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북한군 서울 지체 3일의 미스터리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1.18 16:23

Tip. 북한군 서울 지체 3일의 미스터리



북한군은 전쟁발발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1일까지 3일간 지체함으로써 한국군은 병력을 수습하여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고, 미 지상군이 전개하여 낙동강방어선까지 지연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면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왜 3일간 지체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도하장비의 부족, 남한 내부 인민봉기의 기대, 승리감 도취와 북한군의 재정비, 국군 제6사단의 춘천, 홍천전투의 성공으로 인한 최초 계획의 차질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도하장비가 없었다. 

전쟁 전 북한군은 소련에 도하장비 5개 세트를 요청하였으나 1개 세트만 지원받아서 도하장비가 부족했다. 그리고 6 27일부터 시작된 미 공군의 폭격으로 도하 준비 중인 북한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실제 북한군은 보병의 경우 야간에 수영과 목선, 뗏목을 이용하여 도하하였고, 전차와 중장비, 차량 등은 완파되지 않은 경부선 철교를 복구하여 도하하였다.

 

> 남한 내부의 인민 봉기를 기다렸다.

박헌영은 서울을 점령하면 남로당 당원 20만 명이 봉기할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주장하였다. 북한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면 남로당원들이 봉기해서 군사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남한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을 기다려도 봉기는 일어나지 않고, 또 예상보다 빨리 미군이 참전하는 바람에 북한군은 작전을 바꿔 남하하게 되었다.”

 

> 서울 점령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기본임무를 망각하였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제3,4사단과 사단으로 승격시킨 제105전차사단에 서울 사단의 칭호를 부여하는 등 자축과 점령정책에 치중하였고, 부대들은 전투휴식과 정비로 작전템포를 상실하였다. 그리고 6 30일 제13사단에 서울 위수업무를 부여하고 본격적으로 한강 도하작전을 개시하였다.

 

  ※  별오리회의 시 김일성의 평가(1950. 12. 21)

   “적들의 유생역량을 소멸하는 것이 군사승리의 최우선 과제임을 망각하고 적들을 분산 혹은 도망치게 하였다.    그 결과 적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줘 다시 부대를 수습해 반격할 가능성을 줬다.”


  ※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 6.25전쟁 보고서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은 3일간 그곳에 머물러 이승만 군대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였다. 각사단장들은 서울에서 퇴각하는 적을 적극적으로 추격하거나 한강 도선장을 점령하지 않은 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모호하게 행동하였다. 또한 105땅크여단 예하부대들도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적을 추격하지 않은 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적에게 한강 남쪽 강변을 강화하고 교량을 파괴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 북한군 제2군단의 춘천점령 지연으로 최초계획에 차질이 발생했다.

북한군은 1단계 작전에서 제2사단과 제6사단으로 한강 이남에서 양익 포위하고, 603모터사이클연대가 수원 이남으로 포위하여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포반도로 공격한 제6사단의 영등포 점령이 지연되었고, 2사단은 춘천 점령 지연으로 6 29 20:00시가 되어서야 팔당 일대의 한강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제12사단의 홍천 점령 지연으로 제603모터사이클연대를 수원방향으로 진출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조공인 제2군단의 진출과 협조된 작전을 위하여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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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내원 2014.02.06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 인민봉기설이 맞을겁니다. 3일으로 전쟁응 끝내고 무력통일을 하려는데 뜻대로 안되자 남침을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3년동안 각본에 없는 전쟁을 치뤘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