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거인의 퇴장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7.28 08:13

 
  전쟁 종결 방법에 관한 맥아더의 강력한 의지는 영국을 비롯한 자유진영 측의 반발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협상으로 전쟁을 종결지으려는 트루먼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군이 아닌 유엔군사령관의 직위를 가진 맥아더가 전쟁을 지휘하는 한 정부와의 불화는 더욱 격화될 것임이 명확하게 되었습니다. 맥아더가 설득당하여 그의 고집을 꺾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던 워싱턴 당국은 맥아더를 해임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임된 전쟁영웅의 귀환을 반기는 뉴욕시민]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를 해임시켰다는 워싱턴 발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당시 맥아더는 유엔군사령관이라는 직위 외에도 주일 연합군사령관, 극동 미군사령관, 극동 미 육군사령관의 직위를 함께 보유한 제왕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군인이기 이전에 일본을 통치하는 총독과 같은 존재였고 인천상륙작전에서 알 수 있다시피 6·25전쟁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의도대로 진행하던 또 하나의 주요 정치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거물의 갑작스런 해임소식에 세계는 놀랐으나 사실 맥아더의 해임은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필요에 따라 지휘관을 교체하는 것은 군 통수권자의 고유권한이지만, 문제는 맥아더가 미군뿐만 아니라 국민들과 공화당으로부터도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전쟁영웅이라는 점이 정치인 트루먼에게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맥아더의 해임은 선거에 임박해 있던 그에게 분명히 일종의 모험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심을 거듭한 트루먼은 마샬, 브래들리, 애치슨, 해리만 등의 참모들과 협의를 거쳐 극약처방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의 후임으로 어려운 시기에 제8군을 잘 이끌어 왔던 리지웨이를 임명하였습니다.
   

  1951년 4월 14일, 유엔군사령관으로 영전한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공석이 된 제8군사령관에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중장이 임명되었는데, 그는 제1급 전투사령관이라는 보증서가 붙어 있는 역전의 용사로 상당히 공세지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 같이 최고 지휘부가 일거에 교체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전환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는 공세적인 성격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와 신중한 성격의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의 지휘체제로부터 신중한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와 공세적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체제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내한 한 브래들리 합참의장을 안내하는 리지웨이와 밴플리트]


  이 시점에서 새로운 지휘부의 최대 화두는 소련의 개입이었습니다. 소련의 개입은 지상군을 투입하는 전면개입, 해-공군만 투입하는 제한개입, 장비와 물자만 지원하는 간접개입 등으로 나뉘어 질수 있었는데, 당시 정보에 의하면  간접개입단계로 파악하고 있던 중이었고 규모는 중국군의 참전이후 더욱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현 단계에서 이러한 단계를 넘어서는 개입이 이뤄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한마디로 가장 큰 고민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1951년 4월말까지 소련은 북한이나 중국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중국과 북한이 소련에게 가장 많이 그리고 간절히 도움을 원했던 것은 절대 열세 상태에 있던 공군이었습니다. 비록 소련이 MIG-15같은 최신병기를 공급하여 주었지만 흔히 미그회랑(MIG Ally)이라 불리던 한만국경에서나 작전을 펼칠 수 있었지, 정작 가장 중요한 38도선일대는 공중지원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더불어 야포나 전차의 지원도 그리 충분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원인으로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이유가 거론됩니다.


  가장 큰 가능성이 중국이 전쟁에서 완승을 거두어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는 사태를 소련이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라는 가능성입니다. 다음으로 소련의 국력에서 더 이상의 개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는 주장입니다. 소련은 불과 6년 전에 끝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오천만 명이상의 인명손실을 입었고 국토의 대부분도 황폐화되어 재건에 매진하여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언급되는데, 분명한 것은 적어도 그 당시 시점에서는 소련이 미국과의 직접대결을 회피하였던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1945년 8월 만주점령 당시 환영받는 소련군,

소련은 막강한 전력을 갖추었지만 적극적인 개입은 주저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소련이 6·25전쟁에 확대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의 주요 당사자였고 중국의 개입을 사주하기도 하였던 소련이 막상 이런 소극적인 자세를 전쟁 내내 견지하자 중국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고 이것은 후일 중-소 이념분쟁의 한 가지 원인으로 발전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였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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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berdashery 2011.10.30 0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번도 없이 목숨을 내걸고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이 있으니 또한 고마울따름입니다.

  2. qwe 2012.02.19 08: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병전우회 자유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중공군이 물밀듯이 서울로 향하여 내려오고있던 1950년12월23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서울북쪽 의정부의 미군부대를 방문하는 길에 아들 샘 워커중위에게 은성훈장을 직접 수여하기로 했다. 얼어붙은 도로를 맹속도로 달리고 있던 워커중장의 짚을 추월하려던 한국군 트럭이 추월했다. 짚이 옆으로 뒹굴면서 보좌관과운전병은 튕겨나와 살았지만 워커중장은 즉사했다. 이승만대통령은 이 소식을 전해 듣자 사고를 낸 한국군 운전병을 즉시 처형하도록 지시한다. 옆에 있던 미 군사고문관 짐 하우스만 대위가 말려 운전병은 3년 징역형을 받았다. 이 짐 하우스만 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런 뼈아픈 지적을 했다.
    <하버드 대학의 고풍어린 교내 예배당 벽에는 한국전에서 목숨을 바친 20여명의 하버드생 병사들 이름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미국은 한 도시에서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한 '미국의 희망'들을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보냈다. 교수들도 참전해 더러는 전사했다. 한국에서도 많은 학도병들이 전사했다. 그러나 한국의 어느 학교에도 전사한 학도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지나는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게하는 표지는 없다. 존경하는 소대장님, 용감한 중대장님, 대대장님, 그리고 생명을 던져 진지를 지켜낸 병사들의 애기는 입으로만 전해질 뿐 그들을 기릴 수 있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은 전후 팔응 잃은 국회의원, 눈이 날아간 국방장관을 갖지 못했다. 행사장이나 연회장 같은 데서 한국전 전상자들을 만나 본 적도 없다.>
    여중생 두명이 미군 장갑차 깔려 죽은 것만 기역하는 젊은이들은 6.25때 한국을 지키는 작전을 총지휘했던 미군사령관이 한국인의 과실로 죽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도 다른 미군 사령관의 아들이 자원하여 참전, 폭격임무에 종사하다가 전사한 사실도 모를 것이다.
    알아도 아무 감흥이 없다면 국가적으로,인간적으로 구제불능이다. 그래서 걱정이다.

    위와 같은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로 모교를 소개 했습니다.

    "6.25때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중장"이라는 글을 써주신 참전 해병 선배님,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후배들에게 많은 가르침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배님께서 "한국의 어느 학교에도 전사학도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지나는 자들의 머리를 숙이게 하는 표지는 없다."라고한 하우스만 대위의 회고록을 인용하셨는데 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모교 '서울고등학교'는 한국전쟁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한 학생이 우리나라에서 2번째로 많은 학교입니다. 제일 많은 학교가 제주 오현고등학교고, 저의 모교가 2번째라고 합니다. 저의 모교에는 1956년도에 포충탑(褒忠塔)이라는 탑을 건립, 제막하였습니다. 포충탑의 뜻은 충성된 마음을 기리는 탑이라는 뜻이며, 초대 이승만 대통령께서 하사하신 친필 휘호입니다. 그 탑의 뒷면에는 "조국을위해 생명을 바친 학우들에게"란 15자의 글을 그 당시 모교 은사로 재직하고 계셨던 시인 조병화 선생님께서 지어주셨고, 6.25전쟁 참전 학도병들숭에서 전사한 30명의 학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그 후 4.19의거 때 희생된 학우들, 또 월남전 파월전에 수류탄을 덮고 산화하신 강재구 학우등 총 33명의 이름이 각인되어있어 후배들에게 애국의 정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강재구 소령의 흉상은 그 동기들이 졸업 30주년 기념으로 제막하였습니다. 포충탑,강재구 소령 동상,삼일탑(3.1탑)등 3개 시설물은 국가보훈처로부터 2002년 12월11일 국가보훈시설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선배님 제 모교 자랑인 것 같습니다만, 우리나라에도 "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친 학우들"의 뜻을 기리는 학교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상과 같은 글을 해병대 전우회 자유게시판에 올렸습니다. What an excellant high school we attended! How smart and nice the education we received was!! How no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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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7월 8일 독립신문(http://independent.co.kr/ )독립군 게시판 623번 글에 실렸던 이 칼럼은 비록 짧지만 우리가 주한미군의 한국인에 대한 우정을 이해하기 위해 몹시 중요한 글이므로 일독을 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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