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6·25/우리고장 국방유적지'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13.04.11 천혜의 자연경관 갖춘 ‘충절의 고장’ (1)
  2. 2013.04.08 <10> 수백년 호국의 전통 잇는 창녕의 국방유적 (1)
  3. 2013.04.02 <9> 서울의 관문 파주의 국방유적 (1)

천혜의 자연경관 갖춘 ‘충절의 고장’

생생! 6·25/우리고장 국방유적지 2013.04.11 08:45
경상남도 중앙에 있는 의령군은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불렸다. 또한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과 남강을 끼고 있는 비옥한 평야 지대면서 지리산 줄기인 자굴산이 있는 산간분지 지역이다. 역사적으로는 1592년 임진왜란 시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수천의 민중이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격파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 때는 의병의 후손답게 의령 곳곳에서 수많은 주민이 시위에 참가했다. 또한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과 유엔군의 격전 속에서 많은 지역민이 전쟁 참화를 당하기도 했다. 더구나 1953년 7월 휴전 이후에도 빨치산 준동으로 전쟁 후유증을 오랫동안 앓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충익사, 의병박물관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춘 벽계관광지, 자굴산 산악휴양지 등 다양한 관광시설을 가진 아름답고 풍요로운 고장으로 발전하고 있다.

 

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훌륭한 인물 다수 탄생  충혼탑 등 유적 바라보며 선조들의 호국정신 기려

 

봉무산 공원의 전몰용사충혼탑.

 

임진왜란 유물이 전시된 의병박물관.


의령 명승지 지도.


  

 

▶ 의병광장·의병박물관·전몰용사충혼탑

시원하게 뻗은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군북·의령 IC를 빠져나오면 곧바로 남강에 걸쳐진 정암 철교를 만난다. 이곳이 바로 의병의 고장 의령읍 관문이다. 매년 6월 1일이 국가기념일인 ‘의병의 날’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날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전국의 수많은 의병을 추모하고, 의병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높이고자 정부에서 2010년 제정했다. 의병광장, 의병박물관, 곽재우 장군 생가 등 전국 최초의 의병 발상지답게 의령은 의병과 관련되는 유적지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또한 의령읍을 잘 조망할 수 있는 봉무산 공원에는 전몰용사충혼탑이 우뚝 서 있다.

6·25전쟁 중 이 지역의 젊은 청년 722명이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쳤다. 특히 이 충혼탑은 멀리 의령천 건너편의 의병탑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공원 옆에는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의령초등학교(1910년 개교)가 있다. 이곳에서 오늘날의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는 신세대들이 충혼탑과 의병탑을 바라보며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설계한 듯했다.
 

▶ 의령 민초들의 수난

의령군 역시 6·25전쟁의 처참한 참화를 많이 겪은 지역이다. 이곳은 북한군의 일방적인 점령으로 지역 내 큰 전투기록은 없다. 따라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전까지 대부분의 주민이 북한군 치하에서 지냈다. 40여 년 교직에 몸담았다 현재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박희구(83·의령군 의령읍 서동) 씨는 전쟁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남강과 낙동강 건너편에는 유엔군이, 의령은 북한군이 주둔했다. 남강 정암 철교는 폭격으로 끊겼다. 강을 건너 함안으로 진격하려는 북한군은 야간에 수중교 건설을 위해 많은 주민을 동원했다. 당시 열여덟 학생이었던 나도 강제로 끌려갔다. 유엔군의 조명탄이 터지면 모든 사람이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 가끔씩 비행기 소리라도 들리면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결국 그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가는 북한군 릴레이식 보급수송에 동원됐다가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시골 친척집에서 은거하다가 마침내 감격적인 유엔군의 북진대열을 맞이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이 같은 북한군 강제노역 중 미군 폭격이나 피아 전투 간 많은 양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 빨치산의 의령경찰서 습격 사건

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 동안의 처절했던 동족상잔은 끝났다. 그러나 의령은 지리산의 험준한 산악과 연결돼 있어 정전 후에도 북한군 패잔병과 빨치산의 준동으로 또다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같은 해 11월 23일, 이날은 의령 장날이었다. 당시 시골주민들은 5일장을 통해 집에서 키우던 정든 강아지까지 팔아 생필품을 구입하곤 했다. 오래간만에 이웃 마을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소식을 나누는 등 장터는 항상 작은 시골잔치의 무대가 된다. 그때 느닷없이 두 대의 트럭에 분승한 무장군인들이 나타났다. 거칠게 트럭을 몰고 경찰서로 달려가는 그들을 주민들은 불안한 눈길로 쳐다봤다. 이들은 바로 국군 복장으로 위장한 이영회 빨치산 부대였다. 경찰서에 들이닥친 무장대는 곧바로 박영동 경찰서장 등 많은 경찰관을 살상하고 일부를 납치했다. 이어서 읍내를 누비며 우체국·금융조합·군청을 방화했다.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의 의령장터는 아비규환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적 무대로 변하고 말았다. 수 시간의 약탈이 끝난 후 그들은 인근 용덕과 정곡지서를 습격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당시의 순직 경찰관들을 위한 추모비가 의령경찰서 정문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제단 앞에 누군가 갖다 둔 국화 한 송이와 함께 그날의 참상을 비문은 생생히 전해 주고 있었다.
 

▶ 의령이 낳은 훌륭한 인물·지역명승지

외적의 침공과 불의를 방관하지 않는 충절의 고장 의령이지만 이러한 터전 위에 우리 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훌륭한 인물도 이곳에서 많이 탄생했다. 삼성그룹 창시자 호암 이병철 선생의 생가도 여기에 있다. 그는 1936년 마산에서 조그마한 정미소사업으로 출발해 현재의 삼성전자 등을 포함한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었다. 한국 최대의 장학재단을 설립해 매년 1000여 명의 국내외 학생들을 지원하는 관정 이종환 선생도 의령 출신이다. 그가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출연한 재산은 8000억 원이나 되며 곧 1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의령은 훌륭한 인물 배출뿐만 아니라 빼어난 자연경관으로도 유명하다. 읍내를 관통해 흐르는 의령천은 손으로 떠서 마셔도 좋을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읍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자굴산 휴양지, 벽계관광지, 정암루(솥바위), 수도사 등은 전국적으로 이름나 있는 가볼 만한 명승지다.

                                                  <신종태 전쟁과평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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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ook for Allectio Cyprus Here 2014.02.15 14: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투현장에서 믿음을 심어준 카푼 신부님의

<10> 수백년 호국의 전통 잇는 창녕의 국방유적

생생! 6·25/우리고장 국방유적지 2013.04.08 08:55

천연적 장애물 등으로 항상 전란의 중심에 서 있던 곳, 6·25 당시 낙동강 물을 핏빛으로 물들인 최대 격전지

 

경상남도 창녕군은 낙동강변을 따라 풍요로운 평야와 빼어난 명산, 다양한 유적지를 가진 살기 좋은 지역이다. 그러나 대구~마산을 잇는 교통 요충지, 천연적 장애물인 낙동강 등으로 임진왜란 이래 항상 전란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지역 내의 항일의병운동, 기미독립만세운동, 6·25전쟁 등의 영향으로 주민들의 외적에 대한 항쟁의지와 호국의식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8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쾌속 남진하는 북한군의 저지를 위해 낙동강을 끼고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다. 이때 창녕의 낙동강 돌출부에서 북한군과 미군 사이의 처절한 전투로, 강물을 핏빛으로 물들인 혈투가 벌어졌던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박진 전쟁기념관 전경.

 

창녕군 낙동강 박진대교.

 

창녕군 명승지 소개 지도.

 

 

▶ 박진 지역에서의 치열한 전투

창녕군 남지읍의 낙동강 돌출부 지역, 한적한 시골에 폐교된 학교를 보수해 만든 아담한 박진 전쟁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앞 150고지에는 유엔군 전승비가 우뚝 솟아 있다. 그곳에서는 박진대교와 북한군 도하출발점이었던 박진나루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지역에서 오래 거주한 노인들은 전투가 끝난 후 마을 옆 능선에 미군과 북한군의 시체 수백 구가 처참하게 뒤엉켜 있던 광경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곳 박진지역에서 부산 점령을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하던 북한군 2·4·9·10사단과 미 2·24사단, 미 25사단 일부 및 미 해병 임시 5여단이 2주간에 걸쳐 사투를 벌였다. 북한군 최정예 4사단은 8월 5일 야간에 박진나루터를 이용, 은밀히 기습 도하에 성공한다. 특히 북한군은 강제 동원한 현지 주민과 의용군들을 이용해 박진 나루터에서 가마니 등으로 수중교를 만들어 전차, 차량, 대규모의 병력 등을 도하시켰다. 칠흑 같은 야간에 수중교작업을 하는 동안 숨져간 억울한 생명의 수효는 아무도 모른다. 악착스러운 북한군은 미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8월 11일에는 20여㎞ 떨어진 영산까지 진출한다. 만약 영산을 통과해 밀양을 북한군이 점령하면 낙동강 방어선은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미 25사단 27연대와 해병 5임시여단의 긴급 증원으로 미군은 북한군 저지에 성공했다.

 
▶ 전장 상황 생생히 기억하는 현지 주민

박진 전쟁기념관 옆에서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정만진 씨(78·창녕군 남지읍 월하리 거주)는 당시 15세로, 전장 상황 당시를 생생히 기억해냈다.

“1950년 여름, 어렴풋이 38선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8월 초순께 갑자기 시골 벽지인 이곳에 많은 미군이 트럭을 몰고 왔다. 강변에서 전화선을 가설하는 미군들이 던져 주는 건빵과 초콜릿에 시골 소년들은 열광했고 미군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때는 서로 앞다퉈 나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며칠 후 마을 사람들은 긴급하게 영산으로 피난을 가라는 지시에 따라 고향을 떠났다. 특이한 일은 미군들이 박진에 들어오기 전, 강 건너편에서 고향을 밝히지 않는 낯선 피난민 여섯 명이 마을로 들어왔다. 나중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일부 주민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북한군 특수공작대로 도하에 성공한 북한군과 합류했다고 한다.”
 

▶ 영산 호국공원·낙동강변 남지철교

박진나루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밀양 방향으로 달리면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도시 영산 읍내가 나온다. 영산 시내 중심부의 호국공원에는 곽재우 의병장 기념비, 3·1운동 봉화대, 영산지구전투 전적비 등이 있다. 인구 수천에 불과한 이곳 영산면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의병장이 왜군을 격파한 이래 전통적으로 호국정신이 강한 곳이다. 특히 1919년 삼일 만세운동 때 24인의 지역주민 결사대는 현 호국공원이 위치한 남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만세운동은 영산보통학교 학생, 주민, 결사대원들이 주축이 돼 영산과 창녕에서 3월 말까지 계속됐다. 뒤이어 찾아온 6·25전쟁에선 피아 격전의 틈바구니에서 이 지역 민초들이 미군을 도와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또한 낙동강변의 남지읍에는 1931년에 건설된 아름다운 철제 트러스교가 있다. 현재 이 교량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으나 전쟁 당시에는 허리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제 그 상흔을 깨끗이 씻고 바로 옆에 똑같은 모양의 신 남지철교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 애국을 실천하는 창녕군 청소년

이제 이 지역에서도 전쟁체험을 생생하게 증언해 줄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신세대들은 일반적으로 ‘호국, 애국, 전쟁…’이라는 단어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 창녕지역은 또 다른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해마다 수학여행철이나 피서기에 많은 지역 청소년들이 박진 전쟁기념관이나 영산 호국공원을 찾는다. 특히 해마다 3월 개최되는 ‘영산 삼일민속제’에는 각종 민속놀이와 더불어 삼일운동 봉화봉송, 호국공원 방문행사에 수많은 학생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다.

창녕군은 세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우포늪, 국내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부곡온천, 남지 유채꽃 축제, 화왕산성 억새 숲 등 다양한 볼거리가 대부분 자동차로 30분 거리 내에 있다. 또한 6·25전쟁 최대 격전지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만든 낙동강 전투지역의 관광벨트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신종태 전쟁과평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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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llectio Cyprus Advice 2014.02.15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투현장에서 믿음을 심어준 카푼 신부님의

<9> 서울의 관문 파주의 국방유적

생생! 6·25/우리고장 국방유적지 2013.04.02 18:30

경기도 파주는 한반도의 중심 서쪽 한강과 임진강 하류에 위치해 예로부터 비옥한 땅이었다. 또한 두 강을 이용해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전부터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지리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한 부족과 국가 간 경쟁과 전쟁도 치열했다.

파주는 고조선의 땅이었다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다. 삼국시대에 파주를 차지한 나라는 백제였으나 고구려와의 계속된 영토싸움으로 475년 파주 전체가 고구려에 편입됐다. 그 뒤 신라의 진흥왕이 차지했다. 임진왜란 때인 1952년 5월에는 도원수 김명원이 공격해 온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와와 문산 일대에서 크게 일전을 벌였지만 대패하고 말았다. 6·25 전쟁 때도 서울의 관문 파주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처럼 파주는 국방유적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한반도 중심 서쪽 한강·임진강 하류에 위치한 비옥한 땅  임진각 ‘자유의 다리’로 포로 1만2773명 자유 찾아 귀환

 

 

경기 파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헌병들이 북측 판문각을 마주보고 보초를 서고 있다.

 

 

임진각 망배단.


 

 

파주시 일대 지도. 연합뉴스


 

▶ 통일공원

통일공원은 파주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국방유적지다. 문산 시내 통일대로변에 위치해 접근성이 매우 좋다. 6·25전쟁 이전부터 파주와 인연을 맺은 국군1사단 장병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3년에 조성됐다. 그 후 많은 전적기념물과 시설들이 추가로 건립되거나 이전되면서 지금은 종합적인 안보교육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시설물만 해도 10여 개나 된다. 6·25전쟁 직전인 1949년 5월 송악산 전투에서 투혼을 발휘한 육탄10용사 충혼탑을 비롯해 베티고지의 영웅 김만술 소위 기념비를 볼 수 있다. 개마공원 반공유격대 위령탑도 볼 수 있는데, 6·25전쟁 이전 북한 치하에서 개마고원을 무대로 활동했던 반공투사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다.

 
▶ 임진각과 전적기념물

통일로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임진각 관광지는 분단과 6·25전쟁과 그후 계속된 남북의 대립으로 슬픔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파주시는 안보와 관광을 묶은 안보관광지로 활용하기 위해 1972년 임진각을 건립했다. 임진각 전시관 내부에는 북한의 군사·정치·사회 등 생활상 전반에 관한 각종 자료 및 화보 400여 점이 진열돼 있다.

옥외로 나오면 6000여 평의 대지 위에 임진강지구 전적비, 미군 참전기념비와 함께 6·25전쟁 때 사용했던 비행기·전차·대포 등이 전시돼 있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방문 중에 북한의 폭탄테러로 순직한 외교사절을 기리기 위한 버마 아웅산 순교사절 위령탑도 볼 수 있다.

특이한 기념물의 망배단도 있다. 망배단은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설이나 추석 등의 명절과 조상의 추모일 등에 이곳을 찾아 차례 또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통일공원에도 망배단이 설치돼 있지만 고향을 방문하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많은 실향민이 북쪽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이곳을 찾아 아픔을 달랜다.

망배단 뒤편으로 경의선 철도의 교량을 이용해 만든 자유의 다리를 볼 수 있다. 1953년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포로가 됐던 국군과 유엔군 1만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 자유를 찾아 귀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명명했다. 원래 서울에서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철교는 상하행 두 개의 교량이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돼 교각만 남아 있었다. 그 후 전쟁포로의 교환이 시작되면서 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서쪽 교각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임시교량을 가설했다.

당시 포로들은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이동한 후 도보로 자유의 다리를 건너 귀환했다. 이 다리는 ‘자유를 찾아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6·25전쟁의 대표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전적비

6·25전쟁 때 글로스터 대대의 이야기는 중공군 5차 공세와 함께 시작된다.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해 가자 중공군은 새로운 공세를 계획했다. 당시 중공군 사령관 펑떠화이는 서울을 다시 점령해 마오쩌둥에게 노동절(5월 1일) 선물로 바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4월 22일 임진강을 건너 대공세를 감행했다.

국군1사단이 파평산에서,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 대대가 설마리와 감악산에서 중공군을 막아섰다. 중공군은 2개 사단으로 파평산을 공격하면서 1개 사단을 추가로 투입해 글로스터 대대를 공격했다. 중과부적이었던 글로스터 대대는 설마리에 전면방어 진지를 편성했다. 유엔군이 글로스터 대대를 구출하기 위해 연결작전을 시도했으나 중공군의 포위망은 요지부동이었다.

연결작전에 실패한 29여단장은 대대장에게 항복하거나 분산해서 철수하거나 양자택일의 결정권을 위임했다. 대대장은 중대단위로 분산해 철수토록 지시했다.

A중대로부터 D중대까지 4개 중대가 25일 철수를 시작했다. D중대를 제외한 3개 중대는 후방으로 철수했지만 마지막 D중대는 정반대 방향인 북쪽을 향했다. D중대는 파평산 방향으로 전환해 국군1사단에 의해 구출될 수 있었다. 후방으로 철수를 시작한 3개 중대는 모두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글로스터 대대는 전사 59명, 포로 526명으로 생존자가 67명밖에 안 돼 결정적인 피해를 입고 붕괴했지만 국군1사단과 함께 중공군의 공세를 3일 동안이나 저지했다.

한·영 우호의 다리와 함께 조성돼 있는 글로스터 대대 기념공원과 기념비를 돌아보며 이름도 모르는 나라의 자유를 위해 희생한 고귀한 넋을 다시 한 번 기리게 된다.

 

▶ 파주의 국방유적

파주는 서울에서 자유로를 따라 1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파주의 국방유적과 전적기념물은 비교적 잘 알려진 것만 해도 30여 개나 돼 군 단위 지자체로는 가장 많은 수다. 그중 판문점과 제3땅굴이 대표적이다. 도라산역과 도라산 평화공원, 오두산 전망대 등 볼거리와 안보교육장이 산재해 있다. 대부분이 테마 관광시설과 연계돼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곳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박병호 전쟁과평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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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omarbramy.pl 2013.04.07 0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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