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스탈린, 김일성의 남한 공격을 허락하다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03.20 08:54

소련 수상 스탈린은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미국과 달리 적극적이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였다. 스탈린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 이유는 자칫 남한에 대한 공격이 장기화할 경우 미국이 개입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남한 내에서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고 반동체제의 파괴와 남한에서 인민봉기의 확산, 그리고 북한군의 강화에 최대한 노력을 집중하라고 지시하였다.

 

스탈린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남침을 단행할 경우 유엔으로부터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을 받은 한국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여러 가맹국이 무기 및 탄약 등을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한편 하루라도 빨리 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조급해하던 김일성은 남한의 군사력을 그다지 강하지 않다고 평가하고, 당시 주북한 소련 대사로 있던 스티코프에게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을 준비하겠다는 의지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남한 공격시기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김일성의 제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북한군이 좀 더 준비되고, 여건이 성숙되면 스탈린이 남침을 승인할 것이라고 믿었다.

 

북한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경계태세와 전력을 탐색할 목적으로 38도선에서 불법도발을 자행하여 군사적인 불안감을 조성하였다. 19495월부터는 옹진·개성·춘천 등지에 중대연대 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분계선을 침범하고, 정규전 못지않은 치열한 전투를 치른 후 마지못해 철수하는 등 무력충돌을 끊임없이 야기하였다. 이러한 분쟁도발은 인민유격대의 후방교란과 38도선을 북한군의 실전훈련장으로 이용하는 등 추가적인 효과도 있었다.

 

김일성은 무력사용을 통한 남조선 해방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북한군을 강화시켜 나가면서 스탈린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1949101일 중국에서 공산당이 정부를 수립하여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19501월 미국이 한반도를 극동방위선에 제외했다는 사실을 발표하자, 김일성은 다시 스탈린을 졸라대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소련대사에게 그 자신이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스탈린 동무의 명령이 나에게는 법이라는 얘기를 전하였다. 이러한 대화내용은 즉시 스탈린에게 보고되었으며, 스탈린은 마침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최종 승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드디어 김일성의 남침 구상은 스탈린의 승인하에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김일성에게 청신호를 보낸 스탈린의 행보는 신속하고 열정적이었다. 스탈린은 당시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던 마오쩌둥과 북한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 필요한 사항을 논의하였다. 스탈린의 지원 약속을 받은 김일성은 195024일 소련대사를 방문하여 3개 사단을 더 증강하여 총 10개 사단의 병력을 유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이를 허락하고 잘 훈련된 병사와 현대장비로 무장된 정예사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시까지 곁들였다. 이처럼 일단 남침계획을 승인한 스탈린의 김일성 지원은 가히 전폭적이었다.

 

김일성은 소련이 제공한 특별기편으로 1950330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425일까지 머물렀다. 이 기간에 스탈린은 한국의 통일을 적극 추진할 수 있음을 자신있게 밝혔다. 그 이유로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를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석권했지만 미국은 중국의 새 정부에 도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며, 중공과 소련이 동맹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주의 국가에 간섭하는 것을 더욱 망설이게 되고 실제로 미국 내에서도 아시아의 문제에 간섭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일고 있으며, 소련이 원자폭탄을 보유해 북한의 입장도 매우 강화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일반적인 정세와 조건 등을 의논한 뒤에 김일성과 스탈린은 전쟁준비와 계획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스탈린은 화력과 기동력이 증강된 공격사단을 편성하고 이를 위한 준비는 소련이 책임지고 지원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특히 스탈린은 공격계획이 세 단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전략적으로 구체적인 지침을 주었다.

 

스탈린으로부터 전쟁지침을 받고 북한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북한군 총참모장 강건에게 즉각 남침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총참모장 강건과 새로 부임한 바실리예프 소련 군사고문단장이 중심이 되어 529일 남침계획을 완성했으며, 6월 말에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완성된 계획은 스탈린에게 보고되었으며, 김일성과 스탈린의 협의에 의하여 보완되었다. 이처럼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함으로써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는 점차 한반도 전체를 휘감아 가고 있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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