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비들 고사시킨 전투 경찰의 매복 전술 2편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06 08:23


 


처형을 앞둔 경찰관 살해 공비들 .
경찰을 죽이고 탈출을 시도해서 전원 사형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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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있기는 한 고역이었다.

참기가 어려워 뒤척이는 순간 누가 신호를 보냈다.

“쉿!”

분명 적이 멀리서 흔적을 보였다.

공비들은 한 줄로 서서 달빛 속을 걸어왔다.

공비들 특유의 악취가 산들바람을 타고

먼저 대원들에게 도착했다.

대원들은 아연 긴장했다.


공비들이 마을 앞을 태연자약하게 통과해서 오는 것을 보니

과연 소문대로 대장 외팔이는 대담한
성격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공비들이 고추밭에 들어서자 마른 고춧대가 사각거리며

소음을 냈다.


공비들 특유의 악취가 짙어 지더니 불규칙한

발자국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그리고 어둠 저편에서 공비들의 상반신부터 노출이

되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공비들이

잠복 지점으로 들어섰다.


20미터, 10미터, 5미터, 소총을 든 공비 선두 첨병이 

내 앞을 지나갔다. 등의 짐을 이기느라 고개를 앞으로

뺀 적들이 2,3미터 간격으로 우리 앞을 통과하고 있었다.


완전한 돌출 타겟이었다.

네 명이 나의 정면을 통과했던 순간이었다.

“ 쏴라!”


빠바바앙 -!

일제 사격에 돌출 사격은 무너져 내렸고

대원들은 스프링처럼 공비대열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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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았던 월남의 매복전에서도 일제 사격과 크레머를

터뜨려 적에게 섬멸적 타격을 가하고도 이렇게 총검돌격을

하는 일은 없었는데 하여튼 이 시절 한국 전투경찰이
대단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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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닥쳐야 할 육박전의 대상은 없었다.

기습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적 두어 명이 노루처럼

이리저리 뛰어 달아나는 뒤에다 대고 대원들이 따라가며

총을 쏘았다.


미처 짐을 벗지 못한 적 한명은 총 개머리 판에

타격되어 생포됐으며 나머지는 총이나 약탈 짐을 지고

둑길 아래에 쳐 막혀 있었다.


생포 1명에[김경준, 선전책] 사살 5명의 전과였다.

일차 타격으로 부안 공비 9명중 6명을 섬멸 한 것이다.


생포자가 머리에 손을 얹고 끌려오자 나는

신원확인 질문으로 시간을 끄는 사찰계장과 우두거니 서있는

경비계장을 제치고 이들을 직접 심문했다.

“ 제 2의 비상 집합 장소는 어디냐?”

“-----”
“제대로 말하면 살려 주겠다.그렇지 않으면--”

즉결 처분한다는 위협이었다.


“천연암 아래요.”

“제 3의 장소는?”
“그 너머 고지라우.”

“무장은 소총 몇 정이었나?“
”석 자루 뿐이었어유.“

소총이 3 정뿐이라면 달아난 적은 모두 비무장이라는

결론이다. 시체에서 거둔 총이 석 자루였다.


나는 경비계장에게 생포자를 재갈 물리고 앞세워

곧바로 제 2, 제 3의 비상 장소를 찾아가도록 시켰다.

대원 중 6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나와 사찰 계장은 공비 시체 검사를 맡았다.

내가 죽은 공비들 시체에 섞여있는 외팔이의 시체를 검사하고

있는 동안 주변을 돌아보던 대원이 비명을 질렀다.

“어! 이거 멀쩡하네!“

하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죽은 시체로 보였던 공비에서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놔라! 이 싸가지 없는 개들아!”


나는 달려가 보았다.

여자 공비였다.

허벅지에 중상을 입고 다량의 출혈을 한 것이

어둠 속에서도 확인 되었다.

그녀는 악을 쓰며 죽여주기를 원했다.

“언제 입산했나?”

“묻지 마라 이놈아 ! 나는 혁명 전사다 어서 죽이라 !”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싶었다.


그 녀는 결국 힘을 모아 “조선 의용군가”를 부르고

대원에게 처형당했다.


도주한 두 명의 공비는 제 2의 접선장소에서

체포가 되었지만 한 명은 끝내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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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공비중  한 명인 임한근은 김두운씨와

줄포 국민 학교 동창으로 밝혀져 그가 구해 내려고 노력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친구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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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공비들도 군경이나 그 가족들을 함부로 죽였지만

군경도 포로들을 가차없이 즉결처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날 붙잡힌 포로 세 명도 김두운 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찮게 생각한 부안 경찰서 사찰 계장이
모두 사살해버렸다.

어두운 한국사의 한 시절이었다.

김두운 씨는 이 사건뒤에 생포한 공비는 처형이 아니라
반드시 설득하고 감화시켜 전향시키기로 맹세했다.



죽음이 일상화 되었던 6·25전쟁후 한국.
여순 사건때 반란군들이 학살한 무고한 양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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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가 있다.

전쟁이 터지고 김두운 씨는 동료들과 다급한

후퇴 길에 올랐다.

시골 고향에서는 형님이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날 도주했던 공비가 따발총을 가진 무장병을 데리고

김두운 씨 가족을 몰살하러 왔다가 다행히 동구에서

형님을 만나 이미 김두운 가족이 좌익에게 다 죽었다는

말을 듣고 혀를 차며 그대로 돌아갔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중국에서 공산화 대박을 터뜨린 모택동의 신화를

재현할 꿈을 가지고 입산했던 수 천 명의 남한 공비들은

모두 섬멸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로 소위 유격활동을 할 구역이 너무 좁았고

주변도 인구 밀집지역으로 뻗어나갈 공간도 없었다.


두 번째로 북한과의 연계 실패다.

북한은 공비들이 다 섬멸되기는 손가락을 물고 구경만

했지 한 푼의 지원도 해주지 못했다.

해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가 식량 확보의 실패다.

이것은 첫 번째의 실패이유와도 연관이 있다.

빨치산들은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고

식량을 공급해줄‘해방구'도 인구 밀집의 남한에서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전투 경찰 경비아래 수확하는 농민들.
이 단계부터 경찰은 식량을 공동관리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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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공비들의 이 약점을 파고들었다.

공동 추수를 독려하고 수확물은 지서에 공동으로 보관시켰다.

부락민들은 식구의 한 끼만 가져가서 밥을 해먹도록 했다.


쌀이 손에 안 들어오자 공비들은 식량을 찾으러 민가로 내려왔다.


경찰은 이들을 매복전술로 맞받아 쳤다.

식량이 이들 입으로 가져가기 직전 좌절시키는 작전이었다


마침 내가 찾아낸 더 큰 경찰 매복 전술의 성공적인 사례를 

조금 이른 시기의 것이지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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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산의 식량 사정은 더 나빠져서 대원들이 며칠씩 굶는 날이

  많았다. 1950년 4월 16일 도당 간부 몇 사람만 남겨놓고
  무장대원
40명 비무장 대원 20명, 모두 60명이 합쳐
  보급투쟁에 나섰다.


  구례 간전면 제기암 골에서 백운산 상봉은우회하여

  진상면 야지로 나가려는 것이다.

  그것은  결사적인 시도였다.

 

  이틀간의 잠복 끝에 가까스로 식량 확보에는 성공했으나 
  돌아오는
도중 고리봉[상봉]근처에서 앞질러 와서 매복하고 있던

  경찰에게 퇴로를 차단당했다 .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쫓기며 귀환을 시도했으나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경찰의 추격으로 겨우 20명 정도만이 살아
  돌아왔다.


  이로서 전남 도당은 큰 타격을 입었고 식량을 비롯한
  제반 사정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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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은 시간이 지나고 경찰이 매복 토벌을 체계화 하자

식량 확보는 이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전쟁 후반은 공비들은 식량 확보에 모든 전력을 쏟는

기현상의 유격전이 벌어졌다


공비들에게 식량은 생명이었고 이의 확보가

바로 전쟁이자 전투였다


식량 약탈은 보급 투쟁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계급투쟁이 공산주의자의 목표인데 남한의

공비들은 식량약탈 투쟁을 주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농민해방이니 부르조아지 타도니 남조선 혁명이니

하는 때깔 좋은 소리는 그들에게서 잊혀진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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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은 자주 저녁 식사시간에 동네를 급습했다.

식구들의 밥상을 통째로 빼앗아서 미친 듯이 쓸어 넘고도

부족해서 밥을 더 담은 밥그릇을 가지고 다니며 게걸스럽게

밥을 먹을 정도로 굶주렸었다니 공비들의 뱃속

사정을 짐작할 만하다.



항공 촬영한 호남 농촌지역
공비 아지트가 있는 산에는 식량이 없었다.
식량 공급처인 농촌지역의 확보 실패가 공비를
죽음의 보급투쟁으로 내몰았다.

공비들이 식량을 구하러 이 농촌으로 오는 길에
경찰이 설치한 '매복'이라는 죽음의
덫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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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쌀 강탈해간다는데 좋아할 농민들이 없었다.

인심은 당장 돌아서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에 호의를 가지던 주민들도 한번 이라도

약탈을 당하면 당장 경찰 편으로 돌아섰다.


물고기인 공비들의 물이 되어줄 농민들은

그들을 적대시하고 경찰 토벌에 협조했다.


그러나 공비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보급투쟁은

더욱 먼 거리까지 확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결국 자기들에게 등을 돌리는 주민들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고 오고 가는 장거리에 여러 매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짓이었다.


과거 빨치산 생활을 경험한 분에 의하면

공비들이 마치 침투 간첩이 하듯 식량 약탈의

루트를 개척해 놓으면 경찰들이 단 시간 내에 귀신 같이

파악해서 매복을 했다고 회고했다.

즉 자신들의 아지트는 수십겹의 경찰 매복의 그물속에
있었기 때문에 보급투쟁은 목숨을 걸어야 했었다.
앉아 있어도 죽음이 있었고 서서 움직여도 죽음이 있었던
것이 공비들의 운명이었다.



희생당한 전투 경찰 박원기의 장례식.
그칠 수없는 어머니의 통곡이 너무 슬프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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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의 공비들은 모택동의 정강산이나 연안의 화려한

꿈 대신 거지와 도둑이 결합된 화적떼로 퇴화하여 볼품없는
소멸의
길을 갔다.


식량 부족이 공비들을 말려 죽인 것이다.

공비들을 말려 죽였다고 할만한 매복전술은

한국의 전투경찰들이 몸으로 부딪히고 희생하면서 터득한 것이다.


한국 전투 경찰의 매복전술은 육군 대부분의

전술 교리가 미국 FM에서 가져온 것에 비하면 토종

한국형 전술이다.


나의 좁은 지식에 나중에 채 명신 장군이 월남에서 사용했던

중대기지 전술과 중공군 인해전술에 수류탄 대량 투척으로 맞섰던

고지 방어 전술 외에 이에 비견할 특별하게 폭 넓게 적용된

한국형 유명 토종 전술은 생각나지가 않는다.


군사 전문가들은 군의 환경을 맞추어서 자생적으로 창안되고

개발된 전술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중국 모택동의 유격 전술이나 이스라엘 군대가 개발하고

활용해온 이스라엘 식 전격전 전략은 이 말을 증명해준다.


나는 20년 전 남아공의 특수 부대가 사막거주 부쉬만 종족들의

비법인 동물이나 사람 발자국 추격 술을 세세하게 캐묻고
연구하고 체계화해서 특수부대 교육용 매뉴얼로 만든 것을
보고 감탄한바 있었다.

특수부대는 이 교범으로 부대원를 훈련시켜 반도들의
추적 작전에
활용했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6·25전쟁 이나 월남전중 선배들이

몸으로 희생하며 터득하고 개발한 전훈을 교리로서

정리하는 측면이 매우 부족했다.


6·25전쟁 후 전투경찰의 매복 전술의 세련도는 분명 육군의

그것보다 한 수 앞선 것이었다.


한국 전투경찰의 매복전술이 정리되고 교범으로 정리되어
후배들에게 전달이 되었더라면
월남전등에서나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고 한국의
전투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을 것이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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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이아빠 2010.07.06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서장 노년 모습입니다.. http://www.wonbuddhism.or.kr/wonnews/interview/i1108.html

  2. 냥햏 2010.07.07 0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ㄱ-; 안그래도 소통이 잘 안된다는 평을 듣는것 같은데 .. 뎃글마저도 '승인'이 필요한건가요? 가끔 와서 좋은글 읽고 갑니다만 .. 운영 방식이 너무 구시대적인 것 같아 안타깝네요.

  3. Gray 2010.07.11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읽고 갑니다.

  4. 요츠 2011.05.23 1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이 뜨질 않네요..
    사진을 보고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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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 고사시킨 전투 경찰의 매복 전술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05 09:50


6·25전쟁 후, 한국 전투 경찰의 활약은 의외로 알려져 있지않다.


내가 기억하는 전투경찰의 활약상을 소개한 책자는

불과 서 너 권 밖에 되지가 않다.

그러나 6·25전쟁 전후  경찰 전사자는 일만명이나 되었었다.


월남전 8년간 전몰 파월 장병이 5천명임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 희생의 크기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전투경찰은 육군에 비하면 훈련도 장비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한창 때의 공비들은 경찰 전투력을 우습게보기도 했었다.


한때 지리산 일대에 일 만 명이나 세를 불려 기세를 올린

공비들에게 연타를 안겨 그 세를 꺾은 것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던 육군이었지만 6·25전쟁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 간을 물고 늘어져 소멸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 주인공은 이 전투 경찰들이었다.


한국 경찰은 육군처럼 강력한 병력과 화력이 없었기에

산야를 쓸어내리는 듯한 대규모 토벌을 자주 실시할 수가 없었다.



라이프 지의 한국 경찰 기사에서 빌려온 사진을 다시
싣는다. 부상 공비를 운반하는 전투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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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형편이었던지라 빈약한 병력으로 공비들에게 타격을 주는

전술을 개발해내고 또 그 전술은 효과를 발휘하여

공비들을 실핏줄을 토막토막 잘라 말려죽이듯 서서히

섬멸해갔다.

전투 경찰의 전술은 경영학에서 말하는 비용대 효과의

절대 기능을 발휘했다고 하겠다.


한국 경찰이 일선에서 몸을 부딪혀가며 창안하고 개발해낸

그 공비 말려죽이기 전술은 ‘매복 전술’이었다.


해방 후부터 경찰에 몸담으며 공산당 무리들과 싸웠던

김두운 선생의 공비 토벌 수기‘지리산 호랑이' 중의
일부를 소개한다.


김두운 씨는 일본 중앙대학교 재학 중 일본군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육군 소위로 근무하다가 귀국하자 경찰에 투신했다.



김 두운 서장-1951년 무주 경찰서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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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수기에서 식량 약탈을 자행하고 귀소(歸巢)하는

부안군의 공비 일당을 매복 섬멸했던 작전을 자세히
기술(記述)하고 있다.

여기서 한국 경찰의 공비 소탕 매복 전술을 엿 볼 수가 있다.


그 분이 전북 부안 경찰서 경무 계장으로 근무하던 1949년

늦은 가을철이었다.


김두운 선생은 타 경찰서에서 이미 공비 토벌을 경험하며

자신 나름의 공비 토벌 전술을 터득한 상태였다.


경찰 입문 이래 호남 일대에 공비들이 준동하자
아무 군사 훈련도
실전 경험도 없었던 간부들은 단지
일본군 부대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공비 토벌을 
떠 맡겼다.

그는 전북 도경의 기동대장으로 임명되어 토벌에 나섰다.


군 경험이래야 일본군 고사포 부대에서 약간 근무했을 뿐이었던

김두운 씨는 부하들을 데리고 우왕좌왕 산을 쏘다니며

허탕을 치기도 하고 기습을 당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작심하고
연구를 거듭하여
매복 섬멸전의 비법[?]을 개발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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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 토벌의 초창기에 여러 일선 경찰서에 매복

전술만이 토벌의 최고 유효 수단이라는 의견은 떠돌았었다.


그러나 표준 교안이 없어서 일선 전투 경찰 지휘관들은

김 두운 씨처럼 연구와 실전 경험으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비방[?]을 개발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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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운씨는 자신이 개발할 매복 전술에서 전투요령을
복격술이라 이름짓고 아래와 같이 부하들을 훈련시켰다.

첫째,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자세를 낯춘다음
오른 손바닥을 귀에 대고 다가오는 소리를 감지한다.

둘째, 기동선을 따라오는 적의 순서와 우리의 매복 순서에
맞추어 한 명이 적 한 명만을 겨냥한다.

세째, 쏴의 신호와 동시 단 한발만 발사하고 함성없이
그대로 각자 조준했던 적에게로 돌진해 생포,또는
확인 사살을 한다.

넷째, 도망치는 적은 너무 멀리 추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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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관심 있게 볼 대목은 그가 공비들이 통과할 목을

미리 집어내고 매복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마치 돼지 명포수가 목을 잡는 요령과 비슷해서

흥미롭다,


아래는 김 두운씨의 글이다.

전북 도경 기동대장에서 부안군 경무계장으로
전출되었을 때 겪은 전투를 회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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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살 된 공비 시체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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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늦은 가을 저녁.

일과를 끝내고 신도종 서장이하 간부들이  바둑을 두고 있던

전북 부안 경찰서에 부안군 산내면 지서로부터 중계리에 공비가
출현했다는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6·25전쟁 이전 부안 관내에는 자생한 소규모 공비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남로당 부안 군당으로서 총인원은 9명 이었다.

나중에 지리산 일대에서 기세를 올리던 공비들의 규모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민폐가 극심했다.


남로당이 불법화되고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입산(入山)한

공비들로서 이들은 다른 남로당 군당들에 비하면 골수분자들로

상당히 투쟁적이었다.

[전쟁 전 입산자들은 구빨치로 분류된다.]


여순 사건 뒤에 체포된 14연대 반란병들.
이들은 대거 지리산으로 도주해서 신빨치의
주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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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변산의 기상봉 아래 있는 천연암 근처에 주 아지트를
두고
부근 마을, 특히 산내면 중계리를 ‘민주 부락’[ 이 당시

민주란 말은 공산주의자들이 전문으로 쓰던 용어였다.- 나중에
남한
군경들에게 통비 부락[通匪 部落]으로 불리게 된다.]으로
장악해 놓고
열흘에 한번 정도 약탈을 자행했다.


거리 관계 때문인지 이들은 특히 산내면 일대에 심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부안 군당의 공비들은 외팔이 부대로 통하고 있었다.

군당의 책임자는 장순언의 장남인 장모[張某]였다.

그는 고향인 부안군 산내면 진백리에서 진백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진백 수산 강습소를 나와 남로당 부안 군당에

입당, 산에 들어갔다.


말단 대원이던 시절 그는 경찰 토벌대와 총격전을

벌이다 머리에 부상을 입고 왼쪽 팔은 절단이 되었다.

그해 5월 경 그가 군당 책임자가 되면서 부안 군당을

외팔이 부대라 칭하게 되었다.


국민 학교 시절 그이 생활 기록부에는‘두뇌가 명석하고 비교적

활발함' 이라 적혀 있었다.


공비 토벌은 각 경찰서 경비계장의 업무였다.

공비 출현의 보고가 접수되었는데도 토벌작전에 경험이 없는

경비계장은 우왕좌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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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은 출현 공비의 토벌 작전과 지휘를 경험자인 경무계장

김두운 경감에게 요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단조로운 경무계장의 업무에 지루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김두운 경감은 이 지시를 반갑게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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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경찰이 주요 도로에 설치한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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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저 경비계장이 가져온 5만분지 1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공비들의 기동선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으므로 무턱대고

출동할 수는 없었다.


일단 주 아지트가 있다는 천연함에서부터 지도상에 붉은 선을
긋고
보니까 다음의 예상 출몰 지역은 상여봉 밑 마을이나
상서면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는 것이 손금 보듯 빤히
들여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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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그리스 펜으로 공비 근거지와 출현 지점을 직선을 그어

연결하고 이 직선 주변을 분석해서 공비가 필히 통과 할 목을
찾아내는 것이 김 두운 씨의 목잡기 비법의 첫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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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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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비계장에게 정예 10명만 선발하라고 부탁했다.


쫓는 쪽의 입장에선 적의 2,3배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지만 이 당시의 공비, 소위 구빨치 시대에는
어느 지역이나
무장을 절반도 못해 있던 형편이었다.


공비들은 두 부락을 그냥 지나쳤으므로 다음 부락 어디에선가는

약탈을 자행할 것이었다.


늦더라도 다음 출몰 시까지 기다려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디에 나타나든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그때 출발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공비들은 맨몸으로 하산할 때는 시간당 약 6킬로미터를
보행하고
약탈을 마친 뒤 짐을 지고 돌아 갈 때는
3 킬로미터도 보행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지트로 돌아가는 예상 기동선만 정확히 판단한다면

시간은 넉넉했다.

적은 현재 아지트에서 약 8 킬로미터 이상 벗어나 있을 터였다.


시간은 저녁 7 시가 이미 지나 있었다.

예상했던 상여봉 아랫마을을 지나쳤거나 현재 약탈이
진행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신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개암사 아랫 부락이리라.

바드재를 넘어 보안면 쪽으로 갈 확률은 없었다.

지도상 그쪽은 산이 얕고 민가가 많았다.


나는 저들의 목적지가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고 단정하고

대원들에게 식사를 하도록 했다.

시간은 충분해 보였다.

우리도 서장실에서 식사를 마쳤다.


그 때였다.

다시 비상 전화통이 비명을 질렀다.


경비계장이 화닥닥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상서면 지서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10리 떨어진 개암사 쪽에서 계속 총성이

들린다는 보고였다.

출현 지역은 적중했지만 저들의 걸음은 생각보다 빨랐다.


“비상! 비상!”

경비계장은 고함을 지르며 부리나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사찰계장도 따라가 보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즉시 출동했다.


적이 아지트로 돌아갈 기동선은 너무도 빤했다.

저들이 지나쳐 왔던 길을 되밟아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므로

새재를 지나 뱀사골을 거쳐 천연함 아지트에 이르는

기동선을 따라 갈 것이었다.


밤 8시 읍내를 벗어나자 한밤중을 방불케 했다.

도로에서 멀찍이 물러나 앉은 마을에서 듬성듬성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정겨웠다.


차는 밤길을 가르며 출렁출렁 마구 달렸다.

나는 스리쿼터 적재함에 탔다.

조수석에는 행선지를 일러준 사찰주임만 탔을 뿐

경비계장도 적재함에 대원들과 함께 타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차는 길가의 작은 마을 앞을 지나쳐 멈추었다.

이 마을 서쪽 1킬로 지점에 공비 통과의 예상 목인

새재가 있었다.


대원이 가리키는 새재를 보며 나는 후레쉬의 불빛으로

지도를 비춰보았다.


예상이 적중한다면 틀림없는 위치였다

나는 전원을 하차시키고 차를 멀리 대피시켰다.

멀리서 대기하고 있다가 총소리가 나면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영 불쾌했다.

위치로 보아 마을 앞쪽은 불리할 상 싶었다.

적들도 마을을 가로지르지는 않을 터인데

우회 길을 우리의 매복 지점 훨씬 전에서

돌아 버린다면 허사였다.


나는 대원을 이끌고 비탈 밭을 멀리 돌아

마을 끝으로 갔다.


누런 반달이 산위에서 떠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른 고춧대가 서있는 비탈 밭머리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이 가르마처럼 나있었다.


그 길은 밭둑길로 이어져 희미하게 마을로 뻗어있었다.


나는 그 곳 밭머리를 잠복지접으로 결정하고 10여 명의 대원들을

일일이 위치를 지적해서 순서대로 배치했다.

마른 고춧대가 무성하게 서있어서 완벽한 은폐가

가능한 좋은 잠복지점이었다.


거기다 둑길 아래의 위치는 밭뙈기들은 아래로 비탈이

져 있어서 밭고랑에 엎드려 바라보니 둑길은 그대로 달빛아래

다 노출이 돼있었다.

또한 귀를 땅에 대고 기울여 접근해오는 적의 부대를

청음[廳音]으로 감시할 필요도 없었다.


달빛 아래 멀리 마을까지도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 보였다.

나는 절대 정숙을 명하고 종대(縱隊) 잠복 병력의 중앙인
5번과 6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엎드렸다.


그 자세로 몇 십 분이 흘러갔다.

※ 2편으로 계속 클릭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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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이아빠 2010.07.06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 서장 노년 모습입니다.

  2. 홍이아빠 2010.07.06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 서장약력입니다.

    약 력

    1923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한 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19사단 입대, 일본 육군소위입명, 귀국 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전북특경대장등, 정읍·무주·남원·충북 영동·이리·부산 동래 경찰서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정읍군수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3. trading account 2012.04.16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19사단 입대, 일본 육군소위입명, 귀국 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전북특경대장등, 정읍·무주·남원·충북 영동·이리·부산 동래 경찰서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정읍군수를 마지막으로 공

  4. allstate auto insurance corp 2012.05.26 1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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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히 좋은 글이지만 일제 때부터 항일투쟁으로 빛났던 좌익세력을 죽인 건 크나큰 오류였습니다
    특히 6.25를 전후해 들불처럼 일어났던 반일,반미,반이승만,반독재,민주투쟁은 우리 역사에 두고 두고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남조선노동당 부안군당의 혁명 전사들은 죽인 김두운 서장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국제정세는 미국의 무한독주가 무너지고 러시아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또 아프간,이라크의 저항이 빛을 봐 미군들이 하루에도 수 십 명씩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미국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민족해방 인민해방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참된 민주해방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려면 미국의 저항이 거셀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미국을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돈과 권력을 쥔 세력들의 마지막 발악이 거셀 텐데 그럴 수록 우리는 더욱 단결해 이 자들은 저 미국으로 쫒아내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단결합시다 투쟁합시다 항일세력들을 죽이고 가두고 고문하던 반민주,친일친미 세력들을 반드시 처단합시다 그리고 역사의 장대한 길에 이자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후세들에게 진실된 역사들 가르칩시다
    투쟁합시다 투쟁 얼어죽고 맞아죽고 굶어죽을 때까지 싸웁시다 투쟁

    • ㅉㅉ 2014.03.25 0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 미쳤네. 민주주의도 좋지만, 이런 놈 헛소리 해대는 거 보면 진짜 어느 정도 민주주의도 제한해야 한다. 꽁꽁 잡아 북한으로 보내던지. 투쟁? 혁명전사? 미친놈.

공비들의 열차 습격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6.11 08:05

 

올림픽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그때까지 금기시하던

사상 분야의 출판물들이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금기시했던 분야의 틀을깨고 국민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테마중의 하나가 남한 지리산 지역에서 항거하다가
소멸당했던 북한 무장세력,
자신들은 빨치산이라고 부르고
당국에서는 공비라고
부르던 공산무장 조직원들의 이야기였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지만 이들은 근세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비들의 사진은 정말 찾기 힘들다.
이 라이프지 사진을 다시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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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과거 빨치산이었다가 투항해서 석방되거나 형을

살고 나와 남한 사회에 발을 붙인 분들이 쓴 책이

한 두 권이 아니다.


나 윤주 씨의 ‘누가 반역자냐? ’육철식 씨의 “빨치산 ‘

등이 내가 이런 분야에서 최초로 접했던 책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지리산 언저리에서 소멸되어버린 빨치산들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 것은 이태 씨가 썼던 ‘남부군’이었다.


이 출판물의 큰 인기는 남부군이라는 영화가 나왔던 사실이
증명해준다.


남부군의 인기는 때마침 사회에 일기 시작한 진보의
사상적 호응을
받아 그간 금단의 울타리 넘어에 있던
빨치산들의 이미지에
큰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특히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 빨치산의 이미지가 굶주리고
병든체 무자비한 군경에 쫓겨 죽어간 역사적 희생자라는
불쌍한 존재로 형성되는 감을 감지 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사실과 매우 차이가 있다.


이러니 학생들을 데리고 빨치산의 장악하던 본거지를
무슨 성지방문하듯 답사여행을
다니는 선생들까지 나올만했다.


그러나 해방후부터 십여년간 이들 빨치산들은 북한과 함께
대한민국의
존립을 행동으로 위협하던 존재였다.


즉 이들은 군사적으로 엄연한 대한민군의 적이었으며 대한민국은

이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소탕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들 위협세력의 제거에 말 할 수 없이 많은 무고한 피아의

인명이 살상되고 막심한 재산과 삶의 희생이 있었지만

이들을 결코 천진하고 감상적으로 평가해야할 존재는
아니었었다.



구속된 여자 공비들-이들중에 이미 살인죄로 사형 언도를
받은 여자 공비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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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공비의 준동과 북한이 남파한 북한 유격대의 토벌을 위해서

1948년부터 195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은 과대한 국방 예산의

지출로 국가의 재정이 휘청거리기까지 하였다.


이들의 군사력은 상상외로 강해서 1951년 국군 2개 사단을

전방에서 이동시켜 대토벌을 할 무렵에는 근거지인 지리산,
백운산
일대에 덩지를 틀고 있었던 이들 세력이
일 만 명이나 되었었다.


사실 한국은 북쪽과 남쪽 두개의 전장에서 공산군과
전쟁을 했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월남의 베트공처럼 외부의 꾸준한 지원을

받았거나 중국처럼 유격전의 충분한 지역적 공간이 있었다면

경제적이나 정치적으로 공산주의에 취약했던 당시 대한민국의

말로는 월남처럼 공산화되었을 지도 모른다.


남한 활동 공산세력 ,즉 빨치산이나 공비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기 위해서 이들의 여러 게릴라 활동에서

가장 독특했던 열차 습격사건들을 소개한다.


서부활극에서 볼 수 있었던 열차 강도 사건이 남한에서도

한번도 아니고 다섯 번이나 발생했었다.


모두 공비들이 준동했던 서남부를 관통하는 호남선 전라선과

경전선에서 발생했었다.


1.1950년 11월 24일 이양[화순군 이양면] 철로 폭파 작전

화순군 유격대가 주축이 되어 펼친 작전이었다.

군의 병력 수송 수단을 파괴하여 징집되어가는
청년들을 구출[?}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제 2국민 병들인 듯한 청년들을 실은 열차가 24일 오후 4시에

통과하리라는 정보에 따라 화학산 깃대 봉에서 동쪽으로

내리 뻗은 당그래 능선 자락 철로에다 폭약을 장치해놓고

매복 대기했다.


열차가 절벽 밑을 통과 할 즈음 유선 격발 장치로 폭발시켰다.

절벽위에서는 일제 사격이 퍼부어졌다.


열차는 비스듬히 왼쪽으로 기울어 멈추고 끌려가던 청년들

수 백 명이 논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호송하던 군경들도 그 속에 섞이어 도주했다.


10여 명의 호송 군 경들은 현장에서 포로가 되었고 들판으로

도망쳤던 군경들은 냇물 건너 품평리 앞산에 군복으로

변장 매복하고 있던 화순 유격대에게 잡혔다.


[제 2 국민병 시스템은 물의를 크게 일으키고 폐지되었다.]


2.1951년 10월21일 쌍봉 열차 습격

공비 15연대가 1951년 7월 창설해서 육성했던
항미 소년 돌격대라는
십대들의 전투 부대가
열차 습격에 출동하였다


이들은 보성 -이양간 철도에 삼중(三重)으로 매복했다.

1지점, 2지점, 3지점에서 연달아 통과하는 한 개의 열차를

연타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들은 폭약이 없이 작전을 개시했다.

공비들은 쌍봉이라는 곳에서 매복했다.


새벽이 다 된 오전 4시에 1 지점에서 나타난 기관차를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기습했다.

그러나 열차는 그대로 통과해서 도주했다.


그러나 제 2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 사격에 열차는 심하게 요동하며 속도가 느려졌다.


세 번째 매복조의 공격에 열차는 탈선하여 철도 옆

절벽을 길게 긁으며 정지했다.

탈선한 열차는 모두 9량이었다.


10대 공비들은 탈선한 열차에 뛰어올라 약탈과 살상을 하고

도주했다.



가면 상태에서 출동을 대기하고 있는 전투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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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51년 11월 중순 장성 갈재 열차 습격

노령지구 공비들은 아침 일찍 월동한 보급 투쟁을 위해서

강제 동원한 농민들을 대기 시켜놓고 장성 갈재 
터널 남쪽에서
서울 발 목포행 열차를 공격했다.


공비들은 철도에 커다란 바위를 올려놓아 기차가 이를

들이 받고 정지한 뒤에 수류탄과 소화기로 공격했다.

공비들은 열차에 뛰어올라 군경들을 무차별 사살하고

승객들을 약탈했다.


공비들은 강제 동원한 노무 부대들에게 약탈품을 지워서

백아산 아지트로 운반했다.



공비들의 도로 차단을 막기 위해서 고개 정상에
구측힌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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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51년 11월 14일 풍무재 열차 습격

공비들은 경전선 순천- 광주간의 구간에서 이날 오전 11경에

운행하고 있던 열차 습격을 했다.


열차가 이양과 춘양 경계인 풍무재 협곡의 속도가 느려지는

곡선 구간에서 철도를 폭파하고 일제 사격을 가했다.


기관차 2량에다가 11개 객화차를 연결했던 이 열차는

군수물자와 전선으로 가는 노무자들을 태우고 있었다.


기관차와 화차가 4량이 탈선하고 나머지들도 탈선된 열차를

들이 받고 정지했다.

이 습격으로 기관사와 미군 종군 기자 한 명이 죽었다.


5.1952년 6월 24일 사거리- 신흥구간 열차 습격

오후 2시경 노령 병단 소속 공비들은 전날 밤부터

매복하고 있던 호남선 사거리 -신흥 간에서 대전을 떠나

목포로 가던 열차를 공격했다.


매설한 폭약을 터뜨려 열차를 탈선시키고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 습격은 공비들의 열차 습격사건으로 가장 대규모적인 것으로

이들의 만행으로 열차 10 량이 전소되고 승차해있던 군경 25명과

철도 운행 요원 4명,그리고 미군 두 명이 사살 당했다.



이 블로그에서 세편으로 나누어 소개했던 드웨이 맥클린씨의
참전 사진첩에서 - 부산으로 가는 병원 열차에 무장 호송병이
탄 열차가 연결되어 있고 기관차 앞에 폭탄 매설에
대비한 샌드 백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미군들이
위에서와 같이 공비 열차 습격에 피해를 입어서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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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은 열차만 기습한 것이 아니라 촌락을 오가는 버스도
여러 번
기습했었다.

여기에 버스 습격 사건의 한 사례를 소개한다.


1953년 봄.

전남 부대가 광양- 진상간 신작로에서 버스를

기습했다.

평지로 내려와 대숲에서 잠복하고 있던 소년 공비

6명은 오후 세시쯤 통과하는 버스를 정차시켰다.


군복 차림의 변장이었기 때문에 검문하는 척하면서

한사람씩 하차시켰다.

군인 1명과 경찰 학교 학생 7명이 타고 있었다.

공비들은 카빈 1정과 군복등을 노획하고 이들을 훈방했다.


위의 경우는 훈방했다고 하지만 대개 공비들은
 

버스에 타고 있던 군경은 그 자리서 잔인하게 사살했다.



귀순 공비들로 조직된 특수부대 - 보아라 부대나 이기자
부대등 서너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공비들의
핵심을 기습해서 섬멸시키는 작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


열차를 탈선시키고 승객들을 약탈하고 군경을 무자비하게
죽여 버린
공비들의 이미지는 거지같이 헐벗고
아귀같이 굶주려서 식량 약탈이나
다니다가 군경에게
타살되다시피 했을 것이라는 요즘 일부 젊은이들이

믿는 공비들의 불쌍한 이미지와는 너무 차이가 있다.


공비들은 기세를 올리다가 1952년 초 전방의 2개 사단을

후방으로 이동시켜 감행했던 군이 토벌 작전에서
대 타격을
  입었다.


그 뒤에 그들의 준동이 많이 잠잠해졌지만 휴전이 되고나서도

지리산 일대의 평화는 요원했었다.


휴전이 되던 해 12월에 군 병력을 동원한 대 토벌이 있고나서

공비들은 급속히 소멸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정 순덕이라는 여자 공비로 기억되는 5-6명의
잔당 공비[망실공비]
들은 생존하며 경찰대를 괴롭히다가
마지막으로 근절된 것은
60년대 초기였다.

3년간의 전쟁을 겪었던 대한민국은 뒷마당에서는
비정규전이라는 전쟁을 15년 가까이 치루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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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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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nghoseo 2010.06.21 16: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비들의 도로 차단을 막기 위해서 고개 정상에 구축한 요새라는 설명을 해주신 사진을 보니 왠지 하늘에서 본 월남전 당시 한국군 중대기지 모습과 많이 닮아있는 듯 보입니다. 한국전 당시 유격부대를 이끌었고 초대 파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내신 채명신 장군님의 아이디어로 채택된 중대기지와 무관해보이진 않은 것 같네요. 호기심이 생깁니다.

  2. 리산 2011.03.23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51년 12월-1952년 2월의 백야전사령부(Task Force Baik)의 지리산 및 주변 토벌에는
    수도사단과 8사단이 동원되었습니다.

  3. items insurance coverage personal house 2012.05.18 16: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항상 거의 몇 시간에 관한 좋은 정보를 친절하게 검색 내용 사실로 인해이 페이지의이 종류를 찾을 백업 이제 내가 그러므로 발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주제에 대한 유용한 정보 이외에도 신선한을 많이 언급했습니다이 사람의 게시물을 검사 이외에 사실에 대한 상당히라고 하셨 거든. 이 특정을 논의 감사합니다!

  4. lookup our own means have a look at 2012.05.18 16: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것은 훌륭한 직장 밖에서 웹 페이지를 경험해야했습니다. 정말 연습을한다면 주사 그 제대로 경험을 만드는 최고 노치 데이터의 방식에있어 언제든지 여러분의 두뇌를 사용하여 제한합니다. 내 개인 컴퓨터에서 정상적으로 오른쪽이 웹 사이트를 찾다가 시작됩니다. 토론 주셔서 감사합니다

  5. go to monk media 2012.05.18 16: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웅장한 쓰기를 찾고 있었어! 내 파트너와 나는 절대적으로 그것을 검토 좋아, 당신은 잘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저희는 귀하의 블로그를 검색하는 확실하고 분명 곧 오래 계속 돌아오기만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의 환상적인 출판 계속 다른 사람을 촉진해야 좋은 밤이을 사용!

  6. guarantee outl 2012.06.07 2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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