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6.11 공비들의 열차 습격 (6)
  2. 2010.04.12 서부전선의 눈물 3편 (61)
  3. 2010.04.05 32. 감격적인 합류 (6)

공비들의 열차 습격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6.11 08:05

 

올림픽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그때까지 금기시하던

사상 분야의 출판물들이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금기시했던 분야의 틀을깨고 국민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테마중의 하나가 남한 지리산 지역에서 항거하다가
소멸당했던 북한 무장세력,
자신들은 빨치산이라고 부르고
당국에서는 공비라고
부르던 공산무장 조직원들의 이야기였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지만 이들은 근세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비들의 사진은 정말 찾기 힘들다.
이 라이프지 사진을 다시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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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과거 빨치산이었다가 투항해서 석방되거나 형을

살고 나와 남한 사회에 발을 붙인 분들이 쓴 책이

한 두 권이 아니다.


나 윤주 씨의 ‘누가 반역자냐? ’육철식 씨의 “빨치산 ‘

등이 내가 이런 분야에서 최초로 접했던 책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지리산 언저리에서 소멸되어버린 빨치산들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 것은 이태 씨가 썼던 ‘남부군’이었다.


이 출판물의 큰 인기는 남부군이라는 영화가 나왔던 사실이
증명해준다.


남부군의 인기는 때마침 사회에 일기 시작한 진보의
사상적 호응을
받아 그간 금단의 울타리 넘어에 있던
빨치산들의 이미지에
큰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특히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 빨치산의 이미지가 굶주리고
병든체 무자비한 군경에 쫓겨 죽어간 역사적 희생자라는
불쌍한 존재로 형성되는 감을 감지 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사실과 매우 차이가 있다.


이러니 학생들을 데리고 빨치산의 장악하던 본거지를
무슨 성지방문하듯 답사여행을
다니는 선생들까지 나올만했다.


그러나 해방후부터 십여년간 이들 빨치산들은 북한과 함께
대한민국의
존립을 행동으로 위협하던 존재였다.


즉 이들은 군사적으로 엄연한 대한민군의 적이었으며 대한민국은

이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소탕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들 위협세력의 제거에 말 할 수 없이 많은 무고한 피아의

인명이 살상되고 막심한 재산과 삶의 희생이 있었지만

이들을 결코 천진하고 감상적으로 평가해야할 존재는
아니었었다.



구속된 여자 공비들-이들중에 이미 살인죄로 사형 언도를
받은 여자 공비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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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공비의 준동과 북한이 남파한 북한 유격대의 토벌을 위해서

1948년부터 195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은 과대한 국방 예산의

지출로 국가의 재정이 휘청거리기까지 하였다.


이들의 군사력은 상상외로 강해서 1951년 국군 2개 사단을

전방에서 이동시켜 대토벌을 할 무렵에는 근거지인 지리산,
백운산
일대에 덩지를 틀고 있었던 이들 세력이
일 만 명이나 되었었다.


사실 한국은 북쪽과 남쪽 두개의 전장에서 공산군과
전쟁을 했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월남의 베트공처럼 외부의 꾸준한 지원을

받았거나 중국처럼 유격전의 충분한 지역적 공간이 있었다면

경제적이나 정치적으로 공산주의에 취약했던 당시 대한민국의

말로는 월남처럼 공산화되었을 지도 모른다.


남한 활동 공산세력 ,즉 빨치산이나 공비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기 위해서 이들의 여러 게릴라 활동에서

가장 독특했던 열차 습격사건들을 소개한다.


서부활극에서 볼 수 있었던 열차 강도 사건이 남한에서도

한번도 아니고 다섯 번이나 발생했었다.


모두 공비들이 준동했던 서남부를 관통하는 호남선 전라선과

경전선에서 발생했었다.


1.1950년 11월 24일 이양[화순군 이양면] 철로 폭파 작전

화순군 유격대가 주축이 되어 펼친 작전이었다.

군의 병력 수송 수단을 파괴하여 징집되어가는
청년들을 구출[?}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제 2국민 병들인 듯한 청년들을 실은 열차가 24일 오후 4시에

통과하리라는 정보에 따라 화학산 깃대 봉에서 동쪽으로

내리 뻗은 당그래 능선 자락 철로에다 폭약을 장치해놓고

매복 대기했다.


열차가 절벽 밑을 통과 할 즈음 유선 격발 장치로 폭발시켰다.

절벽위에서는 일제 사격이 퍼부어졌다.


열차는 비스듬히 왼쪽으로 기울어 멈추고 끌려가던 청년들

수 백 명이 논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호송하던 군경들도 그 속에 섞이어 도주했다.


10여 명의 호송 군 경들은 현장에서 포로가 되었고 들판으로

도망쳤던 군경들은 냇물 건너 품평리 앞산에 군복으로

변장 매복하고 있던 화순 유격대에게 잡혔다.


[제 2 국민병 시스템은 물의를 크게 일으키고 폐지되었다.]


2.1951년 10월21일 쌍봉 열차 습격

공비 15연대가 1951년 7월 창설해서 육성했던
항미 소년 돌격대라는
십대들의 전투 부대가
열차 습격에 출동하였다


이들은 보성 -이양간 철도에 삼중(三重)으로 매복했다.

1지점, 2지점, 3지점에서 연달아 통과하는 한 개의 열차를

연타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들은 폭약이 없이 작전을 개시했다.

공비들은 쌍봉이라는 곳에서 매복했다.


새벽이 다 된 오전 4시에 1 지점에서 나타난 기관차를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기습했다.

그러나 열차는 그대로 통과해서 도주했다.


그러나 제 2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 사격에 열차는 심하게 요동하며 속도가 느려졌다.


세 번째 매복조의 공격에 열차는 탈선하여 철도 옆

절벽을 길게 긁으며 정지했다.

탈선한 열차는 모두 9량이었다.


10대 공비들은 탈선한 열차에 뛰어올라 약탈과 살상을 하고

도주했다.



가면 상태에서 출동을 대기하고 있는 전투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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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51년 11월 중순 장성 갈재 열차 습격

노령지구 공비들은 아침 일찍 월동한 보급 투쟁을 위해서

강제 동원한 농민들을 대기 시켜놓고 장성 갈재 
터널 남쪽에서
서울 발 목포행 열차를 공격했다.


공비들은 철도에 커다란 바위를 올려놓아 기차가 이를

들이 받고 정지한 뒤에 수류탄과 소화기로 공격했다.

공비들은 열차에 뛰어올라 군경들을 무차별 사살하고

승객들을 약탈했다.


공비들은 강제 동원한 노무 부대들에게 약탈품을 지워서

백아산 아지트로 운반했다.



공비들의 도로 차단을 막기 위해서 고개 정상에
구측힌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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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51년 11월 14일 풍무재 열차 습격

공비들은 경전선 순천- 광주간의 구간에서 이날 오전 11경에

운행하고 있던 열차 습격을 했다.


열차가 이양과 춘양 경계인 풍무재 협곡의 속도가 느려지는

곡선 구간에서 철도를 폭파하고 일제 사격을 가했다.


기관차 2량에다가 11개 객화차를 연결했던 이 열차는

군수물자와 전선으로 가는 노무자들을 태우고 있었다.


기관차와 화차가 4량이 탈선하고 나머지들도 탈선된 열차를

들이 받고 정지했다.

이 습격으로 기관사와 미군 종군 기자 한 명이 죽었다.


5.1952년 6월 24일 사거리- 신흥구간 열차 습격

오후 2시경 노령 병단 소속 공비들은 전날 밤부터

매복하고 있던 호남선 사거리 -신흥 간에서 대전을 떠나

목포로 가던 열차를 공격했다.


매설한 폭약을 터뜨려 열차를 탈선시키고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 습격은 공비들의 열차 습격사건으로 가장 대규모적인 것으로

이들의 만행으로 열차 10 량이 전소되고 승차해있던 군경 25명과

철도 운행 요원 4명,그리고 미군 두 명이 사살 당했다.



이 블로그에서 세편으로 나누어 소개했던 드웨이 맥클린씨의
참전 사진첩에서 - 부산으로 가는 병원 열차에 무장 호송병이
탄 열차가 연결되어 있고 기관차 앞에 폭탄 매설에
대비한 샌드 백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미군들이
위에서와 같이 공비 열차 습격에 피해를 입어서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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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은 열차만 기습한 것이 아니라 촌락을 오가는 버스도
여러 번
기습했었다.

여기에 버스 습격 사건의 한 사례를 소개한다.


1953년 봄.

전남 부대가 광양- 진상간 신작로에서 버스를

기습했다.

평지로 내려와 대숲에서 잠복하고 있던 소년 공비

6명은 오후 세시쯤 통과하는 버스를 정차시켰다.


군복 차림의 변장이었기 때문에 검문하는 척하면서

한사람씩 하차시켰다.

군인 1명과 경찰 학교 학생 7명이 타고 있었다.

공비들은 카빈 1정과 군복등을 노획하고 이들을 훈방했다.


위의 경우는 훈방했다고 하지만 대개 공비들은
 

버스에 타고 있던 군경은 그 자리서 잔인하게 사살했다.



귀순 공비들로 조직된 특수부대 - 보아라 부대나 이기자
부대등 서너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공비들의
핵심을 기습해서 섬멸시키는 작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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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를 탈선시키고 승객들을 약탈하고 군경을 무자비하게
죽여 버린
공비들의 이미지는 거지같이 헐벗고
아귀같이 굶주려서 식량 약탈이나
다니다가 군경에게
타살되다시피 했을 것이라는 요즘 일부 젊은이들이

믿는 공비들의 불쌍한 이미지와는 너무 차이가 있다.


공비들은 기세를 올리다가 1952년 초 전방의 2개 사단을

후방으로 이동시켜 감행했던 군이 토벌 작전에서
대 타격을
  입었다.


그 뒤에 그들의 준동이 많이 잠잠해졌지만 휴전이 되고나서도

지리산 일대의 평화는 요원했었다.


휴전이 되던 해 12월에 군 병력을 동원한 대 토벌이 있고나서

공비들은 급속히 소멸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정 순덕이라는 여자 공비로 기억되는 5-6명의
잔당 공비[망실공비]
들은 생존하며 경찰대를 괴롭히다가
마지막으로 근절된 것은
60년대 초기였다.

3년간의 전쟁을 겪었던 대한민국은 뒷마당에서는
비정규전이라는 전쟁을 15년 가까이 치루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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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nghoseo 2010.06.21 16: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비들의 도로 차단을 막기 위해서 고개 정상에 구축한 요새라는 설명을 해주신 사진을 보니 왠지 하늘에서 본 월남전 당시 한국군 중대기지 모습과 많이 닮아있는 듯 보입니다. 한국전 당시 유격부대를 이끌었고 초대 파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내신 채명신 장군님의 아이디어로 채택된 중대기지와 무관해보이진 않은 것 같네요. 호기심이 생깁니다.

  2. 리산 2011.03.23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51년 12월-1952년 2월의 백야전사령부(Task Force Baik)의 지리산 및 주변 토벌에는
    수도사단과 8사단이 동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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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전선의 눈물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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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commercial roofing nj 2013.06.20 2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동 거기 기념관 가봤었는데.. 그땐 그냥 신기한 마음으로 봤었는데 지금 이 만화 보고 나니까 왠지 마

  9. painting nj 2013.07.08 15: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고있던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그 시절 수많은 목숨들이 저마다 절절한 사연을 품고

  10. aksesoris mobil jakarta 2013.08.01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는 1953년 4월 16일 철월 서쪽 갈화동에서 중공군과 고지쟁탈전을 끝으로 전선에서 물러나 제3대대와 교대하고 4월 30일 귀국하였습

  11. aksesoris mobil jakarta 2013.08.01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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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varias mobil jakarta 2013.08.01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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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Aksesoris Mobil - Modifikasi Mobil - Variasi Mobil 2013.08.01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는 1953년 4월 16일 철월 서쪽 갈화동에서 중공군과 고지쟁탈전을 끝으로 전선에서 물러나 제3대대와 교대하고 4월 30일 귀국하였습

  17. http://flashandmattyboypresent.com/ 2013.09.12 21: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그 시절 수많은 목숨들이 저마다 절절한 사연을 품고 쓰러지고 사라졌겠지요. 덕분에 많이 알고갑니다.

  18. farewell speech example 2013.09.14 01: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변경내용을 안내하고 있었지만, 개별적으로 변경정보가 전달되지는 않았습니다.

  19. Auctions for fundraising 2013.09.16 0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개별적으로 변경정보가 전, 개별적으로 변경정보가 전

  20. Ideas for successful Charity Auctions 2013.10.25 0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월 16일 철월 서쪽 갈화동에서 중공군과 고지쟁탈전을 끝으로 전선에서 물러나 제3대대와 교대하고 4월 30일 귀국하였습

  21. Pros and Cons of using charity auctions 2013.11.19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월 16일 철월 서쪽 갈화동에서 중공군과 고지쟁탈전을 끝으로 전선에서 물러나 제3대대와 교대하고 4월 30일 귀국하였습

32. 감격적인 합류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4.05 08:36

 

  국군 제1사단의 선전으로 낙동강방어선이 일순간 붕괴되자 북한군은 소백산맥과 금강일대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9월 21일경부터 인천상륙 소식이 전선에 전파되었고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북한군은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북한군 군관들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며 독전을 강요하였지만 이런 비이성적인 노력만으로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워커 제8군사령관은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9월 22일부로 추격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드디어 전쟁 개시 후 처음으로 낙동강으로부터 전선을 밀고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낙동강을 벗어나 북으로 진격하는 미 제1기병사단]


  워커로부터 경부가도를 따라 38선으로 밀고 올라갈 임무를 부여받은 부대는 미 제1기병사단이었고 그중에서도 선봉은 제7기병연대였습니다. 제7기병연대는 보다 신속하게 전방을 개척하고자 린치(James H. Lynch)중령이 지휘하는 예하 제3대대를 특수임무부대로 편성하여 9월 22일 08시, 다부동을 출발시켰습니다. 그날 중으로 낙동강을 도하한 린치특임대(TF Lynchs)는 다음날 상주까지 진출하여 북한군의 저항 태세를 점검한 결과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해도 될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26일, 사단의 후속부대들이 상주에 집결을 완료하자, 린치는 그의 특임대에 배속된 제70전차대대 C중대 3소대에 수색대를 합류시켜 “보은-청주-천안-오산방향을 따라 전차가 낼 수 있는 최고속도로 전진하고 저항하지 않는 적은 대응하지 말라”는 진격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린치의 판단대로 전선은 밀고 댕기며 교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군의 진격이 멈춘 곳에서 전선이 이루어지는 상황으로 바뀌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일 보은으로 출발한 수색대는 오후에 청주를 지나 저녁에 진천 남쪽에서 진격을 멈추었는데 그것도 북한군의 저항 때문이 아니라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색대에게 쉴 틈을 주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북한군이었습니다. 마침 부근을 지나던 북한군 수송대가 미군 전차를 발견하고는 3대의 트럭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공교롭게도 트럭에는 휘발유가 가득 실려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연료를 보충 받은 수색대는 전차에 다시 시동을 걸고 전진을 계속하여 그날 20시 30분경 천안삼거리에 도달했습니다. 교통정리를 하던 북한군 병사에게 “오산?”하며 길을 묻자, 북한군 병사가 얼떨결에 오산방향을 안내하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까지 발생하였을 정도로 이들의 진격은 빨랐습니다.


[양쪽에서 전진하던 아군의 선두 부대들은 오산부근에서 연결됩니다.]


  쉬지 않고 오산남쪽 16킬로미터 지점까지 올라갔을 때 전방에서 갑자기 치열한 사격이 벌어져 노출된 전차병 1명이 전사하면서 일순간 긴장 상태에 빠졌지만 곧 교전이 멈추었습니다. 전방 부대는 인천으로 상륙하여 오산으로 남진하고 있던 미 제7사단 31연대였는데, 다행히도 오인으로 인한 아군간의 교전이 확대되기 이전에 서로를  알아보았던 것이었습니다. 이때가 9월 26일 22시 26분으로 인천상륙부대와 낙동강 반격작전 선두부대가 감격적으로 이렇게 연결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선두부대가 조우한 장소가 미군이 한반도에서 북한군과 처음 접촉하여 망신을 당한 죽미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08시경, 미 제1기병사단 본대가 상륙부대인 제7사단의 본대와 연결 되면서 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던 전선은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결국 맥아더의 대담한 도박은 제8군의 낙동강 반격이 성공함으로서 단숨에 북한군 13개 사단의 배후를 포위해 버리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극적으로 반전을 이루고 38선을 향한 진격은 계속되었지만 포위망 안에 갇힌 북한군 패잔병의 소탕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전의를 상실한 잔적을 소탕하는 것보다 전쟁이 종결을 위해서 전진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들은 남한 각 지역에 쪼개져서 게릴라가 되어 갔지만 그리 위협적으로 여기지는 않고 천천히 소탕하면 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지리산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하지만 이런 낙관적인 판단과 달리 북한군 패잔병 게릴라들은 두고두고 후방지역의 암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비록 유엔군의 놀라운 진격에 일순간 패퇴하였지만  북한군 대부분은 부대 건제를 유지한 상태로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등지로 잠입해 아군 병참선 차단과 습격 등의 후방교란 임무를 수행하였고 특히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려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까지 지연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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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꾸는 세상살이 2010.04.05 1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잡은 빨치산 중에 정말 빨치산인지 아니면 당시 강제로 끌려가서 활동하게 된 사람인지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긴 시간을 두고 가려낼 정도로 한가한 상황도 아니니 뭐라 말할 평편도 아닙니다.
    그러나 평시 같으면 무고한 사람이 당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묶고 그것을 짊어지고 적군 전차로 뛰어들었던 선배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나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군대에 안 가본 사람이 긴박한 상황의 군대를 지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할 수는 있어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됩니다. 전쟁에서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면 그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서 이론과 실제는 다릅니다.
    많은 이론 중에 무수히 변하는 변수를 모두 기록한 교범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기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은 경험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지요. 물론 경험이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직접 경험이야 말로 순간적인 반사행동으로 나오기 쉽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2. mami5 2010.04.06 0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킨을 시원스레 바꾸신거네요..^^
    글 잘 보고갑니다..^^

  3. home insurance mail quotes 2012.06.05 16: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 블로그 사이트와 함께 제공 내용은 이해하기 절대적으로 매우 가치뿐만 아니라 간단하다. 그것은이 웹 사이트를 참조 반가워하며 유료 교육입니다.많은 감사합니다.

  4. home insurance renowned estimates 2012.06.05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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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pocket fm radio best reception 2012.10.21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잡은 빨치산 중에 정말 빨치산인지 아니면 당시 강제로 끌려가서 활동하게 된 사람인지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긴 시간을 두고 가려낼 정도로 한가한 상황도 아니니 뭐라 말할 평편도 아닙니다.
    그러나 평시 같으면 무고한 사람이 당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묶고 그것을 짊어지고 적군 전차로 뛰어들었던 선배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나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군대에 안 가본 사람이 긴박한 상황의 군대를 지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할 수는 있어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됩니다. 전쟁에서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면 그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서 이론과 실제는 다릅니다.
    많은 이론 중에 무수히 변하는 변수를 모두 기록한 교범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기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은 경험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지요. 물론 경험이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직접 경험이야 말로 순간적인 반사행동으로 나오기 쉽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