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반격 대첩-동락리 전투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26 08:37

이번  포스팅 글은 한강 이북에서 기습을 당해 참패를
당하고 후퇴하던
국군이 전쟁 발발 12일 만인 1950년 7월7일
충북 진천군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 2 대대가 2개 중대도
안 되는 병력으로
적 15사단 1개 연대를 기습해서 전멸시킨
전투를 소개하는 글이다.


전략의 본질이 공격이고 그 이상적인 형태는 기습임을

상기해보면 동락리 전투야 말로 대첩(大捷)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손색없는 6·25전쟁 최대의 완벽한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독립문에 선전물을 붙이는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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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한강 이북에서 대패를 하고 미국을 위시한 여러 우방국으로

부터 그 전투력에 불신을 사던 한국군이 한판의 대승으로
면목을 일신한
전투이기도 하다.


승리의 주역에 대해서는 몇 주 전 이 블로그에 포스팅했었다.

춘천 시 외곽 원창고개에서 북한군에게 기만을 당해 다 잡았던

완벽한 승리의 영예를 내놓고 철수했던 6사단
김종수 대대[7연대 2대대]다.


대승과 대패를 오갔던 풍운아 6사단의 부대답게 2대대는
대승을
동락리에서 거두고 실추한 위신을 당당히 회복하였다. 
[당시 충북 음성군 신니면 동락리, 현재는 충주시]



서울 점령후 한강을 도강하여 남하하는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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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에 대한 기록과 설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1960년대에 아직 전투의 기억이 생생했던 김종수

[욱군 중장-수산청장역임]장군이 일본 방위대학의

사사키 하루다카 씨[한국전쟁 전문가]에게

직접 회상한 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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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임부택 연대장으로부터 가엽산에서 644고지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개하기 위해서 산에 오르자 도중에 큰 사찰이 있어 많은

피난민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부녀자이며 멍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약간 세련된 느낌의 아가씨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쏘아 보고 있음을 느꼈다.


마음에 걸렸으므로 정보장교에게 물어보게 한바, 그녀는

동락국민학교의 교사라고 신분을 밝혔다. 말을 걸자

“지난 날에는 국군을 태산같이 믿고 있었는데

지금은 무슨 꼴이냐 ?“하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 같은 고생을 시키느냐?”

하고 거리낌 없이 울기 시작했다는 보고였다.


나는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슴이 죄어지고
기분이 무거워졌다.

춘천에서 이곳까지 후퇴하는 도중에도 무수한 피난민의
참상을 보고
가슴이 아팠는데 국민으로부터 직접 이같이
후퇴의 책임을 추궁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때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어떻게라도 전쟁에는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이르고 결의에 불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답답한 심정으로 고지에 올라 진지 편성에 착수했다.


당시의 대대 실 병력은 300명 정도였었고 시각은

오후 4시경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대원들이 참호를 파기 시작했으므로 망원경으로
산 아래를 둘러보자
적의 대부대가 동락국민 학교 교정에
모여 있었다.

[민간인이 달려와서 제보했다는 설도 있다.]


북진하는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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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나 인원수는 대충 눈어림해보자 실로 1개 연대의 대병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알 수 없었던 것이 이런 대부대가

아무런 경계를 안하고 있었다.


아마 패주에 급급했던 한국군들을 깔보는 분위기가 북한군
부대에 퍼져있던 것이
이런 느슨한 경계태세를 취하게
만든 것 같아 보였다.


적은 15사단이었다.

나는 중대장을 모으고 긴급 작전회의를 하였다.


중대장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이상의 기회는 없다! 공격하자!”고 했다.


확실히 절호의 기회이었으나 내 임무는 644고지의 확보였으므로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축한 방어선을 버리고 산을 내려가서 적을 공격하는 것은

임무 밖이므로 작전 명령의 변경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대와의 통신 수단은 없었으며 지휘소에 내려가

임부택 연대장의 인가를 받을 상황도 아니었다.


더구나 적을 공격하기에 대대는 병력도 부족했고 중화기라고는

81mm 박격포 1문과 50구경 기관총 1 정뿐이었다.

적 대부대를 공격하기에 너무 화력도 약했다.


중대장들은 자꾸만 공격하자고 졸랐다.

망설였으나 마침내 독단으로 공격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이 결심에는 여교사의 꾸중을 들은 것이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피난민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자는 생각도

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3명의 중대장과 작전회의를 통하여 1개 중대씩 적을

3면으로 포위해 들어가기로 했다.


작전은 곧 개시되었다.

사격 개시 시간을 17:00으로 미리 정했다.

시간이 되면 별도의 대대장의 별도 명령 없이 중대장이 알아서

사격명령과 공격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미리 정한 1700 대대의 제 6중대는 집중 사격을 개시했다.

불시에 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우왕좌왕하고 그늘에 숨었으나

교정에 정열 해 놓은 적 포들은 포구를 6중대 쪽으로 돌리고

시사(試射)했다.



소련제 76mm 사단포 방탄 장갑이 있다.
이 포는 독일군에게 노획되어 약간 개조 된 PAK39 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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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김종수 대대장은 즉각 박격포 반장 

신동관[7기-준장예편]
중위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포신만 있고 포판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윽고 북한군 포병은 일제 사격을 시작하고 제 6중대는

폭연(爆煙)에 덮였다.

전멸했는가 싶을 정도로 지독한 포격이었다.


거기에 포판이 도착했으므로 신중위는 직접 조준으로
제 1탄을 발사했다.

사거리는 300미터 정도였다.

놀랍게도 초탄부터 적 포병들의 한가운데 떨어져 폭발하면서

적병 수 명을 날렸다.



미군이 2차 세계 대전시 사용하던 81mm 박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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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신 중위는 효력사로 옮겨 최대 발사 속도로

지역사격을
가하자 적의 포병은 침묵해 버렸다.

그래서 제 6중대와 제 5중대가 협격하자 북한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되어 퇴로를
차단하고 있던
제 7중대의 기관총 소사(掃射)에 포착되었다.


또한 동쪽으로 도망친 북한군은 용원리의
제 3대대에게 섬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3대대의 역할이 크다는 이설도 비중이 크다.]

도망칠 곳을 잃은 북한군은 뿔뿔히 흩어져서 야음을 타고

북쪽 산속으로 궤란해갔다.


다음 8일 날이 새는 동시에 전장 청소했던바 유기시체만
800여구를
헤아렸으며 포로 90여명을 잡았다.


그 중에는 북한 제 15사단의 군수 참모인 모 소좌나

제 48연대 본부 중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포로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이 적은 북한 제 48연대였는데
민간인들로부터 무극리 부근의 국군은 전부 철수했다고
들었으므로 안심하고 동락리에서 연대 정지를 했다.


저녁 식사 후에 다시 행군을 개시할 예정이었으므로
전연 경계하지 않았다.


제 2대대장이하 많은 장교가 전사했다.


대 승리를 올린 제 2대대 용사들은 자기들이 올린 전과에

스스로들 놀랐다.

막대한 전리품이 동락리 국민 학교 주변에 유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76mm포 12문 장갑차 3량, 박격포 35문, 각종 기관총 47정,

소총류는 약 1,000정, 차량 60량, 무선기 기타 다수였다.

또한 기막히게 놀랄 일은 이런 전과를 올린대대의 아군의 손상은

단 1명의 경상자뿐이었다.


6사단은 이 전리품들의 수송을 위해서 사단의 수송수단을
총 동원해서
대전의 수송되어서 시민들에게도 전시가 되었다.

동락리 대승은 거듭된 패퇴에 의기소침했던 민과 군의
사기를 크게 고무했다.

각종 무기는 1점씩 유엔 본부에 보내져 북한 침략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크게 기뻐한 이승만 대통령은 전대대 장병들을
1계급씩 특진 시켰다.

이 전투의 후일담이 여럿 있다.

대패를 당한 15사단 사단장 박성철은 해임되었다.

이 정도라면 군인으로서 그 생명은 끝장이 나겠지만

박성철은 10대 때부터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에 그의

똘마니로 따라 다녔던 관계로 신임이 깊었다.


나중에 다시 중용되어 1971년 최초의 남북 대화 때
남한을
방문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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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없고 무식했던 빨치산 부대 출신 사단장
[박성철, 오백룡, 최용진등]들은 실전에서 국공 내전에서
단련된 중국 해방군 출신 사단장[김웅, 방호산, 이권무]들에
비하면 여러 가지로 역량이 못 미침을 들어냈었다.

박성철의 대패도 그런 경우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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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가 전멸당한 북한군 48연대 민치구 중좌는 자기에게

국군이 없다고
알려 준 동락리 인접 무극리의 주민들
남녀노소를 마구 학살을 했다.


주민들이 알려준 것은 거짓 정보가 아니었는데도 대패배로
머리가 돌은
그에게 진위를 따질 기분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대전에서 학살한 양민들- 국군 포로들과
미군 포로도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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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전투 자체보다도 한국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은 김종수 대대장을 부끄럽게 만든 김재옥 교사다.


그녀는 나중에 군인 김득주 중령과 결혼했다.

1963년 그녀에게 불행이 닥쳐와 고재봉이라는 살인범에 의해서

남편과 자녀들과 함께 일가족이 오인 살해당했다

[그가 원한을 가졌던 전임 대대장 가족으로 오인했었다.
전임 대대장 부인은 고재봉을 절도로 고발해서
영창에 갔다오게 했었다.].


그 녀의 이야기는 영화 '전쟁과 여교사'로도 만들어 졌었다.

현재의 충주시 동락리 격전장에 그녀의 추모비가 서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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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코비치 2010.07.26 15: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블로그에 한국전쟁 관련 포스팅을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혹시 북한군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요? 미군, 국군에 의한 것은 많이 나와 있는데, 북한군에 의한 것은 찾기가 어렵더군요.

  2. 김현수 2010.07.29 1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국을 수호했던 선열 들이시여 삼가 감사 드립니다,

  3. 팬클럽회장 2010.08.01 1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재옥씨 배우자는 2대대 중위였던 이득주라고 인터넷에 나오네요. 그리고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신동관 아니고..)중위가 행양경찰대장때 현충비를 세웠답니다.

  4. Jeremy 2010.08.25 0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신지요.

    고 정일권 총리의 회고록(당시 참모총장이었죠)에도 첫번째 승리로 저 전투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데요, 그 책에는 한 여교사가 제보했다고 나와있습니다. 동일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5. united healthcare rate increases missouri 2012.05.26 1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얼마 동안 다음과 같은 문제에 매료되었습니다. 나는 시간이 몇이 조사하여 매우 흥미로 게시 발견되었습니다. 행복을 빌어요.

  6. major medical insurance companies 2012.05.26 1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러한 환상적인 검토와 함께 아래로 게시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완전히 매료 느낌! 이것이 반환과 같은 물건을 보존.


  7. employee vs independent contractor benefits 2012.05.26 1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검토와 함께 제출 끝내 이런 종류의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놀라는 느낌! 그 길에의 종류와 같은 정보를 보존.

  8. Read More about Commodity Warrants 2014.02.13 0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류의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놀라는

  9. Greentree Legal Team 2014.04.10 1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대가 전멸당한 북한군 48연대 민치구 중좌는 자기에게
    국군이 없다고 알려 준 동락리 인접 무극리의 주민들
    남녀노소를 마구 학살을 했다.

  10. http://andersenconstruction.co 2014.04.13 1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제 6중대와 제 5중대가 협격하자 북한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되어 퇴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