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오'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1.06.11 사직리[社稷里] 전투-1949년 (108)
  2. 2010.08.26 74. 아군의 실책 그리고 북한군의 무능 (5)
  3. 2010.06.17 북 기만술에 당한 원창현 전투 (7)

사직리[社稷里] 전투-1949년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6.11 15:45

1949년 2월 미군이 철수하고 한반도를 가로 지른 휴전선에서는 간단없는 총성이 울렸다. 국군과 북한군은 기선제압을 위한 공격과 보복을 되풀이 했다. 북한군의 도발 강도가 강해지다가 급기야 6ㆍ25전쟁으로 연결되었다.

<참모 총장을 역임한 김종오 장군. 사직리 전투 작전의 구상자이며 지휘자이기도 하다>

남한 국내에서도 국가는 출발했지만 치안과 공산당의 활동은 기세를 올리다가 끝내 여순 반란 사건이 발발하고야 말았다. 공산당 오열들이 침투했던 군은 숙군의 칼을 빼들고 공산분자 색출과 처단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군에 침투했었던 적색분자들이 대부분 잡혀서 법에 의한 처분을 받자 아직 체포되지 못한 다수의 군내 적색분자들은 군을 이탈하여 북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던중 춘천 일대 38선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8연대의 적색분자였던 두 대대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월북해버린 국군사상 씻지 못할 오점의 사건이 발생했다.

표 무원 강 태무 두 사람은 경남 고성 출신 보통학교 동창으로써 다른 군 적색분자들인 최 남근대령과 오 일균소령등에게 감화 받아 공산주의자가 되어 군내에 잠복했었다.

일본군 지원병 출신인 1대대장 표 무원 소령은 숙군의 칼날이 자신을 겨냥하자 불안을 느낀 나머지 1949년 5월 4일 훈련을 핑계로 화천쪽엔서 대대를 이끌고 월북하였다.

대대원 반수가 대대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탈출해왔지만 표무원은 장교 4명 사병 213명을 이끌고 북한군에 항복했다. 같은 연대 2대대장 강 태무는 다음날 새벽 행동에 들어갔다.

일본군 학병 출신으로 대대장이 된 그도 군 수사당국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표무원이 월북한 다음날 새벽 역시 부하들을 이끌고 작전이라는 명분으로 38선을 넘어갔다.

대대는 북한군과 실제로 교전까지 하고 사상자까지 발생하자 강 태무는 대대원들에게 항복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50~60명이 탈출해서 복귀했지만 강 태무와 사병 150명이 북으로 넘어갔다.

이들 두 사람은 북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두 개 대대나 월북했던 불운을 겪었던 국군 8연대장 김 형일 대령은 인사조치되고, 후임으로 김 종오 대령이 임명되었다.

<표 무원, 강 태무가 속여서 강제 월북시킨 국군 장병들이 평양역에서 거대한  환영을 받고 있다>

이 응준 참모총장도 사임하였다. 이 분은 두 대대장을 체포해서 심문하자는 김 창룡 방첩대장의 건의를 들어주지 않았다가 큰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 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김 창룡 장군.
숙군의 공이 컸고 청렴했지만 군내외에 너무 많은 적이 있었고, 암살당했다>


8연대장으로 부임한 김 종오 연대장은 즉시 두 대대 월북후 바닥에 떨어진 사기를 올리기 위한 한 기책을 세웠다.

그것은 연대 정보 주임이었고 그 때는 육본 정보국에 발탁된 김 창룡 대위와 극비리에 모의한 것으로,
38선을 왕래하는 2중 간첩을 이용, 북한군에게 1개 대대가 5월 8일 새벽 사직리를 경우하여 연곡으로 월북하겠으니 수용조치를 하라는 강구하여 달라고 전하게 하고 접수하러 온 적 부대를 격멸하려는 구상이었다.

북괴군은 표 무원 강 태무 대대들이 월북한 직후인지라 즉각 신용하였던 것 같았다.

이에 북한군은 평양 정치 보위부의 지휘하에 접수부대를 배치하고 보도 관계자까지 초치하여 준비를 끝냈다. 이를 확인한 김 종오 대령은 5월 7일 2000경 무장한 2개 중대를 해발 1,161미터인 국망봉 서쪽 기슭으로, 다른 1개 소대를 212고지를 경유하여 각각 북괴군의 퇴로를 차단하게 하고 1개 중대를 자동차에 승차시켜 월북을 가장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동쪽으로 우회한 2개 중대가 길을 잘못들어 03:00경 북한군과 조우하여 전투가 개시되었다. 월북을 가장한 중대는 트럭의 라이트를 껐다 켰다하며 신호했으나 북한군은 한국군의 기도를 알아챘는지 월북 부대를 접수하러 오지 않았다. 38도선 북쪽 3킬로 부근 지점에서 일어난 총소리는 점점 치열해갔다.

부푼 기대로 만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김 종오 연대장은 적을 유인하기 위해서 차량으로 투입했던 월북 가장 부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우회하다가 북한군과 잘못 조우하여 격전을 치룬 주력 부대도 철수 명령에 적과의 접전을 중지하고 부상자를 이끌고 익일 미명 05:00경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김 종오 대령과 지휘부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사상자만 발생한 것을 낙심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

적과 교전을 치뤘던 주력 부대의 맞은 편인 서쪽인 212 고지 북쪽 기슭으로 서쪽 루트를 통해 우회하여 조공격으로 침투했던 최 영두 소위의 소대와는 무선 교신이 두절되어 철수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가 못했다. 최 소위는 매복한채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38선 바로 아래 좌측에 짧게 침투했던 최영두 소위의 침투로가 있다>


이윽고 날이 밝자 북한군 1개중대가 가까이 행군해왔다. 북한군 증대 병력은 20여 미터 떨어진 도로상에 집합하여 운반 트럭이 오기를 기다렸다. 최 소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제 사격을 퍼부어 104명을 사살하고 포로 13명 소총 100여정 기관총 1정을 노획하여 38선을 다시 넘어 무사히 귀대하였다.

다 실패했던 작전이 기사회생으로 큰 전과를 얻고 종결되었던 것이다.

<고지 점령의 기쁨을 만세로 표출하는 국군-백마 고지 전투시 [1952년 10월 15일]장면이라고 하지만 털모자에 동계 피복으로 보아 다른 전투의 장면으로 보인다>


이 사직리 전투는 6ㆍ25전쟁 전에 38선에서 벌어졌던 여러 전투들, 동해안의 기사문리 전투에서 개성 송악산 전투, 서해안 해주의 은파산 전투들중에서 가장 뛰어난 전과를 거둔 통쾌한 전투로 기록할만하다.

북한군은 표 무원 강 태무 소령들의 월북으로 크게 고무되어 있다가 큰 타격을 받았다. 최 영두 소위는 이 공로로서 2계급이나 특진하였다. 김 종오 대령은 나중에 대장까지 진급하게 되는 기틀을 만들게 되었다.

월북했던 표 무원 강 태무 두 사람의 운명이 궁금해서 지켜보았는데 표 무원은 6ㆍ25전쟁때 남한 침공 부대의 한 부대장을 했다는 정도만 파악되었고 강 태무는 사단장을 거쳐 1980년까지 생존한 사실만 확인했었다.

몇 년 전 NK 자유연대 웹을 보니 김 민세라는 새터민 기자가 쓴 기사에 강 태무가 2007년도에 82세의 나이로 죽고 표 무원은 그 일년전 죽었다고 되어있었다.

<김 정일이 차려준 80 생일상을 받는 강 태무. 80년도에 촬영한 사진보다 훨씬 늙었다>

둘다 이용가치가 출중했던가 김일성 부자는 강태무와 표무원을 중장까지 진급시켰다. 특히 김 정일은 강 태무의 80세 생일상을 직접 차려주었다는 글도 있었고 사진도 있었다.

김 부자가 생일상을 차려주는 것은 엄청난 명예라고 한다. 강태무와 표무원을 김 부자가 끝까지 품어준 흔치 않은 월북자들 중 특히 선택받은 존재들이었다. 내외적인 선전가치를 인정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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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복을 되풀이 했다. 북한군의 도발 강도가 강해지다가 급기야 6ㆍ25전쟁으로 연결되었다.

  21. freecandycrushcheats 2014.05.19 0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크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전투지만, 동락리나 화령장 전투에 비견되는 비중있는 전공을 기록한 전투이다.

74. 아군의 실책 그리고 북한군의 무능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8.26 08:10

 

  좌측에서 남하한 중공군의 공세와 더불어 동시에 우측으로 내려와 포위망을 연결할 부대는 북한군 제5군단 예하의 4개 사단이었는데, 이들은 해발 1,519미터의 가리봉일대를 통과하려다가 국군 제3군단의 우익인 제3사단의 집요한 저항에 방어선을 뚫지는 못하였습니다. 제3사단은 험준한 지형을 십분 활용하여 5월 17일까지 4배나 많은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모두 격퇴시킴으로써 정상적인 방어 편성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까지가 제3사단이 현리전투에서 보여준 모든 것이었습니다.


[제3사단이 북한군을 막아내었지만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김종오 제3사단장은 좌측에 인접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으로부터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차단당하였다는 비보를 통보받았습니다. 그런데 단지 이 한마디에 퇴로의 차단을 우려한 사단장은 현진지 사수를 포기하고 선전하고 있던 전방연대에게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일거에 국군 제3군단의 몰락을 불러오게 되었는데, 사실 못내 아쉬운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벙커힐전투의 미 제2사단처럼 철저히 현 진지를 사수하는 것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김종오는 지난 북진 시에 그가 지휘하던 국군 제6사단을 아군부대 중 압록강에 제일 먼저 도착시키는 영광을 얻었지만, 부지불식간 출현한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하여 초산에서 부대가 무참하게 붕괴 당하였던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포위에 대해서 극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중이었는데, 유일 후방 통로인 오마치고개가 차단되었다는 소식은 당연히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초산 당시에는 아무도 도와 줄 수 없으니 알아서 탈출하라는 식이었지만 이번에는 설령 포위되었어도 결사적으로 방어에 임한다면 적을 물리칠 가능성은 충분하였습니다. 물론 고립방어 전술이 성공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많은 위험을 감수하여야 하지만, 공세 능력에 제한이 많다는 중공군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나서는 상당히 효과를 많이 보았던 전술이기도 합니다. 화력과 공군력을 발판으로 하여 유엔군은 지난 지평리전투, 가평전투에서는 물론 바로 같은 시기에 좌측에서 벌어진 벙커힐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었습니다.


[지난 북진 당시에 당한 악몽이 너무 커서 퇴로를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제3사단이 고립방어를 포기하자 이제부터 상황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아갔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제3사단이 철수하자 뒤 쫓아 내려온 북한군 제5군단이 가리봉일대까지 진출하였으면서도 정작 험준한 산악지역을 넘지 못하여 오마치의 중공군 제20군과 연결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더불어 북한군 제5군단의 동쪽 외곽에서 남진하던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도 좌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방대산 일대의 산악통로가 차단되지 않았고 이것은 이후 각개 분산되어 도망치던 국군 제3군단 패잔병들의 유일 탈출로가 되었습니다.


  천만 다행히도 북한군의 무능은 계속되었습니다. 태백산맥 일대와 동해안을 담당하던 3개 사단으로 구성된 북한군 제2군단이 한계령과 설악산의 중간지점으로 공세를 펼쳤는데, 이 지역은 국군 제1군단 수도사단이 강력히 방어하던 곳이었습니다. 북한군 제2군단은 처음부터 수도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움직이지 못하면서 좌절되었습니다. 결국 국군 제3군단의 동측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속사리 일대에서 거대한 포위망의 한축을 구축하려던 북한군 제5군단과 제2군단의 진출이 이처럼 연속으로 좌절되었고 더불어 후속하려던 북한군 제3군단의 후방진출도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북한군의 선전사진과 달리 그들은 현리전투에서 무능의 극치를 달렸습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중공군 제6차 공세 당시의 현리전투만큼 남과 북이 공통적으로 한심한 모습을 보인 전투는 6·25전쟁사에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우리입장에서는 기억 속에서 조차 지우고 싶을 만큼 아팠던 사상 최악의 패전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북한군도 제대로 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려 9개 사단이라는 압도적인 전력을 동원하고도 단 2개 사단이 담당하던 아군의 우측방어망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국군 제3사단은 급속히 붕괴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이를 추격한 북한군은 산속을 헤매고 다니기에만 바빴습니다. 결론적으로 아군의 방어선을 붕괴시킨 것은 좌측으로 쇄도한 중공군이었고 이후 이를 극적으로 틀어막은 것은 미 제3사단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남북한군의 총체적 무능의 결정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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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기만술에 당한 원창현 전투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6.17 09:03

               


남침하는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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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볼수록 이 사단이 세계에서도 알아줄만한

독특한 기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6·25전쟁 중 6사단은 대승과 대패를 번갈아 왔다갔다하는

극과 극의 전투를 해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풍운의 사단이라고 할만하다.


고른 승리를 기록했던 1사단과도 비교되지만

중공군과의 주요 전투에서 매번 패배를 맛보아 조롱 받던

모 사단과도 극명하게 대조되는 ‘개성 있는 이력’의 사단이다.


6사단은 패주하던 북한군을 추격하여 초산을 점령하고 압록강

물을 마시는 환희의 승리도 맛보았지만 불과 며칠 뒤

중공군 참전으로 후퇴중에 중공군 야간 공격에
산하 7연대가
산산조각이나는 붕괴의 패배를 맛보았다.


그 뒤 중공군의 5차 전역, 즉 1951년도 춘계 대공세 때

6사단은 사창리에서 압도적인 적 병력의 공세에 패주했다.


장도영 사단장이 미군 사령관에게 ‘당신 싸울 줄아나?’

하고 경멸 섞인 조롱을 당했다는 일화를 남긴 패주였다.



용문산 전투의 6사단장. 장도영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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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6사단은 심기일전해서 한 달 뒤 용문산 전투에서

무섭게 선전해서 군단 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했다.


유명한 용문산 대첩이다.


이 6사단이 6·25전쟁 초기 춘천 방면의 북한군의 공세를 격퇴해서

한국군의 체면을 세워준 공훈을 국민들이 알아주고 있다.


그러나 풍운아 6사단의 춘천 승리는 역시 어이없는

패배로 연결되었다.


전사에서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작은 전투이지만
6사단이
가진 풍운아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춘천 전선에서도 잘 싸우고도 육본의 지시로 내키지 않은

후퇴를 하던 6사단 7연대가 춘천 남방 원창현[고개]에서 성공적인

매복 공격중의 막판에 북한 1개 중대가 부린 기만적 반격에

대대 병력이 어이없이 패주했던 전투를 소개한다.



춘천 전투의 6사단장, 김종오 장군
-------------------------------


6사단 7연대[연대장 임부택]는 6월 28일 명에 의해서 철수하면서
예하
김 종수 소령의 2대대를 후위로서 춘천 남방 원창현 마루턱에

배치했다.


원창현 고개 마루는  당시 춘천 분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해발

600 미터의 고지였다.


양쪽의 산은 별로 험하지 않았지만 민둥산 많았던 이  지역에서는

드물게도 잡목림(雜木林)으로 덮여 있었다.


그래서 김 종수 대대는 매복한 진지를 용이하게 은폐 시킬 수가 있었다.


춘천 방향에서 고개로 올라오는 길은 구불구불해서 기습하기에

아주 좋은 지형이었다.


오후 두 시 경 멀리서부터 적의 대부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긴 장사진(長蛇陣)이었다.

병력의 규모는 상당히 커서 거의 2개 연대에 달하는 것으로 보였다.


잠복한 부대원은 적의 선두가 300 미터 내로 접근 할 때까지 대기했다.


7연대는 사실 6사단의 다른 연대들이 내침한 북한군을 맞받아치며

분전하는 동안 춘천 남쪽의 석사리에서 북한군 2 사단을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느라 아직 큰 전투를 해보지는 못했었다.


각 부대원들은 우리는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보고 철수만

하고 있느냐고 불만을 터트리고 있었던 터였다.


대대장은 드디어 적에게 일제 사격을 명하였다.

대대 장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격렬한 화력을 고개 마루

아래 접근로의 북한군에게  퍼부었다.


북한군은 지형상 어디로 도피할 수도 없고 후퇴 할 수도 없었던

터라 속절없이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었다.


두 시간 가까운 시간이 지나자 북한군이 공격으로 옮기는
기미가 보였으므로 한층 치열한 사격을 가하자 선두의 적들은
백기를 흔들었다.


백기는 하나가 아니었다.

북한 병사들이 모두 손수건이나 수건 같은 것을 꺼내서 흔들었다.

김 종수 대대장은 적이 투항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사격 중지를 명령했다.


1개 대대가 적 2개 연대를 포로로 잡는 순간이었다.

부대원들은 환호하며 모두 참호 밖으로 나와서 포로를

영접[?]할 준비를 하였다.


투항하는 북한군은 한 손에 따발총을 다른 손에 태극기를 들고

두 손을 올리고 고개에서 환호하는 국군에게 다가왔다.

병력은 약 1 개 중대 규모였다.



따발총
------


김종수 대대장은 투항하는 적병 중에 대대장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적장[?]에 대한 예우로서 연락병을
보내
모셔 오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자신도 마중을 위해서 호에서 나와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웬걸, 만사체념한 듯이 얌전히 걸어오던 북한군들은

느닷없이 함성을 지르고 따발총을 난사하며 돌격해왔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급습을 당한 국군은 다급히 총을 들어

반격하러 했으나 북한군은 진지까지 난입해서 국군 병사들과

난투극을 벌였다.


원체 사생결단하고 덤벼드는 북한군의 공격에 국군은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무질서하게 도주했다.


김동수 대대장도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지고 탈출했다.

적 대대장을 모시러 적진으로 갔던 연락병은 첫 일격에

전사했다.


부대는 겨우 후방 사현에 축차 진지를 구축했던 김용배 소령의

1대대 지원을 받아 한숨을 돌리고 재편성을 했다.


이 북한군의 악랄하기로 유명했던 최 현[전 국방상]이 지휘하던

북한군 2사단 병력으로서 홍천을 점령하고 이어 수원 쪽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북 2사단은 남하하는 105전차 여단에 앞서 수원에 진출,
국군을 포위하려고 시도 기동 중 6사단의 7연대 2대대와
격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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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부대는 비록 기만전술로서 사지(死地)에서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원창현에서 김종수 대대에게 큰 타격을 받고 원 작전계획을
수정하고 가평 방면으로 방향을 변경했다.


젊었던 한국군은 적 기만전술에 경험이 없었기에 급습을
당했던 것이다.


기만전술은 소련군이 독일 군과 싸우면서 구사했던 치사한 교리로서

독일군은 이 비열했던 기만 전술을  알고서도 번번이 당했던
경험이 있었다.

북한이 소련에서 배운 남침의 노우하우중 하나다.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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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종수 소령의 2대대는 역시 6사단 대대답게 며칠 뒤

충북 진천의 동락리에서 적 1개 연대를 전멸시키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극과 극을 오가던 6사단의 풍운의 전력은 전쟁 초기부터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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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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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꼬레아 2010.06.17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전쟁에서의 국군사단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있는 6사단....저 또한 6사단 출신임에도 군에 가기전까지 1, 3, 5, 7, 9사단은 알았어도 6사단은 몰랐었죠. 한국전쟁에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좋은 글 잘 보고갑니다.^^;

  2. 원창... 2010.06.18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창고개 쪽에 군견대가 있지 않나요? 군견훈련 당시에 2주동안 파견나간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주워들은 얘기로는 원창고개가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이어지는 최후의 요지라고 하더군요. 원창고개를 빼앗기면 곧장 춘천은 물론 가평 방면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부근에 군부대도 많고 야트마한 산지임에도 작은 부대들이 산재해 있더군요. 민간인들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위장되어 있는... 뒤로는 공군부대가 주둔하는 대룡산이 있고요.

  3. janghoseo 2010.06.21 15: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울프독님 블로그에 이어 이곳에도 들러 댓글을 남겨봅니다.

    당시 대대장의 가중 큰 과오는 백기를 들고 오는 적에게 무기를 버릴 것을 요구하지 않고 20m 전방까지 접근시켰다는 점입니다.. 개인이나 부대를 막론하고 투항의 첫째 조건이 '무장해제' 임을 간과한 거죠.

  4. 태풍 2010.10.30 2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따발총 파파샤넹 (PP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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