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북한군의 군사력 증강(2-2)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03.26 17:10

                    <소련에서 철도를 통해 도입되는 T-34 전차>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의 규모와 전력을 계속 강화시켜 나갔다. 1949년 초에는 독·소 전쟁 때 스탈린그라드전투에 참전한 조선인 병력 5,000여 명을 입북시켜 105전차여단에 배속시켰다.

 

1949년 4월 조·중 회담에 따라 중공군 제166사단, 165사단, 그리고 독립 제15사와 중국 각지의 조선의용군 5만여 명이 1949년 7월부터 1950년 5월까지 북한으로 들어왔다.

중공군 출신 한인부대인 제5·6·12사단과 제4사단 18연대 등 5만여 명의 병력은 부대검열 시 사격, 소대공격, 백병전 등의 일부 전투훈련에서 타 부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의 남침 승인하에 북한은 3개의 민청훈련소를 승격시켜 10·13·15사단을 편성함으로써 10개의 사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북한은 전문적인 유격대를 양성하기 위해 제945부대 와 제766유격대를 창설하였다.

 

다음으로 북한은 제12모터사이클 정찰연대(일명 제603 모터찌크 연대)를 창설하였다. 1949년 8월 중공으로부터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 전투 경험자 약 2,000명의 병력을 기간으로 창설된 이 부대는 54대의 모터찌크, 각각 16문의 45㎜ 대전차포와 120㎜ 박격포로 장비된 총병력 3,500명에 달하는 북한군 유일의 기동화된 독립연대였다.

 

 

<북한군 모터 사이클 정찰대>

 

 

<한국군에 비해 사정거리가 배나 되던

북한군의 122mm 곡사포>

 

또한 1949년 중순 북한군은 122㎜ 야포연대를 창설하였다. 북한군은 1949년 7월 15일 개성 북방 송악산 488고지 쟁탈전에서 처음으로 122㎜ 야포를 사용하였다. 당시 한국군 11연대장은 그 위력에 놀라 불발탄을 수거하여 즉시 새로운 무기의 출현을 보고하였으며 육본도 이를 보고 크게 놀랐다.

당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최대구경 포는 105㎜ 곡사포로, 사거리가 6,252m에 불과하였다. 이에 비해 122㎜ 곡사포는 사거리가 무려 1만 1,710m에 이르는 장거리 화포였다.

 

북한 해군은 1948년까지 내무성 산하의 해안경비대로 있다가 1949년 8월 20일 민족보위성으로 관할이 옮겨지면서 해군으로 정식 발족하였다. 북한군 해군은 소련의 지원으로 30여 척(5,560톤)의 대·소형 함정을 보유하였으며, 병력은 총 1만 5,720명이었다.

 

한편 북한 공군은 1948년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민족보위성으로 배속되어 비행대대가 비행연대로 증편되었다. 1949년 3월 김일성은 소련 방문 시 총 150대의 항공기(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를 제공받아 항공부대를 확장하였다. 북한 공군은 먼저 1차분으로 1949년 8월 중산 IL-10형(전폭기)과 YAK-9형(전투기) 항공기 등 모두 30여 대를 지원받아 같은 해 12월에 항공연대를 항공사단으로 증편하였다.

 

1950년 4월부터 IL-10, YAK-9 등 60여 대를 새로 소련에서 지원받아 배치하였으며, 남침을 1주일 앞둔 6월 18일 IL-10 60여 대를 소련군 조종사들이 직접 몰고와 인도해 주었다. 이에 따라 북한 공군은 200여 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북한의 공군력은 보병이나 전차의 지상 전력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다. 이는 소련이 한국 공군의 전력(연락기 22대)이 워낙 열세여서 그 이상의 공군력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전차부대를 보유한 북한의 지상군만으로 충분히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소련은 북한이 막강한 공군력을 갖춘다면 일본까지 공격하게 되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위험이 있음을 고려하였던 것이다.

 

북한군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 외에도 자체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1949년 7월 북한은‘조국보위위원회’를 조직하여 병기 헌납 등 전시동원 체제를 확립하고, 18세에서 45세의 주민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또 북한당국은 농민들에게‘애국미’라는 명목으로 곡식을 김일성 정권에 헌납하도록 강요하여 1949년 말까지 총 4만8,400여 가마를 거두었다. 이런 식으로 거둬들인‘애국미’는 전쟁에 대비한 군량미 비축과 군사장비 구입기금으로 사용하였다.

 

전쟁 수행에서 전투기와 전차 등의 기계화부대를 움직이는 데 필수불가결한 유류 문제는 소련으로부터 원유수송이 쉬운 원산 부근과 장진호 부근 지하에 각기 연 12만 5,000톤의 정유능력을 가진 정유공장을 1949년 초 건설해 상당한 분량을 확보해 놓았다. 또한 1950년 4월 소요량의 부족분인 석유 10만 톤을 루마니아에서 수입하여 저장하였다.

 

이처럼 북한은 자체 생산한 소화기와 탄약, 소련에서 지원 받은 전투기를 비롯한 기동장비와 중장비, 그리고 전쟁 동안 사용할 유류비축 문제 등을 해결함으로써 남침전쟁을 수행할 모든 준비를 1950년 5월 말까지 완료하였다. 이는 경제건설은 제쳐두고 북한주민들을 동원해 군수산업에 각종 기술과 자원을 투입한 결과였다.

 

이렇듯 남한에 비해 절대적으로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북한군은 기동훈련을 가장해 은밀하게 38도선에 전력을 배치하고 공격개시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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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www.geekoversity.com 2014.03.07 2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공군의 포로수용소 폭격을 부인하는 각서를 공산측에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