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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08 전의[全義]의 군목 학살 (5)
  2. 2010.11.08 98. 전쟁이 남긴 것 (154)
  3. 2010.10.06 화령장 전투 (10)

전의[全義]의 군목 학살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7.08 10:22

 6ㆍ25 전쟁중 북한은 자주 국군과 미군들을 학살했었다. 금강과 대전 중간의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서 발생한 미군 학살은 최초의 집단 학살 사건이었다.

<1950년 8월 17일 왜관 303고지에서 북한군에게 학살당한 1기병 사단 5연대 H중대 화기 소대원들의 손이 묶여있다. 지시한 북한군 군관 김광택과 학살을 자행한 전병덕은 포로가 되었다가 생존자의 지적으로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전의의 학살 사건이 세계 전사에 잔인한 학살 사건의 하나로 기억되는 것은 북한군이 낙오한 부상병을 위해서 기도하던 군목과 부상병을 무자비하게 쏴 죽인 야만성 때문이다.

 근대의 전투에서 종교인들을 저항이나 첩자등의 이유로 몰아 학살한 경우는 있었지만 기도라는 경건한 종교 예식을 올리는 성직자를 학살한 경우는 없었다. 전의의 목사 학살 사건은 북한 공산당의 원초적인 잔인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국전에 투입된 미군들은 7월 5일 오산 첫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대패하고 물러나 평택에서 싸웠지만 여기서도 패배하였다. 미군들은 조치원, 천안 등에서 연패를 당하면서 남쪽을 향해 후퇴를 계속하고 있었다. 북한군을 상대로 제대로 훈련되지도 못하고 편성도 되지 못한 미군 1개 사단만을 파병했으니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7월 12일 24사단장 윌리암 딘 소장은 사단의 세 개 연대, 19연대, 21연대, 그리고 34연대에게 금강을 건너 남쪽으로 철수하고 다리는 모두 폭파하라고 명령하였다. 금강선을 방어선으로 삼을 작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7월 16일 03:00에 북한군은 19연대 지역에 맹포화를 퍼붓고 금강을 건넜다. 연대는 치열한 접전을 벌여 강을 건너온 북한군을 모두 강 건너로 다시 격퇴했다.

<금강 전선에서 포사격을 하고 있는 미 포병>


 하지만 이 순간에 적의 소부대가 미군들의 전선을 우회 침투한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북한 침투부대는 미군의 후방을 기습하고 전방과 후방 대전 사이의 보급로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19연대를 고립시켰다.

 학살은 1950년 7월 17일 대전 북방 도남이라는 농촌 인근 야산에서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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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남은 현재의 공주시 반포면 도남리 같다. 근처에 금강 휴양림이 있다. 그런데 학살 사건 명칭은 전의 학살이라고 한다. 한국 지리에 어두웠던 미군은 종종 이런 명칭의 오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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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투한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 사단중의 하나인 3사단 소속으로서 사단장은 소련군 출신인 이영호였다. 그들의 도로 차단은 미군들로 하여금 당장 탄약 추진과 부상자 후송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후방으로 가는 도로가 봉쇄되자 생명이 경각에 달린 중상자들을 빨리 후송해야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16일 13시경 19연대장은 사단장 딘 소장에게 후방 도로가 차단되었음을 보고했다. 딘 소장은 도로 봉쇄를 분쇄하고 보급로를 뚫으라고 지시으나, 북한군은 6정이나 되는 기관총을 도로 좌우 언덕에 설치해놓고 반격하는 미군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의 대전 역 앞>


 미군은 도로를 개통시키기 위해서 여러 번 공격했지만 그 때마다 실패했다. 자기 힘으로 걸을 수없는 중상자들부터 시급히 후송해야 했다. 이들의 치료는 경각을 다투는 문제였다. 연대는 할 수없이 중상자들을 짚차에 승차시켜서 도로 봉쇄선을신속히 돌파하는 것을 시도해보기도 했으나 북한군의 기관총 사격에 번번이 좌절 되었다.

 14:00에는 후방에서 오는 보급 차량들이 북한군의 차단에 막혀서 오도가도 못하고 대전에서 북상하고 있는 기갑 부대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탱크 한 대가 도로 봉쇄를 뚫고 전방의 19연대에 도착해서 부상당한 지휘관 한 명을 태우고 철수했다.

 19:00. 석양이 지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고 본 19연대 연대장은 도로 봉쇄선 동쪽의 산악 지대로 우회하여 후방으로 중상자들을 후송하라고 지시했다.

 21:00. 약 100여 명의 19연대 인원들이 도남의 동쪽 산속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30명 정도의 환자들과 동행했다. 그중 20명은 중상을 입어 걸을 수가 없어서 들것에 싣고 운반했다. 이들이 어두운 산길을 올라 산 능선 부근에 도달했을 때 중대장은 들것 운반 병사들이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중상자들을 후송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 자리에 남겨 놓고 가도록 결정했다.

 연대 의무관 린턴 J 버트리와 군목 허만 G. 펠헬터 군목이 이들 중상자들 옆에 잔류하기로 하였다. 후속하는 미군 부대가 오면 이들을 계속 후송할 계획이었다. 군의관 버트리 대위는 팔에 적십자 완장을 차고 있었다.

<오른쪽 고지가 포로들이 죽은 303고지다.>


 군의관이라는 국제적인 표식이었다. 펠헬터 군목도 자신이 미군 소속 군목이라는 표식을 팔에 차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아무런 무기도 소지하지 않았었다. 상식으로 보아도 이들이 비무장이고 비전투원임을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그대로 밤이 새고 아침이 왔다. 버트리와 펠헬터 군목은 북한군 정찰대가 접근하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이들은 미군 후방에 침투한 북한군 3사단 정찰대였다. 살기 띈 이들에게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펠헬터 군목은 버트리 대위에게 도망치라고 말했다.

 버트리 대위는 그대로 뛰어서 그대로 도망쳤다. 북한군은 따발총으로 달리는 그에게 사격을 가했다. 버트리 대위는 발목에 관통상을 입는 중상을 입었지만 탈출에 성공했다.

 버트리 대위를 놓친 북한군은 펠헬터 군목에게 다가왔다. 펠헬터 군목은 운신을 못하고 들것에 누워있는 중상자들을 위해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최후의 성사를 올렸다. 전방에 있던 19연대 사령부와 연대 본부중대 요원들은 망원경으로 먼 후방 산위에서 있던 이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다.

 북한군들은 딱콩 총[아식 보총]과 따발총[PPSH 41]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기도를 올리고 있는 군목에게 다가온 북한군은 군목의 머리와 첫 발을 쏘고 등에 또 한 발을 쏘아서 그를 절명시켰다.

 그리고 이어 따발총으로 휘둘러 들것 위에서 운신도 못하는 20여명의 미군 중상자 전원을 사살했다. 피의 학살이 끝나자 북한군은 철수하였다.

<303고지에서 학살당한 미군 포로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는 군목>


 지켜보던 19연대 본부 요원들은 경악했지만 불리한 전황에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연대는 적의 압박에 철수하는 다급한 상황에사 학살당한 유해중 세 구만 가까스로 회수할 수가 있었다.

 끝까지 남아 중상자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펠헬터 군목은 군목으로서는 최고의 수훈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미국의 명예 훈장 다음 등급의 무공훈장이었다.

 이 학살 사건은 세계에 알려졌고 비난이 쏟아지지 당황한 북한의 전선 사령관 김책은 사단장 이영호에게 학살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말 뿐인 조처로서 김일성의 동서인 105전차 사단의 유경수 부대는 2개월 뒤인 낙동강 전선 왜관 부근 고지에서 포로로 잡은 미군 1개 소대를 모두 학살하여 세계를 다시 분노케 했었다. 그러나 이 학살 때 살아남은 미군들이 있어서 그 후 포로들 중에 학살자들을 가려내서 처벌했었다.

<303고지 탈환후 미군에게 붙잡힌 포로중에서 학살범을 지적하는 생존 포로>


 전쟁중 북한군은 학살을 자주 저질렀는데 방 호산이나 김웅, 이권무 등 모택동군 출신 사단장들은 학살을 별로 자행하지 않았지만 유경수나 최용진같은 김일성 부대 출신 사단장들과 이청송, 이영호 같은 소련군 출신 사단장들은 학살을 자주 해댔다.

 이 학살 사건은 후에 미 의회에서 조사에 착수했었기 때문에 군의관 버트리 대위는 의회에 나가 증언을 하여야했다.

 제네바 협약이니 뭐니하는 것이나 미의회의 조사 등 인류 보편의 도덕에 기본으로 하는 서방측의 규탄들을 김일성은 비웃음으로 대응했을 뿐이었으며, 그는 죽을 때까지 정적 숙청과 남파 간첩을 통한 학살의 손을 놓지 않았다. //끝//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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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전쟁이 남긴 것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1.08 07:57


  6·25전쟁은 이 땅에 무엇을 남겼을까요?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한반도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당연히 전쟁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전쟁 전에 남북을 가르던 희미한 38선은 오히려 감정의 골이 더욱 깊게 파인 굵은 휴전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수많은 사상자와 전쟁의 폐허만을 거머쥐고 남북한의 감정과 이념대결이 더욱 격화됨으로써 평화통일의 기대는 더욱 멀어져 버렸습니다. 결론적으로 3년 동안 파괴와 희생만 부르고 결국 원위치로 되돌아 온 것뿐이었는데 그로인한 대가가 너무 컸습니다. 그렇다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으며, 어느 쪽도 명확하게 승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남겨진 피해는 너무 컸습니다. ]


  그렇지만 지난 3년간 피를 바치면서 혈전을 벌여왔던 양측 모두는 전쟁이 멈추자 자신들이 이겼다고 맹렬히 주장했습니다. 그것을 전쟁을 계속하기는 곤란하였지만 그렇다고 자존심까지 함부로 내팽겨 칠 수 없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세계최강의 미국에게 역사상 첫 패배를 안겨주며 남한의 북침을 저지하여 북한이 승리한 전쟁’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대한민국의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을 물리치고, 남한정부의 전복을 막아 자유를 수호하였기 때문에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승리를 하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승리의 대가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작은 한반도에서 3년을 넘게 계속된 전쟁으로 남-북한 모두는 참혹한 전화(戰禍)를 경험하였습니다. 전선이 남으로는 낙동강까지, 북으로는 청천강 및 함경도 일대까지 오르락내리락 하였기 때문에 국토의 대부분에 포탄이 떨어졌다고 봐야했을 정도였고, 특히 주인이 수차례 바뀐 서울에서 38선 일대는 그야말로 초토화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참혹한 인적, 물적 손실이 발생하였으며 국토는 폐허로 변해 버렸습니다.

 

  전쟁기간 동안 전사상 당한 국군과 유엔군의 손실은 77만 6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화력의 열세를 인해전술로 메우는 전술을 사용하던 북한 및 중공군은 약 2백여만 명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더불어 후방의 민간 또한 이에 못지않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민간인의 경우 남한은 100만여 명, 북한 150만여 명 등 250만여 명의 인원피해가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전쟁 전 남북한을 합친 총인구인 2,500만여 명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더불어 320만 명의 피난민과 30만 명의 전쟁미망인, 10만 명의 전쟁고아 등은 그야말로 사회적 기반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수준이어서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닙니다.


[민간인의 피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더불어 소중한 개인의 재산은 물론 해방직후 미미하나마 존재하던 국가 기간산업시설과 공공시설마저도 송두리째 파괴되었는데, 이로 인한 재산적 손실만도 당시 가치로 32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였습니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외침에 의해 국가가 멸망당한 최악의 경우도 있었지만, 6·25전쟁은 피해를 단순히 수치로만 계량화한다면 한민족 5천년 역사상 가장 비참했고 참혹했던 재난으로 인정하는데 결코 이의가 없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남북 서로가 주장하는 전쟁의 승리 주장을 떠나 전쟁의 결과는 남북한에 커다란 소용돌이를 몰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남북한 모두가 전쟁을 전후하여 인구의 재배치가 급속히 이루어졌는데, 특히 북한은 전쟁 중 대규모의 북한인구가 자진 월남함으로써 인적자원 면에서도 상당한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구이동은 해방 및 분단 직후 비록 짧은 시기였지만 별개의 상이한 체제를 택하였던 남북간의 경쟁에서 어느 체제가 인간을 존중하였는지 명확히 알려주는 명확한 바로미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체제에 반대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자진 월남함에 따라 공산정권으로서는 전쟁 전 보다 쉽게 ‘김일성 독재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반사 이익도 누렸습니다.


  외적으로 북한은 제2차 대전 후 세계 최강이었던 미국과 전쟁을 치름으로써 제3세계로부터 주목을 받았지만 이로 인해 서방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고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화 정책은 더욱 가속화되어 1958년에 이르러 모든 생산수단이 완전히 국유화되어 체제가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외적으로 드러난 성과는 오늘날 경제가 완전히 붕괴된 상태에 이르게 될 만큼 급전직하 추락하여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피난민의 이동은 한반도의 인구분포를 바꿀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대한민국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는데, 우선 대폭 들어난 인구의 대부분이 중부권에 집중됨으로써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시기의 인구 집중과 달리 단지 전란으로 인한 피난민의 증가는 의식주 해결에도 벅찰 만큼 힘든 환경을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1960년대까지 국가의 경제정책은 국민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을 정도였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사회는 은근히 이어져 내려오던 봉건주의적 마지막 잔재가 무너지고 시장경제 질서에 급격히 성립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란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과 초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확고한 반공이념을 심어 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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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한다면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한반도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당연히 전쟁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17. frutablend 2013.11.20 15: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으며, 어느 쪽도 명확하게 승리를11

  18. crocs original 2013.11.20 15: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한다면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한반도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당연히 전쟁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

  19. nhcp peninggi badan 2013.11.20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한다면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한반도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당연히 전쟁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20. jaket bola grade ori 2013.11.20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21. 피알앤애드 2014.06.25 1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포스팅 관련하여 사진자료가 필요해서 퍼다 씁니다.
    물론 출처를 밝히고, 상업적인 용도나 변경은 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화령장 전투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10.06 08:24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퇴각하던 암울한 시기, 
대승리를 거둔 화령장 전투는 1950년 7월 17일과
7월 20일 양일간, 경북 상주군 화령장 인근 상곡리와
동관리에서 아군 17연대가 적 15사단을 격파한 대첩을 말한다. 

북한의 남침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은 7월 중순,
충청북도를 지나 경상북도까지 물러섰다.


서울 점령후 시가 행진하는 북한군 -이 때만 해도 김일성은
남한을 금방 먹어 치울 줄 알았었다.
---------------------------------------------------------


한반도 중앙 축선에서 후퇴하던 국군은 초등학교의 엉성한
괘도를 가지고
작전을 짜느라 괴산과 상주를 잇는 977도로가
있는지 조차도 몰랐었다.


[나중에 미군은 일본이 총독부 시절부터 작성해서 보관했던
한반도
지도로 긴급히 군사지도를 만들어서 미군과 한국군에
지급했다.]


이 지역은 좌측의 국군 1사단과 우측의 6사단 사이의
30km
빈 간격이었다. 여기에는 국군이 한 명도 없었다.


북한군은 이 방면이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15사단을
충북 괴산에서 상주 방향으로 977번 도로축을 따라
침투 시켰다.


김일성이 만주 안도현에서 불량 농촌 소년들을 모아서
무장 단체를
조직했던 초기부터 따라 다니며 유격대 활동을 하던
그의 졸개
박성철이 사단장인 이 사단은 이미 국군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었다.


북한 15사단의 대표적인 대패는 7월 7일 충청북도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에게 호되게 당한 동락리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김치구 중좌가 지휘하는 15사단 48연대는
궤멸적인
섬멸을 당했다..


그런데 2주가 지나 그럭저럭 재정비와 충원을 한 이 연대가
다시 남침의 선봉에 서서 화령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부대가 경북 상주군 화북면에 들어서자 주민들은
신속히
경찰라인을 따라 국군 1군단과 2군단과 정보 부서에
신고했다

1군단과 2군단, 두 군단은 정찰 부대를 내 보냈다.


[1군단 정찰대는 방원철 소령이,
2군단 정찰대는 
배상록 대위가 지휘했다.]


1군단장 김 홍일 장군-오래간만에 뵙는
사진이라 업로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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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북한군 15사단이 이 텅 비어놓은 틈을 이용해서
은밀히 남하 중임을
확인했다.


군단은 이 보고에 옹진반도에서 싸웠던
17연대를
2군단으로 배속 변경하여 이 쪽으로 급파했다.

이 연대는 옹진 반도 철수후 대전에 집결했다가
진천과 청주등에서 격전을 겪은 뒤 보은에 잠시 주둔중이었다.

17 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먼저 보은의 1대대[대대장 이관수]를
급히 화령장으로 파견했다.

부대는 자정경 명에 의거 출발했다.
[연대장은 백인엽 대령이었으나 부상으로
후송되고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지휘]


역시 서울 시내를  행군하는 북 T-34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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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이 1950년 7월 17일 오전 07:00 이었다.

1대대가 977 도로를 타고 진입했을 때 한 주민이 차량 행렬을
가로 막고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 선발대가 이미 지난밤에
이 길을 따라 상주 쪽으로 갔다고 알려주었다.

1 대대는 적의 부대 중간에 끼게 된 것이었다.


연대장은 적의 후속 부대가 필히 있을 것이니
이렇게 된 바에야 상주로 간 부대를 놔두고 후속 부대를 치자고
결심하고 괴산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977도로 중간에 있는
갈령 남쪽 방향을 따라있는 상곡리 일대에 1대대 병력으로
길게 매복진지를 만들었다.



화령장 북동쪽 977도로의 상곡리에서 
있었던 매복 전투 상황도.
푸른 선이 아군, 붉은 선이 북한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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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을 완료한 부대는 매복 지대 아래 상주 쪽에 있는

상곡교에서 자전거로 북상하고 있던 북한군 연락병을
잡아 이미 선두로 상주로 내려간 부대가 박 성철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확보했다.


1대대는 이 통신 보고서에서 적 48연대가 곧 후속할 것이며
바로 1대대 매복진지 앞의
일대에서 숙영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1950년 8월 고되게 행군하는 한국군- 복장으로 보아
전투 경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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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가 조금 지나자 갈령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이 행군 대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보부대에 뒤이어 각종 포와 탄약을 실은 것으로
보이는
40여 대의 우마차를 끌고 왔으며 북한 연락병
통신문에서와
같이 국군 17연대 1대대 정면 길가에 정지하더니
대 휴식에 들어갔다.


이들의 일단은 매복 정면 북쪽인 하송리의 송계 초등학교
부근에서
휴식하고 다른 일단의 병력은 상곡리 일대에서
휴식했는데
이들은 학교 교정과 도로가에 사총[斜銃]한 후
경계는 소홀히 한 채
일부는 옷을 벗어 던지고 개울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가 하면
일부는 낮잠을 자거나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마을에 들어갔는데 잠시 후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서 이들은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북한군의 서쪽 사면 3부 능선에 매복하고 있던 제 1 대대
장병들은 코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북한군의 목욕 광경 등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면서 사격 명령이 빨리 하달되기만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매복 병력의 후방 390고지에서 쌍안경으로 북한군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적이 목욕을 하는 등
무방비 상태이기는 하나
넓게 흩어져 있으므로 좀 더 좋은
여건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질 무렵인 19:30분경 흩어져 목욕하던 북한군 병사들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집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병사들은
수저를 놀리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 때가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시점이라고 판단한 이관수
대대장은
대대 작전장교 김희재 중위로 하여금
적색 오성 신호탄을 발사하여
사격명령을 내렸다.

대대장의 사격명령에 따라 400여 정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고
박격포와 기관총도 쉴 사이 없이 쏘아댔다.


저녁 식사를 하려고 집결하거나 식사를 하고 있던 북한군은
불의의
집중사격을 받고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쓰러져 갔고 그 때까지도 하천에서 목욕하던 자들은
옷을 입지도 못한 채 쓰러졌으며 다행히 살상을 면한 자들은
부락으로 숨어들거나 삼밭에 몸을 숨겼으며 일부는 뒷산으로
도주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40여 필의 말과 소들이 포성에 놀라
날뜀으로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제 1대대가 1시간 가까이 적을 섬멸하는 사이 연락을 받은
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전투현장에 도착하였는데 대대장이
소탕 작전을 건의하자 연대장은

“야음이 다가왔고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니 내일 17연대
  본대가
도착한 후에 하라“라고 명령하며 전투 현장에서
살아 남은 적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 매복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대대장은 후방 진지에서 예비대로 있었던 제 2중대를
북한군이 행군해왔던 도로의 후방을 차단해서 도주자를 색출했다.


김희중 연대장은 어제 16일 밤에 청주 전투에서 고전을 하고
철수하여
보은에 집결하고 있던 제 2대대와 제 3대대를
화령장으로 급파시켰다.


먼지로 뒤덮힌 한국의 도로는 미군들에게 고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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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을 한 1대대는 살아남은 적을 색출하가며 잔적소탕을 했다.

북한군이 식사하려고 집합했던 곳은 시체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기습 현장의 뒷 산으로 도주했던 잔적들을 소탕했다.


북한군 정치 장교 놈은 그래도 기가 죽지 않아 바위 뒤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들아 !부산은 벌써 함락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저항하느냐!" 하며 속임수의 선동을 하다가
국군의 사격에 도주하기도 했다.


대부분 사살했으나 뒷산 바위틈에서 기관총탄이 계속 날아왔다.


박격포 사격으로도 제압되지않아 특공대를 투입해서 제압하고
보니 북한군 간부들은 기관총 사수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발목이
쇠사슬로 묶이고 기관총에 연결된 채 죽어 있었다.


[모두 단 죽어가는 현장에서도 북한군 간부들이 사병을
 희생삼아
살길을 도모했던 치사함이 노출 되어 보인다.]


전장 정리의 마무리가 끝나고 전과 확인을 해보니 포로 30여명,
사살 250명, 박격포 20문,45mm 전차포 7문, 소총 1,200정,
그리고 수점의 통신장비와 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부대를 확인한바 북한군 15사단 48연대의 보병 2개 대대로서
통신 중대와 대전차 포 중대 및 기마대인 것이 밝혀졌다.


총을 사총[斜銃]한 상태에서 기습을 받았으므로 도주한 자들은
대부분 비무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노획한 소총이 많았음에 유의]


미국 기록은 두 사람이 북한군이라고 설명했지만 평양에서
신상철 사단장과  다른 사단장이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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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18일 적의 후속 부대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정보참모 유 창훈 소령을 지휘관으로 한 정보 부대를
전방으로
파괴하였다.


이 부대는 전투 현장에서 북쪽인 갈령을 넘어가서 잠복했다가
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올라오는 두 명의 북한군 연락장교를
잡았다.


두 연락 장교로부터 15사단장 박 성철이 이미 궤멸된
48연대장 김 치구에게 아무런 보고하지 않음을 질책하고
49 연대가
곧 후속함을 알리는 통신문이 압수했다.


박성철은 이렇게 두들겨 맞은 48연대의 운명을 알지도
못 했을 뿐더러
후속 연대가 뒤따른 것이라는 것을 국군에게
알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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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대대 상곡리 기습에서 후방으로 도주해서 48 연대가
 섬멸되었음을 
제대로 보고한 적군이 한 명도 없었을 뿐더러
 [전멸을 의미함]북에 정보 협조해주는
주민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국군이 정보 획득에 주민들의 절대적인 협조를 받은 것과
 대비된다.


 또한 중요 정보를 자전거를 탄 전령들로부터 연달아
 두번이나 입수한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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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 연대장은 19일 전투후 적을 기습하기로 하고
송호림 소령이 지휘하는
2대대를 파견했다.


2대대는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1대대가 대첩을 거둔
577도로의 위쪽,
즉 갈령과 기습 현장인 심곡리 사이에 있는
동관리와 하성리 중간 계곡에
매복진지를 구축했다.


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며칠 전 차량 전복 사고로 기동조차
불편한
형편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진지를 구축하고 후속할
적 49연대를 기다렸다.


그는 적이 계곡 안에만 들어와 준다면 일개 연대를
전멸시킬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었다.


대대가 집결지인 화령장에서 동관리로 이동하여 매복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1대대가 전장 정리를 완료한 20;00이었다.


아래 심곡리에서 윗쪽으로 올라간 곳인 동관리에서
화령장의 두번째 전투가 벌어졌다.[3개 중대의 공격선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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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중대를 적이 들어올 입구인 좌측 갈령 쪽, 5중대를 중앙,
6중대를 적이 나가는 방향인 우측 상주 쪽 으로 배치했다.


다음날 7월 19일 16;00시 말을 탄 적 장교 두 명이 인솔하는
우마차 20대와 적 20여명이 7 중대 매복 망에 들어왔다.


대부대를 기다리는 대대로서 그냥 통과 시키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한 병사가 선두 기마 장교를 우발적으로 사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7 중대는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 기습으로 적병 17명, 소 두 마리, 말 3마리를 사살하고
소 두 마리와
말 9마리를 생포했으며 우마차에 실려 있는
많은 양의 탄약과 식량들을 노획하였다.

이들이 징발했던 민간인 두 명도 희생된 것은 유감이엇다.


송 호림 대대장은 이 우발 사격을 크게 질책하고
대대 관측소를
전방의 7중대 지역으로 이동하여 더 이상의 
실수가 
없도록 중대를 직접 통제했다.


다음날 7월 20일 새벽이 되었지만 적정이 없었다.
송 호림 대대장은 연대 본부에 이상 없음을 보고했다.


김희준 중령이 이거 우리가 속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 2대대 철수를 생각할 때 선두 7중대장 조 경학 중위는
송 호림 대대장에게 피아 식별 불능의 대병력이 갈령에서
도로를 따라 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북한군의 훈련. 앞에 지형 모형 사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술 훈련중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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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훤히 샐 무렵이었지만 골짜기는 안개가 온통

뒤 덮여 길 위로 이동하는 부대 식별이 쉽지가 않았다.
적 부대는 4열 종대로 행군해 오고 있었다.


적 부대는 7중대 앞을 이미 통과하여 선두 부대는
7중대 화망을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송호림 대대장으로부터 적 식별을 분명히 하라는 지시를
받은 조경학 중위는 유선 전화기로 안개 사이에 희미하게
통과하는 대부대에 관한 관측 정보를 계속 보고하였다.

“배낭 같은 것을 모두 메고 있다.”

“총에 긴 송곳 같은 것이 꽂혀 있다.[총창이다]”

“바퀴 달린 기관총을 끌고 가고 있다.[수냉식 맥심 기관총이다.]”
등의 정보를 보고하는 조 중위는 이 대열이 분명 적이라고
판단하는
어조였다.


소제 수냉식 1910년 맥심 기관총.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들이 체코 군에게서 
구입한 이 기관총들로 일본군을 격멸함,
바퀴가 달려 있어서 강아지처럼 줄을 매어 끌고
이동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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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군은 한강 이북에서 배낭을 모두 잃어버려서
배낭이 없는 상태였고 배낭이 있는 부대도 배낭은 차량으로
운송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피아 식별을 하고 싶었던
송 호림 대대장은
주저했다.


적이 7중대를 통과하여 좌측 6중대 지역으로 진입하자
6중대장 곽성범 중위는 이들의 선두가 중대 정면을 지나가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빨리 사격명령을 내려주기기를 간청했다.


김희준 연대장에게 보고하기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송호림 대대장은 자신의 판단으로 아군 부대를 잘못
공격했을 때는
죽음으로 속죄하기로 하고 적색
오성 신호탄 3 발을 쐈다.
전 대대 동시 사격 명령이었다.


명령일하 전대대의 화력이 도로에서 행군하던 적에게 쏟아졌다.
동관리 계곡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하면서 아비규환이 되었다.


대대는 적 후미인 갈령 방향에는 81mm 박격포로 견제사격을 하고
중대간의 중기관총으로 교착사격을 하며 도로 건너편 개활지와
산으로 도주한 적에게는 중대의 60mm 박격포로 제압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인 화기는 977번 도로를 최저 표적사 할 수도 있도록
지가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안개로 인하여 표적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사격만
하면 화망 안에 깔려든 적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기습사격을 받은 북한군은 숨을 곳을 찾아 이리저리 뛰었으나
은폐물이 없는데다 근거리에서 사격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
쓰려져 갔고 일부 병력은 논바닥에 엎드려 저항을 하였으나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송호림 대대장은 불편한 몸 상태를 잊고 붉은 기를
흔들며 “죽여라! 죽여라!”하고 부대를 독려하였다.


08:00경 안개가 걷힌 후 977도로 위와 논바닥에는 시체와
장비가 즐비하였고 아직도 삶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삭발한 머리였다.
박박깎은 머리는 북한군의 특징이다.

기습한 국군은 이들이 진짜
북한군들임을 이제야 육안으로 
확인 할 수가 있었다.


반대편 산으로 도주했던 적들은 미리 746고지에 배치했던
7중대의 1개 소대에 격멸되었다.


이틀 전 1대대의 상곡리 전투에서는 이 배비가 없어서 적들이
반대편 산에
붙어 저항했지만 이번에는 아래 계곡해서
도주해 오는 북한군을  산정에서 사정없이
쏴 거꾸러뜨렸다.

09:00, 제 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예비로 있던 제 6중대로
하여금 잔적 소탕을 하게 하였다.


6중대가 소탕 작전을 전개하자 이때까지 죽지않고 논바닥에
엎드려 있던 북한군들은 상당한 저항을 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소탕 되었다.


이 당시 5중대에 탄약 추진차 갔다가 전투를 관전하게 된
하송리의 박 무진 씨는

“적이 길 위와 논바닥에 새카맣게 쓰려져 있었는데 7-8명이
 
하천 직경 70cm의 배수관 속으로 기어 들어가자
  소탕 작전을 하던
국군 한 명이 배수관 속으로 사격하는 것을
  보았어요. 
  국군들은 참 용감하였습니다.“

이날 작전은 오후 14;00에 종료되었다.


송호림의 2대대는 적 현장 확인 사살 356명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전투 며칠 후 현지민들이 논과 도로에서 모아다가
매장한 적군 시체만 600구가 넘었었다.

노획 무기로서 박격포 16문, 반 탱크 총 2문,
기관총[수냉식 15문, 경기관총 15문, 체코 식 경기관총 23정,]
소총 186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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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멸된 15사단의 두 연대 보유 노획 무기가 빈약함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2주전인 1950년 7월 7일, 국군이 충북 동락리에서 6사단
7연대에게
1차로 격멸당한 48연대에서 거둔 노획품은 막대했다.

동락리 사살은 2186명, 포로가 132명,

노획 장비는 122mm 곡사포가 6문,
76mm 곡사포 4문, 직사포 7문,
12.7mm 중기관총 6정,
장갑차 4량, 2 1/2트럭 60대, 1/4 짚차 15대,
사이드카 7대등이다.


탄피를 수거하고 있는 국군, 탄피의 양으로 보아 엄청난
포격전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화령장 전투는
국군 1사단과 미 24연대가 이어 받아 7월 25일까지
계속되었고 북한군과 미군사이에 엄청난 포격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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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북한 연대는 남침 때는 완전 차량화 되어 있었다.
참패했던 동락리에서도 전 연대가 차량을 타고
매복선에 들어와서 주차했다가 기습을 당했다.

이 동락리 전투에서 막대하게 노획했던
차량과 중포가 화령장에서는 전무함이 들어난다.


보건데 적 15사단 48연대는 동락리에서 전 장비를 상실하고
인원만을 급히 충원했지만 한국 침공 개전 때의 화려한 장비는
북한으로부터 재보급 받지 못해 우마차나 자전거 같이
빈약한 것을 썼던 것이 아닌가 한다.


48연대장 김치구 중좌는 동락리 전투 대패후
국군이
다 후퇴했다는 거짓 정보를 주어서 큰 피해를 입었다며
지방 주민들을 수 십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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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리 전투에서 아군은 전사 4명에 부상 30명의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 15사단은 15:00에야 자기들 연대가 섬멸된 것을 알고
감히 갈령을 넘어 오지는 못하고 포격만 했지만 2대대는
적의 반격에 대비해서 이미 진지 이동을 한 뒤였다.


김 일성이 생각없이 일으킨 6.25남침으로 남북 양쪽의
주민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손자를 데리고 강을 건너는 피난민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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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령장에서 적 15사단의 두 개 연대를 섬멸하는 승리에는
한국군 정보부대의 민활한 활동에 크게 힘입은 바가 컸지만
현지 주민들의 협조가 압도적인 공헌을 하였다.


화령장 주민들은 첫 첩보 부대인 방 원철 부대나
배 상록 부대가 화령장에
파견되었을 때부터 국군에
적극적인 협조를 했는데
대한 청년단원들은 단장
김 기영을 중심으로 적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마을을
경비하며 보급 추진 업무를
도와주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탄약 운반이나 취사 업무등은
우리가 맡을 터이니 군인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전장에 나가서
적을 물리치도록 해 달라“고 하면서
탄약 운반, 취사등을 자원했으며
박 삼덕[청년 단원- 38세]씨는
자신의 약방을 치료소로
사용하도록 하면서 약품을 지원하고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서울 탈환 전투에서 포로가 된 북한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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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철은 동락리와 화령장 두 번의 대패로 사단장에서 해임되었다.


김일성이 아무리 신임하던 졸개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대패에는 어쩔 수없이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5사단은 남침 3개월전에 함경북도 회령에서 급조직
된 사단으로서 출발 초기부터 그 전투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북한 군부내있었다.

그래서 남침초기 최 선봉에도 서지 못하고 예비대로
따라오다가 국군과 맞붙으면서 그 문젯점을 여지없이 들어냈다.

무기를 다 빼았기고 문자 그대로 거덜이 난 이 15사단은
두 달간 계속된 낙동강 전투에서 옹골진 전투력 한 번
발휘하지 못하고 비실대다가 북으로 패주했다.

15사는 6·25전쟁 최약체 북한 사단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령장 전투 전승행사 안내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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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회령장 2010.10.06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짜 어이없겠네요... 아니 말을 탔다고 북한군으로 간주하다니.... 본 순간 부터 진짜 황당함이 자체가 나옵니다....;;

  2. 화령장 2010.10.06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윗 분 무슨 소리하고 있는가 ?

    본순간부터 진짜 황당함이 자체가 나옵니다라고 ?

    말을탔다고 붃한군으로 간주했다니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나?

  3. chaffee2090 2010.10.07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탄피 회수 장면은 실제 화령장 전투 당시가 아닌 것이라는 얘기죠?

  4. 조조 2010.10.24 0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럭리 전투에서 대패한 15사단 박 성철의 군대가 화령장에서 다시 국군의 재물이 됏구먼 북괴15사는 완전 봉이였구먼,,,,ㅎㅎ 정말 웃기는 넘들이엿군 15사

  5. clothing factory 2011.05.25 2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성 인터넷 프로토콜 (VoIP, Voice over Internet Protocol) 은 인터넷 프로토콜 을 이용 하여 소비자 에게 음성 통신 제공 을 하는 시스템 을 말한다.

  6. auto insurance web correspondence 2012.05.21 15: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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