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드러난 검은 그림자의 실체(여수·순천 10·19사건)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04.10 13:27

광복 직후 남한 내 각종 좌익세력은 자체적인 무장능력을 갖추고자 하였다. 그러나 194511월 중순 국방사령부를 설치한 미 군정당국은 이듬해 1월 중순 그 예하에 국방경비대를 창설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사설 군사단체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해산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사설 군사단체의 해산은 곧 좌익세력이 독자적인 무장능력을 갖출 기회가 사라졌음을 의미하였다. 더욱이 국방경비대가 점차 군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자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은 군 내부의 주요 인물들을 포섭해 군 조직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킬 목적으로세포를 국방경비대 내에 침투시키는 공작을 시도하였다. 전쟁 전 북한이 남한 내부의 교란을 위해 일으킨 주요 사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로당의 군내 침투공작은 장교와 사병을 구분해서 그 방법을 달리하였다. 장교의 경우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내에 이미 침투해 있거나 포섭된 조직망을 통해 남로당이 추천한 자를 입교시키는 방법, 임관된 장교를 통해 남로당이 추천한 자를 입교시키는 방법, 임관된 장교를 통해 그 지인들을 포섭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였다. 사병의 경우는 각 시·군 단위 세포조직별로 추천한 사병들을 연대 공작담당 조직원을 통해 각 대대·중대 및 소대로 배치하는 등 한국인들의 토착적인 정서를 이용해 포섭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방법을 활용하였다.

 

한편 국방경비대 소속 사병들은 대부분 빈농 출신이었다. 그중 일부는 광복 후 득세하던 좌익세력에 가담한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또 다른 일부 중에는 좌익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쫓겨 국방경비대에 들어오는 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국방경비대 소속 사병계층 가운데는 경찰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남로당은 바로 이 같은 국방경비대와 경찰 간의 대립관계를 적극 이용하였다.

 

당시 남로당은 주한미군에 맞설 만한 군사력을 가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언젠가는 미군이 철수할 것이며, 철군 후에는 국방경비대가 권력쟁취를 위한 결정적 힘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국방경비대를 장악할 교두보로서 국방경비대 내에 좌익 조직을 구축하려 한 것이다.

 

당시 미 군정당국은 국방경비대 병력을 충원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도록 공평하게 사병을 모집한다는 원칙에 따라 선발 인원을 신원조사조차 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좌익성향의 청년들이 대거 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남로당은 군내에 좌파 세력을 침투시키는 공작 과정에서 장교들은 당 중앙 군사부에서 관리토록 하였고, 사병들은 각 지방 당부가 관리케 하는 이원적 체제를 운영하였다.

 

좌익세력이 군 내부로 침투해 발생한 대표적 사건은 1946525일의 국방경비대 제1연대 1대대 소요사건이다. 이 사건은 영등포 보급중대에서 차량 2대 분량의 보급품을 부정 처분한 데에 분개한 제1연대 1대대 병사들이 연병장에 모여 데모를 일으킨 것이 직접적인 발단이 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국방경비대 창설 이래 누적되어 온 각종 불만과 사상적 대립이 외부로 표출된 것이었다.

 

특히 제1대대 내에는 그 이전부터 이념적으로 좌·우 대립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경찰의 수배를 피해 다닌 자들이 대거 군에 입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시 미 군정당국의 방침에 따라 사상검열 없이 신체검사와 구두시험만으로 신병을 모집한 상부의 눈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연대 내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의견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우익과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이로 인해 좌·우익의 주도권 쟁탈이 극심하였다. 1연대 1대대 사병들의 집단 소요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하극상 사건이었다.

 

사건은 일부 하사관들을 구속하고 지휘관들을 전출시킴으로써 일단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미 군정당국의 국방경비대 정책과 간부들의 지휘통솔 방식에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다. ·우익을 가리지 않는 미 군정당국의 불편부당 방침은 좌익들로 하여금 국방경비대 내로 쉽게 진출하도록 만들었으며, 또 국방경비대 내에서 좌·우 갈등을 증폭시킨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남로당이 세포 조직원을 통해 군 내부의 반란을 선동한 대표적 사례는 여수에 주둔해 있던 국방경비대 소속 제14연대가 중심이 된 사건이다. 19485월 초 여수에서 창설된 제14연대는 신병 모집에 들어갔는데, 다른 연대와 마찬가지로 정치성향에 관계없이 입대 지원자는 모두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제14연대 내에도 일부 장교들의 부정에 대한 불만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장교와 사병 간의 마찰이 빈번하였다. 그런 와중에 19481015,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좌·우익의 대립으로 혼란에 빠진 제주도의 치안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제주도에 파견할 1개 대대를 조속히 편성한 후 대기하라는 명령이 제14연대에 떨어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남로당 제14연대 조직책이자 연대의 인사담당 선임하사관인 지창수는 남로당 소속 부사관에게 이를 전달하였고, 이들은 제주도로 가는 배 위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선상 반란 계획이 누설되었을 것으로 판단한 지창수 등은 계획을 수정하여 영내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1차 기회를 놓친 후 그들은 제주도 출동 직전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19일 밤 20:00시경 총성과 비상나팔 소리를 들은 출동 대대의 병사들은 출동예정 시간이 1시간 앞당겨진 것으로 생각하고 서둘러 연병장에 집합하였다.

 

병력이 집결하자 사병들을 앞에 두고 단상에 오른 지창수는동족을 살상하기 위한 제주도 파병에는 절대 반대한다. 경찰을 타도하자고 선동하였다. 지창수를 비롯한 좌익 세포들은 연이은 선동연설과 함께 그들에게 반대하는 부사관을 현장에서 총살하였고, 그러한 위협 속에 전원을 삽시간에 좌익 반란군으로 돌변시켰다. 14연대 병사들은 총성과 비명, 선동연설 등이 한데 뒤섞인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이내 반란 동조자로 변하였다.

 

지창수의 지휘하에 약 3,000명의 반란군은 2001:00시경 여수 시내로 진입해 봉산지서 출장소를 공격함으로써 경찰과 접전을 벌였다. 새벽 05:30분경 반란군들은 시내 주요 기관들을 점령하고 좌익 청년단체와 좌익계 학생들을 동원해 경찰, 국군장교, 우익인사 등에 대한 검거와 테러활동을 본격화하였다. 그리고 20일 오전에 여수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서 반란군은 오전 10:30분경 세 방면에서 순천을 압박해 들어가면서 경찰서와 지서를 파괴하고, 경찰관들을 살해하면서 순천을 점령하였다.

 

<관련사진  *자료출처 : 위키피디아>

 

순천을 점령한 반란군 주력은 병력을 주변의 학구, 광양, 벌교 등 세 지역으로 분산시켰다. 14연대의 반란 소식이 육군 총사령부에 전달된 것은 2001:00시가 넘어서였다. 국방부는 오전 09:00시에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하고 진압작전을 논의하였다.

14연대 반란에 관한 상황보고를 접한 정부는 매우 긴박하고 위급한 상황으로 인식하면서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38도선 경비 병력을 제외한 모든 가용병력을 진압작전에 투입하였다. 각 진압부대가 순천에 집결한 것은 반란군이 순천을 완전히 장악한 후였다. 진압작전을 본격화한 22일 반란군은 이미 서쪽으로 보성, 동쪽으로 광양, 북쪽으로 구례·곡성까지 뻗쳐 있었다.

 

진압군의 순천 탈환작전은 학구 공방전으로 시작되었다. 조직적인 합동작전을 펼친 진압군은 곳곳에서 게릴라식의 기습을 벌이는 반란군을 차단하며, 치안확보에 주력하면서 반란군을 소탕해 나갔다. 전투사령부는 순천을 완전히 회복한 후 여수 탈환작전과 각 지역으로 분산된 반란군의 소탕작전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고, 24일 여수 탈환작전을 개시하였다. 진압군의 제1차 공격이 있자 반란군의 주력은 24일 야음을 틈타 여수를 탈출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시내에는 좌익계 학생들과 조직원들만 남아 우왕좌왕할 뿐 조직적인 저항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반란 9일째인 27일 여수는 진압군에 장악되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추격에 쫓긴 반란군 주력은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장기간 게릴라전을 펼치며 저항하였다. 이 사건은 정부수립 2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일어난 군내 반란사건으로서 좌익계열 하사관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처럼 군내 좌익세력은 정부수립 이후에도 남로당과 연계되어 군 안팎에서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반정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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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lationship Issues With Dead Piff 2014.02.12 2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선의 방어력이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방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