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10.11 87. 피로 얼룩져간 능선 (16)
  2. 2010.10.01 84. 고지 쟁탈전의 시작 (9)
  3. 2010.09.20 57mm 무반동총의 적 벙커 공격 (11)

87. 피로 얼룩져간 능선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0.11 08:06

 

  1951년 8월 중순에 접어들어 장마가 그치자 미 제8군은 지체 없이 공격을 재개하여 공산군을 압박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러프너(Clark L. Ruffner) 미 제2사단장은 펀치볼에 대한 공격과 병행하여 이를 감제할 수 있는 대우산 서측의 983고지도 함께 공격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일대를 선점하여 방어에 나선 북한군은 아군의 핵심방어선인 캔사스선과 후방지역을 깊숙이 감제 관측할 수 있는 이점을 살려 아군의 모든 군사 활동을 포격으로 손쉽게 제한할 수 있었지만, 반면 미 제2사단의 피해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군의 피해는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장차 공격을 위한 발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983고지 확보는 필수적인 과제였습니다. 이 고지는 문등리와 사태리 계곡의 중간에 위치한 약 8킬로미터에 이르는 횡격실 능선의 주봉이었는데 능선 전체가 남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어 북한군의 방어에 상당히 유리한 반면 공격에 나선 아군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리한 지형이었습니다. 때문에 이곳은 처음부터 피를 부어대지 않고는 점령하기 힘든 위치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위험한 임무가 제2사단장의 지휘를 받는 국군 제5사단 36연대가 공격부대에게 부여되었습니다.


  983고지를 방어하던 북한군도 이곳의 전술적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어 무려 2개 사단을 이 일대에 배치하여 놓았습니다. 그들은 고지로 연결되는 능선서측에는 제12사단 1연대를, 동측에는 제27사단 14연대를 나누어 배치한 후, 후속배후에 각 사단의 본진이 대기하는 형태로 철통같이 방어에 돌입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모든 참호를 포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유개호(有蓋壺)화하였고 고지의 후방에는 신속한 보급이 가능하도록 깊숙한 교통호를, 반대로 아군이 진입할 전방에는 5,000여 발의 지뢰를 매설하여 놓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같은 배경과 준비 하에서 983고지 일대의 능선에서 벌어진 전투는 처음부터 워낙 많은 인명피해가 필연적으로 발생하였고 이를 취재하던 종군기자가 그 참혹함을“피의 능선(Bloody ridge line)”이라고 보도하면서 전사에 피의 능선전투로 불려 지게 되었습니다.


[능선을 피로 붉게 적셔 이후 피의 능선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8월 15일부터 고지일대에 대대적인 항공폭격 및 포병사격이 무려 3일간 집중적으로 실시된 후, 황엽(黃燁)대령이 이끄는 국군 제36연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대대적인 사전 포격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은 북한군은 격렬한 저항을 나섰고 더불어 아군은 적이 매설한 지뢰에 의해 진격이 저지되었습니다. 또다시 엄청난 포격을 가하여 지뢰지대를 개척한 후 야간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에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험준한 산악 지역에 구축된 요새진지는 화력과 정면공격만으로는 점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각인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제36연대는 후방으로 우회하여 적을 급습하기로 작전을 변경하였습니다. 우선 능선 맨 우측의 773고지를 공격하는 제5중대에서 특공대를 선발하여 후방 침투를 시도하였는데, 예상대로 전방만 신경을 쓰던 적의 배후를 강타하는데 성공하여 773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같은 방법을 전 공격부대에 즉시 적용시켜 공격 4일째인 8월 21일, 940고지 일대의 능선을 제3대대가 확보하였고, 드디어 8월 22일 11시 30분경 난공불락처럼 버텨오던 983고지의 정상을 제11중대가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황엽대령은 공격으로 인하여 손실이 컸던 제36연대를 대신하여 983고지의 방어임무를 미 제2사단이 인수인계 받아 줄 것을 건의하고 이를 타당하다고 판단한 러프너 사단장도 승인하였으나, 막상 밴 플리트 제8군사령관은 한국군의 공적을 미군이 가로챘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부대 교체를 반대했습니다. 이에 따라 전력이 고갈되어 더 이상 고지를 사수할 여력이 없던 제36연대는 8월 26일 02시경에 북한군 1개 연대 규모의 역습을 받고 983일대에 포위되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북한군의 역습에 어렵게 점령한 고지를 포기하였습니다.]
(전후 촬영된 북한의 선전사진)


  결국 제36연대는 983고지에서 능선 아래쪽인 940고지일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추격해온 적에게 8월 27일 밤에 이마저 내줌으로써 허무하게도 공격 이전은 상태로 회귀하고 말았습니다. 과잉 친절이 불러온 어이없는 결과였고 그동안 흘린 피가 무효가 되어버린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피의 능선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국군 제36연대는 8월 28일 10시부로 제2사단 배속이 해제된 후 후방으로 철수하여 재편성에 착수했고 피의 능선을 재점령하는 임무는 미 제2사단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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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슈타인╋ 2010.10.11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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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고지 쟁탈전의 시작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0.01 08:21

  휴전협상이 진척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쌍방 모두는 휴전협상 자체를 파국에 빠뜨릴 수 있는 거대한 전면공세는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휴전 자체를 부정하려 하지는 않았고 다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조성을 위한 제한적인 공격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엔군은 공산군 측이 회담을 결렬시키려 할 때 강력한 화력과 공군력으로 압력을 가하는 방법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하여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1951년 휴전회담의 시작과 동시에 군사적인 대응 전략이나 전술은 이전과는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치열하게 대지공격을 펼치는 유엔군 전투기]

  공산군에게 유엔군의 화력은 넘을 수 없는 한계였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임진강 하구-화천 저수지-간성을 연하는 캔사스선(Kansas Line)북방 10~20킬로미터에 와이오밍 선(Wyoming Line)으로 명명된 느슨한 방어선을 설정하여 놓고 있었는데, 이는 내심 휴전선으로 생각하던 캔사스선의 확고한 점령을 위한 전초진지(前哨陣地)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2중의 방어개념은 적이 대규모 공세를 취해올 경우에는 상당히 유효하였지만, 전력을 분산한 상태였기 때문에 종심 1~2킬로미터 내외에서 단일 고지군(高地群)을 목표로 벌어지는 제한전에서 그리 효과적이지는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뒤에 든든하게 설정 된 완충지대를 믿고 적이 공격해 올 때마다 제한적으로 후퇴한다는 것은 이제는 고려하기 힘든 전술이 되었습니다.


  이를 간파한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는 와이오밍선의 방어진지를 캔사스선과 동일한 강도로 축성하도록 지시하여 후퇴 없이 와이오밍 선에서 적을 격퇴하도록 조치하였는데, 그 덕분에 오늘날 휴전선이 애초 계획하였던 화천호-속초선보다 대략 10킬로미터 이상씩 북으로 북상한 현재의 위치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저돌적인 밴 플리트의 적극적인 대응전략으로 임시방어선으로 설정된 와이오밍선은 영구진지화 되면서 차후 작전은 이 일대의 고지군 확보를 위한 고지쟁탈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공산군 측이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고의로 휴전회담을 지연시키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동안 대규모 공세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시간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아서 적에게 전력 정비의 여유를 주지 않고 유리한 지형을 계속 확보하기 위하여 과감한 공세를 감행하였습니다. 하지만 휴전회담장이 포함된 서부지역에서 공세를 감행할 경우 회담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이 커서 중동부의 산악지역에 집중된 제한적인 공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피로 얼룩진 고지쟁탈전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고지쟁탈전의 소모전 상황을 알려주는 탄피]


  사실 휴전하였을 경우 유리한 위치를 차지려는 고지쟁탈전은 이미 전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북한군과 중공군은 이전처럼 주로 국군이 담당하고 있는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습니다. 국군의 출혈을 강요시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의 휴전반대 운동을 약화시키려는 부차적인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국군이 담당한 지역이 지리적인 여건 상 미군지역보다 화력이 약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에 비하여 병력에서는 여전히 열세였으나 화력과 기동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국군이 담당하던 해발 1,000미터 이상의 중동부 산악지역에서는 이런 이점이 효과적으로 발휘되기 힘들었습니다.


  공격과 방어가 반복되면서 고지쟁탈전은 쌍방에게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강요하였습니다. 공격하는 병력은 아무래도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노출되고 체력소모가 심하여 상당히 불리한 형국이었지만, 물 한 모금조차 산 아래서 조달하여야 할 만큼 보급의 제한을 극심히 받는 고지를 계속하여 방어하기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1951년 9월 펀치볼을 공격하던 미 제1해병사단에서 사상최초로 헬기를 이용하여 병력을 기동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후 헬리콥터는 지상군의 필수장비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헬리콥터는 새로운 전쟁 수단으로 급속히 부각하였습니다.]


  사실 6·25전쟁에서 이 당시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진 일련의 고지전투들에 대한 인상이 너무 오래가서 이후 오래 동안 고지확보를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작전으로 여기는 시류가 있기도 하였지만, 고지 쟁탈전과 고지위주의 병력배치는 단지 상대에게 휴전을 강요하고 유리한 위치에 서기위한 상황 하에서 적용되는 특이한 전술이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보급이 제한되어 스스로 고립될 수 있는 고지의 점령과 확보는 일반적인 전쟁양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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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개시된 휴전회담  (7) 201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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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이 커서 중동부의 산악지역에 집중된 제한적인 공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피로 얼룩진 고지쟁탈전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57mm 무반동총의 적 벙커 공격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9.20 08:28

- 백암산 고지 탈환작전,1951년-

옛 보병 장비인 57mm 무반동총은 6·25전쟁에서 대활약을
했음에도 자매격인 60mm 박격포와 같이 그 전공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7mm 무반동총
-------------


아래는 6·25전쟁 참전 용사인 이봉조 선생이 썼던
‘분대장’이라는 옛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1951년 7월 18일.
중공군이 포진하고 있던 백암산[1279고지]의 탈환을
명받은 국군 5사단 35연대는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은 이미 전날 [17일] 대대적인 박격포 준비 사격으로
시작되었다.

이봉조 이등 중사는 60mm 박격포 분대장으로

이 고지 탈환
전투에서 박격포 사격을 지휘했다.

아래는 그 분의 전투 수기다.


이봉조 이등 중사
-----------------

중대 본부가 위치한 바로 아래에 우리들 박격포반이
자리를 잡았다.
적진은 우리 부대가 있는 지대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공격하는데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기필코 부대의 명예를
걸고
신명을 다 바쳐 백암산을 탈환하겠다고
굳게 결의하였다.


57mm로 적진을 강타하고 있는 미군- 1951년 3월 38선 부근
-------------------------------------------------------

백암산은 워낙 높은 지대라 박격포탄 운반에도
어려운 문제가 많았다.
공격에 동원한 박격포는 예비 중대 것까지 합치면
9문이었으나 위치와 포탄 보급 관계로
최초에는 내가 지휘하는 포 1문만 자리를 잡아
기점 사격을 하다가 나중에 다른 박격포도
사격에 참가하게 되었다.


60mm 박격포
-----------


이 무렵 나는 포반장의 결원으로 분대장에서
박격포 3 문을
지휘하는 박격포 반장으로 현지에서
임명을 받았다.

각 분대에는 포 분대장과 사수가 있었으나
사격술이
미숙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중대장은
나로 하여금
직접 포를 운용하여 지원 사격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그간 소총 분대장으로서 실전 경험을 쌓아 왔었고

박격포 포술에는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명령에 따라 임무 수행이 가능하였다.

우리 포반은 고지 정상을 집중적으로 포격하기 시작하였다.

적과의 거리는 불과 400미터 내외여서 가늠대를
포목선상[砲目線上] 꽂아 직접 조준하면서 사격제원을
산출할 수 있었다.


오후 늦게 시작한 포격을 밤새도록 하고도 뒷날에도

하루 종일 계속 하였다.
우리들의 포격이 정확했음인지 적군의 활동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도 유개진지[有蓋陣地]내에 대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끔 어느 때는 적군 몇 명이 뛰는 것을 나의 포진지에서도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 포반은 포탄 보급정도에 맞추어 쉴새없이 포격을

가해서 적의 활동을 견제하고 시설을 파괴하였다.


단장의 능선 -한국 전쟁 기간의 삼분지 이 세월은 피아 쌍방
이런 험준한 산악에서 싸웠다.
---------------------------------------------------------

1953년 7월 17일 바로 그날 오후부터 다음날 공격 개시 전에서
적진에 퍼부은 박격포탄은 무려 5,000여 발에 가까웠다.
적의 벙커는 명중탄을 여러 발 맞았는데 흙먼지만
일으킬 뿐 파괴되지 않았다.


쌍안경으로 세밀히 관찰한 바로는 벙커를
덮은 훍의 두께가 1m 이상 되는 것 같았다.


60mm 박격포
-----------

정상으로 통하는 9부 능선이 시작되는
곳에
적은 두 개의 벙커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그중 한 곳에 기관총과 따발총으로,
벙커 정면으로
공격하는 우리 부대원이 보이기만 해도 사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우리는 박격포탄을 계속 벙커에 명중시켰으나

불을 뿜는 적 벙커의 총안[銃眼]는 멀쩡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군 돌격 부대는 적의 기관총 사격 때문에 이 능선

양쪽 계곡에서 더 이상 전진을 못한 채 호를 파고
대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우리 중대 본부 소대 선임하사인

김정대 중사가 중대장에게
“중대장님 화기 소대의 무반동총으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하고 건의하였다.

중대장은
“아! 그걸 잊고 있었군, 빨리 무반동총 가져와!“ 명령하였다.


57mm 무반동총
----------------


다래 계곡에 놓아 둔 57mm 무반동총을 관측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즉각 배치하였다.
배치 완료된 시각은 오전 9시 경이었다.

무반동총을 정 조준한 다음 포탄 한 발을

장진하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었다.
급히 살펴보니 공이가 부러져 있었다.

폐쇄기 뭉치에서 고장 난 공이를 제거하고 새 공이를

갈아 끼웠다.
무반동총을 손 보고 다시 발사하기 까지는
10여 분이 걸렸다.

이번에는 이상이 없이 발사되었으나 첫 탄은

총안을 명중하지 못했다.

무반동총 진지에서 적 벙커까지의 거리가 300미터에
불과했는데도 그것을 명중시키지 못한 것이 몹시 쑥스러운지
김중사는 머리를 긁적이었다.

다시 침착하게 조준하여 발사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탄착 지점을 확인 할 수가 없었다.
모두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펑!“하고 적의 벙커가 폭발했다.
적 기관총 진지 총안으로 포탄이 들어 간 것이었다.


57mm 고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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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진지 옆에서 보고 있던 중대장 이하 전 대원의 환호성이
요란하게 퍼졌다.“됐다! 명중이야 , 대성공이다.”
이어서 각 소대장에게 돌격명령이 무전으로 하달되었다.
각 소대장은 중대장으로부터 돌격 명령을 받자마자
“소대 ! 돌격 앞으로-!”
백암산 능선 사면을 잽싸게 달려 오르기 시작했다.

적군은 사방으로 놀란 토끼처럼 달아나느라고 야단이었다.
중대원들은 고지 하단부로 도주하는 적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고지가 원체 가파른 곳이라 추격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대대에서 내려왔다.

우리 박격포반원들이 산정으로 올라올 때 보니까 문제의
기관총 벙커는 지붕이 무너져 있었다.
그 곳은 적 기관총 조 2명이 완강히 저항했던 곳으로
두 놈이 죽어 있고 기관총이 파괴되어 있었다.
그런데 놈들이 독하다는 것은 거기서 또 증명이 됐다.
그 곳은 흙으로 후방 출입구를 완전히 막아 놓아 사방이 막힌
폐쇄된 곳이었다.

두 명을 그렇게 가두어 놓고 죽을 때까지 저항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반동총으로 적 기관총 진지를 파괴했던 김 정대 이등 중사는
이봉조 씨와 친한 전우였고 같은 고향 출신이었다.

적 벙커 파괴의 수훈을 세운 그는 산 아래로 도망가는

중공군 낙오병을 추격하다가 아군 타 부대원이 던진 수류탄에
아깝게도 희생되었다.

다음 날 7월 19일 아침 각 소대 각 분대 별로 휴식도중 6사단

병력이 올라와서 우리 사단과 진지 교대를 하고 우리 중대는
방어선 후방으로 내려가서 대기하며 정비를 했다.


이봉조 이등 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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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 참가자인 이봉조 씨는 1950년 11월 자원입대해서
1954년 5월 제대할 때까지 3년이 넘게 전방을 누비며
소총수, 자동소총 사수, 그리고 소총 분대장, 박격포 분대장
반장직을 역임하면서 싸운 역전의 용사이다.

대담한 적진 잠입으로 중공군 2명을 생포해와
화랑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피의 능선 - 고지 전투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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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당시 소위 ‘빽’없는 보통

국민이었는데
그는 국방의 일선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가 2년간 틈틈이 원고지 1,000매에 쓴 전투 수기 ‘분대장’을

읽어 보면 그가 전쟁기간 내내 보이는 상관에 대한 존중심,
동료 전우들과의 전우애,
부하들을 아끼는 애정,
그리고 업무를 연구하고 열중하는 태도는 물론 전투에 임해서
그가 내리는 냉정한 판단과 지휘의 용감함은 읽는 후배들에게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책을 발간하던 1980년도에 50대의 가장으로

택시 운전을 했었는데
지금은 연로하여서
은퇴했을 것을 추측된다.


6·25전쟁에서 영웅들만이 호국의 중책을 수행했던 것이 아니다.

이와같이 국가의 부름에 받고 불평 한마디 없이 일선에 배치되어
목숨을 바쳐
싸웠던 일반 서민 출신‘보통 병사’들의
무수한 희생과 무공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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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영보 2010.09.21 0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산화한 수많은 선배님들의 덕분에 오늘으이 있음을 항상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2. 비도승우 2010.09.22 05: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존경스러운신분입니다. 다만 5000여발의 60mm 박격포탄이 아깝게 느껴지네요..

    57mm 한발로 이리 쉽게 해결될것을.. 그래서 중요한것이 적재적소에 대응화기와 전술을

    대입하는 지휘관의 판단력같습니다. 아무튼 이봉조 선배같은 분들덕에 이나라가 존재합니다.

    그분들의 노고를 언제나 기억합시다.

  3. 바라는것이란 2010.09.22 2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역 군인입니다....

    분대장이라는 책은 저도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혹 출판사나.. 구매할만 한 곳이 있으면 리플을 달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실전에서 쓰여진 책이니 후배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수 있을것 같습니다....

    사실... 국/군내에서 구할수 있는 대부분의 책들은 분대급 이하 제대의 전투경혐이 담겨 있는 책은 구하기가 힘듭니다.

  4. 울프 독 2010.09.23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좋은 생각입니다. 이 책은 30년전에 출판되어서 지금은 절판되었습니다.
    병학사라는 곳에서 출판했었습니다. 저는 남산 도서관에서 처음 읽었고
    이번에는 국회 도서관에서 복사했습니다. 필요하시면 국회 도서관에 가셔서
    등록하시고 모두 복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병 교육 자료로 쓸만한 같은 책으로서
    일본인 병사가 쓴 '이런 중대장도 있었다'도 추청 할만합니다..- 같은 병학사 간-입니다.

  5. 2010.09.25 1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6. 하늘바라기 2010.09.25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암산=흰바위산(하얀 바위산이랍니다) 7사단이 관리하고 제2땅꿀이 근처에 있죠 전 적근산 대성산에서 근무했는데
    옛날생각 많이 나네요

  7. 황태 2010.10.05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7미리 메고 다니는 거 보고 많이 놀린적이 있었는데.
    3.5" 하고 57 무반동총 이것도 무시할게 못되는군요.

  8. cthwn 2010.11.06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참고 자료로 양해해 주시리라 믿고 복사해 가겠습니다.
    그런데 서두에 백암산 공격개시일 1951년과 중간 부분에 박격포 5천여발 발사싯점의 1953년이 시차가 커서 제가 다른 경로로 확인해 본 결과 1953년이 맞는것 같습니다. 아마 오타인것 같은데어째튼 좋은 자료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9. save money tips 2012 2012.05.23 1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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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progressive era essay 2012.06.07 17: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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