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남한의 허술한 전쟁대비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04.03 08:24

북한의 남한 공격준비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군사력과 전쟁 대비책은 매우 허술하였고, 소련과 중공의 북한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남한 지원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실례로 남침계획을 승인한 후에 3개 정예사단을 편성하라는 스탈린의 북한 지원과 달리 미국은 한국에 105야포의 지원도 망설이고 있었다.

 

더구나 남한의 전쟁지도부는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국방부장관은 미국의 지원이 없을 경우에는 단독으로라도 북진을 하여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서슴지 않아 오히려 북한이 무력 사용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데 필요한 명분과 구실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김일성은 국방부장관의 북진 발언을 빌미로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했기 때문에 자위적 차원에서 반격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으로 남침을 정당화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194511월 미 군정당국은 장차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한국의 현지 군사력을 육성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1113일 군정 법령 제28호로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책임자로 미 제24군단 헌병사령관인 로런스 시크(Lawrence E. Schick) 준장을 임명하였다.

 

국방사령부는 장차 한국정부의 수립에 대비하여 국방군 창설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초 이 계획은 국방군을 육군과 공군으로 구분하며, 육군의 규모는 3개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1개 군단, 공군은 1개의 수송중대와 2개 비행중대로 편성하려 하였다. 육군과 공군 병력은 45,000명이고 여기에 5,000명의 해군과 해안경비대를 합하여 총 5만 명 규모의 군대를 창설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는 때에 한국군의 창설은 소련을 자극할 수 있다고 보고 이 계획에 반대하였다.

아서 참페니(Arthur S. Champeeny) 대령

이에 따라 미 군정당국은 신임 국방부장 아서 참페니(Arthur S. Champeny) 대령에게 보다 규모를 축소한 새로운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였다. 참페니 대령은 군 기능보다 경찰 기능에 가깝게 병력과 장비를 축소한 경찰예비대의 창설안을 작성하여 건의하였다. 이때 건의한 경찰예비대 창설계획안이 바로 ‘Bamboo(뱀부)’계획 이다.

뱀부계획은 국방군 창설 계획안보다 그 규모 면에서 훨씬 축소된 것이었다. 이에 의하면 국방경비대는 각 도에 1개 연대씩 모두 25,000명 규모로 8개 연대를 편성할 계획이었다. 당시 국방사령부 고문으로 있던 이응준 장군이 뱀부계획 수립 시 각 도에 1개 사단 규모를 유지할 것을 조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뱀부계획은 경비대의 창설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우선 남한의 각 도에 1개 중대씩 먼저 8개 중대를 설치하되, 편성은 중화기가 없는 미군 보병 중대를 기준으로 장교 6명과 사병 225명으로 편성하고, 장교는 중앙에서 양성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도에 중대를 편성할 때는 정원의 20%를 초과 편성하도록 하고, 중대의 편성이 완료되어 훈련이 끝나면 그 초과병력을 기간으로 다음 중대를 추가 편성하도록 계획하였다. 이처럼 중대를 편성하여 대대를 편성하고, 대대 편성이 완료되면 다시 연대를 편성하여 각 도에 1개 연대를 편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와 같이 미군은 외부 북한의 침략에 대비해서가 아니라 남한의 내부 치안유지를 위해 한국군을 창설하려고 하였다.

 

미 군정은 뱀부계획에 따라 1946115일 남한의 8개 도에 1개 중대씩을 창설하였으며, 8개 중대는 곧 8개 연대로 확장되었다. 한편 주한미군 철수에 따라 미 국무부는 한국의 경비대를 무장하고 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조선경비대는 이미 편성된 9개 연대를 근간으로 3개 연대를 1개 여단으로 편성한 후 1947121일 서울(1여단), 대전(2여단), 부산(3여단)에서 3개 여단을 창설하였다. 1948429일 제5여단을 추가로 창설하였고, 51일부터 4일 사이 6개 연대를 추가로 창설하여 여단에 편입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선경비대는 5개 여단, 15개 연대로 증편된 후 후방지원부대가 보강된 상태에서 1948815일 정부가 수립되자 91일부로 대한민국 육군으로 잠정 편입되었다. 당시 조선경비대의 병력은 장교 1,430명과 사병 49,087명으로 총 5517명이었다. 무장은 극소수의 경기관총을 제외하고는 소총이 전부였으며, 그마저 일제 소총이거나 미군이 쓰던 것을 넘겨받은 것이었다.

 

1949년 한 미 군사고문단은 한국 육군은 애국심 하나만 빼고는 1775년 독립전쟁 당시의 미군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를 인식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원조를 간절히 요청하였으나, 미국 정부는 한국이 부담할 수 없는 대규모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보다 건실한 경제개발이 더욱 중요하다고 경제안정의 내부단속만 강조하였다. 아울러 이승만 정부가 국내 반공의식을 강화하고 국민의 결속을 다지는 목적으로 말하는 북진통일공산주의 타도라는 구호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경축행사에서 서울 시가를 행진하는 국군(1948. 8. 15, 서울)>

 

해군미군으로부터 소규모 함정을 인수한 후 이를 보수하여 사용하였고, 함정 건조를 위한 모금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PC-701함을 구입하였다. 그 후 702·703·704함을 계속 구입하였으나, 이들 함정이 하와이에 기항하고 있을 때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 해군은 1950625일 당시 29척의 경비정과 약 7,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상태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 PC-701 백두산함>

 

육군과 더불어 발족한 공군은 주로 경비행기인 연락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애국기 헌납운동을 펼쳐 항공기의 판매를 미국에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캐나다에서 AT-10형 훈련기 10대를 구입하였으며, 1950514일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건국기라고 명명하였다. 이후에도 항공기의 추가 구입이나 미국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 공군은 22대의 연락기와 연습기만으로 북한의 YAK 전투기를 대적해야만 했다.

 

이처럼 한국군은 북한의 공격에 대비하기에는 너무도 허술하였다. 특히 국민의 반공의식을 고취하고 국민적 단결을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내세운 북진통일’, ‘공산주의 타도등의 구호는 한국군의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모든 분야의 노력이 군사력의 증강에 집중된 북한과 침묵 속에 북한을 지원한 소련·중공과는 달리 한국은 각 분야의 노력을 집중시켜 국가를 방위하기보다는 서로 상충되는 역할을 함으로써 국가적 노력이 분산되었고, 국내 정치는 대외 외교를 뒷받침하지 못했다. 이러한 결과 한국군은 소총과 연습기, 북한군은 전차와 전투기로 무장하는 극심한 불균형 현상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북한 김일성으로 하여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도록 만들어 전쟁을 촉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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