학( 이학사 )과 해군공학( 공학사 )로 나뉘어 항해와 기관병과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해군사관학교가 기존 일반대학과 같은 수준의 전공교육을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1970년대의 교육분야 변화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시대상을 반영한 이념교육을 바탕으로 한 정신교육이 교과개편에 다수 반영된 점과 1976년 1월 17일 개교 30주년 기념사업으로 "117 사업"계획을 수립, 일대 개혁을 실시함으로써 신교과과정이 추진되었다는 것입니다.
  신교과과정은 학술적인 면을 충실하게 보완함으로써 기존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학사학위 소지자로서 손색없게 함은 물론 전문 장교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1, 2학년은 기초과목을 습득하고 3학년은 전공을, 4학년은 전공과 군사학 및 실습과 실기 위주의 교육을 받도록 세분화되었습니다.
  해군사관학교의 교육과정 중 가장 독보적이면서도 자랑할 만한 것은 바로 생도 4년간 교육의 총 결산으로 매년 실시하는 순항훈련입니다.
  졸업을 앞둔 4학년 사관생도들에게 항해술 및 각종 현장체험훈련, 그리고 임관 전 함상 적응능력 배양을 위해 실시하는 순항훈련은 실무 적응능력과 지휘역량을 배양하고 세계화 시대에 맞춰 국제적 식견과 안목을 갖춘 해군장교로서의 자질을 축적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1954년 해군사관학교 9기생부터 실시한 순항훈련은 60년대까지 동남아시아 지역을 순항하는데 그쳤지만 1970년대에는 미국과 중동, 아프리카 지역을, 1980년대엔느 샌프란시크코, 벤쿠버, 괌, 미드웨이,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피지, 라바울 등 20여 지역을 순항함으로써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의 국력을 실증했습니다.

  새 천년을 맞이해 해군사관학교는 시대의 변화에 앞장 서 오늘도 학교를 새롭게 재창설한다는 각오로 정예 호국간성 육성을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해군사관학교가 어떤 기관인지 연혁을 살펴봤으니 6·25 전쟁 당시 34명의 전사자를 냈던 본교에 남아있는 6·25 전쟁의 흔적을 찾아 직접 가보는 것이 좋겠죠?

  다행히 해군본부 주최로 월간 디펜스타임즈 코리아와 자주국방 네트워크 회원들이 참여한 2010 안보현장 견학 행사를 통해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이자 전사학 교수인 조덕현 중령님(
해군사관학교 40기 )의 상세한 설명 덕분에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6·25 전쟁 관련 유물과 손원일 교장과 관련된 각종 설명을 경청할 수 있었습니다.


 
2010년 6월 24일, 해군본부 주최로 월간 디펜스타임즈 코리아와 자주국방 네트워크 회원들이 해군사관학교를 견학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조덕현 중령님의 안내로 해군사관학교의 표상인 귀선에 대한 설명을 경청 중인 자주국방 네트워크 회원 및 월간 디펜스타임즈 코리아 취재진

  해군사관학교에서 1999년에 복원한 귀선.
  오늘날 귀선에 대한 각종 논란이 분분하지만 조덕현 중령님의 설명에는 현재 이 형태가 가장 확실하다고 합니다

  귀선 내부는 당시의 형태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고 선체의 경우 나무못을 실제로 박아넣는 등 적잖은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내부의 6·25 전쟁 및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한 해군과 해병대의 유품 및 전시물들을 견학하는 자주국방 네트워크 회원들

  아쉽게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는 6·25 전쟁 관련 유물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가치가 큰 유물은 하나 발견했습니다

  이 그림은 바로 유명한 백두산함의 대한해협 해전도입니다.
  당시 한국해군이 보유한 전투함 중 강력한 축에 속했던 백두산함이지만 북한의 무장 수송선 역시 중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목숨을 건 사투였고 결국 적함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백두산함의 활약으로 후방으로 침투해 교란작전을 펼치려했던 북한군의 작전 기도는 무산되었고 이후 부산항을 통해 미군의 물자보급과 병력 증원이 이뤄져 전황이 역전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승리의 주역이었던 백두산함은 아쉽게 실물은 보존되지 못하고 모형으로만 남아있습니다.
  척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어링급 구축함보다도 작은 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두산함으로 조촐하게 시작한 한국해군은 현재 KDX-Ⅱ에 이어 이지스 구축함인 KDX-Ⅲ를 보유한 막강한 전력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이어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실 겸 조덕현 중령님의 연구실에서 각종 문의사항에 대한 문답이 이어졌습니다.

  해전사를 전공하신 분답게 서구해전사 및 6·25 전쟁 당시 해전사에 대한 다양한 질문이 오고갔습니다.
  특히 영국의 빅토리호나 미국의 컨스티튜션호처럼 백두산함도 보존되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드러내셨는데 그 와중에 바로 이 부근에 백두산함의 마스트가 보존되어 있다는 제보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조덕현 중령님의 제보에 따라 직접적으로 부두로 달려간 결과 발견한 백두산함의 마스트.
  이것이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백두산함의 유일한 흔적입니다.

  비록 백두산함의 실물은 볼 수 없었지만 그에 못잖게 귀중한 정보와 사료들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리였고 호국 간성의 양성을 통해 강한 정예 해양강국을 꿈꾸는 대한민국 해군의 미래를 가늠하는 좋은 자리였습니다.
  6·25 전쟁은 우리에게 큰 비극이었지만 해군에게는 보다 큰 미래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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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호 2010.07.01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퍼싱님!!

    대한해협 해전도는 처음보는데 아주 멋지네요

    잘 보고 갑니다.

  2. 강준일 2010.07.01 1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주국방 네트워크 회원 분들 여럿 보이네요

    즐거운 시간이셨겠습니다.

    멋진 사진 에세이 잘 보고 갑니다

  3. 강효섭 2010.07.02 2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해군사관학교 견학 기회 있으면 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귀선 사진 잘보았습니다.

    특종 건지셨네요 ^^

  4. 박소정 2010.09.28 2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알고 싶었던 정보들이 많네요

  5. 박소영 2010.10.02 1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사진과 자료를 보니 진해에 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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