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현장에서 믿음을 심어준 카푼 신부님의 이야기(3-1)

생생! 6·25/6·25전쟁 지원국 2013.04.10 15:19

 

 

 

전투는 전투병과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군에는 보병을 비롯한 여러가지 병과(군종, 정훈, 병참, 헌병, 부관, 경리 등)가 있습니다. 6ㆍ25전쟁 당시에도 낯선 땅 한국을 위해 바다를 건너온 미군 전투병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끊임없이 심어주기 위한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오늘은 미 한국전 60주년 사업위원회에서 이달의 인물로 선정한 에밀 카푼 신부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래 글의 원 출처는 http://www.koreanwar60.com/이며, 원문을 번역한 내용을 3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

*본 자료의 저작권은 미 한국전 60주년 사업위원회에 있습니다.

 

 

 

Emil Kapaun 대위는 1916420일 미국 캔사스Pilsen에서 태어났다. 농부의 아들로서 Kapaun은 튼튼한 신체를 가진 청년으로 성장했고, 덕분에 후일 포로수용소의 척박한 환경에도 잘 견딜 수 있었다. 또한, 독실한 천주교 가정환경 덕택에 어떠한 육체적 고통 또는 심리적 압박에도 굴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Kapaun1932년 천주교 기숙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몬타나Saint Louis에 위치한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1940, 마침내 성직에 임명되어 고향 Pilsen의 부목사로 부임한다.

 

1941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과 동시에 Kapaun 목사는 인근 군 기지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섬기며 군종 신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1944육군에 입대한 Kapaun은 말라리아가 창궐하던 인도 전선에서 2년간 복무했다. 1946년 전역 이후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등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군 생활을 잊지 못해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1948년 군종 신부로 재입대했다.

 

일본에서 기병 1사단 8연대 소속 군종 신부로 근무하던 Kapaun 대위는 6.25 전쟁이 발발 직후 소속부대와 함께 포항에 상륙했다. 8연대 예하 2개 대대는 서북방으로 이동, 용동 인근에 물밀 듯 남하하는 북한군에 맞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723일 최초로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8 기병연대의 장병들이 이국땅에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전개해가는 가운데, Kapaun 신부는 언제나 최전선에서 전상자들을 도왔고, 장병들과 음식을 나누며 사기를 북돋았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한 공로로 동성훈장을 수여받는 등 전우를 위한 마음씨가 남달랐다.

 

Kapaun는 신부는 편지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지인들에게 전했다: 적 포격으로 인해 양 다리를 잃은 장병들을 봤습니다. 한명은 머리의 윗부분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더군요. 아마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을 겁니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이렇게 고백했다: “8일간 전선에서 적과 맞서 싸우는 장병들과 함께했습니다. 적의 끊임없는 기관총 및 박격포 공격에 시달리고, 전차의 포격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3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기기도 했지요. 제가 살아남은 건 하나님의 은총이었던 듯합니다. 얼마나 더 이 끔찍한 나날들을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같은 개인적인 심정에도 불구하고, Kapaun 신부는 전우들 앞에서 만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한번은, 북한군 탱크가 발사한 포탄이 수미터가 되지 않는 지점에 떨어져 철모가 날아가기도 하고, 야외 미사를 진행하던 장소에서 140미터 떨어진 곳이 적의 집중포격을 받는 일이 있기도 했다. 사용하던 차량마저 적에게 피격되자 버려진 자전거를 수리해 타고 다니며 전선의 부대들을 방문하는 등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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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lick Wagening en CNS Link 2014.02.13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꼭 알아야할 한국의 아픈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