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사건의 어느‘교장’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29 07:41

 

국내 모 일간지에 연재하는 백 선엽 장군님의 6·25전쟁

회상록에서 14연대 반란사건 부분이 나온다.

여순 반란 사건은 태생적으로 사병들 사상에 문제가 많았던

국군 14연대가 여수와 순천에서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14연대는 제주도 토벌 작전을 명받고 여수항에서 승선 대기 중에

정보과 선임하사 지창수 주동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출동한 반란 진압군- 반란군과의 식별을 위해 머리에
흰띠를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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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휘권은 다음날 김지회 중위에게 넘어가고

순천에서는 홍순석의 중대가 이에 호응했다.

사실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은 이 날벼락 같은 공산 분자들의

난동과 그 뒤의 토벌 작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대 피해자들일 뿐이고 공산도배나 반란 등의 불순한
단어와 거리가 많다.


주모자 지창수나 후에 반란 부대를 지휘했던 김 지회,

홍 순석 따위는 모두 여수나 순천과 거리가 먼 타지 인간들이다.


그러나 내가 여순 사건을 만나면 반드시 생각나는

현지의 인간이 한 명 있다.

이 자의 음흉한 흉계가 수많은 어린 학생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여수 Y 여자 중학교 교장 송 욱[宋 郁]이라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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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한 나의 기억을 되뇌어 본다.

나의 군 생활 시절 한 나이든 부 사관들로부터 여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그는 그의 사병시절 여순 반란을 평정하는 토벌 작전에

참여했던 사람이 자기 부대 인사계여서 그로부터
여순 지구 진압작전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 진압군이 여수 시내를 탈환하고 들어가니까 가시내들이

   골목마다에서 진압군을 꼬이더란 말이야.

   홀딱 빠져서 따라 들어가면 이 년들이
   총신을 짧게 자른 칼빈 총을 붕대로

   허벅지에 감아 가지고 있다가 한방 갈겨 버리는 거야!

   속절없이 죽는 거지!“


아직 순진했던 나는 물었다.

“아니 어떻게 해서 여수의 술집 강아지들이 단체로 
  빨갱이가
되었나?“
그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보면서 말했다.

“ 작부가 아니었소! 모두 여고생들이었다고요!

“ 뭐요? 여고생?”

그는 대답했다.

“빨갱이 선생 놈이 있어 가지고 애들을 녹여서
  몽땅 빨갱이로 만들어
버렸대요!

  나중에 알아챈 진압군들이 이 아그[애기]들을

  사정 보지 않고 막 쏴 죽였다고 하더군!“


듣기에도 끔찍한 이야기였다.

충격을 받은 나는 칼빈 소총을 분해해서 총신을 짧게 자르면

몸에 은익 할 수가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살펴보니 개머리를 분해한 칼빈 총신을 짧게 자르면 꼭
모젤 권총만해서
능히 숨길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나는 관심을 가졌던 이 사건의 배후에 송 욱이라는

붉은 교장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말이 길어지므로 이 자와 그의 붉은 일당이 여수에
끼친 해악을
먼저 알아보자.


여순 반란사건의 시작에 군(軍)의 지 창수가 있었다면

민(民)에 송 욱이 있었다.


주검앞에 통곡하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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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놈 다 혁명이니 뭐니 하는 고상한 말을 입에 올렸지만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엄청난 살인을 두명이 저질렀다.

단지 지 창수가 직접살인을 했다면 송 욱은 간접살인을

했다는 차이뿐이다.


송욱은 지 창수가 1949년 10월 19일 밤 반란을 주도해서
14연대를
장악한 다음날 20일 일찌감치 얼굴을 내밀었다.


여수 중학교 교장이던 송욱은 잠복해있던 23명의 공산분자들을

이끌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14연대 본부에 나타나서

반란군과 합류했다.


두 인간들 사이에 반란 전 어떤 형태로건 간에
사전에 소통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송욱은 즉각 붉은 졸도들로 여수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신이
위원장이 되었다.

집단 총살당한 우익 인사들 - 벽에 총탄 자국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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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직은 인민재판을 주도하여 수많은 양민을 살해했다.

잔인함은 극을 달하여 군과 갈등이 있던 경찰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평소 좌익 분자에게 미움을 받던 인사들은
꼬투리를 잡혀 죽임을 당했다.


거리에 흩어진 또 하나의 주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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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경찰들은 온몸이 난자당하고 토막 나는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이 여경들의 주검이 거리에 효시가 되었다니 이들 집단들의

잔인성을 짐작할 수가 있다.


붉은 살인귀들이 열흘 남짓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있는 사이 학살당한 무고한 민간인 숫자는 1200명이 넘었다.


정부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거침없이 저지르는 14연대 반란을

국가 보위를 위협하는 중대 변란으로 판단하고
즉각 진압에 나섰다.


징발된 농민들이 진압군의 실탄과 군수품을 운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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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부터 병력을 동원한 군은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토벌 작전이 본격화 하면서 송 욱과 그와 동조자였던

붉은 교사들은 어린 학생들을 동원해서 방어군을 조직했다.


아직 피지도 못한 어린 학생을  죽음으로 내몰 비인간적인

생각이 어떻게 교육자의 머리에서 나왔는지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Y여중은 물론 실업고인 Y수산고학생들까지도 

세포 요원인 골수 좌익 학생들의 곧 남한이 적화 된다는

감언이설의 선동과 말을 안 들으면 죽이겠다는 살해의 위협에

삽시간에 다수의 어린 학생들이   자의만 타의만
붉은 학생병이 되어
반란군의 보조 저항 군력으로 조직되었다.


[믿기 힘들지만 반란 진압 후 조사한바에 의하면 Y 수산고는

100%, Y여중은 40%나 좌익에 포섭되었다고 한다.]


여학생을 포함한 어린 학생들을 비인간적인 방어 병력화 하는

작업은 역시 반란군이 장악한 순천의 좌익 교육자들이
주도하여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자신이 교장으로 있는 Y 여중은 물론 타교인 Y 수산고는

물론 멀리 떨어진 순천의 학교 선생들까지도 포섭하여

좌익화 한 것을 보면 송 욱이라는 인간이 제자들의 앞날을

열어주는 참교육을 팽개치고 이 지역의 지하 활동에 얼마나

전념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즉결처분 당한 가족들 - 돈이 있다는 것이 학살의 이유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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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 먼저 토벌한 것은 홍 순석이 반란을 일으킨

순천에서부터 이었다.


20일 반란이 일어난 순천을 22일 군이 공격했을 때 벌써

일반 좌익 폭도들과 학생들이 총을 들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홍 순석의 반란군은 이미 시내를 빠져나간 뒤였다.

이들은 총기뿐만 아니라 죽창을 들고 반항했다.


그들은 날뛰면서 저항했지만 장갑차까지 앞세운
토벌 군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순천은 당일 오전 중으로 수복되었다.


그러나 이틀에 걸친 전투에서 어린 학생들을 활용하는

좌익 활동의 뿌리 깊음과 치밀함을 아래 일화에서 볼 수 있다.


6·25전쟁중 수많은 대소 전투를 치르고 상이 제대했었던
이 윤 선생이 쓴 수기에서 회상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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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새벽 6시경 교복을 입은 한 처녀가 우리가 있는

도립 병원으로 다가왔다.


도립병원은 반란군이 지휘소로 쓰던 곳이었는데

그 전날 저녁 국군에게 탈환 되었다.

새벽에 교복 차림의 처녀가 적 지휘소로 접근한 것은

수상한 것이었다.


그 학생은 근처에 와서 손짓으로 암호를  하는 듯하나 우리는

알지를 못하고 그저 가까이 오라고 했더니 그 학생은

머뭇거리다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반란군 병사들 사이에 상대를 확인하는 암호 동작이 있었다.

그 학생은 도립병원이 아직도 반란군의 지휘소인줄 잘못하고

접근했다.-


나는 쫓아가 그 학생을 붙잡고는

“왜 도망가지? 하여간 넌 수상한 계집애다!“ 하고 몸수색을

시작하니 그 학생은 퍽 당황하면서

“왜들 이래요? 아무 죄 없는 사람이어요!“

하면서 허둥지둥했다.

몸을 수색했으나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왼쪽 팔의 학년 표시[숄더 패치]가 약간 뜯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것을 뜯어 보았다.

그 곳에서 담배 꽁초만한 종이쪽지가 땅에 떨어지면서

그 학생은 갑자기 정신병자모양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종이쪽지는 그야말로 중대한 전달 문서였다.


순천B조, 발전소 동방 2km로 이동 명령 대기 중

  5시“라는 쪽지였다.

즉시 나는 여학생과 쪽지를 전투 사령부로 압송하였다.


이 윤 선생이 그린 여학생 연락원.
어깨 학년 표시에 쪽지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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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전투 경찰대와 군 병력은 계집애를 앞세우고

놈들이 숨어있는
부락으로 접근하여 3면으로 포위하고
공격해서 섬멸했다.

약 300명의 적이 섬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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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탈환 후 여수 진입 작전은 26일 개시되었다.

그러나 여수를 사수하리라 생각했던 잔류 반란군 1개 대대는

24일 밤 여수시 방어를 송 욱이 지휘하는 폭도들과 학생들에게
맡기고
빠져 나간 뒤였다.


2여단 군수참모 함 병선 소령[중장 예편]이 지휘하던 진압군

2여단 예비 2대대는 부두 가까이까지 전진하자 적의 사격이
극심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총을 쏘고 있는 것은 여학생들이었다.

아직 15,6세를 넘지 못한 중학생들이었다.


노련한 함 병선 소령은 이들 머리위로 일제히 기관총 사격을
가하고
찝차로 돌입하며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하는
위압감있는
호령을 하자 여학생들은 총을 버리고 투항했다.


그 숫자가 무려 백여 명이 넘었다.



사진 작가 이 경모 선생이 촬영한 반란 가담 여학생.
유명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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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들과 학생들의 저항은 진압군이 시내 깊숙이 진입한 27일부터

노골화 되었고 여학생들이 총을 들고 나타나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진압군은 시체가 여기저기에 널부러진 거리를 전진해 가면서

그간 숨어 있었던 군경들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일주일간 하수도에 숨어 있었던 반란 14연대

부연대장 이 희권 소령도 이 때 구출되었다.


주먹밥으로 요기를 하고 있는 진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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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심하다가 여학생의 유혹에 피해를 입은 것은 27일 시내로

진입한
송 석하 소령의 제 3연대 1대대 병력이었다.


폭도 혐의자를 구타하며 연행하는 경찰.
동료들이 참혹하게 학살당한 현장을 보고
분격한 일부 경찰들은 반도들에게 혹독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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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내가 군 생활 시절 부사관에게서 들었던바 있었던 

여학생들의 유혹과 암살은 이날부터 시작되었다.


공식 기록을 살펴보니 여학생들이 권총으로 살해했다고 했는데

권총이 그렇게 많았을리 없었고 칼빈 소총을 짧게 자른 소총이

사용되었다는 설이 더 유력할듯하다.


성적(性的)으로만 유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병사들은 상냥한 소녀가 나타나서

“아휴 수고하시네요. 저기 그늘에서 쉬세요. 물을 떠 올테니까”

하고 부대를 유인하고 데려간 다음 “쏘세요!”라고 외치고

숨어버렸다.

잠복한 적들은 사격을 해서 유인당한 병력에 큰 피해를 주었다.


수없는 여 제자를 죽음으로 내 몬 붉은 교장 송 욱은

이날 함 병선 소령의 부대가 여수 여자 중학교를

수색했을 때 체포 되었다.

그는 후에 그의 졸개 교육자들과 함께 총살되었다..


여수를 평정한 진압군은 각자 구역내 주민을 집결하고 좌익분자
색출에 나섰다.- 여기 모인 주민중에 80여명이
좌익으로 판정받아 당일로 총살되었다.옥석 가리지 않은
증오의 응징 분위기가 강해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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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죽고 제자들도 죽임으로 내몬 송 욱과 그 동조

선생들은 뭐라 변명해도 천벌을 받을 짓을 하였다.


좌익으로 지목된 사람이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동안
경찰이 그의 소지품을 뒤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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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지리산 쪽으로 도주했던

반란군의 지도자 김지회와 홍순석은 다음해 봄에

지리산에서 사살되었다.


김지회의 처, 20살의 제주도 비바리 조 경순은

그를 따라 입산했다가 역시 체포되어서

처형되었다.

지 창수의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다.

반란군과 가담 좌익들이 처형당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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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송 욱의 간계에 빠져 반란에 가담했던
어린 여학생들 중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잘 알리고 있지 않다.


여순 사건 뒤에도 산으로 가서 공비가 된 여학생들이 있었다.
공비 간호병 김 봉숙의 군사재판 - 군경 부상 포로들에게
잘 대해 준 사실이 확인되어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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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압 작전 중에 좌익들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보고 흥분했던 진압군과 경찰의 응징이 철저했던 점으로

보아 적지 않은 학생들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요새 가끔 생각한다.

내 군 생활시절 부사관이 이야기 했던

송 욱에 대한 대목 ‘ 여학생들을 녹였다.’이다.


다시 판단해보면 스승이 할 ‘참교육’이라는 것을

내 팽개친 ‘ 인기전술’로 어린 학생들의 환심을 사고

그 환심 속에 붉은 독주사를 놓았을 것이다.


요즈음도 보니 자기들 입지를 넓히려 학생들의 장래가
어찌 되건 학생들 편하게 해주는 인기 정책만 주장하는 
교육계의 일부 극단적인 세력들을 보면 어쩔 수없이 송 욱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 일당의 이데오르기 장난에 호된 희생을 치뤘던

Y여중은 지금은 호남의 명문 여성 교육기관으로 발돋음했고

요즈음은  대학으로 발전한 Y 수산 고등학교는 

오랜 기간 한국 수산업계의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

국가 경제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데오르기 놀음의 끝. 1950년 수색 처형장에서 반란 가담자와
숙군에서 색출한 좌익 장병들의 총살형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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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두 학교의  자랑스런 위상(位相)은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할 독약을 조제하느라 증오와 파괴를 선동하는 공산주의
책자나
들여다 보던 붉은 교장 송 욱과 그 졸개들이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목표였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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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武運長久 2010.07.29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교육자로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어떻게 저런 비참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지금도 가끔 편향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하는 몇몇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선동하고 잘못된 역사관들 심어주고 있습니다...

    근데 카빈총을 짧게 자르면 그 휴대성이 굉장할것 같습니다...

    그걸 권총처럼 들고 다니며 국군을 살해하다니...

  2. 武運長久 2010.07.29 1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튼 학생들까지도 선동시켜서 죽음으로 몰고간 송욱이라는 교장은...

  3. 가명 2010.07.30 14: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창수는 나중에 공비활동중에 체포되었고 대구인가 어디 형무소 복역중 전쟁이 발발하자 사전 검속에 의해서 사살된걸로 압니다.

  4. 77연대 2010.08.01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창수 그 개자식은 그러고보면 완전 숙청감이네. 상부르조아니... 오늘날에도 보면 부르조아 빨갱이놈이 제법 있지요. 자식놈들 미국에 뇌물받은 달러로 유학 보내고, 여기서는 북괴놈 편 들고. 하여간 그때나 지금이나 각계에 침투한 빨갱이 프락치가 제법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목사, 중, 신부의 탈을 쓰고 잠입한 프락치, 교육계에 잠입한 프락치놈들... 송욱이란 놈도 바로 그런 프락치라. 정신 단단히들 차리고 혹 그런 놈들 만나면 가능하면 다 때려죽입시다. 자유민주의 이름으로...

  5. 초록사자 2010.08.01 2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 대한민국에..좌빨들이 득시글 합니다..다음 아고라 가시면..기가막힙니다..김정일,김일성 욕하는 글쓰면..바로 삭제됩니다..김대중,노무현 욕하면 삭제됩니다..이명박욕하면 삭제 않됩니다..이것은 무엇인가요? 여수,순천반란사건이..또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면서..몰골이 송연합니다..군에도..좌빨들이 분명 있을것입니다..여기 글보면서..제가 가입한 카페로 퍼가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운영자님..펌해도 괜찮은지요??

  6. 내집 2010.08.04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교조가 비스므리한 일을하고있는것 같은데 아니었으면 좋겠고

  7. 2010.08.20 14: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8. 산도리 2010.08.20 14: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 한겨레21에서 숙군장면(태능인근)을 민주애국지사에 대한 처형으로 호도하던 기사와 사진을 본 기억이 나네요 왜이리도 철없는 좌익들이 많은지 통탄스러우나 우파및 기득권의 도덕적느슨함에도 절반이상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돼어 큰소리도 못내겠습니다

  9. 좌익 2010.08.22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주도 공산 반란사건은 팔로군 출신 사위인 노 명예비서에 의해 민주화 투쟁으로 이미 보상한걸로 아는데..

  10. 일송정 푸른소나무 2010.09.05 16: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간에 있는사진보니까 꼭 일본순사하고 일본군복장한놈 두새끼가 눈에거슬리네
    그리고 전일본군출신백두산호랭이 김종완대대장...이시키는 일본도로 좌익에 가담했던놈들을
    학교운동장에서 수도없이 모가지따기..게임을했다지...

    친일파새끼들도 저당시에 다잡아 족쳐야했던건데 오히려 제세상만나서 기고만장했던시절....
    언제까지 이더러운 동족상잔의 기억을떨쳐버릴건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서로못죽여서
    지랄하는 열등한 한반도종자들...이러다 조선놈들씨말라서 중국떼놈들한테먹힐날도 얼마안남았네

  11. haro 2010.09.21 2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교육계, 노동계에 저런 인간들이 득세하는 바람에
    어느새 친북찬양하지 않으면 퇴출되는 시세까지 됐다니까요.
    한심한 일입니다.

  12. 기동대 2011.05.13 0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치는 않으나 어느 참전 노병의 수기를 보니 지창수는 토벌군에 의한 토벌전 초기에 사살됐다고 합니다..

  13. 하얀늑대 2011.06.30 1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일 그랬다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것이지만, 실제로 송욱 교장은 우익 인사였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당시 반란군,좌익인사들이 명망있는 인사를 억지로 인민위원회 대표로 끼워넣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당시 신문에서 송욱을 좌익이라고 명시한 신문도 있지만, 확실치 않은 풍문을 그대로 기사화한 경우도 있습니다. 송욱은 유력 우익인사인 고당 조만식의 제자인데 갑자기 좌익으로 변했다는게 믿기지가 않네요. 좀 더 연구할 가치가 있는 사건 같습니다.

  14. 지창수애비 2011.08.28 0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죽일놈

  15. 지창수애비 2011.08.28 0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얀늑대씨 진실으 호도 하지마시요 떠도는 낭설로 진실을 호도하지 말란 말이요 그자가 행한 사악함은 어덯게 설명할거야?! 어리디 어린 수많은 여학생들을 호도하여 죽음으로 내몬 더러운 죄악을! 증거가 없으면 심증이나 떠도는 설을 이용한 음모론을 풍기지말란 말이요 좌익이 아니라면.

  16. orbitz airline tickets 2012.05.26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아주 잠시 동안 문제의이 종류에 호기심왔다.남편과 아내가 몇 시간에 연결하고 흥미로운 것으로이 게시물에 위치한 내가 실제 항목을 찾고있다. 많은 감사합니다.

  17. orbitz cruises 2012.05.26 1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뷰 결합과 같은 훌륭한 게시물에 대한 건배, 저는 전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오고 이런식으로 물건을 보존.

  18. fight airline flight simulation websites 2012.05.31 17: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뷰와 함께 쓰기까지 정말 환상적인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전 완전 만족! 이것이 도착 굴러 유지합니다.

  19. rattan indonesia 2012.12.30 2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 중요한 전망과 더​​ 많은 블로그와 포

공비들 고사시킨 전투 경찰의 매복 전술 2편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06 08:23


 


처형을 앞둔 경찰관 살해 공비들 .
경찰을 죽이고 탈출을 시도해서 전원 사형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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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있기는 한 고역이었다.

참기가 어려워 뒤척이는 순간 누가 신호를 보냈다.

“쉿!”

분명 적이 멀리서 흔적을 보였다.

공비들은 한 줄로 서서 달빛 속을 걸어왔다.

공비들 특유의 악취가 산들바람을 타고

먼저 대원들에게 도착했다.

대원들은 아연 긴장했다.


공비들이 마을 앞을 태연자약하게 통과해서 오는 것을 보니

과연 소문대로 대장 외팔이는 대담한
성격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공비들이 고추밭에 들어서자 마른 고춧대가 사각거리며

소음을 냈다.


공비들 특유의 악취가 짙어 지더니 불규칙한

발자국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그리고 어둠 저편에서 공비들의 상반신부터 노출이

되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공비들이

잠복 지점으로 들어섰다.


20미터, 10미터, 5미터, 소총을 든 공비 선두 첨병이 

내 앞을 지나갔다. 등의 짐을 이기느라 고개를 앞으로

뺀 적들이 2,3미터 간격으로 우리 앞을 통과하고 있었다.


완전한 돌출 타겟이었다.

네 명이 나의 정면을 통과했던 순간이었다.

“ 쏴라!”


빠바바앙 -!

일제 사격에 돌출 사격은 무너져 내렸고

대원들은 스프링처럼 공비대열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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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았던 월남의 매복전에서도 일제 사격과 크레머를

터뜨려 적에게 섬멸적 타격을 가하고도 이렇게 총검돌격을

하는 일은 없었는데 하여튼 이 시절 한국 전투경찰이
대단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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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닥쳐야 할 육박전의 대상은 없었다.

기습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적 두어 명이 노루처럼

이리저리 뛰어 달아나는 뒤에다 대고 대원들이 따라가며

총을 쏘았다.


미처 짐을 벗지 못한 적 한명은 총 개머리 판에

타격되어 생포됐으며 나머지는 총이나 약탈 짐을 지고

둑길 아래에 쳐 막혀 있었다.


생포 1명에[김경준, 선전책] 사살 5명의 전과였다.

일차 타격으로 부안 공비 9명중 6명을 섬멸 한 것이다.


생포자가 머리에 손을 얹고 끌려오자 나는

신원확인 질문으로 시간을 끄는 사찰계장과 우두거니 서있는

경비계장을 제치고 이들을 직접 심문했다.

“ 제 2의 비상 집합 장소는 어디냐?”

“-----”
“제대로 말하면 살려 주겠다.그렇지 않으면--”

즉결 처분한다는 위협이었다.


“천연암 아래요.”

“제 3의 장소는?”
“그 너머 고지라우.”

“무장은 소총 몇 정이었나?“
”석 자루 뿐이었어유.“

소총이 3 정뿐이라면 달아난 적은 모두 비무장이라는

결론이다. 시체에서 거둔 총이 석 자루였다.


나는 경비계장에게 생포자를 재갈 물리고 앞세워

곧바로 제 2, 제 3의 비상 장소를 찾아가도록 시켰다.

대원 중 6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나와 사찰 계장은 공비 시체 검사를 맡았다.

내가 죽은 공비들 시체에 섞여있는 외팔이의 시체를 검사하고

있는 동안 주변을 돌아보던 대원이 비명을 질렀다.

“어! 이거 멀쩡하네!“

하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죽은 시체로 보였던 공비에서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놔라! 이 싸가지 없는 개들아!”


나는 달려가 보았다.

여자 공비였다.

허벅지에 중상을 입고 다량의 출혈을 한 것이

어둠 속에서도 확인 되었다.

그녀는 악을 쓰며 죽여주기를 원했다.

“언제 입산했나?”

“묻지 마라 이놈아 ! 나는 혁명 전사다 어서 죽이라 !”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싶었다.


그 녀는 결국 힘을 모아 “조선 의용군가”를 부르고

대원에게 처형당했다.


도주한 두 명의 공비는 제 2의 접선장소에서

체포가 되었지만 한 명은 끝내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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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공비중  한 명인 임한근은 김두운씨와

줄포 국민 학교 동창으로 밝혀져 그가 구해 내려고 노력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친구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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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공비들도 군경이나 그 가족들을 함부로 죽였지만

군경도 포로들을 가차없이 즉결처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날 붙잡힌 포로 세 명도 김두운 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찮게 생각한 부안 경찰서 사찰 계장이
모두 사살해버렸다.

어두운 한국사의 한 시절이었다.

김두운 씨는 이 사건뒤에 생포한 공비는 처형이 아니라
반드시 설득하고 감화시켜 전향시키기로 맹세했다.



죽음이 일상화 되었던 6·25전쟁후 한국.
여순 사건때 반란군들이 학살한 무고한 양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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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가 있다.

전쟁이 터지고 김두운 씨는 동료들과 다급한

후퇴 길에 올랐다.

시골 고향에서는 형님이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날 도주했던 공비가 따발총을 가진 무장병을 데리고

김두운 씨 가족을 몰살하러 왔다가 다행히 동구에서

형님을 만나 이미 김두운 가족이 좌익에게 다 죽었다는

말을 듣고 혀를 차며 그대로 돌아갔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중국에서 공산화 대박을 터뜨린 모택동의 신화를

재현할 꿈을 가지고 입산했던 수 천 명의 남한 공비들은

모두 섬멸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로 소위 유격활동을 할 구역이 너무 좁았고

주변도 인구 밀집지역으로 뻗어나갈 공간도 없었다.


두 번째로 북한과의 연계 실패다.

북한은 공비들이 다 섬멸되기는 손가락을 물고 구경만

했지 한 푼의 지원도 해주지 못했다.

해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가 식량 확보의 실패다.

이것은 첫 번째의 실패이유와도 연관이 있다.

빨치산들은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고

식량을 공급해줄‘해방구'도 인구 밀집의 남한에서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전투 경찰 경비아래 수확하는 농민들.
이 단계부터 경찰은 식량을 공동관리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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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공비들의 이 약점을 파고들었다.

공동 추수를 독려하고 수확물은 지서에 공동으로 보관시켰다.

부락민들은 식구의 한 끼만 가져가서 밥을 해먹도록 했다.


쌀이 손에 안 들어오자 공비들은 식량을 찾으러 민가로 내려왔다.


경찰은 이들을 매복전술로 맞받아 쳤다.

식량이 이들 입으로 가져가기 직전 좌절시키는 작전이었다


마침 내가 찾아낸 더 큰 경찰 매복 전술의 성공적인 사례를 

조금 이른 시기의 것이지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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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산의 식량 사정은 더 나빠져서 대원들이 며칠씩 굶는 날이

  많았다. 1950년 4월 16일 도당 간부 몇 사람만 남겨놓고
  무장대원
40명 비무장 대원 20명, 모두 60명이 합쳐
  보급투쟁에 나섰다.


  구례 간전면 제기암 골에서 백운산 상봉은우회하여

  진상면 야지로 나가려는 것이다.

  그것은  결사적인 시도였다.

 

  이틀간의 잠복 끝에 가까스로 식량 확보에는 성공했으나 
  돌아오는
도중 고리봉[상봉]근처에서 앞질러 와서 매복하고 있던

  경찰에게 퇴로를 차단당했다 .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쫓기며 귀환을 시도했으나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경찰의 추격으로 겨우 20명 정도만이 살아
  돌아왔다.


  이로서 전남 도당은 큰 타격을 입었고 식량을 비롯한
  제반 사정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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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은 시간이 지나고 경찰이 매복 토벌을 체계화 하자

식량 확보는 이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전쟁 후반은 공비들은 식량 확보에 모든 전력을 쏟는

기현상의 유격전이 벌어졌다


공비들에게 식량은 생명이었고 이의 확보가

바로 전쟁이자 전투였다


식량 약탈은 보급 투쟁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계급투쟁이 공산주의자의 목표인데 남한의

공비들은 식량약탈 투쟁을 주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농민해방이니 부르조아지 타도니 남조선 혁명이니

하는 때깔 좋은 소리는 그들에게서 잊혀진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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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은 자주 저녁 식사시간에 동네를 급습했다.

식구들의 밥상을 통째로 빼앗아서 미친 듯이 쓸어 넘고도

부족해서 밥을 더 담은 밥그릇을 가지고 다니며 게걸스럽게

밥을 먹을 정도로 굶주렸었다니 공비들의 뱃속

사정을 짐작할 만하다.



항공 촬영한 호남 농촌지역
공비 아지트가 있는 산에는 식량이 없었다.
식량 공급처인 농촌지역의 확보 실패가 공비를
죽음의 보급투쟁으로 내몰았다.

공비들이 식량을 구하러 이 농촌으로 오는 길에
경찰이 설치한 '매복'이라는 죽음의
덫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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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쌀 강탈해간다는데 좋아할 농민들이 없었다.

인심은 당장 돌아서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에 호의를 가지던 주민들도 한번 이라도

약탈을 당하면 당장 경찰 편으로 돌아섰다.


물고기인 공비들의 물이 되어줄 농민들은

그들을 적대시하고 경찰 토벌에 협조했다.


그러나 공비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보급투쟁은

더욱 먼 거리까지 확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결국 자기들에게 등을 돌리는 주민들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고 오고 가는 장거리에 여러 매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짓이었다.


과거 빨치산 생활을 경험한 분에 의하면

공비들이 마치 침투 간첩이 하듯 식량 약탈의

루트를 개척해 놓으면 경찰들이 단 시간 내에 귀신 같이

파악해서 매복을 했다고 회고했다.

즉 자신들의 아지트는 수십겹의 경찰 매복의 그물속에
있었기 때문에 보급투쟁은 목숨을 걸어야 했었다.
앉아 있어도 죽음이 있었고 서서 움직여도 죽음이 있었던
것이 공비들의 운명이었다.



희생당한 전투 경찰 박원기의 장례식.
그칠 수없는 어머니의 통곡이 너무 슬프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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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의 공비들은 모택동의 정강산이나 연안의 화려한

꿈 대신 거지와 도둑이 결합된 화적떼로 퇴화하여 볼품없는
소멸의
길을 갔다.


식량 부족이 공비들을 말려 죽인 것이다.

공비들을 말려 죽였다고 할만한 매복전술은

한국의 전투경찰들이 몸으로 부딪히고 희생하면서 터득한 것이다.


한국 전투 경찰의 매복전술은 육군 대부분의

전술 교리가 미국 FM에서 가져온 것에 비하면 토종

한국형 전술이다.


나의 좁은 지식에 나중에 채 명신 장군이 월남에서 사용했던

중대기지 전술과 중공군 인해전술에 수류탄 대량 투척으로 맞섰던

고지 방어 전술 외에 이에 비견할 특별하게 폭 넓게 적용된

한국형 유명 토종 전술은 생각나지가 않는다.


군사 전문가들은 군의 환경을 맞추어서 자생적으로 창안되고

개발된 전술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중국 모택동의 유격 전술이나 이스라엘 군대가 개발하고

활용해온 이스라엘 식 전격전 전략은 이 말을 증명해준다.


나는 20년 전 남아공의 특수 부대가 사막거주 부쉬만 종족들의

비법인 동물이나 사람 발자국 추격 술을 세세하게 캐묻고
연구하고 체계화해서 특수부대 교육용 매뉴얼로 만든 것을
보고 감탄한바 있었다.

특수부대는 이 교범으로 부대원를 훈련시켜 반도들의
추적 작전에
활용했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6·25전쟁 이나 월남전중 선배들이

몸으로 희생하며 터득하고 개발한 전훈을 교리로서

정리하는 측면이 매우 부족했다.


6·25전쟁 후 전투경찰의 매복 전술의 세련도는 분명 육군의

그것보다 한 수 앞선 것이었다.


한국 전투경찰의 매복전술이 정리되고 교범으로 정리되어
후배들에게 전달이 되었더라면
월남전등에서나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고 한국의
전투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을 것이다.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홍이아빠 2010.07.06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서장 노년 모습입니다.. http://www.wonbuddhism.or.kr/wonnews/interview/i1108.html

  2. 냥햏 2010.07.07 0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ㄱ-; 안그래도 소통이 잘 안된다는 평을 듣는것 같은데 .. 뎃글마저도 '승인'이 필요한건가요? 가끔 와서 좋은글 읽고 갑니다만 .. 운영 방식이 너무 구시대적인 것 같아 안타깝네요.

  3. Gray 2010.07.11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읽고 갑니다.

  4. 요츠 2011.05.23 1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이 뜨질 않네요..
    사진을 보고싶은데..

  5. carinsurancecompany community hunting 2012.05.26 14: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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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 고사시킨 전투 경찰의 매복 전술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05 09:50


6·25전쟁 후, 한국 전투 경찰의 활약은 의외로 알려져 있지않다.


내가 기억하는 전투경찰의 활약상을 소개한 책자는

불과 서 너 권 밖에 되지가 않다.

그러나 6·25전쟁 전후  경찰 전사자는 일만명이나 되었었다.


월남전 8년간 전몰 파월 장병이 5천명임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 희생의 크기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전투경찰은 육군에 비하면 훈련도 장비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한창 때의 공비들은 경찰 전투력을 우습게보기도 했었다.


한때 지리산 일대에 일 만 명이나 세를 불려 기세를 올린

공비들에게 연타를 안겨 그 세를 꺾은 것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던 육군이었지만 6·25전쟁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 간을 물고 늘어져 소멸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 주인공은 이 전투 경찰들이었다.


한국 경찰은 육군처럼 강력한 병력과 화력이 없었기에

산야를 쓸어내리는 듯한 대규모 토벌을 자주 실시할 수가 없었다.



라이프 지의 한국 경찰 기사에서 빌려온 사진을 다시
싣는다. 부상 공비를 운반하는 전투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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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형편이었던지라 빈약한 병력으로 공비들에게 타격을 주는

전술을 개발해내고 또 그 전술은 효과를 발휘하여

공비들을 실핏줄을 토막토막 잘라 말려죽이듯 서서히

섬멸해갔다.

전투 경찰의 전술은 경영학에서 말하는 비용대 효과의

절대 기능을 발휘했다고 하겠다.


한국 경찰이 일선에서 몸을 부딪혀가며 창안하고 개발해낸

그 공비 말려죽이기 전술은 ‘매복 전술’이었다.


해방 후부터 경찰에 몸담으며 공산당 무리들과 싸웠던

김두운 선생의 공비 토벌 수기‘지리산 호랑이' 중의
일부를 소개한다.


김두운 씨는 일본 중앙대학교 재학 중 일본군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육군 소위로 근무하다가 귀국하자 경찰에 투신했다.



김 두운 서장-1951년 무주 경찰서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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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수기에서 식량 약탈을 자행하고 귀소(歸巢)하는

부안군의 공비 일당을 매복 섬멸했던 작전을 자세히
기술(記述)하고 있다.

여기서 한국 경찰의 공비 소탕 매복 전술을 엿 볼 수가 있다.


그 분이 전북 부안 경찰서 경무 계장으로 근무하던 1949년

늦은 가을철이었다.


김두운 선생은 타 경찰서에서 이미 공비 토벌을 경험하며

자신 나름의 공비 토벌 전술을 터득한 상태였다.


경찰 입문 이래 호남 일대에 공비들이 준동하자
아무 군사 훈련도
실전 경험도 없었던 간부들은 단지
일본군 부대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공비 토벌을 
떠 맡겼다.

그는 전북 도경의 기동대장으로 임명되어 토벌에 나섰다.


군 경험이래야 일본군 고사포 부대에서 약간 근무했을 뿐이었던

김두운 씨는 부하들을 데리고 우왕좌왕 산을 쏘다니며

허탕을 치기도 하고 기습을 당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작심하고
연구를 거듭하여
매복 섬멸전의 비법[?]을 개발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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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 토벌의 초창기에 여러 일선 경찰서에 매복

전술만이 토벌의 최고 유효 수단이라는 의견은 떠돌았었다.


그러나 표준 교안이 없어서 일선 전투 경찰 지휘관들은

김 두운 씨처럼 연구와 실전 경험으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비방[?]을 개발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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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운씨는 자신이 개발할 매복 전술에서 전투요령을
복격술이라 이름짓고 아래와 같이 부하들을 훈련시켰다.

첫째,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자세를 낯춘다음
오른 손바닥을 귀에 대고 다가오는 소리를 감지한다.

둘째, 기동선을 따라오는 적의 순서와 우리의 매복 순서에
맞추어 한 명이 적 한 명만을 겨냥한다.

세째, 쏴의 신호와 동시 단 한발만 발사하고 함성없이
그대로 각자 조준했던 적에게로 돌진해 생포,또는
확인 사살을 한다.

넷째, 도망치는 적은 너무 멀리 추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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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관심 있게 볼 대목은 그가 공비들이 통과할 목을

미리 집어내고 매복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마치 돼지 명포수가 목을 잡는 요령과 비슷해서

흥미롭다,


아래는 김 두운씨의 글이다.

전북 도경 기동대장에서 부안군 경무계장으로
전출되었을 때 겪은 전투를 회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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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살 된 공비 시체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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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늦은 가을 저녁.

일과를 끝내고 신도종 서장이하 간부들이  바둑을 두고 있던

전북 부안 경찰서에 부안군 산내면 지서로부터 중계리에 공비가
출현했다는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6·25전쟁 이전 부안 관내에는 자생한 소규모 공비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남로당 부안 군당으로서 총인원은 9명 이었다.

나중에 지리산 일대에서 기세를 올리던 공비들의 규모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민폐가 극심했다.


남로당이 불법화되고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입산(入山)한

공비들로서 이들은 다른 남로당 군당들에 비하면 골수분자들로

상당히 투쟁적이었다.

[전쟁 전 입산자들은 구빨치로 분류된다.]


여순 사건 뒤에 체포된 14연대 반란병들.
이들은 대거 지리산으로 도주해서 신빨치의
주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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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변산의 기상봉 아래 있는 천연암 근처에 주 아지트를
두고
부근 마을, 특히 산내면 중계리를 ‘민주 부락’[ 이 당시

민주란 말은 공산주의자들이 전문으로 쓰던 용어였다.- 나중에
남한
군경들에게 통비 부락[通匪 部落]으로 불리게 된다.]으로
장악해 놓고
열흘에 한번 정도 약탈을 자행했다.


거리 관계 때문인지 이들은 특히 산내면 일대에 심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부안 군당의 공비들은 외팔이 부대로 통하고 있었다.

군당의 책임자는 장순언의 장남인 장모[張某]였다.

그는 고향인 부안군 산내면 진백리에서 진백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진백 수산 강습소를 나와 남로당 부안 군당에

입당, 산에 들어갔다.


말단 대원이던 시절 그는 경찰 토벌대와 총격전을

벌이다 머리에 부상을 입고 왼쪽 팔은 절단이 되었다.

그해 5월 경 그가 군당 책임자가 되면서 부안 군당을

외팔이 부대라 칭하게 되었다.


국민 학교 시절 그이 생활 기록부에는‘두뇌가 명석하고 비교적

활발함' 이라 적혀 있었다.


공비 토벌은 각 경찰서 경비계장의 업무였다.

공비 출현의 보고가 접수되었는데도 토벌작전에 경험이 없는

경비계장은 우왕좌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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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은 출현 공비의 토벌 작전과 지휘를 경험자인 경무계장

김두운 경감에게 요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단조로운 경무계장의 업무에 지루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김두운 경감은 이 지시를 반갑게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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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경찰이 주요 도로에 설치한 요새
-----------------------------------

나는  먼저 경비계장이 가져온 5만분지 1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공비들의 기동선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으므로 무턱대고

출동할 수는 없었다.


일단 주 아지트가 있다는 천연함에서부터 지도상에 붉은 선을
긋고
보니까 다음의 예상 출몰 지역은 상여봉 밑 마을이나
상서면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는 것이 손금 보듯 빤히
들여다보였다.


---------------------------------------------------------

붉은 그리스 펜으로 공비 근거지와 출현 지점을 직선을 그어

연결하고 이 직선 주변을 분석해서 공비가 필히 통과 할 목을
찾아내는 것이 김 두운 씨의 목잡기 비법의 첫 단계였다.

---------------------------------------------------------



부안군 지도
-----------


그는 경비계장에게 정예 10명만 선발하라고 부탁했다.


쫓는 쪽의 입장에선 적의 2,3배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지만 이 당시의 공비, 소위 구빨치 시대에는
어느 지역이나
무장을 절반도 못해 있던 형편이었다.


공비들은 두 부락을 그냥 지나쳤으므로 다음 부락 어디에선가는

약탈을 자행할 것이었다.


늦더라도 다음 출몰 시까지 기다려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디에 나타나든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그때 출발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공비들은 맨몸으로 하산할 때는 시간당 약 6킬로미터를
보행하고
약탈을 마친 뒤 짐을 지고 돌아 갈 때는
3 킬로미터도 보행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지트로 돌아가는 예상 기동선만 정확히 판단한다면

시간은 넉넉했다.

적은 현재 아지트에서 약 8 킬로미터 이상 벗어나 있을 터였다.


시간은 저녁 7 시가 이미 지나 있었다.

예상했던 상여봉 아랫마을을 지나쳤거나 현재 약탈이
진행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신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개암사 아랫 부락이리라.

바드재를 넘어 보안면 쪽으로 갈 확률은 없었다.

지도상 그쪽은 산이 얕고 민가가 많았다.


나는 저들의 목적지가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고 단정하고

대원들에게 식사를 하도록 했다.

시간은 충분해 보였다.

우리도 서장실에서 식사를 마쳤다.


그 때였다.

다시 비상 전화통이 비명을 질렀다.


경비계장이 화닥닥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상서면 지서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10리 떨어진 개암사 쪽에서 계속 총성이

들린다는 보고였다.

출현 지역은 적중했지만 저들의 걸음은 생각보다 빨랐다.


“비상! 비상!”

경비계장은 고함을 지르며 부리나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사찰계장도 따라가 보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즉시 출동했다.


적이 아지트로 돌아갈 기동선은 너무도 빤했다.

저들이 지나쳐 왔던 길을 되밟아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므로

새재를 지나 뱀사골을 거쳐 천연함 아지트에 이르는

기동선을 따라 갈 것이었다.


밤 8시 읍내를 벗어나자 한밤중을 방불케 했다.

도로에서 멀찍이 물러나 앉은 마을에서 듬성듬성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정겨웠다.


차는 밤길을 가르며 출렁출렁 마구 달렸다.

나는 스리쿼터 적재함에 탔다.

조수석에는 행선지를 일러준 사찰주임만 탔을 뿐

경비계장도 적재함에 대원들과 함께 타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차는 길가의 작은 마을 앞을 지나쳐 멈추었다.

이 마을 서쪽 1킬로 지점에 공비 통과의 예상 목인

새재가 있었다.


대원이 가리키는 새재를 보며 나는 후레쉬의 불빛으로

지도를 비춰보았다.


예상이 적중한다면 틀림없는 위치였다

나는 전원을 하차시키고 차를 멀리 대피시켰다.

멀리서 대기하고 있다가 총소리가 나면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영 불쾌했다.

위치로 보아 마을 앞쪽은 불리할 상 싶었다.

적들도 마을을 가로지르지는 않을 터인데

우회 길을 우리의 매복 지점 훨씬 전에서

돌아 버린다면 허사였다.


나는 대원을 이끌고 비탈 밭을 멀리 돌아

마을 끝으로 갔다.


누런 반달이 산위에서 떠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른 고춧대가 서있는 비탈 밭머리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이 가르마처럼 나있었다.


그 길은 밭둑길로 이어져 희미하게 마을로 뻗어있었다.


나는 그 곳 밭머리를 잠복지접으로 결정하고 10여 명의 대원들을

일일이 위치를 지적해서 순서대로 배치했다.

마른 고춧대가 무성하게 서있어서 완벽한 은폐가

가능한 좋은 잠복지점이었다.


거기다 둑길 아래의 위치는 밭뙈기들은 아래로 비탈이

져 있어서 밭고랑에 엎드려 바라보니 둑길은 그대로 달빛아래

다 노출이 돼있었다.

또한 귀를 땅에 대고 기울여 접근해오는 적의 부대를

청음[廳音]으로 감시할 필요도 없었다.


달빛 아래 멀리 마을까지도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 보였다.

나는 절대 정숙을 명하고 종대(縱隊) 잠복 병력의 중앙인
5번과 6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엎드렸다.


그 자세로 몇 십 분이 흘러갔다.

※ 2편으로 계속 클릭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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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이아빠 2010.07.06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 서장 노년 모습입니다.

  2. 홍이아빠 2010.07.06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 서장약력입니다.

    약 력

    1923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한 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19사단 입대, 일본 육군소위입명, 귀국 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전북특경대장등, 정읍·무주·남원·충북 영동·이리·부산 동래 경찰서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정읍군수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3. trading account 2012.04.16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19사단 입대, 일본 육군소위입명, 귀국 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전북특경대장등, 정읍·무주·남원·충북 영동·이리·부산 동래 경찰서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정읍군수를 마지막으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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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김현석 2013.03.25 2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당히 좋은 글이지만 일제 때부터 항일투쟁으로 빛났던 좌익세력을 죽인 건 크나큰 오류였습니다
    특히 6.25를 전후해 들불처럼 일어났던 반일,반미,반이승만,반독재,민주투쟁은 우리 역사에 두고 두고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남조선노동당 부안군당의 혁명 전사들은 죽인 김두운 서장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국제정세는 미국의 무한독주가 무너지고 러시아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또 아프간,이라크의 저항이 빛을 봐 미군들이 하루에도 수 십 명씩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미국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민족해방 인민해방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참된 민주해방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려면 미국의 저항이 거셀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미국을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돈과 권력을 쥔 세력들의 마지막 발악이 거셀 텐데 그럴 수록 우리는 더욱 단결해 이 자들은 저 미국으로 쫒아내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단결합시다 투쟁합시다 항일세력들을 죽이고 가두고 고문하던 반민주,친일친미 세력들을 반드시 처단합시다 그리고 역사의 장대한 길에 이자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후세들에게 진실된 역사들 가르칩시다
    투쟁합시다 투쟁 얼어죽고 맞아죽고 굶어죽을 때까지 싸웁시다 투쟁

    • ㅉㅉ 2014.03.25 0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 미쳤네. 민주주의도 좋지만, 이런 놈 헛소리 해대는 거 보면 진짜 어느 정도 민주주의도 제한해야 한다. 꽁꽁 잡아 북한으로 보내던지. 투쟁? 혁명전사? 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