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남한에 대한 미군의 군정(2-1)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03.12 08:51

<군정 3년간 실질적인 통치자이던 존 하지 장군>

 

한반도를 38도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할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한다는일반명령1호를 접수한 태평양지역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하지 중장에게 이 임무를 부여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하지 장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연합국의 후원 아래 중국에서 귀국시켜 정치가 안정되고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명목상의 지도체제로 활용하려 했으나 상호 불신으로 말미암아 실현하지 못하였다. 결국 미군정 당국은 38도선 이남에서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이며, 다른 정부는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주도해 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던 미군정 당국의 의도는 한국의 실정을 외면한 중대한 착오였다. 이러한 현상은 전후 한국문제 처리에 구체적인 준비가 없던 미국정부가 한국 실정에 어두운 현직 군사령관에게 대부분의 군정 정책을 일임한 데서 연유하였다. 당시 한국의 산업이 위축되고 경제가 위기에 처한 것도 미군이 군정을 펴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체의 주요 자리에 한국인을 거의 기용하지 않은 일본 식민지 정책이 남긴 유산이었다.

 

 

또 광복 후 일본인들이 각종 산업자원과 기술자원을 철수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였다. 남한의 공장들은 일본인들이 철수할 때 자본 94%, 기술 80%를 가져갔기 때문에 남한 내 890여개의 공장이 가동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이 철수한 광복 직후부터 98일까지 4주일 만에 37억 원에 달하는 화폐를 발행하였고(당시 화폐발행고는 약 50억 원이었음) 10월에는 공산당들이 6차례나 위조지폐를 발행하여(정판사 위폐사건) 1947년까지 화폐발행고가 334억원으로 약 6.6배 증가함으로써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가 33배나 폭등하였다.

 

태평양전쟁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에는 전후 일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걸쳐 처리해야 할 시급하고도 복잡한 문제들이 아주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에만 관심을 집중할 수 없었다. 이는 북한을소비에트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던 소련의 입장과는 확연하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미군정 당국은 혼란 속의 남한 실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자 일본인 고문들을 퇴임시키고 그 자리에 지도자급 한국인 인사를 임명함으로써 한국인이 참여하는 군정으로 한 걸음 진전하였다. 이어서 일제강점기의 악법들을 폐기함과 동시에 각 행정기관장을 한국인으로 교체하였으며, 군정청 행정기구에 미국인과 한국인을 함께 기용하는 등 군정기구를 정비하였다.

 

하지만 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좌·우익을 망라한 모든 정당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는 크게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심각하게 대립하였다. 이 결과 무려 248개의 정당이 난립하였고, 공산주의자들도 정치활동을 합법적으로 보장받아 1946년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함으로써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것은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여 공산체제가 확실하게 형성된 북한과는 매우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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