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기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8.11 길목에 남겨진 역사 (2)
  2. 2009.12.28 남아프리카 공화국 참전결정 과정 (6)

길목에 남겨진 역사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8.11 08:30

 

  현재도 우리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6·25전쟁의 유산 중 하나가 한미동맹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굳건한 동맹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미동맹의 법리적, 외교적 근거는 1953년 10월 1일 체결되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입니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현재는 많이 축소되었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주한미군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반도 곳곳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서류상의 조약보다 6·25전쟁 발발 일주일도 되지 않아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미국이 전쟁에 전격 개입하여 우리와 함께 피를 흘림으로써 동맹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전쟁 당시에 미국 외에도 수많은 나라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고 귀중한 전투병을 파견하여 피를 흘려주었지만 당시 유엔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것은 단연코 미국이었습니다.


[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중 미군의 역할이 제일 컸습니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쟁 기간 중 총 178만 명의 미군이 참전하여 우리를 도왔고 그중 사망자 3만6940명, 부상자 9만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 등 총 13만7250명 희생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더불어 수많은 물자지원이 함께 있었는데, 이러한 고귀한 희생과 지원은 대한민국이 초유의 국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엄청난 힘이 되었고 한미동맹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미군들이 희생을 당하였고 그것은 동맹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쟁 당시는 물론 상호방위조약 체결 후 6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미군들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한반도를 거쳐 갔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이들이 한반도에 들어오고 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관문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주한미군의 병력도 많이 축소되었고 장거리 항공 교통이 발달한 관계로 오산에 있는 미 공군기지가 중요한 통로역할을 담당하지만 오래 동안 주한미군 병력이 한반도로 들고나가는 길목은 인천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인천을 통해 떠나는 미군들의 모습 ]


  전쟁 초기에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대부분은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지만 전쟁 중반기 이후에는 내륙교통망의 파손도 심하고 전선이 가까운 관계로 인천항은 주요 출입구가 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인천항이나 인천이 전쟁사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인천상륙작전이지만 사실 이처럼 전쟁 내내 묵묵히 아군의 생명선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전쟁 중 현재 인천항 제1부두에 설치된 제21운송대 입구 ]


  물론 한반도 최대의 항구인 부산의 역할은 계속하여 컸지만 주로 군수물자에 한정되었고 병력이나 시급한 화물은 인천항을 통해 전선과 계속하여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천이 미군의 통로가 된 것은 전쟁 훨씬 이전부터였습니다. 1945년 9월 8일 미 제24군단 예하의 제7사단이 38선 이남의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군정을 실시하기 인천으로 상륙하였던 것이었습니다.


[1945년 9월 상륙하기 위해 인천항 내항으로 진입하는 미 제7사단]


  행정상륙이었지만 인천은 미군이 상륙주정을 이용하여 한반도로 들어오는 길목이 되었고 부대 또한 5년 뒤 미 해병 제1사단과 함께 인천으로 상륙한 제7사단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인천을 발판으로 한반도에 손쉽게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1949년 철군한 미군은 이듬해 다시 인천에서 거대한 상륙을 성공시켜 서울로 진입하는 통로가 되었고 1951년 이후에 오래 동안 주한미군의 관문 노릇을 하였습니다.


[인천항에서 유류를 하역하는 모습 (1952년)]


  특히 인천항과 내륙을 연결하는 초입인 부평일대에 설치된 애스캄(ASCOM)이라 불린 거대한 미군병참기지는 1970년대 초반까지 한반도로 들어오는 미군과 미군 물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1945년부터 1970년 사이에 한반도에서 근무한 미군들이 남긴 사진들을 보면 주로 복무한 자대뿐만 아니라 들어오고 나간 인천항이나 일대의 모습이 예외 없이 잡혀있을 정도입니다.


[전쟁 중 초등학교를 징발하여 설치된 제8057보충대]
좌에서 우로 6·25전쟁에 참전한 제3, 2, 1기병, 45, 40, 7, 24, 25사단의 마크가 표시 되어있습니다 (사진-Dewey Mclean)


  1953년경 철도수송대에 근무하면서 찍은 Dewey Mclean씨의 희귀한 컬러사진에도 이 부분이 잘 나옵니다. 부평의 애스캄으로 완전히 옮겨가기 전에 인천 서림초등학교를 징발하여 운영된 제8057보충대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 깊습니다. 긴박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전쟁 중에서도 미 제8군의 보충대답게 예하부대들을 일일이 표시하여 놓은 모습은 한편의 여유를 느끼게도 만듭니다.


[인천 외곽에서 제8057보충대로 가는 길(현재의 제물포역 부근)의 이정표인데, 미국에 있는 집으로 가는 출입구라는 푯말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이제 한국의 그 어느 곳에서도 6·25전쟁 당시의 참담했던 모습을 떠 올리기는 힘들고 그것은 미군이 전쟁 이전부터 그리고 전쟁이후에도 거대한 관문 노릇을 하였던 인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곳을 통해 한반도로 처음 들어왔고 전선이나 자대에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아니면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고국으로 돌아갔던 수많은 미군들에게 인천항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health insurance businesses big apple 2012.05.22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뷰와 함께 쓰기까지 정말 멋진셔서 너무 감사, 완벽하게 놀랐 있습니다! 이것이 올과 같은 물건을 유지합니다.

  2. ideal medical insurance plans for anyone 2012.05.22 1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는 환상적인 게시물의이 유형에 대한 많은 있으며 검토 .. 전 절대 만족! 접근 이러한 종류와 유사한 자료를 잡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참전결정 과정

생생! 6·25/6·25전쟁 지원국 2009.12.28 20:25

남아프리카공화국 참전 결정과정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6월 27일 유엔안보리에서 미국의 대한군사지원에 관한 결의안이 절대다수에 의해 가결되자, 7월 1일 남아공은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구체적인 대한군사지원 방안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장비로 무장되고 고도의 훈련을 쌓은 백인만으로 편성된 12만 명 규모의 상비 병력을 갖춘 남아공은 멀리 떨어져 있고 기후가 전혀 다른 한국으로의 파병의 어려움을 인지하여 간접적인 지원방법을 모색할 뜻을 밝히는 한편,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미교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7월말까지 거듭된 미국과의 교섭에서도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자 급기야 남아공 정부는 8월 초 전투비행대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국회는 특별의회를 소집하여 정부의 해외파병 결정을 합법화하기 위한 긴급법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남아공 정부는 1950년 8월 4일부터 전투부대의 참전을 선언하고는 곧 부대편성에 착수하였습니다.


  남아공 군 당국의 최초 계획은 정규군 가운데에서 지원자를 선발할 예정이었으나 막상 공군당국이 지원자 응모요강을 공고하자, 정규군 장병 외에도 예비군 및 민간인들로부터 엄청난 수의 지원자가 쇄도하였고 이에 군 당국은 새로 대대를 편성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남아공 공군 제2전투비행대대의 파병을 결정하였습니다. 

  남아공 정부는 대대의 소요 항공기 및 장비는 본국으로부터 휴대하지 않고 대대가 극동기지에 도착하면 즉시 현지조달이 가능하도록 미국정부와의 구매교섭에 합의하고, 8월 27일 참전자들의 명단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동부 아프리카, 에디오피아, 이태리 및 중공지구전선에서 용맹을 떨쳐 ‘날으는 표범’이라는 별명이 붙은 남아공 공군 제2전투비행대대는 9월초부터 프레토리아 근방의 워커크루프 공군기지에서 본격적으로 참전준비를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앞서 참전에 따른 제반 행정조치와 유엔군총사령부와의 연락업무를 위하여 1950년 9월 5일에는 일본 동경에 연락본부를 설치하고 장교 49명을 포함하여 총병력 206명으로 편성된 대대는 9월 25일에 프레토리아를 출발, 그 다음날 더반항에서 선박 치사단호편으로 극동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남아공은 그의 국방사상 최초로 극동지역에 전투부대를 파견하게 됩니다.


  1950년 9월 26일 더반항을 출발한 대대는 만 40일간의 긴 항해 끝에 11월 5일 04:30분에 일본 요코하마 항에 도착했고 다음날인 11월 6일부터 미 공군으로부터 예정된 F-51무스탕기 16대와 장비를 인수하여 현지적응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제2대대 도착 장면]


  1950년 11월 15일 전황이 혼미한 와중에 드디어 미 제6002비행단 본부로부터 장교 13명을 포함한 34명의 선발대를 편성하여 즉시 한국으로 이동하라는 첫 작전명령을 하달 받고 다음날 선발대는 다음날 미 공군 수송기편으로 존슨기지를 출발하여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대대장 테론 중령 외 4명의 조종사들은 각기 F-51 무스탕 편으로 조금 늦게 도착하여 이들과 합류함으로써 6·25전쟁이 발발한 지 근 5개월 만에 명실 공히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tempurpedic mattress 2011.08.02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쾌적한 그 진행이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땐. 이 모든 방법으로 수행되어야한다는 준비에서 개발 매뉴얼.

  2. Free classified ads 2011.08.04 0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때 대대장 테론 중령 외 4명의 조종사들은 각기 F-51 무스탕 편으로 조금 늦게 도착하여 이들과 합류함으로써 6·25전쟁이 발발한 지 근 5개월 만에 명실 공히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3. home insurance fast estimate 2012.04.24 1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레이트 쓰기 - 업! 우리는 확실히 사전에 telemedicine을 발견 적이 없다. 사실은 방법 기능뿐만 아니라 효과 클라이언트 유익입니다. 일반적으로 야외 정원 치료와 관련 게시물을 생산할뿐만 아니라 교육용 만드는 회사로 돌아가서. 귀하의 사이트는 우리에게 톤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4. home insurance prices ma 2012.04.26 15: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은 좋은 웹로그를 제공합니다. 우리와 함께이 특정 좋은 문서를 표현하는 개별 많은 감사를 주장 양도 나는 진심으로 원한다. 이것은 실제로 영리 짧은 기사이다. 이 웹 사이트를 통해 중요한 명소를 공유와 관련하여 그것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배우자와 나는 웹 사이트와 함께 흥미로운 제품을 bared 등을 반복했다.

  5. ongoing property insurance organizations 2012.04.26 15: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출해야 아주 좋은 방식으로 인쇄된하지만 개인적으로 나에게 유용 사실을 많이 포함됩니다. 나는이 게시 말로 사람의 고유 방법을 찾아야 감격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자신이 개념을 사용하여 함께 이해하기 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