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포로 조우(遭遇)때 생긴 돌발 상황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5.31 16:06

내 친구 형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6.25전쟁 때 서울과 문산 사이 철도 옆에 살았단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마을 앞으로 북으로 돌아가는 공산군 포로들을 실은 열차들이 자주 통과했었다.


<포로 교환 열차 -아래 연합 뉴스의 사진들은 당시 송환 열차에 동승했었던 미 사진병 폴 굴드 슐레진저 씨의 따님이 제공한 것이다.>


동네 젊은이들은 적기가와 김 일성 장군의 노래 따위를 부르며 포로 교환 장소인 판문점으로 가는 이들의 꼴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그만큼 김일성의 남침으로 겪은 고통이 불러온 반공 사상은 남한 사람들로 하여금 과격한 증오를 남김없이 표출하게 하였다.

포로 교환 열차가 지나가는 것만 보면 주민들은  철도옆에 늘어서서 열차 창문에 우박 같은 돌팔매 선물을 가했다. “ 빨갱이 새끼들! 가다가 다 뒈져라!” 돌 세례를 받은 북한 귀환 포로들도 맞고만 있지 않았다. “이 간나 새끼들! 다음에 밀고 넘어오면 다 죽여 버리겠다!


<열차 내부의 송환 북 포로  모습>


북한 귀환 포로들은 포로생활의 수모를 타고 갔던 객차의 내부를 갈가리 다 찢고 부수어서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포로 교환 장소인 판문점에서는 옷을 홀딱 다 벗어 버리고 한ㆍ미 장교들에게 입에 못 담을 욕을 퍼 붓고 북으로 올라갔다. 북에 억류되어 있던 국군 포로들은 북한 주민들로부터 더 심한 취급을 당했다.

국군 포로들이 북한에서 도보로 이동할 때면 동네 주민들이 예외없이 돌팔매질과 욕을 하였고 몽둥이를 들고 뒤쫓아 오며 “이 미제 놈의 개들에게 원수를 갚게 해다오!”하며 구타하려고 하는 극단적인 인간들도 있었다. 북한의 선전과 세뇌, 그리고 유엔군의 밤낮없는 폭격, 북한군의 다수 유가족 발생등이 주민들의 포로들에게 행패를 부리게 했었다. 그런데 각기 적지에서 수모를 당한 이들 남한 포로와 북한 포로가 귀환 길에 개성 북방에서 서로 만난 일이 있었다.


<상이군인의 모습으로 송환하는 북한군>

누구보다도 서러운 학대를 당한 존재들이기에 상대방들에게 극단적인 혐오감과 증오감을 표현할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해프닝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일이기에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대구 의학 대학 재학중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여 북진하는 국군의 일원으로서 평북 덕천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박 진홍 선생이 쓴 ‘돌아온 패자’에서 인용한 것이다.

1950년 11월에 있었던 덕천 전투에서 한국군 2군단의 2개 사단이 붕괴하고 두 명의 연대장을 포함한 수많은 국군 장병들이 포로가 되었는데 위생병이었던 박 진홍 선생도 본대가 철수하고 뒤에 남아서 부상병을 돌보다가 포로가 되어 3년간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기적적으로 귀환하신 분이다. 글은 포로가 되어 북한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개성 향교로 이동해서 포로 교환을 준비하던 때부터의 부분을 옮긴다.

1953년 8월 17일 아침 식사를 끝내자 북한군은 우리 포로들을 전원을 소집시켰다. 광장에는 소련제 카스토바[군용트럭 4륜차]가 십여대 정렬해 있었다. “드디어 이 차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구나!” 만감이 교차하였다. 포로 번호 817번 나는 8월 17일 교환되었다. 포로 번호와 나의 교환 일자가 동일하였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신기했다. 우리는 감시병 지시에 따라 트럭 적재함에 올라탔다. 한 차에 20여 명씩 탔다. 양쪽에 10여 명씩 갈라 앉았다. 모두가 교환의 기쁨을 환호를 지를 것 같았지만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차가 출발해서 남쪽으로 달렸다. 뒤를 돌아 보았다. 송악산이 눈에 들어왔다.

휴전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충 지대란 팻말도 없었다. 우리는 판문점 일대에 완충지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남으로 가고 있었다. 멀리 맞은 편에서 트럭 한 대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미제 군용 트럭 [GMC]였다. 북으로 가는 북한군 포로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는 않았다. 고함 소리만 요란하였다.


<열차 내부의 송환 포로들>


북한군들이 탄 차가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생했다! 잘 가거라 !” 목청껏 외치며 손을 흔드는 북한군 귀환 포로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손만 흔들었다. 그들은 최 일선에서 총부리를 마주했던 상대였다. 어떻게 “고생했다. 잘 가거라!”라는 말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그들이 북으로 돌아가서 사상검증을 받을 때 그 말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염려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댔다. 양손을 입에 대고 목청껏 외쳤다. 우리도 점차 동화되기 시작했다. 윗도리를 벗어들고 그 쪽을 향하여 마구 흔들어댔다.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도 질렀다. “고생했다. 잘 가거라 !” 우리는 남으로 그들은 북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가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느 전쟁사에 이런 광경이 또 있을까 같은 말을 사용하는 동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한 핏줄의 뜨거운 동족애를 느꼈다.


<악을 쓰며 북으로 송환되는 북한군 여자 포로들. 미군용 송환 열차에 욕설을 담은 플랜카드를 걸고 있다.>


누군가 상의를 벗어 던졌다. 남으로 가면 이제 필요 없다. 한사람 두 사람 옷을 던져 버렸다. 이제 팬티만 남았다. 신발까지 던져 버렸다. 지난날의 서러움과 고통과 괴로움을 옷과 함께 저 멀리 던져버렸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북으로 가는 북 포로들도 북한군 귀환 포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이미 상의와 바지가 없거니와 신발도 없었다. 우리와 교차할 때는 2미터가 채 될까말까하는 거리였다. 서로가 손을 뻗으면 손을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완충지대 4키로는 감격의 거리로 변했다. 이제는 손에 들고 흔들 옷도 없었다. 맨손을 흔들었다.


<송환직전 옷을 벗어던지고 미군 장교에게 마지막 욕을 퍼붓는 북한 포로>


북으로 가는 북한군 포로들의 자동차가 다섯 대 지나갈 때 우리 차는 1대 지나갔다. 우리보다 그들이 숫적으로 많았다. 서로가 교차할 때는 열광의 도가 극에 달해 광적이라 할 정도로 소리쳤다.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고생했다! 잘 가거라!”

전쟁에 수많은 불확실성과 이변을 동반한다. 두 포로들의 만남이 의외로 이렇게 전개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이변중의 이변이다.


<돌아 오는 영국군 포로>


박 선생이 말한대로 동포라는 요소외에 동병상린이라는 인간의 심리적 요소도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박 선생은 생환해왔으나 고통이 다 지나간 것은 아니었다. 포로들은 남해의 고도 용초도라는 곳에 격리 수용되어 엄중히 심문을 받았다. 그 뒤에 전방으로 보내져 근무하다가 겨우 제대를 할 수가 있었다.

박 선생을 전쟁 덕분에 4년이나 늦게 복학하여[1954년] 1960년에야 졸업할 수가 있었다. 지금 8 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건강하셔서 대구에서 ‘박 진홍 정형외과’를 개업 중이시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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