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춘천 전투 참전 중대장의 수기(1/4)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10.17 06:53

6ㆍ25전쟁중 가장 성공적인 방어전을 치룬 춘천 전투는
유감스럽게도 전사에 가장 부정확하게 알려진 전투였었다.


여러 잘못 된 오류들이 개전 초기의 아군 승리를 이리저리
잘못 덮고 짜집기를 해서 그 진상을 알기가 힘들게 한다.


-특정 인물이 춘천 전투의 영웅이다라는 식의 아전인수식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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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어이없는 춘천 전투 공로 독차지하기는 6사단
미 고문관이었던 토마스 매피얼이 미국 언론에 떠벌여 댄 것이다.


그는 6사단의 참호 구축과 사단의 맹렬한 전투 훈련과
적침을 예상한 사병들의 외출 금지와 포병 전개등
모든 전투 준비는 자기가 다 주도해서
사단장을 통해
지시한 것이라는 것이다.


거짓 말의 하이라이트는 자신이 6ㆍ25 당일 전선에 출동해서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6월 25일 그는 김 종오 사단장과 함께 후방 봉의산을
방문해서 지켜보다가 원주 사단 사령부로 돌아갔을 뿐이다.


볼수록 너무 황당하여 이 자가 미국에서 군 제대 후 생계 수단으로
춘천 전투를 이렇게  뻔뻔하게 팔아 사기를 치고 다닌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미국 기록은 이 자의 계급이 소령이라고 되어 있지만 한국측
기록에는 중령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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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단 한 번에 이루어진 듯 각 각 다른 전투를
한꺼번에 압축해서 설명해버린 것,


-북한강과 소양강을 같은 강으로 혼동해서 춘천 전투를
잘못 호칭하는 것,


-그리고 6사단만이 적의 내침을 예상하고 미리 참호를 파고
사병들의 외출을 금지하고 포병을 배치하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춘천 전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오류는 북한강과 소양강을
혼동한다는 것이다. 왼쪽 북에서 흘러오는 강이 북한강이다.
아래에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강은 소양강이다.
붉은 부분이 북한군의 주목표였던 춘천 시가지다.

춘천 전투 네 개의 전투중 25일 16포병대대 포격전, 26일
7연대의 1대대의 옥산포 돌격전 두개의 전투는 북한강
옥산포 일대에서 행해졌고 27일 소양강 전투는 소양강에서
있었다.

현재는 북한강 상류에는 춘천호가, 소양강 상류에는 소양호가
생겨  지형이 그때에 비해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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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를 좀 읽었다는
나로서도 무척 혼란스러워서
춘천 전투의 진상이 무엇인지
아리송했었다.



남침하는 북한군 105사단 모터 싸이클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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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래에 춘천 전투에 대한 ‘확실한 팩트’라고 보증 할만한
기록을 포스팅한다.


아래 글은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28일까지 3일간 국군 6사단
7연대 1중대장으로서 춘천 전방 최전선에서 싸웠던 이 대용 장군이
육필로 쓴 전투 일지다.

87세의 이 대용 장군은 자신이 참전했었고 목격했던 춘천 전투의
정확한 전모를 자기 생전에 알려야 겠다는 일념에 거의 한달간이나
집필했던 춘천 전투 기록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1949년 6사단 7연대 장병들의 군장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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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더한 정확함을 기하기 위해서 16포병대대의 활약은
6.25 포병 전투 초기 서울로 교육을 간 중대장을 대신해서
포격 지휘를 했던 16 포병대대 보급 장교 김 운환 중위[ 소장 예편]의 수기를 인용하도록 배려 해주었다.

16포병 대대 활약 부분은 김 운환 장군의
수기를 요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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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춘천 전투의 개요를 간단히 소개한다.
춘천 전투는 네 개의 주요 전투로 구성되어 있다.
네 개의 전투는 각각 하루의 간격을 두고 나흘간에 걸쳐
전개 되었다.


1. 첫 번째 전투 - 사농동 16 포병대대 포 사격 전투.

1950년 6월 25일 16 포병대대의 북한군 포격 섬멸.
최대의 위기 순간에 북한군에게 반격을 가한 부대는 포병이었다.
이 대용 장군은 북한 남침의 급습을 저지한 포병
단독의 분전을 극찬했다.


2. 두 번째 전투 -옥산포 전투

1950년 6월 26일 옥산포 동쪽 능선에 배치되었던
7연대 1 대대 전장병들이 1.5km 전력 질주하는
장거리 돌격으로 적의 측면을 강타하여 패주시키고 추격함 .
전쟁 초기 유일한 북진 반격이었음.


3, 세 번째 전투.- 소양강 전투

개전 사흘 후인 27일 역시 7연대 2 대대가 소양강을 도강하던
전면의 국군 2대대가 철수한 것을 잘못 안심하고 도강하던 북한군을
역시 전방 측면에서 자동화기와 57mm 전차포로 섬멸해 버린 전투


4.네 번째 전투 - 원창 고개 전투
1950년 6월 28일 이미 서쪽 전선이 무너져서 전 국군의
총 후퇴 해야함을 알게 된 6 사단도 지연전을 하면서
홍천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7연대는 춘천 남방 원창 고개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적에게
타격을 주고 시간을 벌다가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앞에 설명한 나흘간의 네 전투를 지도에 표시해본다.
A는 25일 포병 16대대가 사농동에서  단독으로 치룬 전투다.
B는 26일 164 고지의 7연대 1대대가 쇄도 공격했던 옥산포 전투다.
C는 27일 보병 1대대와 2연대 소속으로 7연대에 지원 나왔던 57mm 포 두 문이
주력이 되고 대대 박격포와 포방 1 개 중대가 합동 실시한 소양강 전투다.
D는 지도에 나오지 않지만 춘천 남방 원창고개에서 7연대의 방어 지연전이다.





6사단장 김 종오 장군과 7연대장 임 부택 대령.

두  분이 콧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면도할
시간도 없었던 낙동강 전선에서 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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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6.25일 오전 38선에 성글게 소대 규모 초소로 배치되었던
국군의 전초선을 단숨에 돌파하고 북한강을 따라 남하하던
북한군을 막아 선 것은 보병이 아니라 긴급 출동한
6사단 소속 16 포병대대였다.


당시 한국군의 포병은 미군의 인색한 원조로 전방 연대는
단 5 문의 포 구성 포병 중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6사단의 포병은 김 성 소령의 1개대대 3개 중대 뿐이었다.
6사단 배속의 1 대대 총 포 수는 15문이었다.


6사단 2연대 배속의 포 중대는 홍천에, 7연대 포 중대는 원주에,
19연대 포 중대는 원주에 각각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만약 이 포병 중대가 연대별로 흩어져 있었다면 6ㆍ25 발발과
함께 즉각 대응한 포병의 눈 부신 활약을 못했을 것이다.

천우신조로 6ㆍ25 적침 바로 전 분산되었던 포병 중대들은
김 성 포병 대대장 지휘 하에 소양강 이북 우두동에 집결해서
훈련 중에 있었다.


7연대 전면의 적들은 05시 40분부터 30분간 포사격을
가하고 06시 10분부터 보병들이 공격 개시선을
출발하여 38선을 넘었다.



적이 내침했다는 경보를 받은 대대는 06시 15분 전 포병 중대들의

포 2문씩을 먼저 출동시키고 이어서 15분 후에 준비를 갖춘
나머지 포들이 후속 출발했다.

 


M-3 105mm 곡사포 - 공수 부대 사용을 위해서 경량화를 하여
포신도 짧았다. 덕분에 사거리도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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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는 포전을 치룰 포탄도 확보하고 있었고 사격 연습으로
전투의
감을 잡고 있었다.


적의 침공로인 북한강변 적의 침공로를 전면을 막고 배치
된 것은 1 포병 중대와 2 포병 중대는 2 개 중대였었다.


두 중대는 적의 사격으로 옥산포 북방의 미리 준비한

진지에 투입하지 못하고 옥산포 남쪽 1km 지점의 사농동에
포 방렬을 하고 사격 준비를 완료했다.


전선 우측 7연대 2대대[ 김 종수 소령 지휘- 충주 동락리
대승 부대다]소양강 상류 방향의 지원을 위해서 3포병중대가
출동했다.


그러나 3중대 역시 2대대 장병들이 철수하는 것을
보고 샘밭의 지서 앞에 포 방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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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무렵에 포병은 포대라는 현재의 명칭 대신
중대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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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들은 07:30 옥산포 남방 사농동에 배치된
포병 1중대와
2중대 전방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방에는 삼삼오오 후퇴하는 국군 병사들 뿐[38선 배치]
건재를 유지한 보병 부대는 단 1 개 소대도 없던 위급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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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전면 7연대 38선에는 10소대로 구성된 진지로
구성된 방어선이 있었다.

북한군은 이 진지들을 포병 사격과 침투 공격으로 각개
기습 격파하고 남쪽을 향한 돌파구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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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당일 대대 15문의 포들 중에  3문이 고장 나서 전투에서
활약한 포는
단 12 문의 포 뿐이었다.

그 고장포 3문이 하필 주공로에 방렬한 2개 중대에서
발생해서
적의 주공에 맞선 포는 단 7문이었다.
 

사농동의 포병들은 우측 123고지에 올려 보낸 FO의
관측에 따라
대대 일제 사격을 연속 퍼부었다.


대대가 처음 해보는 대대 일제 사격이었으나 장병 일체가
되어 포신이 달아오르도록 계속 사격을 가하였다.


09:30 역골 방면의 17번 도로를 따라 SU-76 자주포가
내려오고 있다는 관측에 따라 이 쪽 방향에도 화력을 집중시켰다.


적은 첨병 중대가 첫 일제 사격에 나가 떨어지자 주력 2개 대대

나서서 병진 속공을 시도했으나 계속된 포병의 집중 사격에
결국은 우왕좌왕하다가 피해만 급증하자 급편 방어에 들어갔다.



이 부대는 침공 선두 사단인 북
한군 2사단[ 소련군 출신[
이 청송이 지휘]의 주공 6연대 1,3 대대 였다.
105mm 곡사포가 적을 저지하는 동안 연대 대전차 중대의
57mm 포 1개 소대[ 잘 알려진 심일 중위 지휘]중 2문이
1중대
전방에 위치한 옥산포에 방렬하였다.


심 일 중위는 그의 57mm 포가 적 자주포에 대적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포병들보다 먼저 철수했다.

그의 소대는 포 한 문이 수렁에 빠져 이를 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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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일 중위가 육탄으로 적 자주포를 격파했다는
일화는
이 뒤의 이야기 인듯하다.
김 운환 장군의 수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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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 대대장 김 성 소령은 포의 긴급 전개부터 시종
사농동의 포진지와 보병 7연대 OP인 우두산을
왕래하며 포전을 지휘했다.

이 포격의 결과 북한군 연대 본부의 지휘가 마비되고
북한군 사단장 이 청송과 포병 대대장이 자주포에 승차하여
후방으로 도주하는 등의 대 타격을 받았다.

16포병 대대는 각 중대의 소요 포탄 5,000여발을 북한강
건너 북쪽의 우두동에 보관하고 있었다.
[ 이곳에 16 포병 대대 포탄 보관 탄약고가 있었다는 설이 
  우세하지만 훈련 때문에 포탄들을 일시적으로 운반 해놓았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포전에 필요한 포탄만을 제외한 나머지 포탄은
긴급히 후방으로 철수하여야 했다.
후방이란 춘천 남방 사범학교를 말한다.

먼저 농림학교 농장의 손수레와 생사공장에서 사용하는
손수레 각 10여대를 이용하여 농업학교 호국단, 공장 직공,
우두 국민학교 교사및 동네 구장들로 구성된 시민 협조대가
손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시민 봉사대는 삼단으로 조직되었다.
1조가 창고에서 5번 도로까지, 2조가 소양교 북방 500미터
29번 교차점까지, 3조가 다리 건너 소양강 이남까지 릴레이로 운반했다.

벌써 피난민들이 남행이 시작되고 있었고 주민들도
거리에 나와서 주민들이 진행을 지켜 보고 있었다.

운반 포병들은 주민들에게 사정도 하고 애걸도 하고 강요도
하며 제발 포탄을 소양강 이남까지만 가져 달라고 부탁하여
부지런히 포탄을 운반했다.

지게에는 1-2발, 손수레는 3-4 발, 우마차는 4-5 발,
자동차는 8-10발을 소양교 건너 운반해와 소양로에 집적했다.

소양강 남쪽에서는 춘천 사범학교의 학생들이 동원되어
운반해온 포탄을 학교로 날랐으며 징발된 민간 차량들이
이 포탄들을  춘천 사범학교로 운반했다.
이렇게 해서 아슬아슬하게 건져낸 포탄만
3,800발이나 되었다.

총 300여명의 민간인들이 포탄 운반에 협조했다,
6ㆍ25 전사에서 특기할 민군 합동의 사례다.(계속)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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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omputer Network 2012.02.10 18: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난 이런 행사를 통해 6.25전쟁이 어떻게 전쟁이 났는지 알게되었다.
    그리고 내가 봉사를 많이하고 돈을 아껴써야되는 것도 깨달게되었다
    난 이런 캠페인이 더욱더 개발되어 더 많은 사람들한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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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 is very difficult to show a Myanmar artist out of context and I applaud Yavuz for attempting to조각do so respectfully and with great enthusiasm.

  6. hcg drops 2013.04.15 0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단의 참호 구축과 사단의 맹렬한 전투 훈련과
    적침을 예상한 사병들의 외출 금지와 포병 전개등
    모든 전투 준비는 자기가 다 주도해서 사단장을 통해
    지시한 것이라는 것이다.

    거짓 말의 하이라이트는 자신이 6ㆍ25 당일 전선에 출동해서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6월 25일 그는 김 종오 사단장과 함께 후방 봉의산을
    방문해서 지켜보다가 원주 사단 사령부로 돌아갔을 뿐이다.

    볼수록 너무 황당하여 이 자가 미국에서 군 제대 후 생계 수단으로
    춘천 전투를 이렇게 뻔뻔하게 팔아 사기를 치고 다닌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미국 기록은 이 자의 계급이 소령이라고 되어 있지만 한국측
    기록에는 중령으로 되어 있다.
    ---------------------------------------------------
    -전투가 단 한 번에 이루어진 듯 각 각 다른 전투를
    한꺼번에 압축해서 설명해버린 것,

  7. e cig  2013.04.15 0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라이트는 자신이 6ㆍ25 당일 전선에 출동해서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6월 25일 그는 김 종오 사단장과 함께 후방 봉의산을
    방문해서 지켜보다가 원주 사단 사령부로 돌아갔을 뿐이다.

    볼수록 너무 황당하여 이 자가 미국에서 군 제대 후 생계 수단으로
    춘천 전투를 이렇게 뻔뻔하게 팔아 사기를 치고 다닌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미국 기록은 이 자의 계급이 소령이라고 되어 있지만 한국측
    기록에는 중령으로 되어 있다.
    ---------------------------------------------------
    -전투가 단 한 번에 이루어진 듯 각 각 다른 전투를
    한꺼번에 압축해서 설명해버린 것,

    -북한강과 소양강을 같은 강으로 혼동해서 춘천 전투를
    잘못 호칭하는 것,

    -그리고 6사단만이 적의 내침을 예상하고 미리 참호를 파고
    사병들의 외출을 금지하고 포병을 배치하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8. Busienss Directory 2013.05.09 0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터 6월 28일까지 3일간 국군 6사단 7연대 1중대장으로서 춘천 전방 최전선에서 싸웠던 이 대용 장군이 육필로 쓴 전투 일지다.

  9. vfast loan 2013.09.20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춘천 전방 최전선에서 싸웠던 이 춘천 전방 최전선에서 싸웠던 이

  10. Town of Patrick Relationships 2014.02.13 0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 6사단 7연대 1중대장으로서 춘천 전방 최전선에

  11. More about Media Sona 2014.03.31 2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단의 포병은 김 성 소령의 1개대대 3개 중대 뿐이었다.
    6사단 배속의 1 대대 총 포 수는 15문이었다.

  12. is bubblegum casting legitimate 2014.04.07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두 국민학교 교사및 동네 구장들로 구성된 시민 협조대가
    손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13. Attorneys In Witcha Falls 2014.04.10 1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두 중대는 적의 사격으로 옥산포 북방의 미리 준비한
    진지에 투입하지 못하고 옥산포 남쪽 1km 지점의 사농동에
    포 방렬을 하고 사격 준비를 완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