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비들 고사시킨 전투 경찰의 매복 전술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05 09:50


6·25전쟁 후, 한국 전투 경찰의 활약은 의외로 알려져 있지않다.


내가 기억하는 전투경찰의 활약상을 소개한 책자는

불과 서 너 권 밖에 되지가 않다.

그러나 6·25전쟁 전후  경찰 전사자는 일만명이나 되었었다.


월남전 8년간 전몰 파월 장병이 5천명임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 희생의 크기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전투경찰은 육군에 비하면 훈련도 장비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한창 때의 공비들은 경찰 전투력을 우습게보기도 했었다.


한때 지리산 일대에 일 만 명이나 세를 불려 기세를 올린

공비들에게 연타를 안겨 그 세를 꺾은 것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던 육군이었지만 6·25전쟁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 간을 물고 늘어져 소멸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 주인공은 이 전투 경찰들이었다.


한국 경찰은 육군처럼 강력한 병력과 화력이 없었기에

산야를 쓸어내리는 듯한 대규모 토벌을 자주 실시할 수가 없었다.



라이프 지의 한국 경찰 기사에서 빌려온 사진을 다시
싣는다. 부상 공비를 운반하는 전투경찰.
-------------------------------------------------


그런 형편이었던지라 빈약한 병력으로 공비들에게 타격을 주는

전술을 개발해내고 또 그 전술은 효과를 발휘하여

공비들을 실핏줄을 토막토막 잘라 말려죽이듯 서서히

섬멸해갔다.

전투 경찰의 전술은 경영학에서 말하는 비용대 효과의

절대 기능을 발휘했다고 하겠다.


한국 경찰이 일선에서 몸을 부딪혀가며 창안하고 개발해낸

그 공비 말려죽이기 전술은 ‘매복 전술’이었다.


해방 후부터 경찰에 몸담으며 공산당 무리들과 싸웠던

김두운 선생의 공비 토벌 수기‘지리산 호랑이' 중의
일부를 소개한다.


김두운 씨는 일본 중앙대학교 재학 중 일본군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육군 소위로 근무하다가 귀국하자 경찰에 투신했다.



김 두운 서장-1951년 무주 경찰서장 시절
--------------------------------------


그 분의 수기에서 식량 약탈을 자행하고 귀소(歸巢)하는

부안군의 공비 일당을 매복 섬멸했던 작전을 자세히
기술(記述)하고 있다.

여기서 한국 경찰의 공비 소탕 매복 전술을 엿 볼 수가 있다.


그 분이 전북 부안 경찰서 경무 계장으로 근무하던 1949년

늦은 가을철이었다.


김두운 선생은 타 경찰서에서 이미 공비 토벌을 경험하며

자신 나름의 공비 토벌 전술을 터득한 상태였다.


경찰 입문 이래 호남 일대에 공비들이 준동하자
아무 군사 훈련도
실전 경험도 없었던 간부들은 단지
일본군 부대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공비 토벌을 
떠 맡겼다.

그는 전북 도경의 기동대장으로 임명되어 토벌에 나섰다.


군 경험이래야 일본군 고사포 부대에서 약간 근무했을 뿐이었던

김두운 씨는 부하들을 데리고 우왕좌왕 산을 쏘다니며

허탕을 치기도 하고 기습을 당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작심하고
연구를 거듭하여
매복 섬멸전의 비법[?]을 개발해냈다.


--------------------------------------------------------

공비 토벌의 초창기에 여러 일선 경찰서에 매복

전술만이 토벌의 최고 유효 수단이라는 의견은 떠돌았었다.


그러나 표준 교안이 없어서 일선 전투 경찰 지휘관들은

김 두운 씨처럼 연구와 실전 경험으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비방[?]을 개발해갔다

--------------------------------------------------------

김두운씨는 자신이 개발할 매복 전술에서 전투요령을
복격술이라 이름짓고 아래와 같이 부하들을 훈련시켰다.

첫째,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자세를 낯춘다음
오른 손바닥을 귀에 대고 다가오는 소리를 감지한다.

둘째, 기동선을 따라오는 적의 순서와 우리의 매복 순서에
맞추어 한 명이 적 한 명만을 겨냥한다.

세째, 쏴의 신호와 동시 단 한발만 발사하고 함성없이
그대로 각자 조준했던 적에게로 돌진해 생포,또는
확인 사살을 한다.

넷째, 도망치는 적은 너무 멀리 추격하지 않는다.

----------------------------------------------------
여기서 관심 있게 볼 대목은 그가 공비들이 통과할 목을

미리 집어내고 매복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마치 돼지 명포수가 목을 잡는 요령과 비슷해서

흥미롭다,


아래는 김 두운씨의 글이다.

전북 도경 기동대장에서 부안군 경무계장으로
전출되었을 때 겪은 전투를 회상한 것이다.

-----------------------------------------------------

사살 된 공비 시체 확인
----------------------


1949년,늦은 가을 저녁.

일과를 끝내고 신도종 서장이하 간부들이  바둑을 두고 있던

전북 부안 경찰서에 부안군 산내면 지서로부터 중계리에 공비가
출현했다는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6·25전쟁 이전 부안 관내에는 자생한 소규모 공비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남로당 부안 군당으로서 총인원은 9명 이었다.

나중에 지리산 일대에서 기세를 올리던 공비들의 규모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민폐가 극심했다.


남로당이 불법화되고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입산(入山)한

공비들로서 이들은 다른 남로당 군당들에 비하면 골수분자들로

상당히 투쟁적이었다.

[전쟁 전 입산자들은 구빨치로 분류된다.]


여순 사건 뒤에 체포된 14연대 반란병들.
이들은 대거 지리산으로 도주해서 신빨치의
주력이 되었다.

-----------------------------------------


이들은 변산의 기상봉 아래 있는 천연암 근처에 주 아지트를
두고
부근 마을, 특히 산내면 중계리를 ‘민주 부락’[ 이 당시

민주란 말은 공산주의자들이 전문으로 쓰던 용어였다.- 나중에
남한
군경들에게 통비 부락[通匪 部落]으로 불리게 된다.]으로
장악해 놓고
열흘에 한번 정도 약탈을 자행했다.


거리 관계 때문인지 이들은 특히 산내면 일대에 심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부안 군당의 공비들은 외팔이 부대로 통하고 있었다.

군당의 책임자는 장순언의 장남인 장모[張某]였다.

그는 고향인 부안군 산내면 진백리에서 진백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진백 수산 강습소를 나와 남로당 부안 군당에

입당, 산에 들어갔다.


말단 대원이던 시절 그는 경찰 토벌대와 총격전을

벌이다 머리에 부상을 입고 왼쪽 팔은 절단이 되었다.

그해 5월 경 그가 군당 책임자가 되면서 부안 군당을

외팔이 부대라 칭하게 되었다.


국민 학교 시절 그이 생활 기록부에는‘두뇌가 명석하고 비교적

활발함' 이라 적혀 있었다.


공비 토벌은 각 경찰서 경비계장의 업무였다.

공비 출현의 보고가 접수되었는데도 토벌작전에 경험이 없는

경비계장은 우왕좌왕했다.


-------------------------------------------------------

서장은 출현 공비의 토벌 작전과 지휘를 경험자인 경무계장

김두운 경감에게 요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단조로운 경무계장의 업무에 지루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김두운 경감은 이 지시를 반갑게 수락했다.

-------------------------------------------------------

전투 경찰이 주요 도로에 설치한 요새
-----------------------------------

나는  먼저 경비계장이 가져온 5만분지 1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공비들의 기동선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으므로 무턱대고

출동할 수는 없었다.


일단 주 아지트가 있다는 천연함에서부터 지도상에 붉은 선을
긋고
보니까 다음의 예상 출몰 지역은 상여봉 밑 마을이나
상서면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는 것이 손금 보듯 빤히
들여다보였다.


---------------------------------------------------------

붉은 그리스 펜으로 공비 근거지와 출현 지점을 직선을 그어

연결하고 이 직선 주변을 분석해서 공비가 필히 통과 할 목을
찾아내는 것이 김 두운 씨의 목잡기 비법의 첫 단계였다.

---------------------------------------------------------



부안군 지도
-----------


그는 경비계장에게 정예 10명만 선발하라고 부탁했다.


쫓는 쪽의 입장에선 적의 2,3배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지만 이 당시의 공비, 소위 구빨치 시대에는
어느 지역이나
무장을 절반도 못해 있던 형편이었다.


공비들은 두 부락을 그냥 지나쳤으므로 다음 부락 어디에선가는

약탈을 자행할 것이었다.


늦더라도 다음 출몰 시까지 기다려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디에 나타나든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그때 출발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공비들은 맨몸으로 하산할 때는 시간당 약 6킬로미터를
보행하고
약탈을 마친 뒤 짐을 지고 돌아 갈 때는
3 킬로미터도 보행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지트로 돌아가는 예상 기동선만 정확히 판단한다면

시간은 넉넉했다.

적은 현재 아지트에서 약 8 킬로미터 이상 벗어나 있을 터였다.


시간은 저녁 7 시가 이미 지나 있었다.

예상했던 상여봉 아랫마을을 지나쳤거나 현재 약탈이
진행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신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개암사 아랫 부락이리라.

바드재를 넘어 보안면 쪽으로 갈 확률은 없었다.

지도상 그쪽은 산이 얕고 민가가 많았다.


나는 저들의 목적지가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고 단정하고

대원들에게 식사를 하도록 했다.

시간은 충분해 보였다.

우리도 서장실에서 식사를 마쳤다.


그 때였다.

다시 비상 전화통이 비명을 질렀다.


경비계장이 화닥닥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상서면 지서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10리 떨어진 개암사 쪽에서 계속 총성이

들린다는 보고였다.

출현 지역은 적중했지만 저들의 걸음은 생각보다 빨랐다.


“비상! 비상!”

경비계장은 고함을 지르며 부리나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사찰계장도 따라가 보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즉시 출동했다.


적이 아지트로 돌아갈 기동선은 너무도 빤했다.

저들이 지나쳐 왔던 길을 되밟아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므로

새재를 지나 뱀사골을 거쳐 천연함 아지트에 이르는

기동선을 따라 갈 것이었다.


밤 8시 읍내를 벗어나자 한밤중을 방불케 했다.

도로에서 멀찍이 물러나 앉은 마을에서 듬성듬성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정겨웠다.


차는 밤길을 가르며 출렁출렁 마구 달렸다.

나는 스리쿼터 적재함에 탔다.

조수석에는 행선지를 일러준 사찰주임만 탔을 뿐

경비계장도 적재함에 대원들과 함께 타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차는 길가의 작은 마을 앞을 지나쳐 멈추었다.

이 마을 서쪽 1킬로 지점에 공비 통과의 예상 목인

새재가 있었다.


대원이 가리키는 새재를 보며 나는 후레쉬의 불빛으로

지도를 비춰보았다.


예상이 적중한다면 틀림없는 위치였다

나는 전원을 하차시키고 차를 멀리 대피시켰다.

멀리서 대기하고 있다가 총소리가 나면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영 불쾌했다.

위치로 보아 마을 앞쪽은 불리할 상 싶었다.

적들도 마을을 가로지르지는 않을 터인데

우회 길을 우리의 매복 지점 훨씬 전에서

돌아 버린다면 허사였다.


나는 대원을 이끌고 비탈 밭을 멀리 돌아

마을 끝으로 갔다.


누런 반달이 산위에서 떠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른 고춧대가 서있는 비탈 밭머리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이 가르마처럼 나있었다.


그 길은 밭둑길로 이어져 희미하게 마을로 뻗어있었다.


나는 그 곳 밭머리를 잠복지접으로 결정하고 10여 명의 대원들을

일일이 위치를 지적해서 순서대로 배치했다.

마른 고춧대가 무성하게 서있어서 완벽한 은폐가

가능한 좋은 잠복지점이었다.


거기다 둑길 아래의 위치는 밭뙈기들은 아래로 비탈이

져 있어서 밭고랑에 엎드려 바라보니 둑길은 그대로 달빛아래

다 노출이 돼있었다.

또한 귀를 땅에 대고 기울여 접근해오는 적의 부대를

청음[廳音]으로 감시할 필요도 없었다.


달빛 아래 멀리 마을까지도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 보였다.

나는 절대 정숙을 명하고 종대(縱隊) 잠복 병력의 중앙인
5번과 6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엎드렸다.


그 자세로 몇 십 분이 흘러갔다.

※ 2편으로 계속 클릭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홍이아빠 2010.07.06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 서장 노년 모습입니다.

  2. 홍이아빠 2010.07.06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 서장약력입니다.

    약 력

    1923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한 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19사단 입대, 일본 육군소위입명, 귀국 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전북특경대장등, 정읍·무주·남원·충북 영동·이리·부산 동래 경찰서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정읍군수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3. trading account 2012.04.16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19사단 입대, 일본 육군소위입명, 귀국 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전북특경대장등, 정읍·무주·남원·충북 영동·이리·부산 동래 경찰서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정읍군수를 마지막으로 공

  4. allstate auto insurance corp 2012.05.26 1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그냥 캔트 정지 이것을 스캔. 그것은 결과적으로 내가 단순히 모르는 사실들이 즐비, 정말 대단하고 있습니다. 나는 남자와 여자가​​ 현재 그것에 우리 모두의 여러 가장자리를 보여주는, 그 똑똑한 방법으로이 문제에 대해 얘기되어보세요 감사 해요. 당신은 멋진 블로거에요. 당신은 그것을 계속해야합니다. 우리는 어렵게오고 왠일 읽어 그만 넣어 찾습니다.

  5. carinsurancecompany push 2012.05.26 1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놀라운 정보는 참을 수! 저는 개인적으로 확실히 그것을 통해 읽기, 사랑, 당신은 가능성이 가장 높은 멋진 창조자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장래에 얼마를 반환합니다 모든 중 귀하의 사이트를 즐겨찾기에 유도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작성하여 환상 계속 다른 사람을 촉진해야 멋진 저녁 보유!

  6. 김현석 2013.03.25 2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당히 좋은 글이지만 일제 때부터 항일투쟁으로 빛났던 좌익세력을 죽인 건 크나큰 오류였습니다
    특히 6.25를 전후해 들불처럼 일어났던 반일,반미,반이승만,반독재,민주투쟁은 우리 역사에 두고 두고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남조선노동당 부안군당의 혁명 전사들은 죽인 김두운 서장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국제정세는 미국의 무한독주가 무너지고 러시아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또 아프간,이라크의 저항이 빛을 봐 미군들이 하루에도 수 십 명씩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미국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민족해방 인민해방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참된 민주해방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려면 미국의 저항이 거셀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미국을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돈과 권력을 쥔 세력들의 마지막 발악이 거셀 텐데 그럴 수록 우리는 더욱 단결해 이 자들은 저 미국으로 쫒아내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단결합시다 투쟁합시다 항일세력들을 죽이고 가두고 고문하던 반민주,친일친미 세력들을 반드시 처단합시다 그리고 역사의 장대한 길에 이자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후세들에게 진실된 역사들 가르칩시다
    투쟁합시다 투쟁 얼어죽고 맞아죽고 굶어죽을 때까지 싸웁시다 투쟁

    • ㅉㅉ 2014.03.25 0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 미쳤네. 민주주의도 좋지만, 이런 놈 헛소리 해대는 거 보면 진짜 어느 정도 민주주의도 제한해야 한다. 꽁꽁 잡아 북한으로 보내던지. 투쟁? 혁명전사? 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