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현장에서 믿음을 심어준 카푼 신부님의 이야기(3-2)

생생! 6·25/6·25전쟁 지원국 2013.04.15 14:26

<장병들과 함께 기도하는 카푼 신부님>

 

1026, 평안북도 운산에 포진해있던 국군 1사단이 중공군을 생포했다. 백선엽 당시 1사단장은 포로 취조 끝에 중공군 3개 사단이 아군 근처에 포진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상부에 보고했지만,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지휘부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다.

 

하지만 국군이 중공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육군 1군단장이 지원 병력을 파견했다. 수일 내로 1기병사단 8연대가 운산에 전개되어 마을 북부와 서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기온은 예년보다 높았지만, 중공군이 아군 정찰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피운 검은 연기가 계곡을 뒤덮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전기에서 중국어 대화가 들리는 등 대규모 중공군 병력이 인근에 위치해 있다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식별되었지만, 다시금 지휘부에 의해 무시되었다. 국군은 이미 남쪽으로 철수한 상태였고, 가장 가까운 미군부대는 16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당시 1기병사단장에 따르면 8연대는 매우 위태로운 입장에 처해있었다.

 

111일은 천주교에서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만성절로서, 1950111Kapaun 대위는 제8 기병연대 유일의 천주교 군종 신부로서 아침 일찍 일어나 종일 미사를 진행하고 고해를 듣느라 매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날 역시 인근을 정찰하던 수색대가 대규모 적 부대의 징후를 보고해왔지만, 지휘부의 누구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가 지자 중공군은 운산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8연대 1대대에 대한 대규모 로켓 공격과 함께 공격을 개시했다. 연이어 마을 서북방에 있던 2대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고, 연대가 와해될 것이라 판단한 지휘부는 8연대에게 남쪽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3대대와 함께 최전선에서 수백여 미터 떨어져 있던 Kapaun 신부는 마을 북방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때문에 이른 저녁 잠자리에 들었지만, 2300시 즈음에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서둘러 후퇴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 Kapaun신부는 보조로서 자신을 돕던 Patrick Schuler 일병과 함께 퇴각하는 8연대 차량행렬에 합류했지만,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속출했다. Kapaun 대위와 Schuler 일병은 가능한 많은 수의 미군 장병들을 구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였다.

 

112일 새벽 0300시경 3대대 본부에 중공군이 들이닥쳤고, 후퇴를 하기 위해 준비하던 지원차량들 근처에서 육탄전이 벌어졌다. 부상당한 장병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기며 전장을 누비던 Kapaun 신부는 한순간 중공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군종 신부가 생포된 걸 발견한 장병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전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Kapaun 신부는 군의관 Clarence Anderson을 도와 부상병들을 돌봤고, 살아남은 장병들은 3대의 아군 탱크를 거점으로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했다. 탱크의 막강한 화력 덕택에 중공군의 공격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종일 8연대 장병들은 Kapaun 신부가 몇 번이고 적 총탄과 박격포 공격을 뚫고 부상병들을 찾아 비교적 안전한 참호로 끌어 옮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날 하루에만 15명을 구한 Kapaun 대위는 그 영웅적 용기를 인정받아 훗날 육군 수훈십자훈장을 수상한다.

 

그날 밤, Kapaun 신부는 결국 중공군에게 생포되었다. 수일간의 행군 끝에, 운산 전투에서 생포된 다른 수백 명의 포로들과 재회하는데, 부상병들을 돌보기 위해 끝까지 자리를 지킨 군의관 Anderson도 일행에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군의 잔학성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데다 그 증거를 직접 봤기 때문에(낙동강 방어선, 대다수의 포로들은 자신들이 즉결처형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신, 중공군은 오히려 미군포로를 예우하며 따뜻한 숙소, 넉넉한 음식 및 의료지원을 약속했다. 포로들은 11월의 대부분을 행군에 할애하며 압록강 변에 위치했던 평안북도 벽동 포로수용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군의 폭격에 의해 포로수용소의 반이 파괴되어버려 남쪽의 섬박골에서 2개월을 보내야했다.

 

포로 중에는 들것을 사용해야만 이동시킬 수 있었던 부상병들이 여럿 있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을 도울 지원자를 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만큼 포로생활이 고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Kapaun 신부는 언제나 자신의 차례가 오면 주저 않고 들것에 누워있는 동료들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전우들을 격려하며 모두가 단합해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Sombakol로 이동하던 중 동료 군종 장교 Kenneth Hyslop가 운산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Kapaun 신부는 그의 곁으로 달려가 임종의 순간까지 자리를 지켰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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