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개시된 휴전회담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9.17 07:49

 

  중공군은 참전이후 1951년 5월 말까지 총 6차례에 걸친 대공세를 감행하였지만 그들의 부족한 능력으로 화력의 우위를 점한 유엔군을 결코 한반도에서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인해전술이라고 하지만 더 이상의 피해를 중국은 감내하기 힘들었고 이를 뼈저리게 직시한 마오쩌둥은 38선 인근에서 현 상태 고수를 위한 소규모 작전만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6월 중순부터 공산군의 전술은 지구전(持久戰)으로 전환하였고 내심 유엔군 측으로부터 휴전제의를 기다리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중공군은 더 이상 유엔군의 화력을 감당하기 힘들어 휴전을 생각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당시 미국은“휴전을 통하여 전쟁이전의 상태로 회귀하고, 최종목표인 한반도에서의 통일국가 수립은 유엔을 통해 계속 추구 한다”는 새로운 정책을 수립한 직후였는데, 이때부터 미국은 소련과 막후접촉을 통해 휴전회담 개최 논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1951년 6월 13일~14일에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 부주석 까오강(高岡)을 모스크바로 불러 휴전문제를 협의했는데, 마오는 까오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스탈린과 의논에 임하라고 하였을 만큼 휴전에 적극적인 의중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6월 27일, 당시 소련 외무차관이었던 그로미코(Andrei Gromyko)가 공산군 측을 대표로 휴전회담에 응하겠다는 공식적으로 답변을 함으로써 이제부터 전쟁은 휴전정국으로 급속히 바뀌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본국으로부터 예비교섭을 지시받자마자 전선을 책임지던 밴 플리트 제8군사령관에게“현 전선에서 공격을 정지하라”라는 긴급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이로써 중공군의 전략변화와 거의 동시에 아군의 진격도 멈추었습니다.


  유엔군 측은 6월 30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산군 측에게 최초 회담일시와 장소에 대해 제안하면서 당시 극동군 해군사령관이었던 조이(Turner C. Joy) 해군중장을 수석으로 하는 5명의 대표단을 구성하였습니다. 이에 공산군 측은 7월 1일 북경방송을 통해 김일성과 펑떠화이 공동명의로“회담장소를 개성으로 하고, 7월 10일~15일 사이에 회담을 개최하고 싶다”는 답변을 하였고 이에 따라 본 회담 성사를 위한 연락장교간의 역사적인 예비회담이 7월 8일, 개성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하지만 회담성사만을 염두에 두고 중립지역이 아닌 공산군 측 점령지역인 개성으로 장소를 동의하였던 점은 이후 두고두고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예비접촉 당시의 모습]


  키니 공군대령을 대표로 하는 유엔군 측 연락장교단은 개성에 도착하여 회담장에 입장하였는데, 이때부터 신경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키니 일행은 전쟁 전에 여관이었던 회담장에 들어가자마자 공산군 측의 안내도 받지 않고 남쪽을 향하는 좌석에 먼저 착석하여 홈 코트의 공산군 측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회담장을 중립지역이 아닌 곳으로 동의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습니다. 왜냐하면 동양의 관습에 의하면 강화 회의장에는 승자가 자신의 세력권으로 패자를 불러 강화회담을 하면서 패자는 북쪽을 향하는 좌석에 않도록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엔군 연락장교단은 이를 선전에 이용하려던 공산군 측의 허를 찔렀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승자가 패자에게 베푸는 자비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다과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완전히 실무적인 형태로 접촉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유엔군과 공산군의 회담에서는“국제관례에 따른 외교의례는 일체 불필요하다”라는 묵계가 성립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현재의 군사정전위원회회의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묘한 신경전 끝에 사전 협의가 시작되어 대표명단을 교환하고 이어서 본 회담을 7월 10일 11시에 개성에서 열기로 합의했습니다.


  공산군 측은 본 회담 시 유엔군 대표단의 통행을 위해 개성 동쪽 10킬로미터 지점인 판문점 전방에서 개성까지의 도로를 개방하기로 하였고 대표 5명을 제외한 기타 인원은 백색완장을 두르고 왕래한다는 내용을 합의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길은 지금의 도라산에서 개성공단으로 향하는 옛길이기도 합니다. 또한 공산군 측은 남일(南日) 북한군 총참모장겸 부수상을 수석으로 하는 5인의 대표단을 우리 측에게 통보하였습니다. 이로써 휴전협상을 위한 양측 대표단이 직접 대면할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7월 10일 아침, 유엔군 측 대표단은 헬기와 차량 편으로 임진강을 건너 개성에 도착하여 북한군 측에서 제공한 교통편으로 갈아타고 회담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차량이 움직이는 동안 앞에서 안내하는 북한군 장교가 만세를 부르는 시늉을 하였는데, 북한 측은 이를 사진 찍어‘항복한 유엔군’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는 치졸한 방법을 썼습니다. 공산군 측의 작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아 회담장의 공산군  측 좌석은 남향의 높은 의자로 유엔군 측 좌석은 북향의 낮은 의자로 준비하여 놓았습니다. 한마디로 항복하러 온 패전국 대표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연출하기 위한 술수였고 당연히 유엔군 측은 여기에 대해 거세게 항의하였습니다. 이처럼 공산군 측은 휴전을 위한 회담과정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회담장소인 개성 여관에서 잠시 휴식중인 공산군 측 대표단 모습 ]


  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웃지 못 할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회담 탁자에 앉자마자 유엔군 측은 작은 유엔기를 탁자에 놓았는데 반면 공산측은 미처 국기를 준비하지 않아 무척 당황해 하였습니다. 그러자 부랴부랴 오후에 유엔군 측보다 10센티미터 정도 높은 북한 국기를 탁자 위에 놓았고, 이후 양측이 깃대 높이기 경쟁에 돌입하여 마침내 깃대가 천장에 닿게 되자 합의를 통해 이러한 무의미한 자존심 경쟁을 끝내기로 합의 하였습니다. 그만큼 휴전회담은 하나부터 열까지 치열한 또 하나의 전쟁이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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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L 2010.09.19 0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산측이 휴전회담 자체를 심리전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사례는 유명합니다. 첫 회담지 개성에서 "개성은 공산측 세력권이니 전쟁의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유엔측 차량은 모두 백기를 달고 통행할 것"을 통지하였고, 제3자가 볼 때는 마치 유엔이 공산측에 항복하러 가는 듯한 인상을 주게끔 유도하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서도 휴전선의 설정 및 포로의 송환방법 등에서 공산측에 한치도 밀리지 않고 상당부분에서 관철한 유엔측 대표단은 상당한 선전을 펼쳤다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2. 비도승우 2010.09.22 0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이제독이 준 미제담배를 피며 "미국을 불태웠다"고 너스레를 떨던

    남일의 유치한 제스춰도 있었죠. 서울실함시 노확한 무초대사의 크라이슬러를

    타고 나타나는기도 하고.. 한마디로 무슨 연예인 이슈만들듯 심리전및 언론플레이에 매우 치중했던걸로 기억합니다.

  3. 2012.05.14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민주386 2012.10.20 07: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전쟁을 잊어버리자는 세력이 천안함도 잊어버리자는 세력.

  5. obat tradisional kencing manis 2013.02.06 2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버리자는 세력이 천안함도 잊어버리자는 세력

  6. essays services 2013.02.10 0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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