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피의 공세가 개시되다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8.17 08:13

 

  1951년 5월 16일 16시, 중공군의 대대적인 포격이 개시되었고 엄청난 포탄이 국군 제7사단의 전방연대 진지에 작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숨 막히던 긴장감을 깨고 피로 얼룩진 중공군 제6차 공세가 드디어 개시된 것이었습니다. 제7사단은 예하 제8연대를 서측 전방에, 제5연대를 동측 전방에, 제3연대를 예비로 운용하고 있었는데 동시에 전방의 연대들이 엄청난 포연 속에 파묻혀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군 제7사단은 미 제10군단에 소속이었지만 소양강 남단을 방어선으로 하여 군단의 가장 우측을 담당하면서 우측으로 국군 제3군단과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대대적인 포격이 개시되었습니다.]

(6·25전쟁 중 중공군이 사용한 야포 * 사진출처-LIFE)


  중공군의 포격으로 제7사단은 초전에 통신시설이 파괴됨과 동시에 후방의 포병대대가 상당한 피해를 입어 화력지원 체계가 마비되었습니다. 2시간의 포격이 그치고 서서히 포연이 걷혀가자 엄청난 중공군이 소양강을 도하하여 공격해왔습니다. 무시무시한 사전 포격에서 살아남은 제7사단 장병들이 최초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하였으나 연이어 중공군의 제파공세가 이어지자 더 이상 방어진지를 사수하기 힘들었습니다.


  중공군은 제20군 예하의 3개 사단과 제27군 예하의 3개 사단 등 무려 6개 사단을 집중하면서 순식간 아군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제7사단 5연대는 진지 안으로 밀려들어온 중공군과 백병전을 펼치며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고 후방의 연대지휘소마저 적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사단장은 현 진지를 고수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이미 제5연대는 분산되어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좌익을 담당하고 있던 제8연대의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후퇴하는 아군과 진지를 돌파하여 앞으로 내달리는 중공군과 뒤섞일 정도로 전선의 상황은 혼란스러웠습니다.


  후방에서 예비로 있던 제3연대에게 철수하는 전방 연대를 엄호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지만, 병력 부족으로 인해서 주요고지 위주로 병력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비워버린 계곡사이로 중공군이 진출하여 제3연대마저 적중에 고립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처럼 국군 제7사단을 가르며 쾌속의 진격을 계속한 중공군 제12군 60사단 178연대 2대대 6중대가 5월 17일 07시 30분경에 후방의 오마치(오미재) 고개를 점령했습니다. 불과 12시간 만에 최초 진격선에서 직선거리로 30킬로미터를 주파한 것인데,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그것도 심야에 시간당 평균 2.5킬로미터 속도로 진출한 경이적인 전과였습니다.


[중공군의 산악돌파 능력은 경이적이었습니다.]


  오마치고개는 당시에 미 제10군단 관할 하에 있던 고개 길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우측에 있던 국군 제3군단의 유일 후방통로였습니다. 무주공산이던 오마치고개가 이처럼 아침에 한개 중대에 의해서 순식간 점령당하였지만 후속하여 산길을 뛰어온 중공군이 시간대별로 증강되기 시작하더니 그날 밤 중공군 제60사단 전체가 고개 주변을 완전히 차단하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6·25전쟁 역사상 국군 최대의 참패를 불러오는 무서운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오마치고개가 점령당하던 그날 오후에 후방의 침교 일대를 중공군 제81사단이 거의 동시에 점령함으로써 국군 제3군단의 좌측은 적이 치기 시작한 2중의 포위망에 갇혀버렸습니다. 하지만 포위망을 완전히 공고화하려는 중공군의 공세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 제12군이 가장 좌측의 국군 제5사단을 가르고 외곽지역을 크게 돌아 속사리로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작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중공군 제12군은 자은리 일대로 진격하여 내려왔는데,  정보 분석을 오판하여 국군 제5사단 담당지역이 아닌 보다 좌측인 미 제2사단 지역으로 출몰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외곽으로 돌아 3번째 포위망을 구축할 예정이던 중공군 제12군은 미 제2사단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진출이 저지되었습니다. 특히 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미 제2사단 38연대는 중공군에게 포위되었지만 진내포격을 하는 초강수까지 두어가며 적의 진격을 물리치는 괴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것이 지평리전투와 더불어 미 제2사단사에 빛나는 승전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벙커힐전투입니다.


[벙커힐전투는 공산군 전략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로 인해 중공군은 처음에 계획한 3중 포위망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는데, 만일 미 제2사단 38연대의 놀라운 분전이 없었다면 중공군의 제6차 공세는 대성공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현리전투결과를 추정하여 보았을 때 만일 공산군의 완전한 3중 포위망이 완성되었다면 6.25전쟁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전을 넘어 강원도 인제의 골짜기는 대학살극의 현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였습니다. 그만큼 벙커힐전투의 의의는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기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의미는 아니고 다만 중공군 공세의 일부를 막아내었을 뿐이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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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육이오 2010.08.17 1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간날때마다 읽어서 일주일거의다되가네요 정말 좋은글같습니다./..

  2. 한국전쟁 2010.08.20 0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거의 매일 들러서 읽어보고 있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3. 오늘도 그대로 2010.08.25 14: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주일째 기다리는데 다음편은 언제쯤 올라 올려나요...

  4. expedia vacation plans commercial airline 2012.05.21 1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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