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춘천 전투 참전 중대장의 수기(4/4)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10.17 07:01

6월 28일 오후 3시경, 제 7연대 부연대장 최 영수 중령이
써 보낸 서면 명령이 제 1대대장 김 용배 소령에게 왔다.

‘제 1 대대는 즉시 금병산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모래재[沙峴]로 이동하라“ 는 내용이었다.

제 1 대대의 제일 후미 중대가 금병산을 떠난 것은
오후 4시[16;0]경이었다.


이리하여 춘천 지구 전투는 치열한 공방전 3일간 반 만에
막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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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독에게 자신의 전투담을 들려 주는  이 대용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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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춘천 전투에 대해서 쓴 이 대용 장군의 회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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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춘천 지구 전투에 대한 평가
이 전투의 전략적 평가는 하지 않겠다.
단지 어찌하여1개 연대가 열세한 화력을 가지고도 절대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과 4배나 되는 병력 우세에다가
기습이라는 이점까지 가지고 감행한 북한군을 3일간이나
춘천 지구에서 호각[互角]으로 싸우고 막대한 피해를
적군에게 입혔는지의 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원인에 대해서 증언한다.

가. 제 7연대는 방어 시설의 사전유비(事前有備]가 있었다.
제 7연대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춘천지구 방어를 위한
제 1대대에 진지를 중요한 곳에 구축해놓고 이 진지 점령에 대한
사전 훈련이 되어 있었다.


이 진지는 6ㆍ25 첫날 적군의 남침을 측방 또는 정면에서
저지 시키고 6ㆍ25 둘째 날은 적군을 옥산포에서 북쪽으로
쫓아 내고 큰 심리적 타격을 주며 아군의 사기를 충전시키는
거점 역할을 했다 .


이 진지구축 공사에는 춘천 남녀 고등학생까지 동원되어
군관민의 긴밀한 협조관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나. 아군 사단 포병의 활약이 크게 빛났다.
6.25 첫날의 우리 사단 포병의 활약을 눈부셨다.
제 7연대 제 1대대가 출동하여 방어 진지를 점령할 때까지





즉 25일 오전 10시 30분까지는
아군 사단 포병의 단독의 맹렬한
효과적인 집중 포격으로
북한 공산군 대부대가 5번 국도[화천 -춘천 가도]
한계울과 역골일대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어 춘천을 향하여
더 남진을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맨 윗쪽에 한계울과 역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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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아군 사단 포병은 아주 효과적으로 제 7연대를 지원해주었다.


다. 제 7연대는 공세적 방어를 했다.
6ㆍ25 첫날 야간에서 제 1대대 및 제 2대대에서 소수의
기습 부대를 적진 깊숙이 보내 야간 기습 교란 공격을 감행했고
연대 수색대도 그랬었다.


그리고 6월 26일 오전에 제 7연대 1대대가 옥산포의
적군 부대에
대한 기습 파쇄 공격은 아주 돋보였다.


라. 7연대 지휘관들의 전투 지휘력이 탁월했었다.

1대대 지휘관 김 용배 소령의 대담한 전투 지도도 돋보였고
7연대장 임 부택 중령의 대국을 보는 지휘도 빛이 났었다.


마. 지형은 방어에 유리했다.

국도 5번 도로[화천 -춘천가도]의 접근로는 대부대의 기동공간으로서는
너무 좁아 공격 대부대의 기동에 제한을 받아야 하고 46번 도로[양구-춘천]
접근로는 아주 협소하여 대부대의 기동 공간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북한강과 소양강이 춘천을 감싸주고 봉의산이
높이 솟아 방어에는 아주 유리한 지형이다.


제 7연대는 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전술적으로 잘 이용했다.
단 소양교를 폭파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었다.


바 .북한군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은 전투 경험.

제 7연대는 1949년 8월,9월에 인제로부터 관대리 [冠垈里-현재의 新南]
38 선을 넘어 온 북한군 1 개 여단과 맞서 8연대와 협조하여
약 1개월간의 전투 끝에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격퇴시킨 전투 경험이
있어 북한군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고 사기가 드높았다‘


4. 추가 부언

이상 춘천지구 전투 제 7연대 제 1 중대 전투 개요 기록은 내가 [이 대용 장군]
전투시 자주 기록해 놓은 수첩과 살아 오면서 출간한 ‘압록강 푸른 물’
‘통곡하는 승리자,‘국경선에 밤이 오다’등등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 쓰고 또한 나의 기억에 기초해서
제 7연대 제 1 중대의 춘천지구의 전투 경과를 그대로 적은 것이며
날짜는 추호도 착오가 없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 둔다 .
시간에 대한 오차는 반[半] 시간 정도는 있을 수 있으나 거의
대부분은 정확 할 것이다.


제 7연대 제 1중대의 기록은 정확하지만 타 부대에 대한
언급의 정확성은 그 당사자들에게 일임하는 것이며 나의 진술은
차질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니 타대대나 타 중대에 대한
나의 언급은 단지 참고로 할뿐이며 신빙성을 크게 두지
말 것을 부탁한다.

현재 발간된 전사 책자들에는 크게 잘못된 부분이 많다.
앞으로도 계속 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전사 수정 작업을
주의 깊게 하여야 할 것이다.


전사 기록은 정확한 진실성이 생명이다.
그렇지 못 할 때는 죽은 전사가 된다.
위선자들의 허위 선전의 도구가 된다. //끝//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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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춘천 전투 참전 중대장의 수기(3/4)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10.17 06:58

1950년 6월 27일 상황

(1) 봉의산 진지 방어 전투
6월 27분 새벽 4시경,
제 1 중대는 제 1대대에게 부여된 춘천 방어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서
석사동 숙영지를 떠나 봉의산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제 1 중대의 임무는 봉의산 기슭 후평동 쪽 낮은 능선을 따라 배치되어
우두동 여울[네다리 여울]을 도하하여 후평동 -석사동 방면으로 전진해오는
북한 공산군 부대의 예상 접근로를 차단하고 소양강변에서 북한 공산군
부대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제 1대대 잔여 병력은 제 1 중대 우측에 봉의산 일부와 후평동을
둘러싸고
배치되었다.


6월 27일 오전 8시경 우두동 여울[네다리 여울] 도섭지점에
북한군 부대의
모습이 나타나고 곧 이어서 약 1개 중대 규모의
북한군이 강변에 출현하여 도하 작전을 개시하였다,






봉의산의 우측에 있는 소양강 혈전장. 우두산 남쪽 내다리
여울을 도섭하던 북한군을 좌측의 1대대가 화력을
집중하여 격멸한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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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도하를 결심했던 것은 전면에 배치되었던 김 종수 소령의
2대대가 후방으로 철수해서 강변을 그대로 비워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측면에 배치 된 1 대대를 큰 위협으로 보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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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1 중대 방어진지에서 그 도하 지점까지의 거리는 가까운 곳에서는
약 1,000 미터 이고 먼 곳에서는 약 1,500m 쯤 되기 때문에 소총사격으로서는
큰 효과를 얻기 어려운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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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포에서 북한군이 1 대대의 함정에 스스로 들어오게 했던
장거리에 간격에 대한 방만심이 이들을 또 다시 섬멸의
함정에 스스로 빠져 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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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대 중화기 중대에서 배속된 수냉식[M 1917] 2정과
제 1 중대 화기 소대의 경기관총[M1919 -LMG] 2정은 효과적인
사격을 할 수가 있었다.



1917 수냉식 기관총[HMG] 통칭- 총신이 과열되지 않아 총신 교환없이
수천 발을 사격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무거워 잘 사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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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소총[BAR]도 이에 가담하여 제 1 중대 진지의 자동화기들은
맹렬한 집중 사격을 강변에 있는 북한 공산군과 이미 강물 속에
들어 선
북한 공산군에게 가했다,

16포병대대는 홍천 방면의 2 연대 지원을 위해서 대대본부가
홍천으로 이동하고 춘천에 1 개 중대가 남아있었는데
이 중대의 포들이 지원 사격을 했다.

제 1 중대의 60mm 박격포도 강변의 적군을 강타하고
제 1대대의 81mm 박격포 일부도 포사격에 가세했다.

여기에 더해서 홍천의 6사단 2 연대 소속의
57mm 포 두 문이 7연대 1 대대 지원을 위해서 가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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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mm 대전차 포는 원래 각 연대에 배속된 보병의 중화기였으나
6.25 사변 직후에 사단 포병으로 소속이 바뀌고 일부 장교들도
보병에서 포병으로 병과가 바뀌었다. 심 일 중위는
포병으로 전과했으나 이 훈 중위는 보병 병과에 그냥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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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視界)와 사계(射界)는 확 트여져 있어 우리 사격을
방해하는
요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제 1 중대 지역에 지원 나와 있던 이 훈 중위[8기 특]가
지휘하는 57mm 대전차 포 2 문도 인마 살상용 고폭탄[HE]을
맹렬히 퍼부었다.


허리까지 차는 수심 때문에 강물 속에 들어선 북한군 부대원들은
느리게 움직여서 우리 제 1 중대 진지로부터 비오듯이 쏟아내는
자동화기의 불벼락에 좋은 표적이 되어서 다수가 강물 속에서
사살되었다.


강변에서 움직이고 있는 후속 북한군 부대원들은 아군의
집중 사격에 지리멸렬상태로 빠져 살길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치열한 아군의 화력 속에서도 일개 소대 병력 30명 정도의
북한군이 일단 강을 건너는데 성공하였다.

우리의 자동화기와 포 사격들은 강을 무사히 건너온
적에게 집중했다.
순식간에 다수가 쓰러지자 도강 부대는 견디다 못해
다시 강을 건너 우두동 쪽을 되돌아 가면서
또 적지 않게 섬멸당했다.


벌겋게 물든 소양강물이 봉의산을 감싸고 흘러 내려갔다.
북한군을 사정없이 강타하던 두 문의 57mm 포가 갑자기 침묵했다.

이 훈 중위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단 시간내에
너무 많이 사격을 해서 포신이 뜨겁게 달아 올라
물을 축인 가마니를 번갈아 덮어가며 포신을 냉각시키고
있다고 했다,




57mm 포 - 소양강 전투에서 한국전 사상 최고 다량의
포탄을 발사했었고 전과도 최대로 컸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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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mm 포는 이날 7연대가 보유했었던 다량의 포탄을
공급받아 제한없이 쏘아댔다.
이 대용 장군은 두 문의 포가 100여발 이상 사격했을
것이라고 추상했다.

춘천 방어의 3 개 전투에서 포병들이 보병과 함께
큰 주역을 했다는 점에 전사적으로 유의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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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훈 중위는 말고개 전투에서 적 SU-76 자주포
측면에 직격탄을 날려 파괴한 공을 세웠다.

전후 대령 때 진해 육군 대학의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군을 떠났다.
퇴역후 심한 생활고에 버티지 못하고 인천 바다에
투신해서 생을 마감했다.

이 대용 장군은 이 훈 중위가 무척 똑똑한 인재였으
장군이 될 소양이 충분한 인재였었다고 그의 불행한
최후를 애석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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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거리 사격의 전투는 북한 공산군이 우두동 강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약 2시간 동안 계속 되었다.
북한군 약 2개 중대는 이 소양강 전투에서 완전 섬멸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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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개전과 함께 북한군의 선봉에 서서 남침한 북한 전차
T-34를 파괴하지 못해서 후세에서도 별로 좋은 선입감을
주지 못한 57mm 포지만 이 소양강 전투에서 장거리 사격으로
큰 활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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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부터 우리 제 1 중대가 봉의산에서 철수할때까지
우두동 도하 지점인 내다리 여울에 북한 공산군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2] 봉의산 방어 포기 석사동으로 철수.
6월 27일 정오 [12:00]가 좀 지나서 북한 공산군 자주포[SU-76]
소양교에 진입 빠른 속도로 굴러오고 그 뒤를 북한 공산군
보병들이 뛰어서 뒤따라 오고 있었다.

7연대의 봉의산 방어진지 일각이 뚫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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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사 편찬 위원회의 전사는 이 것들이 자주포가 아니라
춘천의 미 함락에 초조해진 북한군 2 군단장 김 광협이 양구 전선의 
정예 7사단과 함께 불러와 투입한 10여량의 T-34라고 말하고
있다.
7 사단은 전원 중국 내전에서 단련 된 조선족으로
구성 된 부대다.

상태가 안 좋지만 북한 7사단장
전 우의 드문 사진이다. 

군단장 김 광협과 같이 조선족이다.

김 광협과 전 우는 춘천 공격을 했던 2 사단장 이 청송과 함께
김 일성으로부터 지지부지한 전과의 책임을 추궁당하고
전부 해임되었다.
후임들에 김 무정이나 최 현같은 과격한
인간들이 임명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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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 중대 방어 정면에는 북한 공산군이
나타나지 않고
조용하였다.


6월 27일 정오를 전후해서 봉의산 정상과 그 북쪽 부분
그리고 소양로 일대에서 북한 공산군이 퍼 붓는 포탄은
무수히 떨어지고 있었다.

전날 밤부터 가해진 적 포격으로 춘천 시내에는 크고 작은
여러 화재가 발생했었고 주민들은 우왕좌왕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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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방어 전투의 최대 실수인 소양교 파괴 미 실행은
아직 전황에 낙관적인 판단을 하고 있던 사단장 김 종오 대장이
반격시를 대비해 파괴를 하지 않도록 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서울 방면의 비참한 국군 붕괴 사실이
제대로 전달 되지 못하고 있었다.

전방의 포병과 보병이 다 철수한 마당에 거칠 것 없었던
북한군은 그대로 도강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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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의산 동쪽에 배치되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봉의산
방어 중대인 제 1 중대에게 제 1 대대장 김 용배 소령으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온 것은 오후 15:00경이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1 중대장은 각 소대장을 불러 철수 명령을

하달하고 철수를 개시했다.
제일 후미 소대가 봉의산을 떠난 것은 오후 3시 50분 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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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적의 부대가 소양교를 건너 춘천에 침입하기 전
16 포병 대대 최 갑석 상사는 기민한 조치를 취했다.


강원도 지사와 만나 농협 창고에 보관한 정부미
반출을 동의 받아  군량미를
확보하고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정부 보유 휘발유를 인계 받아 부대의 기동력을
보강한 것이다.

덕분에 이 대용 장군은 7연대가 낙동강 전선까지 철수하며
싸우면서도 배를 곯은 기억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6사단이 계속 남하 철수하면서도 잘 싸웠던 것은 무기와
탄약을 보전할 수 있었고 충분한 식량과 연료를
확보한 것도 한 요소가 되었다.

남진한 중공군에게 포탄 수송중인 중공군 마차.
북한군도 초기에 우마차를 수송 수단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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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중대가 석사동 춘천 사범학교 남단에 있는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경으로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이 그곳에 남아서 제 1 중대를
마중해주었다.


최 영수 중령은 제 7연대는 내일 춘천 남쪽 원창 고개에서
방어 진지를 편성하고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시킨다고 말하고
우선 제 1 중대를 위한 저녁 식사 준비가 되어 가고 있으니
여기서 저녁밥을 먹고 학곡리를 지나 원창고개로 가라고 했다.


제 1 중대는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날 때 까지 일부 병력을
경계 배치하고 나머지 중대 장병들은 피곤한 몸을 풀기 위해
완전 무장을 한 채 아무 곳이나 쓰러져서 수면을 취했다 .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녁 식사 준비는 시간이 많이 걸려
제 1 중대 장병들을 깨워 가지고 저녁 식사를 분배를 할 때는
오후 6시 30분경이었다.


제 1 중대 장병들의 저녁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 경계병들과 북한군 정찰대 간의 교전이 벌어졌다.
북한군 정찰대원들은 불과 10여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사거리 12,000야드의 122mm 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 곳에 그대로 머문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8-900미터 떨어져서 쏘는 북한군의 소총탄은 제 7연대
부연대장 찝차 부근에도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 장병들은 빠른 동작으로 이곳을 철수하여
원창 고개로 향했다.


오후 7시 반 [19시 30분경] 학곡리 북쪽에서
제 1 중대를 기다리고 있는 제 1 대대장 김 용배 소령을 만났다.


이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 1 중대는 제 1대대 주력과 합류하여 제 1대대장 지휘하여
사래울 점말을 경유 대룡산[大龍山] 줄기의 수리봉[473 고지]
서쪽 산림 쪽에서 비를 맞으면서 밤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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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춘천 방어 마지막 전투이며 네 번째 전투인
원창 고개 전투가 6사단 7 연대 장병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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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용 장군의 대대장 시절 모습-
그는 6.25 전중 2년 동안이나 전선에서 중대장과
대대장으로 전투를 겪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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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1950 6월 28일 상황

[1] 금병산 방어 전투
6월 27일 밤과 6월 28일 새벽에 줄기차게 내리던 비는 새벽
4시경에 멎었고 하늘을 뒤덮던 구름은 걷혔다.

6월 28일 새벽 5시 [05:00]경 제 1 중대는 제 1 대대의 일부로서
수리봉 원창고개 -금병산[652 고지]를 연결하는 능선을 따라
서쪽에 있는 금병산을 향하여 이동을 개시하였다.
원창 고개 방어 임무는 제 7연대 제 2대대가 맡고 있었다.



남진하는 북한군  시각에서 본 원창 고개와 금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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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대대는 제 1 중대는 제 2 중대 제 3 중대 순으로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배치하여 금병산 능선 일대에 방어 진지를 형성 배치를
끝낸 것은 6월 28일 오전 8시였다.


6월 28일 오전 10시경 북한군 약 1개 중대 병력은 대대 방어
정면 중앙을
담당하고 있는 제 2 중대 지역을 공격해 올라오고 있었다.

제 1 대대 81mm 박격포의 지원을 받아 제 2 중대는 잘 버티며
약 2시간의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제 3 중대 정면에도 적군이 공격해 왔으나 제 3 중대는 이를
잘 막아냈으며 방어진지를 완벽하게 유지되었다.



옥산포에서 바라본 춘천 봉의산 그 앞에 소양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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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중대 정면에는 극히 소수[약 1개 소대]의 적군이 출현했으나
이것 역시 격퇴되어 제 1 대대의 금병산 방어진지는 계속
확보되고 있었으나 우측 원창 고개를 방어하고 있던 제 7연대
2대대는 오전 중에는 방어 진지를 잘 유지하고 있었으나 정오가
좀 지나면서 대대 병력이 원창고개에서 모래재 쪽으로 후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2 대대는 예정 된 철수는 했지만 적에게 만만치 않은
 타격을 주어 그들의 침공 계획에 큰 지장을 주었다.] (계속)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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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춘천 전투 참전 중대장의 수기(2/4)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10.17 06:56

18:00시 넘어 마지막 적의 4차 공격이 개시 되었다.

포 중대는 가래목 나루로 향하는
적 보병 대대를 보리밭에서
붙잡아 집중 포화를 가해서 삼거리
방면으로 도주하게 하였다.

전방의 1중대는 접근해온 적을 피해 500미터 정도 철수하여
방열한 후 직접 사격으로 적을 강타했다.

25일 위기의 순간에만 적에게 쏴댄 포탄만 무려
900발이나
되었다.
춘천 방어 전투 나흘 동안에 18 포병대대가 쏜 포탄은
보유탄 5,000 발 중에서 4,000발이었다.

소양강 이북의 16포병 대대는 이틀간의 눈부신 활약을 하고
26일 밤부터 적의 전체적인 압박으로  남방으로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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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한 북한군 간부 김 석용 씨 증언에 의하면 25일 침공을
개시한지 4시간이 지난 점심 무렵에 포 공격으로 북 2사단
포병대장 안 빈[安 彬] 대좌가 전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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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2사단은 원래 국군의 38선 경계 전투력이
강하여 6월 25일 당일은 돌파구 형성으로만 만족하려고 했으나
국군의 38선 경계 부대가 예상외로 빨리 와해되자
계획을 바꾸어 25일 점심까지 춘천을 점령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재빠르게 전개한 포병들의 맹렬한 저항으로 그 꿈을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



이 대용 장군은 오직 초반 포병의 활약이 있었기에 성공적인
춘천 방어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만약 포병이 없었다면 자주포를 앞세운 적은
당연히 25일 당일로 춘천을 점령했을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이 전투가 사농동 전개 2개 포병 중대의 중대장들이 서울로
교육  출장 미귀의 상태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특기 할만하다.
두 중대장은 당일 전투 중에 귀대하였다.

큰 공을 세운 김 성 소령은 고향이 이북으로서
후에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90년대에 서울 북방에서 양계업을 하며 어렵게
사는 것 같다는 풍문만 확인한바있다.


춘천 전투의 첫 장을 장식한 사농동의 포격전은 위에서
김 운환 장군의 수기를 바탕으로 간단히 요약했다.





18 포병대대장 김  성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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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춘천 방어 전투중 하이라이트인 옥산포 전투와
소양강 전투에서 활약한 7연대 1대대 1중대장인
이 대용 장군의 전투 수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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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연대 제 1중대 전투 개요.
자 : 1950년 6월25일
지 :  1950년 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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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상소집에서 제 1중대 방어 진지 점령
1950년 6월25일 장마철을 알리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 7연대 1중대장이었던 나는 이날 춘천시 죽림동에 있는
하숙집에서 일찍 일어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비가 내리는 가운데 포성(砲聲)이 은은히 들려오고 있었다.
-16 포병 대대들이 남진하는 적에게 연속 포격을 가하고
 있을 때였다.

-
포병의 전개가 얼마나 빨랐는지를 말해 준다.-

옛 춘천 봉의산 일대 항공 사진- 전면의 큰 산이 봉의산이고 왼 쪽에
소양교와 그 너머 사농동 일대[결전장 1]와 먼 끝에 옥산포 전투장[결전장 2]
이 있다.
봉의산 오른쪽 소양강이 구비치는 곳이 소양강 전투가 [결전장 3]있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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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도에 한국을 방문한 중국 동포는 미국이 남한을
사주해서 북한을 사주해서 먼저 북침하게 한 것이 6.25전의
시작이라는 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중국 인민 해방군에서 군 생활을 했던 학교 선생이었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막 무가내로 국군의 북침설을 주장했다.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했었기 때문에 북한이 반격했다는
북한의 거짓 주장을 중국이 학교와 사회, 군대에서 주입식으로
가르친 것이 중국 공민인 그의 머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 일성이 악당이라는 남한 사람들의 의식에는
전적인 공감을 표하면서도 6,25 북침설 인식은 버리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내가 준 책 1984년에 복간 된 이 대용 장군의
수기,‘국경선의 밤이 오다‘라는 책의 이 대목에서 비로소
북침설이 의심을 가지기 시작하더니 내가 건네준 여러 권의
국군 전사를 읽어보고 남침설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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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남침해서 포병이 치열한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 포병부대가 일요일인데도 저렇게 열심히 사격 훈련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무심히 흘려보냈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오전 8시 30분 경 나는 카키 군복에 우의를 입고
검은 긴 고무 장화를 신고 춘천 도서관[봉의산 기슭에 있는 미 문화원,
옛 일본 신사 건물]에 가서 책이라 읽으려고 하숙집을 나왔다.


내가 춘천 공화탕 앞에 이르렀을 때 제 7연대 제 1대대장
김 용배 소령이 급파한 제 1중대 연락병을 만났다.

북한군이 남침을 해서 비상소집을 한다는 급보였다.
춘천역 부근에 있는 제 7연대 본부와 함께 있는 제 1대대 본부로
달려갔더니 대대장은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돌파하고 이미 8km나
남진하여 춘천을 육박하고 있다는 상황 설명과 함께 제 1중대는
신속히 전투 준비를 하고 우두산 북방 약 3km 지점에
있는 제 1 중대 진지로 가서 진지 점령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52년 대대장 시절의 이대용 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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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용 장군의 개인 수기에서 보여 주듯 춘천의 6사단이
적의 내침을 미리 내다보고 전후 외출을 금지하고 비상
대기 중이었다고 쓰고 있는 글들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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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지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춘천 방어를 위해
각 고등학교 남녀학생들과 제 7연대가 공동 작업을 하여
1950년 방어 진지 공사를 완료하고 제 7연대 제 1대대는
일단 유사시에 이 진지를 점령하고 방어 임무를 수행하는
진지 투입 훈련을 해놓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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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지 구축 역시 6사단이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한 것이 아니라 육본의 긴급지시에 따라 실시했다.


이 대용 장군에게서 이 진지들이 일본군 출신이었던 7연대 작전주임
조 남호 소령이 미군 교범보다도 일본군 경험을 되살려 진지를
설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일본군이 다코쓰보[ 낙지 구멍]라는 개인용 참호
처럼 깊고 좁게 파고 이를 교통호로 연결했다는 뜻 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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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중대 본부로 뛰어 가서 중대 출동 준비를 명령하고
불이 나게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철모를 썼으나 군화는 두 컬레
모두 하숙집에 벗어놓고 고무 장화를 신고 왔기 때문에 중대
보급 창고에 있는 군화 중에서 골라 신으려 했으나 모두 작아서
못 신고 다급한 김에 방한화를 신어 봤더니 발에 맞는 것이 있어서
그대로 신고 M 2 카빈 총을 둘러메고 실탄을 탄대에 차고
제 1 중대 장병들을 정렬시키고 인원을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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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용 대위는 이후 하숙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 대용 대위가 하숙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9.28 수복후
국군이 북진할 때였다.


그러나 하숙집은 폭격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주인 부부도 행방불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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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중대 장교 4명이 모두 집결하였다.
그들의 명단과 직책은 다음과 같다.


제 1 중대장
중위 이 대용 [육사 7기]
제 1 소대장 중위 한 도선 [육사 8기]
제 2 소대장 중위 강 구석[육사 8기]
제 3 소대장 소위 손 종구[육사 9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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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소대장중에 한 도선 중위와 강 구석 중위가
낙동강 전선에서 전사하고  
3년 뒤 1953년 금성 전투에서
전사해서 전쟁중 세 명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 대용 장군은 세 명의 소대장 중에서 특히
용맹무쌍했던 1 소대장 한 도선 중위에 대한
추억을 자주 언급했었다.


그는 7월 점촌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평안도가
고향이라서 남한 땅에 그의 호국 영현을 돌 봐주는
친척 한 명도
없는 것이 더욱 애처롭다는 생각을 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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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토요일에 외박 나
사병중 약 40명이 아직도 중대에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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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용 장군의 윗 기록 역시 기습을 당한 국군 사단중에서
6사단만이 유일하게 적의 도발을 예감하고 전 장병의 외출을
금지하고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기존의 기록들이 사실과
다름을 알 수가 있다.


포병 김 운환 장군은 당시 국군의 급식 사정이 너무 열악하여
지급되는 식량으로는 전 장병을 배불리 먹이기가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병력의 30%는 휴가를 주었고 주말이 되면 장병들을
외출을 내보내 남게 되는 쌀로 남은 겨우 장병들을
배불리 먹였다고 했다.

이 휴가와 주말 외출은 1950년 4월과 5월에 적정이 심상치 않아
전군에게 하달된 비상태세 상태에서도 어쩔 수없이 비공식적으로
행해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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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대 선임하사관 이 한직 상사에게 중대에 남아서
이 약 40명이 복귀하는대로 제 1 중대 방어진지로 급파하라고
지시하고 대대장이 준비해준 4대의 2.5톤의 GMC 군용트럭에
중대 전투원을 태워 가지고
속도를 내어 우두산 북방에 있는 여우 고개로 달렸다.

[ 이 한직 대위는 낙동강 전선에서 전사하게 된다.]

우두동을 지날 때 아군 사단 포병[105 ,HOW.M3]의 발사 포성이
우두동을 진동시키고 있었으며 옥산포 쪽에는 북한 공산군의
머리에 포탄이 작렬하고 있었다.

급한대로 제 1 중대는 여우고개를 넘어서 약 5-600미터 더 가서
하차하여 모두 뛰어 가서 북방 약 2km 지점에 있는 준비된 진지를
점령하였다.


6월 25일 1대대의 이동 경로를 보여 주는 지도다.
이대용 중대는 아래 소양교를 건너 북상, 여우고개[X를 지나 표시를
한 164 고지 북방 참호 진지에 투입되었다.  
-------------------

164 고지 - 사진 촬영을 한 날 6.25처럼 비가 많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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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결된 능선 진지는 북한군의 침공 루트와 길게
평행해서 길게 형성 된 능선으로서 침공로에서 1.5 km
쯤 떨어져 있다.


적 침공 대비 침공 방어 진지로서 너무 멀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북한군은 1.5km의 간격에 방심하고 국군에게
측면을 보여주며 남하했었다.


이 방심이 결국 북한군이 7연대 1 대대의 함정에 걸려들어
격멸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춘천 전투에서와 같이 적의 예상 공격로에 평행한 고지를
점령해서 방어 진지를 만드는 것은 국군 중 대대 전술에
교리 발전을 위한 한 사례로서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

이 때가 대강 1950년 오전 10시 반경이었다.
제 1 중대가 진지를 점령하고 서쪽과 북쪽을 바라보니 아군 사단 포병은
역골과 한계울 쪽의 북한 공산군 부대를 효과적으로 집중강타하고 있었다.
춘천시에 제 1 중대 본부에 잔류하고 있던 이 한직 상사는
외박으로부터 중대 본부에 돌아 온 사병들을 계속
제 1 중대 진지로 보내 주고 있었다.


그날 해질 무렵까지 외박 나갔던 제 1중대 사병 약 40명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 1중대 방어 진지에 와서 배치되었다.

2.춘천 지구 전투의 제 1 중대 상황

가 . 1950년 6월 25일 상황
제 7연대 제 1 중대가 사전 준비된 중대 방어 진지를 점령하고
약 30분후인 6월 25일 오전 11시 경 북한 공산군 약 1개 소대 병력이
금광의 서쪽 능선끝 부분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우리
제 1 중대는 사격으로 [60mm 박격포, 기관총, 개인화기]으로 이를
집중 공격하였으며 이 북한 공산군 소수 병력은 제 1 중대 전방
약 400미터 지점까지 내려왔다가 북쪽으로 퇴각해 버렸다.
교전 시간은 약 1시간이었다.


이 교전이 끝나고 점심 식사가 운반되어 와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귀대 사병들을 인솔하고 온 이 한직 상사가 “ 중대장님!
저기 인민군 탱크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며 손으로 가리키는
서쪽을 보니 북한 공산군 탱크 5대가 옥산포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 탱크들은 사실은 북한 SU-76 자주포였으나 우리는 그것이
탱크로 오인하고 있었다.


오후 4시 [16:00] 제 1 중대 전면에는 또 약 1개 소대의 북한군이
출현하여 사격을 가하면서 우리 제 1 중대 정면에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어 우리 제 1 중대는 오전 11시 경에 한 것과
마찬가지로 박격포, 기관총. 자동소총, 소총등으로 응사하여
이를 북으로 격퇴시키고 방어진지를 고수했다.
이 때의 교전 시간은 약 2시간이었다.


이들 북한 공산군 소규모 병력을 5번 국도를 축으로 하여
주공을 펴고 있는 북한군 주력을 측방을 엄호하는
수색대[정찰대]같이 생각되었다.


164 고지 남쪽 능선. 옥산포에서 정동쪽으로 최단 거리다.
이곳의 능선이 1 대대의 돌격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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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야간 상황

6.25일 야간에는 우리 제 1 중대는 중대 정면인 금광터 지내의
남쪽 한계울 등 지역에 60미리 박격포 포탄 사격을 가하여
적진지를 교란시켰다.
이날 밤 북한군과의 교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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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6월 25일의 첫날에는 보병들의 본격적인 대반격전은 없었다.
다음 날인 6월 26일이 7연대 1 대대의 분전이 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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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1950,년 6월 26일 상황

6월 26일 아침 일찍 옥산포를 점령한 북한군에 대한
파쇄 공격[destroying attack]이 전일 [6.25일]오후 일찍부터
옥산포 일대를 점령하고 춘천시로의 진격을 목전에 두고 있는

북한 공산군 부대에 대한 측방 기습 파쇄 공격 명령이
제 7연대 본부로부터 제 1대대에 하달되어 제 1대대 중대장들은
대대장 김용배 소령이 있는 164 고지에 불려가서 옥산포
북한 공산군 부대에 대한 공격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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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돌격은 고지에서 옥산포 일대 북한군의 경계 태세를
면밀히 관찰하던 대대장 김 용배 소령이 드디어 적의 허점을
맹공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연대장 임 부택 중령에게
긴급 건의해서 단행된 것이다.

김 용배 소령은 경북 문경 출신으로서 이 대용 대위가 6.25 전중
가장 뛰어났던 전투 지휘관으로 격찬한 분이다.


김 용배 소령은 며칠 뒤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951년 
1951년 7월 2일,7 사단  5연대장 재직시
적의 포격에 전사했다,
전사후 정부에서 준장으로 추서했다.


평소 부하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 하지 않는 온후한 성품이었지만
전투에 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대담함과 명석함을 발휘하였다.


이 대용 장군의 이 날 김 용배 소령이 옥산포의 적에게 장거리 돌격을
결단한 것은
전투 중대장인 자신의 입장에서도 감히 상상도 못할
과감한 전투 지휘였다고 한다.

이 대용 장군의 여러 수기와 강연들에서 이 분에 대한 회고로
알려지게 되어 그 분의 전기인 “ 세월의 이끼에 가려진 보석”
이라는 책도 출판되었고 고향인 문경에 용배 공원이라는
추모 공원도 생겼다.



용산 전쟁 기념관의 김 용배 장군 흉상.

전쟁중 누구 못지 않은 전투 경험을 많이 축적했었던 이 대용 장군은 
몇번이나 6.25전중 최고의 명장중 한 명은 단연 김 용배 장군이라고 회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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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고지 북방 능선에 배치 되었던 1 대대 주력은
은밀히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옥산포 최단거리 능선에서 돌격 준비를 했다.

오전 10 시경에 옥산포 일대의 적에게 포병의
준비 사격이 시작되어 30분간 집중적인 포격이
행해졌다.

오전 10시 30분 공격 개시선을 넘은 제 1중대는 좌측의
제 3중대와 함께 제방을 터뜨린 홍수와 같이
옥산포에 고함과 사격의 노도와 같이 쏟아져 내려갔다.

선두 보병이 옥산포에 접근 시점에 포병의
사격이 연신되며 종료되었다.

옥산포는 순식간에 점령되고 북으로 도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하는
한 편 옥산포내 각 가옥에 숨어버린 북한군에 대한 수색 소탕 작업을
전개하였다.

옥산포 점령과 동시에 추가 투입된 제 2중대에게 제 1 중대는
옥산포 동네의 주택 수색 소탕 작전을 넘겨주고 제 1중대는 도주하는
북한군 부대를 추격하여 옥산포 북방 삼거리를 지나 지내리에서
내려오는 개울다리까지 진출,북쪽을 향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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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격은 내침한 적을 격파하고 북진했었던 6.25 최초의
전투였다.


1대대가 파쇄 공격을 가한 거리는 대단히 멀었다.
무려 1.5km의 논과 밭을 가로질러 돌진했으며 이에 LMG와
60mm 박격포가 이 돌진에 가세했다.


나중의 전선 고착후 고지전 때 돌격거리는 수류탄
투척 거리의 밖에서 실시되었다는 사실과 비교가 된다.


장거리 돌격의 성공은 국군 전사의 교리 발전에서
관심 있는 연구 대상이다.


26일 164 고지 능선으로 부터 옥산포에 가해진 7연대 1 대대 부대원들의 총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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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진 북한군은 SU-76 자주포 5량을 옥산포에 버리고 도주하였다.
이중 1량은 북한군의 방화로 파괴되고 도주하던 승무원 두 명이 사살되었다.
옥산포에서 패주한 공산군은 모두 한계울 역골 방향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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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76 한 량의 승무원들은 포탑 내부에 인화물을 쌓아 놓고
그 위에 76mm 포탄들을 얹어 놓은 상태로 불을 질러
자주포를 파괴했다.

비행모[ 소련제 가죽 전차병 헬멧]를 썼던 전차장이

소지했던 토카레프 권총은 이 대용 장군이 노획해서 사용했다.


적이 유기하고 도주한 SU -76들은 아쉽게도 예인할 방법이 없어
그냥 놔두었다가 철수하는 바람에 북한군이 다시 회수해갔다.




SU -76 자주포 9.28 서울 탈환 작전 때도 최후까지 시내에 남아
저항하다가 파괴된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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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약 3시간 후인 오후 2시[14:00]경,북한군 부대는
자주포 5 량을 앞 세우고 한계울 방향으로부터 남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계울 - 지도 참조]
피아간의 공방전이 약 4-50분 전개되고 있는데 164 고지에 있는
제 1대대장 김 용배 소령으로부터 제 1 중대를 위시한 옥산포에 있는
모든 중대에게
옥산포를 이탈하여 원진지로 되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옥산포 적 부대 파쇄 공격의 작전 효과는 이미 거두었고 병력이 열세한
제 1대대는 구축된 진지가 없는 옥산포에서 보다는 호가 깊이 구축된
능선에서의 방어 전투가 더 중요하다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었기 때문이었다.


제 1 중대가 원 방어진지에 되돌아 와서 중대 방어 재배치가
다시 끝난 것은 6월 26일 오후 4시 30분[16;30 분]경이었다.


6월 26일 오후 6시 30분경 갑자기 제 1대대장 김 용배 소령은
예하 각 중대장들을 164 고지에 집합하도록 했다.

1. 그 곳에는 양구 방면에서 내평을 거쳐 춘천시로 진격해
내려오는 북한군을 내평에서 방어하고 있던
제 2대대 제 7중대장 이 건옥[육사 7기]중위가 소대원 7-8명을
거느리고 와 있었다.


피로에 지친 모습이었으며 그는 양구로부터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부대가 오늘 밤에 아마도 샘밭을 거쳐 우두동 여우 고개까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제 1대대 일부 병력으로 한계울의 북한 공산군 부대에 야간
기습 파쇄 공격을 계획하고 있던 제 1 대대장 김 용배 소령의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됐다.


때를 같이 하여 제 7연대 본부로부터 “ 제 1대대는 양구로부터
내려오는 북한군 부대에 의해 후방을 차단당하게 되니
6월 26일 일몰(日沒)과 동시에 우두동 남동에 있는 네다리 여울을
건너서 소양강 남쪽 석사동에 집결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2] 방어진지 철수 석사동으로 철수.
제 7연대 제 1대대는 제 7연대장 명령에 따라 6월 26일 저녁 식사를
일찍 끝내고 철수 준비를 한후 일몰(日沒)과 동시에 점령확보하고 있던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철수 작전을 개시하였다.


제 1 중대, 제 3중대, 제 2 중대 순으로 우두동으로 이동, 우두동
동쪽 남단에 있는 도섭가능한 네다리 여울을 건넜다.
여울의 수심(水深)은 사람의 허리까지 찼다.


도섭이 가능한 우두동 네다리 여울의 나투터 정면 넓이는
150m 내지
200m 쯤으로 보였다.
제 1 중대는 춘천시 후평동을 거쳐 춘천시 석사동 야산으로 갔다.
제 1 대대 전병력을 그곳 야산 맨 땅위에 누워서 수면을 취하며
밤을 보냈다.(계속)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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