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분계선'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0.10.27 93. 전혀 새로운 난제 (227)
  2. 2010.09.30 83. 뜨거운 감자, 개성 (5)
  3. 2010.09.27 82. 시작된 줄다리기 (6)

93. 전혀 새로운 난제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0.27 08:30


  군사분계선의 설정이 타결된 후, 다음 의제인 제4항‘포로 송환’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 이유는‘제네바 협정’이라는 국제적인 룰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네바 협정 제118조에 따르면“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한 후 지체 없이 해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라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었고 여기에만 충실히 따르면 포로와 관련된 제반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따라서 미국정부의 최초 원칙은 “제네바 정신에 입각하여 공산군측의 포로들을 즉각 송환해주고, 유엔군 포로를 조기에 송환 받는다”로 정해졌습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많은 포로가 발생하였고 이것은 휴전협상의 난제가 됩니다.]


  그런데 북한군 포로를 신문한 결과 많은 이들이 “원래 자신은 한국군이었는데, 포로가 된 후 강제로 북한군에 편입되었으므로 북한으로 갈 이유가 없다”는 진술이 계속하여 나오면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더불어 전쟁 초기의 서울 점령 3개월 동안 강제 징집된 많은 장정들도 포로가 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전쟁 전에 민간인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많은 중공군 포로들이 자신들은 원래 국민당(國民黨)군이었는데 국공 내전 시 포로가 되면서 강제로 6·25전쟁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타이완(臺灣)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포로들을 강제로 보낸다는 것이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도저히 용납 될 수 없는 사항이었으므로 제네바 협정에 따른 송환만 생각하던 미국정부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엔군의 포로들의 안전한 귀환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심을 거듭한 유엔군측은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는 공산군 포로가 13만 정도인 반면, 공산군측에 포로가 된 유엔군이 약10만 정도일 것으로 추산되었으므로 1:1 동수교환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유엔군 포로 전원을 송환 받는 대신 귀환을 원치 않는 공산군측의 포로는 남겨둘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유엔군도 공산군측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포로에 관한‘소위원회’협상 개시 후 일주일이 지난 1951년 12월 18일, 포로 명부를 교환한 유엔군측은 경악하였습니다. 당시까지 유엔군측이 파악하고 있던 행방불명된 아군인원은 국군 88,000여명과 미군 11,500여명 등 총 10만 여명에 가까웠으나, 공산군측이 넘겨준 포로명부에는 11,559명밖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공산군측은 유엔군측이 제출한 132,474명의 명단이 자신들이 추산하던 188,000여명에 비해 작다고 하면서 불만을 제시하는 적반하장을 연출하였습니다.


  포로의 숫자에 대하여 쌍방 모두 만족하지 못하였지만 당연히 우리측의 불만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대한 북한측은 국군 포로 중에서 북한군에 자원입대하겠다는 이들이 많아 이들을 모두 북한군에 편입했기 때문에 포로가 적은 것이라는 옹색한 변명만 늘어놓았습니다. 공산측은“포로는 거주지 기준이 아닌 체포당시의 부대를 기준으로 하여야한다”고 주장을 하였는데, 이것은 남한 지역주민 46만 여명을 강제로 동원하여 병력과 노무자로 활용한 사실을 스스로 시인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일단 자유송환을 추진하지만 협상이 결렬되면 강제송환을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갖고 있던 미국은 이처럼 포로의 숫자가 차이가 많이 나자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협상에 임하는 유엔군측 대표들은 제네바 협정과 인도주의라는 두 개 요소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하였습니다. 미국 정부도 여기에 대해 적당한 훈령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줄다리기가 계속된 휴전협상 광경 ( 1951년 11월 1일의 모습 ) ]


  3개월이 지난 1952년 2월이 되었을 때 서방측 언론에서 서서히 여론을 환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지는 유엔군의 파병목적을 고려하고, 또한 자유민의 인권 수호를 위하여 유엔의 명예를 걸고 포로들의 완전한 자유송환을 관철하여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워싱턴도 자유송환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인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공산군측의 비현실적인 주장에 무조건 동의하고 나설 수 없었던 것이었고, 어쩌면 그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공산군측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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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뜨거운 감자, 개성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9.30 08:32

  결렬 2개월만인 1951년 10월 25일, 판문점에 급조된 천막에서 휴전회담은 재개되어 두 번째 의제인 군사분계선 설정에 대해 다시 이야기가 오고갔습니다. 어차피 의제 제1항은 회담을 위한 의제선정이었기 때문에 군사분계선 설정이 실질적인 협상의 시작인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있었던 회의를 통해서 상대방의 주장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두 달간의 정회기간 동안 쌍방은 각각의 양보 안(案)을 내심 마련하여 두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양측 모두는 어차피 자신들의 주장대로만 군사분계선이 획정되기는 힘들 것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고 당연히 휴전 성사를 위해 차선책을 준비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휴전회담을 취재하는 양측 종군기자들의 모습]

 
  해-공군 전력의 절대적인 우세를 반영하여 현재의 접촉선보다 북쪽에 경계선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유엔군 측의 주장은 물론 공산군 측의 38선 주장은 각각 철회되었고,‘현 접촉선을 기준으로 하여 군사분계선을 설정한다’는 것으로 사전에 양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고도(古都) 개성이 쌍방 모두에게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지역으로 대두되었습니다. 고려왕조의 500년 도읍지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개성이 우리역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개성은 전쟁 이전부터 38선 남쪽에 속해 있었으며 당시 우리나라의 최고 산업이었던 인삼의 집산지라는 점도 이곳을 포기하기 힘들도록 만들었습니다. 더불어 이곳을 차지하면 군사적으로 서울의 방어종심(防禦縱深)을 보다 깊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개성이라는 도시 하나만을 놓고 보면, 그 지리적 위치가 남으로 임진강을 배후에 두고 북으로 송악산을 비롯한 거대 고지군이 도시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막상 도시를 차지를 하여도 방어는 상당히 불리한 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개성을 탈환할 수 있었지만 이후 대치상황을 고려하여 이곳까지의 진격을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반대로 해석한다면 공산군 측에게도 반드시 차지하고 싶은 지역인 개성은 전선이 서서히 고착화 되어가는 시점에서 계속 눌러앉아 차지하기 쉬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특히 휴전이 이루어졌을 때 북한주민들에게“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았다”고 선전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개성만큼은 점령 하에 두려고 하였습니다.


[1930년대 개성의 모습, 도시 뒤의 북쪽에 거대한 고지가 도시를 감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유엔군 측은 현재의 접촉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되 개성을 남쪽에 포함시키는 대신 중부의 금성과 동부의 고성지역을 약간 후퇴시키는 안을 북측에 제시하였습니다. 이에 북에서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오히려 서부의 옹진과 연안반도를 양보하는 대신에 개성은 물론 중동부의 요충지인 피의 능선 및 펀치볼 일대의 지역과 동해안의 돌출부를 공산군 측에 반환하라는 역 제의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개성은 휴전이 되었을 때 양측 모두가 반드시 차지하고 싶은 지역이었습니다.


  고심을 거듭한 유엔군의 지휘부는 개성을 양보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이유는 개성을 고집하다가 회담 자체가 결렬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불어 너무 명분만 강조하여 방어에 불리한 개성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 반대급부로 더 많은 것을 북한 측에 양보하여야 한다는 냉정한 계산도 깔려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은 당연히 한국정부와 국민들의 엄청난 반대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처럼 우여곡절을 거듭한 군사분계선의 설치안은 “현재의 접촉선을 변경함 없이 군사분계선으로 한다”라는 내용에 합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시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현재의 접촉선을 언제 시점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공산군 측은 협상 당시의 접촉선을, 반면 유엔군 측은 휴전을 조인하는 바로 그 시점의 접촉선을 주장하였습니다. 양측이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역시 개성이었습니다. 공산군 측은 유엔군이 편리한 시기에 군사력을 이용하여 개성을 점령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유엔군 측은 현재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할 경우 공산군이 지연전술을 사용하여 회담을 지연시키더라도 군사적 압력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도“군사력의 사용을 묶어 둔다면, 결코 공산군과 협상이 이루어 질 수 없다”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지도위에 표시하는 모습]


  하지만 하루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미국 정부는 공산군 측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채근하였고 그 결과 유엔군이 개성을 점령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주어 회담의 성사를 유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11월 23일 격론 끝에  군사분계선 문제는 일단 타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휴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포로문제 등 앞으로도 산적한 많은 문제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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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불승불패(不勝不敗)의 전략  (15) 201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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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시작된 줄다리기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9.27 08:16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첨예한 신경전을 보였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회담장에 마주앉았지만 처음부터 회담이 잘 되었을리 없었습니다. 7월 11일부터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으나 협상에 임하는 양측의 자세부터 커다란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엔군 측은 협상의제, 휴전감시방법, 전쟁포로 등 군사적인 문제만을 협상을 통해 해결하자라고 주장했지만, 공산군 측은 즉각적인 적대행위 중지, 외국군 철수 등을 우선적으로 토의하자며 정치적인 주장을 앞세워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다못해 공통의제로 떠오른 군사분계선마저 우리는 현 전선보다 북쪽을, 북한 측은 전쟁 전의 남북 분계선인 38선을 주장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회담장 출발 직전 리지웨이의 환송을 받는 휴전협상 대표단]


  처음부터 이렇게 난항을 겪은 것은 휴전회담을 철저하게 정치적인 대결의 장으로 만들고자하는 공산군 측의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대표단만 해도 유엔군 측은 정치에 관여해 본 일이 없는 순수한 야전 군인들로 구성하였지만, 반면 공산측은 군복을 입었지만 정치경험이 있는 자들로 선발했을 정도였고 더구나 회담을 실질적으로 막후에서 지휘하던 자는 스탈린이었습니다. 그는 형식상 마오쩌둥에게 회담의 전권을 위임한 것처럼 하였지만 회담장소를 최초에 유엔군 측이 제시한 공해상의 덴마크 병원선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공산군 통제 하에 있는 지역에서 회담을 벌이도록 전문으로 통해 지시하였을 만큼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이러한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제1차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유엔군은 1개월간의 전투중지 명령을 내렸을 정도로 몇 주일이면 회담이 완전히 끝나고 휴전에 이를 것으로 낙관적으로 예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치열한 설전 끝에 7월 26일에야 총 5개항으로 구성된 토의의제를 겨우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의제선정은 이제부터 말로써 싸울 범위를 선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이렇게 겨우 합의를 도출한 제1차 휴전회담은 이후 2년간 계속되는 지루한 마라톤의 출발점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처음에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인 것은 토의의제 중 제 2항에 규정한 군사분계선 설정이었습니다. 전쟁이전 남북 간 분계선이었던 38도선을 주장하는 공산군 측과 해-공군의 우세를 반영해 오히려 현 접촉선 보다 아군의 전략적인 공격 범위에 노출 된 북쪽에 분계선을 설정해야한다는 유엔군 측과 주장이 팽팽히 맞섰고 결국 8월 23일, 공산군 측이 일방적으로 회담불참을 선언함으로써 회담이 결렬되었습니다.


[첨예한 회담 이면에는 이런 모습도 간혹 있었습니다.

회담장 밖에서 단소를 나누는 유엔군 헬기 조종사와 북한여군]


  이에 유엔군은 군사적 압박을 가하여 공산군을 회담장으로 다시 불러낸다는 방침을 수립하고, 또한 차후 예상되는 군사분계선 설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려기 위한 제한적인 군사작전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양구 지역의 해안분지(이른바 펀치볼),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백석산 등지를 점령했고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이 월비산을, 중부지역에서는 국군 제2사단이 금성의 서남쪽 후방까지 진출하였으며, 국군 제6사단이 금성천과 교암산을 점령했습니다. 결국 아군의 행동에 상당한 위기감을 느낀 공산군 측은 결국 회담 재개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유엔군은 회담장소의 불리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당시 접촉선인 경기도 파주군 진서면 어룡리의 널문리 마을로 장소변경을 주장하였고 회담 재개가 다급해진 공산군 측이 개성을 계속 고집하다가는 회담성사가 어려워 질것으로 예측하여 여기에 전격 동의함으로써 이곳이 새로운 회담장소로 선정되었습니다. 그 만큼 1951년 초가을에 있었던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아군의 압박은 전사에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지만 공산군 측에게 상당한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던 군사작전이었습니다.


[널문리의 임시 회담장, 이후 이곳이 판문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엔군 측이 제시한 곳은 널문리 마을 초입에 있던 주막 앞은 사방이 탁 특인 평범한 콩밭이었는데 여기에 텐트를 치고 회담이 재개 되었습니다. 이곳은 단지 남북 간 군사 접촉선에서 평평하게 교통로가 확보되어 있는 중간지점으로 어느 일방도 사전에 매복하고 있다가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기는 힘들다는 지리적인 이유만으로 선정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널문리의‘널’자를 교전당사국중의 하나였던 중국어로 표기할 수 없어 이를 의역하여‘널문리 주막’의 한자어 표기인 ‘판문점(板門店)’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판문점은 남북분단의 상징으로 바뀌었고 세계적으로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유명한 지명이 되었고 아쉽게도 지금까지도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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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research essay 2013.02.07 05: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각합니다. 정말 누텔라 상품의 가격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하지만, 이건 정말 저렴한 것 같습니다.항목을 추가하려면 그것과 음료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