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북한군의 군사력 증강(2-1)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03.25 08:46

소련군은 1947926일 자신들의 내 놓은 미·소 양군(兩軍) 철수 제의에 따라 19481225일 철수를 완료하였다. 그러나 다량의 중화기를 북한군에 넘겨주고 북한군 1개 사단마다 150여 명의 군사고문단을 잔류시켰다. 이러한 소련 군사고문단은 북한군이 군사력을 급속히 증강시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미군은 1949629일 남한에서 철수하면서 500명의 군사고문단만을 잔류시켰다. 이에 따라 남과 북의 군사력은 엄청난 불균형 상태를 초래하게 되었다.

 

소련으로부터 각종 중장비를 넘겨받고 소련군 고문관의 지도를 받으면서 북한군은 19475월 이후부터 19482월에 이르는 9개월에 걸쳐 급진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무력의 기초가 다져지자 북한정권 수립 7개월 전인 194828일 김일성은 통수권을 발동하여 '조선인민군의 창설을 선포하였고 6월부터는 징병을 실시하였다.

 

평양역 광장에서조선인민군의 창설을 선포하는 열병식을 가진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남한에 주둔하는 미 점령군으로부터의 도발에 대응하고, 통일을 위한 인민정권의 무력기관이라고 창설 취지를 밝혔다. 조선인민군 창설 이후 북한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훈련을 적극적 실시하였다.

 

<평양역 광장에서 창군식을 가진 뒤 시가행진을 벌이는 조선인민군>

 

<조선인민군 창설을 선포하는 열병식 광경>

 

 

<조선인민군 창설 당시 사용하던 상징 휘장>

 

북한군의 창설은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정책과 결부되었으며, 김일성과 같은 조직에 소속되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편성하였다. 김일성은 소련군 편제를 모방하여 문화부를 설치하였다. 6·25 당시 문화부의 대대장·연대장·사단장 등 지휘관들은 소련의 정치위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들 정치위원들의 정치사상 통제를 통해 군대를 장악하기 위하여 사상과 정치교육에 치중하였다.

 

북한은 194899일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으며, 인민군 총사령부를 민족보위성으로 승격시켜 4개 사단으로 증편된 인민군을 통합 지휘토록 하였다. 이에 앞서 북한군은 194510월에 신의주 항공대를 조직했으며, 194612월에는해안경비대를 해군으로 승격시켰다. 19475월에는 제 115전차연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김일성은 북한의 정권을 장악하고 소련 점령군과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강화시켜 나갔다.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크렘린궁에 들어서는 북한 대표단>

 

소련은 19481225일 북한의 군사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불러 중공의 조선인들을 입북시켜 인민군을 증편하고, 500여 대의 전차를 지원하며, 6개 공격사단을 비롯하여 총 22개 사단의 인민군을 육성한다는 내용에 합의하였다. 이후 북한은 중공과 동북의용군 출신 28,000여 명을 1949년까지 3회에 걸쳐 북한에 보내줄 것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1949317일 스탈린과 김일성은 ·소 비밀군사협정·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면서 근대화된 전차와 공군으로 무장된 북한군의 육성은 일본까지 위협하여 미국과 소련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 규모를 축소하기로 하고, 22개 사단 대신에 6개 사단과 3개의 기계화부대 등 약 7개 사단 규모의 북한 지상군과 150(전투기 100) 규모의 공군을 보유하기로 조정하였다. 이렇게 축소·수정된 계획에 따라 북한은 1949516일에는 115전차연대를 105전차여단으로 증편하면서 500여 대 2개의 전차사단 대신 242T-34전차로 장비된 1개의 전차여단만을 창설하기로 하였다.

 

당시 북한에 머물던 소련 군사사절단이 한국의 지형을 분석한 결과 산악과 하천이 많아 전차부대 운영이 부적합하며, 또 한국군의 대전차 장비가 빈약하므로 구태여 많은 전차를 보유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최초 계획한 전차 500여 대를 그 반으로 줄여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계속)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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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utelscanner 2013.03.25 1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한미군 철수 추진 속 1949년 한미방위조약 주장유럽의 NATO와 유사한 태평양조약 결성도 앞장 결국 실패했으나 공산주의 팽창 저지 등 안목 돋보여

  2. Advice by Dead Piff 2014.02.12 22: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선의 방어력이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방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