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비들 고사시킨 전투 경찰의 매복 전술 2편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06 08:23


 


처형을 앞둔 경찰관 살해 공비들 .
경찰을 죽이고 탈출을 시도해서 전원 사형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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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있기는 한 고역이었다.

참기가 어려워 뒤척이는 순간 누가 신호를 보냈다.

“쉿!”

분명 적이 멀리서 흔적을 보였다.

공비들은 한 줄로 서서 달빛 속을 걸어왔다.

공비들 특유의 악취가 산들바람을 타고

먼저 대원들에게 도착했다.

대원들은 아연 긴장했다.


공비들이 마을 앞을 태연자약하게 통과해서 오는 것을 보니

과연 소문대로 대장 외팔이는 대담한
성격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공비들이 고추밭에 들어서자 마른 고춧대가 사각거리며

소음을 냈다.


공비들 특유의 악취가 짙어 지더니 불규칙한

발자국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그리고 어둠 저편에서 공비들의 상반신부터 노출이

되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공비들이

잠복 지점으로 들어섰다.


20미터, 10미터, 5미터, 소총을 든 공비 선두 첨병이 

내 앞을 지나갔다. 등의 짐을 이기느라 고개를 앞으로

뺀 적들이 2,3미터 간격으로 우리 앞을 통과하고 있었다.


완전한 돌출 타겟이었다.

네 명이 나의 정면을 통과했던 순간이었다.

“ 쏴라!”


빠바바앙 -!

일제 사격에 돌출 사격은 무너져 내렸고

대원들은 스프링처럼 공비대열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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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았던 월남의 매복전에서도 일제 사격과 크레머를

터뜨려 적에게 섬멸적 타격을 가하고도 이렇게 총검돌격을

하는 일은 없었는데 하여튼 이 시절 한국 전투경찰이
대단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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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닥쳐야 할 육박전의 대상은 없었다.

기습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적 두어 명이 노루처럼

이리저리 뛰어 달아나는 뒤에다 대고 대원들이 따라가며

총을 쏘았다.


미처 짐을 벗지 못한 적 한명은 총 개머리 판에

타격되어 생포됐으며 나머지는 총이나 약탈 짐을 지고

둑길 아래에 쳐 막혀 있었다.


생포 1명에[김경준, 선전책] 사살 5명의 전과였다.

일차 타격으로 부안 공비 9명중 6명을 섬멸 한 것이다.


생포자가 머리에 손을 얹고 끌려오자 나는

신원확인 질문으로 시간을 끄는 사찰계장과 우두거니 서있는

경비계장을 제치고 이들을 직접 심문했다.

“ 제 2의 비상 집합 장소는 어디냐?”

“-----”
“제대로 말하면 살려 주겠다.그렇지 않으면--”

즉결 처분한다는 위협이었다.


“천연암 아래요.”

“제 3의 장소는?”
“그 너머 고지라우.”

“무장은 소총 몇 정이었나?“
”석 자루 뿐이었어유.“

소총이 3 정뿐이라면 달아난 적은 모두 비무장이라는

결론이다. 시체에서 거둔 총이 석 자루였다.


나는 경비계장에게 생포자를 재갈 물리고 앞세워

곧바로 제 2, 제 3의 비상 장소를 찾아가도록 시켰다.

대원 중 6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나와 사찰 계장은 공비 시체 검사를 맡았다.

내가 죽은 공비들 시체에 섞여있는 외팔이의 시체를 검사하고

있는 동안 주변을 돌아보던 대원이 비명을 질렀다.

“어! 이거 멀쩡하네!“

하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죽은 시체로 보였던 공비에서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놔라! 이 싸가지 없는 개들아!”


나는 달려가 보았다.

여자 공비였다.

허벅지에 중상을 입고 다량의 출혈을 한 것이

어둠 속에서도 확인 되었다.

그녀는 악을 쓰며 죽여주기를 원했다.

“언제 입산했나?”

“묻지 마라 이놈아 ! 나는 혁명 전사다 어서 죽이라 !”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싶었다.


그 녀는 결국 힘을 모아 “조선 의용군가”를 부르고

대원에게 처형당했다.


도주한 두 명의 공비는 제 2의 접선장소에서

체포가 되었지만 한 명은 끝내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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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공비중  한 명인 임한근은 김두운씨와

줄포 국민 학교 동창으로 밝혀져 그가 구해 내려고 노력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친구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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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공비들도 군경이나 그 가족들을 함부로 죽였지만

군경도 포로들을 가차없이 즉결처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날 붙잡힌 포로 세 명도 김두운 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찮게 생각한 부안 경찰서 사찰 계장이
모두 사살해버렸다.

어두운 한국사의 한 시절이었다.

김두운 씨는 이 사건뒤에 생포한 공비는 처형이 아니라
반드시 설득하고 감화시켜 전향시키기로 맹세했다.



죽음이 일상화 되었던 6·25전쟁후 한국.
여순 사건때 반란군들이 학살한 무고한 양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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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가 있다.

전쟁이 터지고 김두운 씨는 동료들과 다급한

후퇴 길에 올랐다.

시골 고향에서는 형님이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날 도주했던 공비가 따발총을 가진 무장병을 데리고

김두운 씨 가족을 몰살하러 왔다가 다행히 동구에서

형님을 만나 이미 김두운 가족이 좌익에게 다 죽었다는

말을 듣고 혀를 차며 그대로 돌아갔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중국에서 공산화 대박을 터뜨린 모택동의 신화를

재현할 꿈을 가지고 입산했던 수 천 명의 남한 공비들은

모두 섬멸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로 소위 유격활동을 할 구역이 너무 좁았고

주변도 인구 밀집지역으로 뻗어나갈 공간도 없었다.


두 번째로 북한과의 연계 실패다.

북한은 공비들이 다 섬멸되기는 손가락을 물고 구경만

했지 한 푼의 지원도 해주지 못했다.

해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가 식량 확보의 실패다.

이것은 첫 번째의 실패이유와도 연관이 있다.

빨치산들은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고

식량을 공급해줄‘해방구'도 인구 밀집의 남한에서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전투 경찰 경비아래 수확하는 농민들.
이 단계부터 경찰은 식량을 공동관리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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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공비들의 이 약점을 파고들었다.

공동 추수를 독려하고 수확물은 지서에 공동으로 보관시켰다.

부락민들은 식구의 한 끼만 가져가서 밥을 해먹도록 했다.


쌀이 손에 안 들어오자 공비들은 식량을 찾으러 민가로 내려왔다.


경찰은 이들을 매복전술로 맞받아 쳤다.

식량이 이들 입으로 가져가기 직전 좌절시키는 작전이었다


마침 내가 찾아낸 더 큰 경찰 매복 전술의 성공적인 사례를 

조금 이른 시기의 것이지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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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산의 식량 사정은 더 나빠져서 대원들이 며칠씩 굶는 날이

  많았다. 1950년 4월 16일 도당 간부 몇 사람만 남겨놓고
  무장대원
40명 비무장 대원 20명, 모두 60명이 합쳐
  보급투쟁에 나섰다.


  구례 간전면 제기암 골에서 백운산 상봉은우회하여

  진상면 야지로 나가려는 것이다.

  그것은  결사적인 시도였다.

 

  이틀간의 잠복 끝에 가까스로 식량 확보에는 성공했으나 
  돌아오는
도중 고리봉[상봉]근처에서 앞질러 와서 매복하고 있던

  경찰에게 퇴로를 차단당했다 .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쫓기며 귀환을 시도했으나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경찰의 추격으로 겨우 20명 정도만이 살아
  돌아왔다.


  이로서 전남 도당은 큰 타격을 입었고 식량을 비롯한
  제반 사정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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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은 시간이 지나고 경찰이 매복 토벌을 체계화 하자

식량 확보는 이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전쟁 후반은 공비들은 식량 확보에 모든 전력을 쏟는

기현상의 유격전이 벌어졌다


공비들에게 식량은 생명이었고 이의 확보가

바로 전쟁이자 전투였다


식량 약탈은 보급 투쟁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계급투쟁이 공산주의자의 목표인데 남한의

공비들은 식량약탈 투쟁을 주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농민해방이니 부르조아지 타도니 남조선 혁명이니

하는 때깔 좋은 소리는 그들에게서 잊혀진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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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은 자주 저녁 식사시간에 동네를 급습했다.

식구들의 밥상을 통째로 빼앗아서 미친 듯이 쓸어 넘고도

부족해서 밥을 더 담은 밥그릇을 가지고 다니며 게걸스럽게

밥을 먹을 정도로 굶주렸었다니 공비들의 뱃속

사정을 짐작할 만하다.



항공 촬영한 호남 농촌지역
공비 아지트가 있는 산에는 식량이 없었다.
식량 공급처인 농촌지역의 확보 실패가 공비를
죽음의 보급투쟁으로 내몰았다.

공비들이 식량을 구하러 이 농촌으로 오는 길에
경찰이 설치한 '매복'이라는 죽음의
덫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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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쌀 강탈해간다는데 좋아할 농민들이 없었다.

인심은 당장 돌아서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에 호의를 가지던 주민들도 한번 이라도

약탈을 당하면 당장 경찰 편으로 돌아섰다.


물고기인 공비들의 물이 되어줄 농민들은

그들을 적대시하고 경찰 토벌에 협조했다.


그러나 공비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보급투쟁은

더욱 먼 거리까지 확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결국 자기들에게 등을 돌리는 주민들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고 오고 가는 장거리에 여러 매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짓이었다.


과거 빨치산 생활을 경험한 분에 의하면

공비들이 마치 침투 간첩이 하듯 식량 약탈의

루트를 개척해 놓으면 경찰들이 단 시간 내에 귀신 같이

파악해서 매복을 했다고 회고했다.

즉 자신들의 아지트는 수십겹의 경찰 매복의 그물속에
있었기 때문에 보급투쟁은 목숨을 걸어야 했었다.
앉아 있어도 죽음이 있었고 서서 움직여도 죽음이 있었던
것이 공비들의 운명이었다.



희생당한 전투 경찰 박원기의 장례식.
그칠 수없는 어머니의 통곡이 너무 슬프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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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의 공비들은 모택동의 정강산이나 연안의 화려한

꿈 대신 거지와 도둑이 결합된 화적떼로 퇴화하여 볼품없는
소멸의
길을 갔다.


식량 부족이 공비들을 말려 죽인 것이다.

공비들을 말려 죽였다고 할만한 매복전술은

한국의 전투경찰들이 몸으로 부딪히고 희생하면서 터득한 것이다.


한국 전투 경찰의 매복전술은 육군 대부분의

전술 교리가 미국 FM에서 가져온 것에 비하면 토종

한국형 전술이다.


나의 좁은 지식에 나중에 채 명신 장군이 월남에서 사용했던

중대기지 전술과 중공군 인해전술에 수류탄 대량 투척으로 맞섰던

고지 방어 전술 외에 이에 비견할 특별하게 폭 넓게 적용된

한국형 유명 토종 전술은 생각나지가 않는다.


군사 전문가들은 군의 환경을 맞추어서 자생적으로 창안되고

개발된 전술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중국 모택동의 유격 전술이나 이스라엘 군대가 개발하고

활용해온 이스라엘 식 전격전 전략은 이 말을 증명해준다.


나는 20년 전 남아공의 특수 부대가 사막거주 부쉬만 종족들의

비법인 동물이나 사람 발자국 추격 술을 세세하게 캐묻고
연구하고 체계화해서 특수부대 교육용 매뉴얼로 만든 것을
보고 감탄한바 있었다.

특수부대는 이 교범으로 부대원를 훈련시켜 반도들의
추적 작전에
활용했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6·25전쟁 이나 월남전중 선배들이

몸으로 희생하며 터득하고 개발한 전훈을 교리로서

정리하는 측면이 매우 부족했다.


6·25전쟁 후 전투경찰의 매복 전술의 세련도는 분명 육군의

그것보다 한 수 앞선 것이었다.


한국 전투경찰의 매복전술이 정리되고 교범으로 정리되어
후배들에게 전달이 되었더라면
월남전등에서나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고 한국의
전투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을 것이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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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이아빠 2010.07.06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서장 노년 모습입니다.. http://www.wonbuddhism.or.kr/wonnews/interview/i1108.html

  2. 냥햏 2010.07.07 0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ㄱ-; 안그래도 소통이 잘 안된다는 평을 듣는것 같은데 .. 뎃글마저도 '승인'이 필요한건가요? 가끔 와서 좋은글 읽고 갑니다만 .. 운영 방식이 너무 구시대적인 것 같아 안타깝네요.

  3. Gray 2010.07.11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읽고 갑니다.

  4. 요츠 2011.05.23 1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이 뜨질 않네요..
    사진을 보고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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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상공의 캐나다産 F-86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6.09 12:42

 

6·25전쟁중 캐나다는 영연방의 일원으로
육상 전투 부대와
해군의 구축함을 파견에서 싸웠지만
공군 부대는
전투기의 유럽 파견으로 여유가 없어서
파견하지를 못했다.



캐나다 제 F-8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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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2명의 캐나다 전투기 조종사가 한국
전선에 파견되어
미 공군의 F-86을 몰고 압록강 상공에서
공산군의
미그-15기와 싸웠다.


캐나다 조종사들은 실전경험을 쌓으려는 캐나다 공군의
희망에 따라
교환 프로그램으로 미 공군에 배속되어
실전을 경험했었다.


이 교환 프로그램은 미 공군이 미 해군이나 해병대와도

공동 실시하는 것으로 미 최초 지구 선회 우주인 미 해병대
조종사
존 글렌 중령[후에 상원의원]은 F-86으로 출격하여
9일 간 미그기 3기를 격추하였다.


그렇지만 캐나다산 F-86기는 한국 전선에 출동했었다.

이 캐나다 제 F-86기들은 캐나다 조종사들이 조종하지 않았었다.


말이 왔다갔다해서 이상하지만 여기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캐나다의 공중 곡예팀 골든 호크팀이 운용하던
황금색의  F-8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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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항공전 최고 스타 미국 노스 아메리칸 사
F-86기부터 알아보자.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미 최신예기 F-86는 아직 미국에

있었다.

그러나 1950년 11월부터 북한 상공에서 소련제 미그기가 
도전해오자 미군은 그 예기치 않았던 공산기의 성능에 경악했다.


그 전투기는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한국 전장에 투입한
어떠한 전투기보다도
더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놀란 미군은 본토에서 F-86A기를 가져와 긴급 투입했다.

미그 15기가 F-86보다 속도나 상승력에서 약간 나은 점도 있었지만

사격 조준 장치라던가 엔진의 내구성등, F-86은 미그 기보다는

한 수 위의 전투기였다.


이 신예기가 투입되어서야 겨우 미그 15기의 위협을
압도할 수 있었다.


F-86은 3년 가까운 6·25전쟁에서 대활약을 했었다.

뛰어난 비행기의 성능과 우수한 조종사의 솜씨로 미공군은
공산 공군에게
 10대 1의 우수한 전과를 거두어 800기의
공산 적기를
북한 상공에서 격멸했다.

[요즘 들어 이 격추율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설도 나오고 있다.]


F-86기는 2차 세계 대전의 최우수기라는 평가를 받은

F-51 무스탕 기를 탄생시킨 미국 노스 아메리칸 항공기
제조회사
가 미 공군이 내건 까다로운 스펙에 맞추기위해서
고심스럽게 개발해서 한국전쟁 2년 전에 탄생시킨 전투기이다.


F-86 디자인에는 전후 미군이 독일에서 압수해온 Me-262기의

설계 기술이 대폭 유입되어서 활용되었다.

제비 날개처럼 뒤로 제켜진 후퇴익이나 수평타등은
독일 기술 차용의
결과였다.



메사슈미트 Me-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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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선에서의 대 활약은 F-86기를 세계 각국의 공군들이

욕심내는 전투기가 되게 하였다.



영국 공군의 캐나다제 F-8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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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나 일본 대만은 물론 아시아나 중동, 남미, 유럽의
여러 나라가 F-86기를 자국 공군의 주력기로 선택했다.


다시 말하면 6·25전쟁의 활약을 바탕으로 F-86기는 50년대

세계의 대표 전투기라는 명예를 누릴 수가 있었다.


실전에서 F-86기는 세월이 한참 흐른 1972년대
인도와 파기스탄의 전쟁에서도
사용될 만큼 장기간 사용되었다.


노스 아메리칸 회사는 총계 10,000기
정도의 F-86기를 생산해냈다.

이 회사는 나중에 록웰 인터내셔날이라는 회사와 합병했고

이 회사는 나중에 보잉사에 합병되었다.


여기서 캐나다 산 F-86기에 대한 소개를 한다.

최신 F-86기의 성능을 탄생 때부터 지켜본 캐나다는

1948년 미국과 교섭하여 노스 아메리칸 회사의 전투기를

캐나다 내에서 라이센스 생산을 추진했다.

생산을 담당한 캐나다 항공기 회사는 몬트리얼 소재
캐나다에어[CanadAir]
항공기 제작사였다.


이미 상당한 기술을 축적하고 있던 캐나다 회사는
10년간 6가지 모델의
F-86기를 생산해냈다.


캐나다 산 F-86기의 총수는 2,000여기에 달한다.
[캐나다 산 F-86 후계기도 역시 미국 F-104의 캐나다
라이센스 생산형이었다.] 


캐나다는 F-86기의 생산에 비록 미국의 기술을 가져왔지만
점차 엔진을 포함한
부품등 모든 것을 100% 캐나다 국산으로
제조했다.


캐나다는 F-86앤진까지도 국산화 했다. -캐나다제 오렌다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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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산 F-86기들은 성능이 좋다는 평판이 퍼져서
영국은 물론 독일이나 터키 그리스등에 수출했었다.



그리스 공군의 캐나다제 F-8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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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캐나다 F-86기를 도입한 국가 중에 놀랍게도
F-86기를
생산하던 미국도 있었다.


미국은 캐나다 F-86 60기를 도입해서 대부분을
한국 전선으로 보냈다.

미국이 도입했던 캐나다 F-86기는 미국의 E형에 해당하는

MARK- 2로서 캐나다 산 F-86기의 두 번째 모델이다

총 350기가 생산되어 그중 3기는 영국으로 보냈고
캐나다 공군이 287기를 구입했고
 60기는 미국으로 보냈던 것이다.

한국 전선으로 다시 이동했던 캐나다 F-86기들은 물론
미 공군이 사용했으나
이 중 20기는 6.25 참전
남아연방[남아공] 공군에게 대여되었다.



남아연방[남아공]의 캐나다제 F-8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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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연방 공군은 1950년 가을부터 참전하여서 유엔군의
진퇴에 따라 한반도의 여러
기지를 전전하며 싸웠었다.


전쟁내내 F-51기를 가지고 출격했으나 1953년 1월 오산 기지에서

미군으로부터 F-86을 인수받아 훈련을 마치고 그 해 3월 11일부터

압록강 상공에 출격했다.


[일부 외부 기록은 이때 남아공 공군이 F-86F 기로

기종 전환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정보다.]


남아연방 공군은 한국 전쟁중 힘들고 위험했던 미션을
수행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참전 총 97기의 F-51기가 참전해서 이중 74기의 손실을
입었고
 34명의 조종사와 다른 승무원 두명 등 합계 36명이

전사했었다.



남아연방의 한국 참전 F-5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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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공군은 전쟁의 종료를 앞두고 수개월 동안
운용했던 F-86중
4기가 전투 출격에서 격추했다.


남아공 공군은 전쟁이 종료되고 얼마 후 F-86기들을
미 공군에게 반납하고
귀국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조종했던 캐나다제 F-86의 성능에 크게 만족하여

귀국 후 미국아닌 캐나다로부터 더 신형인 마크 9형의 F-86기
34기를 도입했었다.



남아연방의 조종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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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매니아들에게 6·25전쟁중  유엔군의 전투기가 모두
미제 아니면 영국제로만
알려져 있지만 캐나다제의
최신형 전투기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려져 있지않다.

캐나다제 F-86을 생산했던 캐나다에어[Canadair]는
현재 BOMBARDIER AEROSPACE로 변신해서 중거리
여객기들을 생산하고 있다.
몇년전 한국의 저가 항공사에서 이 회사 제품인
터보 프롭 여객기를 구입했었다.


봄바디어 터보프롭 중거리 여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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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를 수출하기도 하는등
기술면에서 한국과 상당한 인연이 있다.
그 긴 인연은 6·25전쟁 부터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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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r insurance 2011.10.08 1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조종사의 솜씨로 미공군은
    공산 공군에게 10대 1의 우수

  2. inkcartridges organization printing device 2012.05.29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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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월드컵 대한민국과 같은조 그리스의 참전경위와 활동

생생! 6·25/6·25전쟁 지원국 2010.03.08 10:32

1. 참전경위
   그리스는 1950년 7월 중순 유엔사무총장이 군사지원을 요청하자 7월 20일 6대의 C-47 수송기와 3,800명으로 편성된 1개 보병여단의 파견을 결정하였습니다. 이후 보병부대의 파견은 미국 합참과의 협의과정에서 1개 대대 규모로 축소 조정되었고 먼저 10월 13일 C-47 수송기 6대와 병력 67명을 차출하여 제13수송편대를 창설하여 11월 1일 미 제5공군에 배속시켰습니다. 지상군은 11월 16일 아침 미국 수송선(General Han) 편으로 그리스를 출발하여 23일간의 긴 항해 끝에 12월 9일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2. 지상군의 활동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된 대대는 1951년 2월 24일 이천으로 이동하여 이천-곤지암-경안리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26일 소정리 부근에서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4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을 입어 첫번째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28일에는 381고지, 307고지, 258고지를 점령하였습니다.  제3중대는 29일 자정 무렵 중공군의 선제공격에 통신마저 두절되어 381고지에 완전 고립되었으나 백병전으로 적을 격퇴하였고 이 전투에서 대대는 적 28명을 사살하였습니다.


  동두천에서 부대를 재정비한 대대는 10월 3일 코만도작전에 참가하여 철원 서쪽 선벽 부근의 313고지(Scotch)를 공격하였으나 중공군의 역공으로 참전 이후 하루 전투에서 가장 많은 14명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으며 공격에 실패하였습니다.  5일 새벽부터 항공폭격과 각종 지원포격으로 313고지를 포격한 후 공격을 재개하여 313고지를 확보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적군 150여 명을 사살하고 부상자 12명을 생포하였으나 대대도 10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11월 28일 미 제1기병사단이 일본으로 떠나자 미 제3사단으로 배속이 전환되었습니다.


  1952년 1월 19일 임진강 서쪽으로 이동하여 고잔리 일대에 재배치되었습니다. 3월 17일 켈리(Kelly)고지, 노리(Nori)고지, 베티(Betty)고지에서 중공군과 전초진지 쟁탈전을 펼쳐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한 후 기산리로 이동하여 4개월 여 동안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에 주력하였습니다. 특히 이 기간중에 제1중대는 5월 23일부터 40여일 동안 거제도 포로수용소 경비임무도 수행하였습니다.


   대대는 중공군이 추계공세를 개시하자 26일 아침에 대노리고지를 공격하기 위하여 임진강 동쪽 중산리에서 서쪽의 소노리고지로 이동하였고 28일 새벽 야포와 전차로 적의 방어거점인 고양대, 대노리고지와 그 북쪽 117고지를 집중적으로 포격한 후 제2중대 제1소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대노리고지를 장악하였습니다. 그러나 09:00경 적 2개 중대규모의 공격을 받아 고지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1953년 1월 29일 김화 서북쪽 하진리로 이동하여 주 저항선에 배치되었고 정찰대는 2월 9일 420고지에서 중공군 27명을 사살하고 3월 11일 438고지 북쪽에서 2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이 작전에서 대대도 6명이 전사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휴전이 임박할 무렵인 5월 16일 강산리로 진출하여 중가산 일대의 주 저항선에 배치되었습니다. 중공군은 휴전선 확정에 영향을 미치는 420고지(Harry)를 수중에 넣기 위하여 6월 17일 자정 무렵 폭풍우가 몰아쳐 시야가 극히 제한된 틈을 타 공격을 개시하였고 대대는 이들을 맞아 5시간 동안 공방전을 벌여 5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중공군이 7월 공세를 개시할 무렵 대대는 금성 남쪽 북정령 일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중공군은 7월 17일 15:00경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주간공격을 개시하였고, 대대는 포병화력의 엄호 하에 2시간 30여 분동안 숨막히는 혈전을 벌여 이들을 격퇴하였고 중공군은 휴전을 불과 3일 앞둔 25일 밤부터 26일 새벽까지 2차에 걸쳐 공격을 재개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150명을 사살하고 27명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려 6.25전쟁의 대미를 장식하였습니다.

 
3. 공군의 활동
   미 제315전투수송비행사단에 배속된 제13수송편대는 12월 4일 연포기지에 파견됨으로써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장진호로 진출하였던 미 해병사단이 철수를 시작하자 편대는 보급품 193톤을 공수하고 전사상자 800여명 을 후송하였고 편대는 12월 중순 미 제10군단의 흥남 철수작전을 지원하였습니다.

   유엔군이 38도선으로 진출하자 편대도 1951년 5월 14일 수영기지에서 김포기지로 이동하였습니다. 이 무렵 편대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협소한 여주, 원주 활주로를 이용하여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였고 8월로 접어들면서부터 편대는 서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백령도에 대한 지원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이때 편대는 백령도가 적지에 근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간조시에만 천연활주로를 이용할 수 있어 이착륙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2월 22일 편대장이 조종한 수송기가 수원비행장에서 미 공군기와 충돌하여 승무원 5명과 후송중인 미군 부상자 5명이 전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설상가상으로 27일 편대장 대리로 임명된 조종사가 진해기지를 이륙한 후 고지정상에 충돌하여 14명이 전사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여 참전 이래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1953년 2월 초 신규편성 된 미 제6461대대가 여의도기지로 진출하자 편대는 대구와 김포기지에 집결된 병력과 물자를 전방까지 추진 보급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편대는 휴전이 성립된 이후에도 김포기지와 여의도기지를 오가며 5대의 C-47 수송기로 지원임무를 계속 수행하였습니다.



  그리스는 6.25전쟁에 10,581명이 참전하여 전사 188명, 부상 459명의 손실을 입었고, 휴전 후 공군은 1955년 5월, 지상군은 12월에 철수하였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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