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병 포로들의 만포진 수용소 탈출기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8.10 17:45

 6ㆍ25전쟁 동안 공산 측에 포로가 되었던 미군은 약 7,000명 정도 되었다. 이중 40%가 학대와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국군 포로의 사망률은 극히 낮았는데, 이 사실로 미군들의 극한 상황을 견디는 신체적 심리적 능력이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포로들에 대한 학대는 중공군이 관리했던 포로수용소보다도 북한군이 운영했던 포로수용소가 극히 심했었다.

[미군이 공중 촬영한 북한의 직동 포로 수용소]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군 노병을 만났는데, 자기는 파주 설마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혀가서 중공군이 관리하던 창성 수용소에서 2년 넘게 수용됐었다고 말했다.

 "나는 운이 좋았어요. 북한군이 관리하던 포로수용소라면 못 돌아왔을지도 몰랐어요. 그 곳은 지옥이었으니까----"

[중공군의 벽동 포로 수용소, 면 전체의 주민들이 쫓겨나고 각 민가가 포로 수용소로 접수되었다. 앞에 압록강이 보인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북한으로서 증오스런 미군에게도 특별히 나은 대우를 해줄 능력도, 관심도 없었다. 이런 혹독한 포로수용소의 환경을 알거나 겪은 미군 포로들은  탈출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상당수의 미군 포로들이 탈출했었다. 6ㆍ25전쟁 기록에 의하면 공산측에 포로가 된 미군의 10퍼센트인 670명이 탈출했었다. 그러나 이 탈출은 적에게 포로가 되고 얼마 안 되는 후방 후송전이거나 최전선 야전에서 발생한 것이다. 북한의 먼 후방인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하기는 극히 어려웠다.

[적십자사를 통해 전달되는 집 편지 나누어주기, 편지를 받는 중공군 복장의 미군들]


 6ㆍ25전쟁 때 남한은 공산포로들을 미군들이 일괄 관리하여 거제도 수용소 한 곳에 수용했지만(포로 폭동 후 분산했지만) 공산측은 유엔군 포로들을 여러 수용소에 분산 수용했었다. 북한과 중공군의 대부분의 포로수용소는 전선에서 아득히 먼 북쪽 압록강 연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중공군 관리하의 벽동 수용소에서는 돼지도 공급이 되었었다. 도살이나 요리는 미군의 몫이었다.]


 이렇게 머나먼 적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했던 사례가 무려 50여건이나 있었지만 전부 실패하였다. 험악한 지형과 현지 북한 주민들과 전혀 다른 생김새, 그리고 전선까지의 장거리가 탈출을 극히 힘들게 만들었다. 

 전쟁 초기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급식은 특히 최악이었다. 병으로 죽는 포로들이 급증하자 부랴부랴 급식 형편을 개선했다.

[식탁도 없이 걸인처럼 땅바닥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미군 포로들]


 이들 포로들이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탈출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보이는 아득히 먼 북쪽인 한 중 국경지대의 압록강의 만포진 포로 수용소에서 과감히 탈출하여 북한 땅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서울 동북방 미군 전선으로 귀환한 미군 세 명이 있다. 

 세 명의 미군들이 탈출을 감행 한 것은 북한의 엄동인 12월이었다. 폭격으로 인해 미군들에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북한 주민들 사회에서 확연히 다른 용모임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지 않고, 그 먼 길을 탈출에 성공한 실화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탈출을 주도했던 존 그래험 해병 상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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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장진호 전투 때 최전방까지 진격했던 해병 7연대 장병으로서 철수중 중공군에게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장진호 호반 유담리의 미 해병 구호소, 중공군 3만명의 포위망을 뚫고 나올 때 7연대가 전위를 맡아 포위망 돌파를, 5연대가 후위로서 밀려드는 중공군들과의 전투를 했다.]


 그래험은 철수 작전 도중 눈 쌓인 벌판에서 흰 위장포를 쓰고 접근해온 중공군과 격돌했다. 양측이 동시에 발사했고 나는 턱에 따발총을 맞고 쓰러지게 되었다. 의식이 돌아 왔을 때는 한 오두막 집안에 다른 아군 병사 여섯 명과 누어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 중에는 호수 건너편에서 우리들처럼 하갈우리 방향으로 철수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고 포로가 된 육군 부상자들도(미 육군 7사 31연대 전투단) 있었다. 

 우리 모두 부상자였지만 희한하게도 내 턱은 붙어 있었다. 아마도 뼈를 스친 유탄에 맞은 것 같은데 그 충격은 정신을 잃을 만큼 컸던 모양이다. 어쨌든 내 얼굴은 얼어붙은 피에 온통 뒤 덮여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우리를 북한군에게로 넘겼고 놈들은 우리를 총검으로 몰아 세우며 며칠 동안 어디론가 데려갔다. 끌려가는 도중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미군은 총검에 찔려 죽었다. 며칠 후 한 작은 마을에 이르러서 심문을 받은 일행은 분산되었는데 나는 북한군의 포로수용소로 가는 대열 속에 끼게 되었다. 

 수주일간 산길을 따라서 밤에 걷고 낮에는 숨어 지내는 생활을 반복한 끝에 한 중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변의 한 마을, 만포진에 이르렀다. 포로로 끌려간 해병에게나 육군에게나 그 곳은 참으로 고약한 시설이었다.

[페렌바크의 유명한 한국전쟁 책에 소개된 탈출한 포로들이라는 사진인데 탈출 인원이 다섯 명인 것으로 보아 그래험 일행은 아닌 것 같다.]


 나중에 듣기로는 이곳에 보내진 자들은 악질분자라 했으며 그래서 북한군의 지극히 ‘부드럽고 자애로운’ 대접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중 한 명만은 악질이 아니었다. 변절자가 있었던 것이다. 

 탈출을 의논하고 있던 나는 덕분에 10일간을 땅 구덩이에 갇혀서 물만 마시고 지내며 교화를 받아야 했다. 밀고한 변절자는 디킨슨이라는 하는 테네시 출신 녀석이었다. 

 수용소에서 23개월을 지낸 어느 겨울 날, 콜세어의 한 편대가 언덕을 넘어와 인근의 중공군 시설을 폭격하더니 또 다시 한 편대가 뒤를 이었다. 인접한 건물에 네이팜탄이 떨어져 불타고 대공포가 간단없이 포효하는 소란 속에 경비병들은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했다. 평소 탈출을 모의했던 우리 세 명, 뮬린스와 포드등 합 세 명의 동지 포로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포진 수용소를 탈출하였다.

 그리고 무조건 남쪽으로 달렸다. 우리는 그날 밤 밤새 걸어서 적의 추격망을 벗어났다. 날이 새자 험한 지형의 잡목더미 속에 숨어 들어가 쉬었다. 그 뒤에도 주민들의 눈에 띄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숲 속에 숨고 밤에는 걸고 하는 탈출 행을 계속하였다. 배가 고프면 민가에 몰래 숨어 들어가 음식물이나 닭을 훔쳐서 허기진 속을 채웠다. 날씨는 무척 추웠으나 북극을 능가하던 장진호 호반 유담리의 혹독한 날씨에 비하면 그런대로 참을 수가 있었다.

 거의 2주일을 그렇게 남하했을 때 우리는 먼 전방에서 포화가 은은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뛸 뜻이 기뻐했다. 그러나 남으로 갈수록 적병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우리는 조심과 조심을 거듭하면서 전선으로 접근했다. 최전선 직 후방의 계곡에 숨어서 밤을 보낸 우리는 날이 부옇게 새자 적 경계선을 은밀하게 돌파하고 드디어 건너 전선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미군들에게 구조 될 수 있었다. 그 곳은 서울 동북방 전선이었으며 우리를 구조해준 미군은 미 제 1기병사단이었다.

[포로 교환 때 돌아온 미군 포로들이 수용된 자유의 집]


 나는 이 고통스러운 탈출 중에 손가락에 심한 동상에 걸려 그 손가락들을 모두 잃었지만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찾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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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ㆍ25전쟁 중에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나온 국군 장병들 또한 여럿이었다.

[박정인 소령]


 비교적 잘 알려진 탈출 이야기는 사단 19연대 작전 주임이던 박정인 소령[후에 3 사단장 역임]과 3명의 장교와 1명의 병사가 1951년 1월 23일 압록강변 벽동 포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두 달 뒤인 3월 14일 귀환에 성공했던 일화이다. 

 미군인 그래험의 북한 탈주 경우의 2주는 무척 빨랐다고 하겠다. 미군으로서 북한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돌아온 것은 이 그래험 상병의 예가 유일할 듯하다.

[유명한 라이프지의 사진, 포로교환으로 돌아온 존 프로크 상병이 믿어지지 않는 귀환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더구나 그가 그 멀디 먼 압록강변에서 탈출해서 주민들이나 북한 추격대에게 발각되지 않고, 전선을 통과해서 돌아 온 것은 ‘기적’이라 생각된다. 국군이라면 모를까 한 눈에 보아도 확연히 티가 나는 백인 얼굴들로 한반도 북반을 종단해서 남하하였다는 사실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험은 현재 80세의 나이에 몬타나 주의 카네지 읍에서 생존해 있다. 위는 카네지 읍내 주민이며 조각가인 그래이저가 영웅으로 추대받은 그에게 헌정한 독수리 조각상. 그래험은 건강이 좋지 않아 그의 아들 존 H. 그래험(왼쪽)이 받았다.]


 지도도 없이 정확히 남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탈출 일행 중에 별을 보고 방향을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남하하는 용의주도한 조심성이 이들의 탈출을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끝//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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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llstate industry 2012.05.28 16: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러한 구체적인 정보는 제 의견으로는 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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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관심사와 관련하여 정말 많은 도움이 쓰기까지입니다. 멋진 유용하고 교육적인 쓰기까지 이런 공급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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