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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1.14 호주 공군 6ㆍ25전쟁 참전기(2/2) (56)
  2. 2011.11.09 호주 공군 6ㆍ25전쟁 참전기(1/2) (12)
  3. 2011.11.08 홍천 말고개의 북 전차 섬멸전 (8)

호주 공군 6ㆍ25전쟁 참전기(2/2)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11.14 13:15

 미그 15기 성능이 이렇게 막강했었던 것은 독일 메서슈미트 제트기에서 영향을 받은 유선형 날개와 영국 정부가 실수로 제공한 롤스 로이스 넨(NENE) 엔진을 카피 생산한 크리모프 RD-45 엔진의 덕택이었다. 넨 엔진은 미국이 해군 전투기 F9F 팬서기(6ㆍ25전쟁 참전)에 장착할 것을 검토하기도 했을 만큼 우수한 기능을 발휘했었다.

[미 해군 F9F 팬더기 - 미국 라이센스 생산 넨 엔진 장착을 계획하다가 변형하였다. 6ㆍ25전쟁에서  미그기들과 격돌하여 이를 격추하기도 했었다.]



 소련 미그 항공기 국은 신형기의 기체 디자인은 완료했지만 그 디자인을 뒷받침 해줄 엔진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다. 소련 엔진 설계자들은 허탕 칠 셈하고 영국에 엔진을 구해 보기로 했다. 그 때 영국에 갔던 디자이너 인솔자가 넨 엔진을 복사한 엔진을 만들어낸 크리모프였다.

 당시는 영국이 진보파인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었을 때다. 소련의 스탈린조차 영국이 그런 최고 기밀을 넘겨주겠느냐며 하며 믿지를 않았었는데 친소파인 상무장관 스테포드 크립스 경이 의외로 선선히 넘겨주어 MIG-15기의 탄생을 도왔다.

 영국의 챔버린 정부가 히틀러에게 유화 정책을 썼다가 큰 피해를 보았었는데 이번에도 그런 실수를 했었다. 엔진 개발사 롤스 로이스 사는 소련이 불법 카피한 자사 제품에 대해서 로얄티를 제공받지 못했었다. 당시 넨 엔진은 그 후 소련이 개발하는 모든 제트 전투기와 제트 폭격기들의 시발점이 되었다.

 영국이 생각 없이 넘겨준 엔진은 결국 자기 발등을 찍는 결과를 가져왔다. 호주 공군 77비행대대의 기종 전환은 1951년 4월부터 7월 사이 일본 이와쿠니 기지에서 이루어졌다. 호주 공군 조종사들은 미티어 기의 성능에 상당한 자신을 가졌었다.

 하지만 현실을 냉혹하였다. 미티어 기가 작전에 전개 되면서 일본 이와쿠니 기지 상공에서 행해진 F-86기들과 모의 공중전들이 있었다.

[미티어 기]



 미티어 기는 이 F-86기와의 공중전에서 열세를 보였다. 단지 상승력이 약간 앞섰을 따름이다. 미그기를 상대해본 미 공군은 이 미티어 기가 미그 15기와 결투하는 것은 역부족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 영국제 전투기에 대한 사용 영역에 대한 미 공군과 호주 공군 사이에 격론이 있었다. 호주 공군이 미티어 기가 원래 제작된 목표대로 요격 목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입장이었고 미국은 미티어의 성능과 변한 공중 작전 상황에서 필요한 지상지원을 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호주 공군은 미티어 기가 F-86기가 상승력에서 우세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저공에서도 선회 능력이 미그기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사실로 미그 15기를 상대할 만하다고 믿었다.

 미국ㆍ호주 공군 사이에 열띤 논쟁이 오갔지만, 호주 공군은 미군의 권고를 거절하고 미티어 기로 미그 15기와 맞서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공산기와 맞대결을 자주 해보아서 경험을 축적한 미 공군의 판단이 역시 맞았다.

 미티어 편대는 1951년 7월 29일 김포 비행장에서 최초로 북한을 향해 출격을 했다. 1951년 8월 29일 고대했던 미티어 기와 미그기의 결투가 압록강 상공에서 벌어졌다. 첫 대결은 미티어 기의 패배로 결말이 났었다.

 77 비행대대 미티어 조종사 론 거트리가 조종하는 미티어 기는 미그 15기에게 격추 당했다. 조종사 론 거트리 준위는 38,300 피트의 고공에서 낙하산으로 비상 탈출하였다. 그는 피까지 어는 것 같은 차가운 고공 대기를 뚫고 지상까지 20분이나 걸려 낙하 했지만 멀리서 보고 달려와 대기하고 있던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로 수용소에서 지내야했다.

[론 거트리 준위]



 1951년 12월 1일은 미티어 기 대참사의 날이었다. 14기의 미티어 기는 북한 북방에서 50여기의 미그 15기 대군에 습격을 받았다. 중과부적의 적 미그기들과 힘겨운 공중전을 벌였던 호주 미티어 부대는 적 미그 15기 1기를 격추했지만, 호주 미티어 기 3대가 격추 당했다.

 그 중 한 명인 반스 드럼몬드 상사는 평양 동남쪽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했다가 포로가 되었다. 비록 중과 부족의 상황이었지만 미티어기의 완전한 참패였다. 소련 전투기 조종사의 회고에 의하며 역시 F-86 전투기가 가장 상대하기 힘든 연합국측 전투기였었고, 다음으로 힘든 것이 F-84였으며 그 다음이 F-80, 그리고 미티어 기가 가장 격추하기 쉬었다고 다는 것이었다.

 미티어 기는 날렵한 미그 15기를 상대하기에 너무 크고 느리고 둔했다는 평가였다. 엔진을 잠재 적국에 넘겨주어 미그 15기 같은 걸작을 탄생시킨 영국이 제작한 미티어 기가 제일 열악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한국 주둔의 호주 공군 미티어 기]



 호주 공군은 공중전에서 미티어 기가 열세에 있다는 비참한 결과를 앞으로의 작전에 반영하여야 했다. 호주 77비행대대장은 배속된 5공군 사령관에게 미티어 기들의 작전 구역을 미그 15기의 위협이 적은 북한 남쪽으로 한정해달라는 건의를 했다.

 새로 부임한 5공군 사령관으로부터 요청을 승낙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터어 기들은 벅찬 미그 15기와 결투를 포기하고 대신 지상 공격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미 공군의 성능이 떨어지는 F-80 슈팅 스타나 F-84 선더 제트는 이미 그 임무를 대지 공격으로 전환 받았었다.

 비록 미그 기들이 출몰하는 북한 북쪽의 출격을 중지하고, 북한 남쪽 대지 공격에만 전념했지만 1953년 미티어기들은 바로 전선 북쪽 사리원 상공까지 내려온 미그기들과 격돌한 일이 있었다.

 그간 미공군들은 적지에 격돌을 피하고 숨어만 다니는 공산군 공군에서 피하지만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 한판 붙자는 조롱의 전단지를 뿌렸는데 이에 자극받은 공산군 MIG-15기들이 보조 연료 탱크를 부착하고 남쪽 깊숙이 기습해 온 것이다. 미티어 기가 미그기와 한판 붙을 뻔했는데 미 공군 18비행단의 소령의 F-86 달려와서 한 기의 미그기를 격추하여 미티어기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쟁이 2년간 지나자 호주 공군은 조종사 부족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1952년부터 호주 공군은 영국공군 남아연방공군 뉴질랜드 공군으로부터 조종사를 파견 받아 비행대를 운용해야했다. 적 포화로 격추되는 전투기들도 많았고, 고참 조종사 자원들이 자꾸 줄어들어 전쟁끝 무렵에 호주 본토에서 한국으로 배치되는 조종사는 갓 비행 학교를 졸업한 평균 연령 20살의 어린 조종사들이었다.

 77비행단의 조종사들은 19,000 개인 출격을 기록했다. 호주 조종사들의 고되고 희생큰 활약은 외교적으로도 큰 결실을 가져 왔다. 그들의 뛰어난 능력은 미국으로 하여금 호주나 뉴질랜드가 염원하던 미국 뉴질랜드 호주의 군사 동맹 조약인 ANZUS 조약이 탄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주는 공군뿐만 아니라 항공모함 15700톤급의 HMS 시드니도 파견하였다.]



 3년간의 6ㆍ25전쟁 참전동안 77비행대대는 명성을 얻는 대신 값비싼 댓가를 치렀다. 40명의 조종사가 한국 방어를 위한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30명은 전투 비행중 격추되어 전사했고, 8명은 사고로, 2명은 지상 사고로 희생되었다.

 6명은 격추된 후에 탈출했지만 공산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비행대대가 운용했던 90기의 미티어 기 중 54기가 격추ㆍ추락ㆍ 파손 등의 원인으로 손실되었다.

[미티어 기]



 77 비행대대는 전후 1954년 3월까지 김포에 주둔하고 있다가 다시 군산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미국으로 들어가는 미공군 F-84 49 비행대대의 공백을 매웠었다. 그러나 비행대대 본부는 일본 이와쿠니로 돌아 와서 한 달 주기로 돌아가며 군산 비행장에 돌아와 주둔했었다.

 휴전이 되자 77비행대대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1954년 11월 선편으로 일본을 떠났다. 77비행대대는 1954년 12월 3일 호주로 돌아왔다. 여담이지만 호주의 미티어기는 한국을 떠났지만 호주기라는 애칭을 50~60년대 한국에 남겼었다. 김포와 군산 비행장을 오가며 활동하던 미티어기는 그 독특한 디자인의 기체가 한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었다.

 한국인들은 미티어같은 수직익을 가진 미군의 F-80, F-84들도 호주기라고 총칭했었다. 호주기의 인상은 전투기에서 머물지 않고 한국 일반 사회에 까지 퍼졌었다. 동작이 빠른 사람을 호주기라고 별명을 짓는 등 한국 민족은 호주기를 빠른 것의 대명사로 활용하였다

 77비행대대는 현재 미 해군이 쓰는 것과 같은 형인 F/A 18 호넷기로 장비하고 호주 영공을 지키고 있다. //끝//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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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공군 6ㆍ25전쟁 참전기(1/2)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11.09 08:19

 6ㆍ25전쟁 중 영국제 미티어 전투기가 참전했었다. 쌍발의 엔진에 수직 날개의 미티어 전투기는 한국인들에게 호주기로 불린 바와 같이 영국 공군이 아니라 호주 공군이 운용했었다.


[호주기 미티어 기]



 영국 공군은 참전은 했지만 수송기나 비행정들이 파견되었을 뿐 전투기는 참전하지 않았었다. 영국은 공군 전투기를 보내는 대신 전투기와 공격기를 탑재한 항공모함을 파견했었다. 비록 공군 전투기는 파견되지 않았으나 여러 영국 조종사들은 한국에 파견되어 호주 공군이나 미 공군에서 전투를 경험했었다.

 6ㆍ25전쟁이 발발할 때 호주 공군 77대대는 곧 호주로 복귀할 계획을 착수하고 있었다. 일주일이 되었을 때 일본에 다른 영연방군들과 같이 일본 점령군으로 주둔하고 있던 호주 77 비행단 장병들은 이와쿠니 기지에서부터 출격을 시작했다.

 호주 공군은 일본 주둔을 마무리하고 곧 호주 본국으로 철수하려고 준비중에 생각지 않았던 전쟁이 터져 4년간이나 더 이 극동 지역에 머물러야 했다. 이 전쟁의 초기에는 호주 공군의 전투기는 제트기인 미티어기가 아니라 프로펠러기인 P-51 무스탕 기였다. 후에 F-51 무스탕 기로 명칭을 바뀌었다.


[호주군의 P-51 무스탕]



 77비행 대대의 무스탕 기들은 이와쿠니 기지로부터 출격하여 한반도 공산군들의 지상 목표를 공격하거나 일본에서 출격하는 미공군 B-26 폭격기들의 공중 엄호를 맡았었다.


[B-26폭격기 - 6ㆍ25전쟁에서 야간 폭격을 전담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호주 비행 대대는 한반도로 이동하여 포항, 대구, 함흥, 부산, 김포 비행장등 여러 비행 기지를 전전하며 전투를 계속하게 된다. 호주 공군은 주로 미 제 5공군에 배속되어 5공군의 명령에 따라 유엔군의 지상전 지원을 했지만 단독 수립한 작전 출격도 감행했었다.  

 호주 공군이 공격했던 지상 표적은 주로 철도와 도로, 군 시설물, 군용 차량, 지상 병력 등이었다. 호주 공군이 지원했었던 유명한 전투로서 장진호 전투의 하이라이트였던 덕동 고개 전투가 있다. 해병 1중대가 닷새 동안 공격해온 중공군을 2,000명이나 사살하고 유담리의 미 해병 2 개 연대 병력이 철수할 길목인 덕동 고개를 지켜낸 전투다.

 호주 공군의 무스탕 기들은 함흥 비행장에서 출격하여 덕동 고개 주변 산악에서 해병 중대에 총격을 가하는 중공군들을 해치웠다. 호주 공군은 초기에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무스탕 전투기를 조종했었다. 무스탕 기들은 통상 폭탄 네이팜 탄, 로케트 탄과 50구경 기관총들을 사용했었다. 

 무스탕 기들은 체공 시간도 길고 무장 적재량도 F-80 제트 전투기보다 커서 한국 전선의 지상전 지원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제트기가 뜨고 내리기가 불가능한 비포장 활주로에서도 출격이 가능해서 전쟁 초기 시설이 불비한 각처의 비행장을 이동하며 싸우기도 좋았다.


[호주 77비행대대 조종사들]



 공산군들이 미군의 항공 공격을 피해서 주로 야간에만 움직이자 야간 출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미 공군 조종사들은 당시 경험도 훈련도 없어 야간 출격에 취약했다. 영연방군들은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야간 출격을 많이 한 경험이 있어서 이 방면에도 미 공군에게 한 수 가르쳐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수가 있었다. (미 공군은 영 공군에게 야간 작전을 훈련 시켜줄 수 있는 영국 공군 장교의 파견을 요청하기도 했었다.)

 미군이 야간 폭격 전문의 B-26을 파견할 때면 야간 출격에 능한 호주 조종사들의 미티어 기들이 호위 비행에 나섰었다. 호위 비행의 경우 호위 임무와 함께 폭격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77비행대에 곧 희생자들도 발생하기 시작했었다.

 전쟁이 발발한지 두 달이 되던 1950년 9월 9일 비행대대장 루 스펜서 중령이 안강 남방에서 공격 중에 지상 포화에 피격되어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비행단에 큰 슬픔을 주었다. 대원들은 새로 부임한 대대장 딕 크레스웰 중령과 함께 충격을 극복하고 재출격에 나섰다.


[대대장 딕 크로스웬 중령]



 호주 비행대대는 6ㆍ25전쟁 중 수천 회의 출격을 했었고, 그 탁월한 비행술과 용감성으로 여러 참전국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아래는 평양 북방 숙천 투하 이틀째에 미 187공정단의 한 병사가 쓴 경험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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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천 투하 둘째 날 우리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북한 SU-76 자주포가 계속해서 우리 부대에 사격을 해 와서 그 사격 범위에서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실 낙하하는 탄들은 우리들 머리 위를 지나가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목표였는지 아니었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북 자주포가 언덕 능선에 붙어서 아래의 우리들을 향해서 사격을 했는데, 포를 우리를 명중시킬 만큼 충분히 아래로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 원인인 듯하다.


[북한 자주포 SU-76]



 산을 오르면서 날아오는 포탄 소리에 뒹굴기를 몇 번 한 끝에 지쳐 버린 소대 선임하사관은 무선으로 지역 상공에 혹시 대지 공격을 할만한 전투기가 있는지를 알아봤다. 무선망을 열자 즉각 독특한 액센트의 영어 응답이 왔다.

 호주 조종사였다.

 그는 근처에 다 왔으며 자신이 확인 할 수 있도록 미군 지역에 연막탄을 터뜨려 달라고 주문해왔다. 우리는 연막탄을 터뜨림과 동시에 4기의 호주 공군 표시를 한 무스탕 전투기 편대가 아주 저공으로 우리 옆 상공에 나타나서 선회를 했다.

 호주군은 우리가 대공 포판을 깔았는지 물어보았다. 우리는 언덕을 오르며 포탄 소리가 날 때마다 뒹구느라 그런 것을 할 여유가 없었다. 

 "어이! 친구들! 우리가 당신들 대공 표시를 보지 못하면 연막탄을 정말 당신들이 터뜨렸는지 공산군이 터뜨렸는지 확인할 수가 없잖아."

 대공 표시판이 즉각 설치되었다. 그리고 적 자주포가 있는 방향을 호주기에게 알려주었다. 호주기는 더 높은 고도로 올라가 선회를 하며 정확한 적 자주포의 위치를 찾고 있을 때 적 자주포가 한 발을 더 쏘았다.

 호주기는 무전을 날렸다.

 "좋아! 발견했어! 머리 숙이고 있어 봐. 우리가 그 빈대를 잡을 테니까!"

 호주기 편대가 적 자주포를 상공을 통과하며 폭탄을 투하하자마자 대 폭음과 함께 적 자주포가 폭발하고 있는 모습이 동시에 연출되었다. 멋있는 한방의 일격이었다. 우리는 감사의 인사를 보냈고 호주기는 빅토리 롤(기체를 뒤집으며 선회를 하는 비행)을 한 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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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 더 진행되자 중공군들이 참전했다. 중공군의 참전은 상황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중공군은 북한군보다도 더 교묘한 은폐술을 구사했고, 장거리를 은밀하게 이동하기도 했고, 훨씬 적은 군수품으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버티었다.


[호주군은 육군 1개 대대도 파견하였다.]



 1952년 유엔군의 전략은 공중 압박으로 변화하였다. 중공군을 전투에 나오게 해서 격멸하는 작전이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공 방어망이 크게 발전해서 이 공중 작전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다. 작전 기간 내내 불순한 기후는 호주 공군에게 대공 포화만큼이나 출격을 어렵게 했었다.

 겨울철의 한국 활주로에서 이륙하기가 쉽지가 않았었다. 지상요원들은 아침마다 활주로를 두껍게 덮은 얼음과 눈을 치워야 했다. 만약에 해상에 비상탈출이라도 할 경우에는 단 몇 분 내로 구출되지 않으면 영하의 찬 바닷물을 그를 죽음으로 인도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운 여름 날씨 역시 큰 작전 장애 요소였다. 때로는 활주로의 아스팔트가 녹아 떨어져 이착륙하는 기체의 하부에 눌어붙기도 하였다. 습기 많은 여름 날씨는 고도 1,000미터까지 안개가 끼게 만들었다. 안개가 끼면 시계(視界)는 3km 미만이어서 작전에 크게 방해 받았다.

 중공군이 참전한 직후 압록강 상공에 미그 15기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당황스럽게도 공산측이 투입한 전투기 MIG-15 전투기는 성능이 아주 뛰어났었다.


[노금석 대위가 몰고 월남한 미그-15기]



 미군은 당시 미국이 보유한 최고 성능의 전투기 F-86기를 긴급히 한국에 가져와 항공작전에 투입하여야 했다. 미그 15기는 이 미국 최강의 전투기보다도 상승력이나 속도면에서 더 능가하는 성능이 있었다. 새로운 적기의 출현이라는 상황을 맞자 호주도 한국 작전기를 P-51 프로펠러 전투기에서 미티어 제트 전투기로 바꾸어야 한다는 조종사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77비행대대가 F-51(P-51의 개칭)로부터 1951년 4월부터 7월 사이 그로스터 미티어 기의 MK.8형으로 기종을 전환을 했다. 원래 5공군 사령관 파트릿지 공군 중장은 영국제 미티어 전투기에 대한 신뢰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1950년 11월 미그 15기가 한국 전선에 나타나자 호주 공군에 영국제 미티어기로 기종 전환을 하도록 권하기도 했었다.

 호주 공군은 F86 세이버 전투기를 도입하기를 희망했지만 제작사 노스 아메리칸 사는 미 공군에 납품하기조차 힘들게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이 궁여지책으로 캐나다제 세이버기를 구입해서 남아 연방군에게 대여해주어 이들이 훈련을 마치고 작전에 들어간 것이 전쟁 말기인 1953년 3월부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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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말고개의 북 전차 섬멸전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11.08 09:17

 1950년 춘천 방면에서 국군 6사단 7연대의 선전[善戰]에 졸렬한 전투를 했던 북한군 2사단을 제치고 춘천을 맹공하여 점령한 부대는 북한군 7사단이다. 당시 북한군 7사단의 정보장교로 참전했던 중국 동포 김동욱 씨는 아득한 젊은 시절, 그의 부대가 남하하던 때를 아래와 같이 회상했다.

 북한군 7사단은 모두 중국 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강한 사단이었다. 중국 내전이 끝난 후 모택동에 의해서 김일성에게 선사된 조선족으로 구성된 정예 사단이었다. 7사단은 안동 점령후 사단 호칭을 12사단으로 바꾼다. 북한군 7사단의 그의 연대는 춘천 점령 부대가 아니라 양구를 점령하고 남으로 침공해 내려온 부대였다. 중국 동포 어르신 분의 심한 사투리의 녹취한 말을 그대로 옮겨 문장이 어색하지만 잘 보시기 바란다.

 이 일화를 채집한 정현수 씨가 남한 침공시 어느 전투가 제일 치열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김동욱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T-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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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과 춘천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에서다. 그 사람들을(국군을 말함) 포로로 붙잡아서 심문하니까 다 철거(장비를 다 버렸다는 뜻)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부대가 해체 되었다는 말) 자신(국군 포로)들만이 꼴이 되었다고. 그래도 백골 부대인지 정말 대단했다. (부대원들이 자신들에게 포로가 되었지만 백골 부대가 매우 용감했다는 말을 하는 것, 여기서 말하는 백골 부대는 춘천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준 6사단을 잘못 오해한 것이며, 이 때는 유명한 3사단 18연대-백골 부대가 탄생하기 전이다.)

 홍천을 지나서 원주 제천 쪽에 대마우 고지라고 있었는데, 우리가 그 고지를 못 올라가서 전차 부대와 소련제 오토바이 부대, 자동포 11대(자주포, SU-76) 까지 동원해서 대마 고개까지 올라가다가 백골 부대에게 격파 당했다. 당해 낼 재간이 없어서 다 파괴당하고 마지막에 젊은 사람은 다 도망쳤다.(북한에서 모집한 신병들을 말하는 듯. 중국 내전에서 실전을 풍부하게 겪은 조선족 병사들은 북한 출신 병사들을 조선병이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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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북한군 소속 한국전 참전 노병이 되게 당했다는 전투는 어디서 어떻게 싸운 전투일까? 

 한반도의 중부 전선인 가평-춘천-양구 전선에서 싸운 국군 6사단은 춘천 지역에서만 잘 싸운 부대가 아니었다. 6사단의 춘천 지역 방어전투는 임부택 중령의 7사단이 했지만 양구 지역 방어전투는 함병선 중령의 2연대가 담당했었다.

[SU-76]



 6사단의 3개 연대 중에 예비 연대로서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19연대는 원주에 주둔하고 있다가 급한 전황의 춘천으로 배치되었지만, 춘천 철수 결정으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었다.

 양구 전선에서부터 적에게 타격을 주며 철수해 오던 6사단 2연대는 지역 방어형 지연 전술보다는 후방의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여 적에게 섬멸적 반격을 하기로 하고 홍천 북방 말고개로 철수해서 방어선을 폈다. 때는 이웃 연대인 7연대가 춘천에서 잘 싸우고 철수한 1950년 6월 28일이었다.

 6사단 2연대가 말고개에 방어선을 폈을 때 6사단 19연대가(연대장 : 민병권 대령) 증원되어 고개 건너편 사면에 배치되었다. 긴 말고개 양 쪽에 두 개 연대의 전차 공격조가 적 전차를 대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말고개에서 내려오는 북한군 7사단 전차 부대를 협격한 6사단 2연대(분홍색) 와 6사단 19 연대(청색)의 부대 배치도]



 두 연대 모두 전차 특공조를 편성해서 전차 공격에 대한 연구와 훈련을 했었다. 유감스러웠던 것은 두 연대 사이에 긴밀한 연결과 협조 방법이 강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나중에 포상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양구로 내려온 북한 7사단 연대는 아직도 홍천을 점령하지 못한 것 때문에 힐책을 받았던지 6월 28일에는 전차와 자주포(SU-76), 야포 등 가용한 전투력을 총동원하여 결전을 시도하였다.

 말고개의 잠복하고 있었던 국군은 지시를 오해한 2연대의 57mm 포가 미리 철수하는 등 혼란이 있으나 적 전차의 고개 진입 전 무사히 원위치하고 적을 대기하였다. 마침내 적 전차 부대가 고갯길을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때 고개 입구 일대를 담당한 제 8중대장 서봉호 중위는 도로를 파서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한 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을 보고 진두에 뛰쳐나가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차 포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고갯길로 올라온 전차는 사실은 SU-76이다. 그러나 증언을 존중하여 그냥 전차라고 쓴다.)

 제 8중대 전투 지대를 통과한 적 전차는 쏟아지는 포화와 수류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첫 번째 굴곡 지점을 돌아섰다.

[57mm 대전차포]



 그 찰나 대기하고 있던 57mm 대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적 전차에 명중한 철갑탄이 튕겨 나갔다. 적 전차는 꿈쩍도 하지 않고 전진해 왔다. 사수는 다급해졌다. 제 2탄, 제 3탄을 연거푸 발사했다. 그러나 3탄을 발사한 직후 적 전차가 반격한 첫 탄에 57mm 포는 배수구에 처박히고 사수는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다가 그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잠복한 국군 병사들은 공포감이 들었다. 첫 포를 제거한 북한 전차는 거침없이 고개를 계속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만일 적 전차가 아군의 마지막 대전차 방어선인 고개의 두 번째 구비진 곳을 통과한다면 그 이남에는 이들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도 없거니와 방어 배치 또한 없기 때문에 적은 홍천까지 단숨에 진출 할 수가 있게 된다. 제 2연대 대전차중대 제 2소대 1분대장 김학두 일등 중사는 57mm철갑탄을 장전했다. 그 50m 전방 구비진 도로변 배수로 속에는 제 19연대 전차특공대원 조달진 일병이 수류탄을 움켜쥐고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적 전차는 점점 다가왔다. 

 먼저 공격한 사람은 대전차포의 김학두 사수였다. 그는 방앗끈을 잡아 당겼다. 그는 결과를 확인하기 전에 연달아 2탄, 3탄의 고폭탄을 발사하였다. 선두 전차는 첫 탄에 측면이 관통되어 급정차하였으며 두 번째 전차가 그 뒷면에 충돌하였다.

 이때 길 옆에 잠복하고 있던 조달진 일병이 쏜살같이 1번 전차로 뛰어 올라가 수류탄을 던져 넣고 도로 좌측 벼랑 밑으로 굴러 떨어졌으나, 중간에서 나뭇가지에 걸려 목숨을 건졌다. 대전차 포탄에 의한 것인지 내부에서 조달진 일병이 던진 수류탄 덕분이었는지, 적 전차는 굉장한 폭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김학두 일등 중사는 계속 2번 전차 측면에도 명중탄을 퍼부었다.

 적 전차 대열은 선두차가 파괴되자 모두 정차하였다. 이 때 길 옆에 잠복한 병사 한 명이 3번 차에 뛰어 올라 수류탄을 던져 넣어 승무원을 몰살시켰다. 후속하던 4번 차는 이것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화양강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하여 수류탄 한 방에 전차 두 대를 잡았다는 소문이 제 2연대 장병들 사이에 자자하게 되었다.

 전차 행군 대열이 정지하자 후미차부터 뒤로 빠져 나가기 위해서 전차장이 전차 햇치를 열고 뒷면을 살피고 있었다. 이때 그 10여 미터 떨어져 있던 좌측 능선(19연대) 위에 배치된 아군이 발사한 2.36인치 로케트 포탄 한 발이 햇치 안에 정통으로 들어가 터지면서 불길을 내뿜었다. 이리 하여 적 전차 10여량은 좁고 굴곡이 심한 언덕길 중턱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게 되고 말았다.

 고개 양쪽에 매복한 국군 장병들은 힘찬 함성을 지르며 적 기갑부대 행렬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가 돌격하는 장병들을 덮어버려 이들을 대담하게 만들었다. 제 2연대와 제 19연대 병사들이 뒤범벅이 되어 수류탄을 던지고 앞을 다투어 전차에 올라탔다. 

 북한군 전차병들은 너무 놀라 도로 옆 벼랑으로 뛰어 내려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2연대 장병들은 적 전차는 소련군이 직접 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 2번 전차에서 죽은 전차장(대위-중대장)의 시체를 검사한 결과 북한군임이 밝혀졌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분열중인 SU-76]



 이 전차 몰살전을 50m 이내의 거리에서 지켜본 지역의 정춘옥 방위 소위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이 때 민병대 수준의 호국군이라는 조직이 지역마다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방위 소위는 이 조직의 소위를 말한다.)

 "57mm 포 첫 탄이 명중하자 선두 전차가 정지했다. 승무원이 햇치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한 병사가 자주포 뒷면으로부터 뛰어 올라가 수류탄을 던져 넣고 사라졌다. 전투가 끝난 직후 나는 현장으로 달려가 보았다. 1번차는 우측면에 포탄이 관통한 구멍이 나 있었고 승무원은 새까맣게 타 죽어 있었다.

 그리고 1, 2, 3번 차는 후방 출입문이 있는 전차(SU-76)였고, 화양강에 굴러 떨어진 것은 좀 크고 형태도 다르며 포신 또한 길어보였다(T-34전차). 그러나 5번 차 이후의 것은 확인하지 못했다. SU-76 내부에는 그들이 남침한 뒤 마을에서 약탈한 혼수감으로 보이는 비단 옷감이 가득 실려 있었다"

[57mm 대전차 포 - 영국 6파운드 포를 개량한 것이다.]



 춘천에서 북한군의 남침 첫 날 옥산포에서 적 대군을 포병으로 분쇄시킨 6사단 18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은 노획한 전차를 활용해 보려고 전차 안에 들어가 포와 내부 조종 장치를 살펴보았으나 그 조작 방법을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아까운 일이었지만 적 전차를 포기하고 파괴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 2연대에 배속된 사단 공병대대 제 2중대[중대장 백 수욱 대위]는 불에 타지 않고 도로 위에 서있는 전차마다 폭약을 장치하여 이를 폭파시켰다.

 그러나 두꺼운 장갑 때문에 완전이 파괴된 것은 그 중의 약 반수에 지나지 않았다.

[말고개 입구에서 전차 특공조에게 섬멸된 북한 T-34전차와 사살당한 북한 전차병들]



 말고개의 전차 섬멸전이야 말로 개전 이래 국군이 한 장소에서 올린 최대의 적 기갑부대 섬멸 전과였다. 이로 말미암아 적의 홍천 점령이 이틀이나 지연됨으로서 춘천 방어 전투 이래 두 번째로 적 2군단 작전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하였던 것이다.

 이 말고개 전차 섬멸전에서 공훈을 세운 장병들에게 훈장과 특진이 후한 포상이 주어졌다. 첫 공훈을 세운 조달진 일병에게는 미 정부에서 동성 훈장이 주어졌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말고개 전투는 우리 전사에서 상당히 저평가 되는 느낌이 있다.

 글의 서두에 소개했던 북한측 참전 노병은 치열한 춘천 전투의 전투 참가자다. 그런 분이 북측이 최대로 참담한 피해를 본 전투로서 춘천 전투보다도 이 말고개 전투를 회상한 것이 그 저평가를 오류를 지적해준다. 

 한반도 중부 방어를 책임진 6사단 7연대(연대장 임부택)가 춘천 방어에서 대단한 전투력을 발휘했었다. 춘천 전역에서 철수한 직후 충주 동락리에서 거둔 대승리가 7연대의 명성을 한층 드높이게 했다. 그 우측 양구 쪽을 담당한 2연대(연대장 함병선)나 예비였었던 19연대(연대장 민병권)는 그 전공이 별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 말고개에서 불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적이 남침에서 도깨비 방망이로 휘둘러 우리 국군의 방어선을 유린하던 기갑부대를 좁은 산 고개에서 변변한 대전차무기도 없이 10량을 파괴한 것은 대단한 전공인 것이다. 더해서 말고개 전투는 3년간의 6ㆍ25전쟁이 현재 한국 육군 기갑교리 발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한 교훈, 즉 “좁은 산길에 기갑부대 투입하지 말라.”는 원칙을 강조해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다.

 좁은 산길에 미군의 기갑 부대가 들어갔다가 큰 피해를 본 경우는 1950년 10월 평북 군우리나 운산, 그리고 장진호 전투가 있다. 북한도 서울 침공의 주범 105전차 여단의 전차 38량과 자주포[SU-75] 7량, 트럭 117량이 1950 년 7월 11일 평택 남쪽의 야산 좁은 길에서 미 공군의 공격으로 선두와 후미의 전차를 공격당해 전진 후퇴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섬멸당한 전례가 있고,

 1950년 8월 11일 해병대의 공격에 쫓겨 경남 고성에서 사천 쪽으로 도주하던 적 105전차여단 83기계화연대 소속 45량의 트럭과 55대의 모터 싸이클이 역시 해병대의 F-4U 콜세어 전투기에게 선두와 후미를 파괴되고 도로에 즐비하게 늘어서서 섬멸당한 전례도 있다.

 서울 북방에서만 대전차 수단 없는 한국군에게 힘을 발휘하였던 북한군 105전차여단의 사령관 류경수는 김일성 부인 김정숙의 여동생 남편으로 김일성과 동서지간이었다. 그는 내내 위와 같이 두들겨 맡는 기록을 세웠었다. UN 군의 인천상륙작전 뒤 류경수는 전차를 타고 북상 탈출을 시도하다가 조치원에서 퇴로가 막히자 전차를 버리고 산으로 해서 북으로 도망쳤다.

 그의 초라한 전적은 견책의 대상이지만 중공군 개입후 군단장으로 승진하여 한국 전선에 다시 나타났다. 17세부터 김일성의 충실한 졸개 노릇을 열심히 했었고 혈연적으로 믿을만한 동서였던 덕택이었다.

 개인적으로 6ㆍ25전사의 피아 기갑 부대 운용의 전례는 한국 기갑이 좀 더 한국적인 기갑 전술, 즉 기갑 공병의 중시, 보전 합동의 전술 숙지, 자주 박격포와의 합동 작전 등을 포함한 전술 개발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끝//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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